#575.
“안녕하세요.”
“……누구예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취조실 안으로 들어온 나연을 본 기영이 불안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봤다.
“이쪽은 사이버수사대 팀장님.”
“사이버수사대요?”
당황한 얼굴로 기영이 성진과 나연을 번갈아 바라봤다.
“억울하시죠?”
반대편 의자에 앉은 나연이 대뜸 기영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네?”
“보통 여기 오는 사람 중에 안 억울한 사람 한 명도 없거든요.”
나연이 가지고 온 노트북을 펼치며 씩 웃었다.
“정말 경찰 맞아요?”
경찰이라고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외모와 옷차림.
나연의 겉모습을 빠르게 훑은 기영이 황당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봤다.
“딱 봐도 경찰 같잖아요.”
마치 나연에게 바통을 넘기듯 성진이 피식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
“뭐가 그렇게 억울해요?”
“네?”
“안 한 걸 했다고 해서 억울한 거예요? 아니면 더 했는데 덜 했다고 해서 화가 나는 거예요?”
“뭐라는 거야.”
나연의 말장난 같은 말에 기영이 짜증 난 얼굴로 핏대를 세웠다.
“핸드폰 주세요.”
“왜요.”
“결국 줄 거 그냥 빨리 줘요. 피차 서로 언성 높일 필요 없잖아요.”
성진이 기영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게 무서워요?”
나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기영을 바라봤다.
“가져가요. 난 떳떳하니까.”
기영이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나연에게 밀었다.
‘일단 지금만 버티자.’
보이스피싱과 관련된 메시지나 통화는 해외 메신저를 사용했고 또 바로바로 지웠기에 핸드폰에 남아있는 증거는 전무(全無).
더구나 지금 당장 포렌식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일단은 협조하며 지금 상황만 어떻게든 잘 넘기면 될 거로 생각했다.
“미리 열어서 주는 건 센스 아닌가?”
나연이 입꼬리를 내리며 잠긴 핸드폰을 다시 기영 쪽으로 밀었다.
“당신들 진짜 내가 다 고소할 거야.”
기영이 성진과 나연을 번갈아 노려보며 침을 튀겼다.
“뭐로 고소할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하고. 일단 비밀번호나 풀어요. 아니 아예 그냥 잠금 설정 다 풀고 줘요.”
“씨.”
성진의 말에 이를 바득 간 기영이 비밀번호를 푼 핸드폰을 다시 나연에게 밀었다.
“이거 말고 다른 핸드폰 또 있으세요?”
나연이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물었다.
“없어요.”
“진짜죠? 하긴 뭐 있어도 없다고 하겠지만.”
“집이라도 가서 뒤져보던가요.”
기영이 성진을 노려봤다.
“오- 세게 나오시네.”
기영의 호기로운 모습에 피식 웃은 나연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역시나 해외 비밀메신저 써서 이미 다 지운 메시지는 확인할 길이 없고. 통화목록도 별거 없고.”
나연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위에 올린 검지를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였다.
“…….”
“요금제 뭐 쓰세요?”
“네?”
뜬금없는 나연의 질문에 기영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요금제 뭐 쓰시냐고요.”
“그건 왜 물어봐요.”
“데이터 무제한이에요?”
나연이 기영의 핸드폰을 만지며 물었다.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기영의 짜증이 극에 달했다.
“말 안 해줄 이유도 없잖아요. 아니에요. 됐어요. 내가 확인하죠. 뭐”
나연이 기영에게 입 다물라고 한 손으로 손짓하며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뭐야. 이 여자.’
경찰 같지도 않은 외모에 더 경찰 같지 않은 행동까지.
기영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연을 노려봤다.
“무제한 아니네요. 데이터도 거의 없고.”
통신사 어플을 확인한 나연이 입꼬리를 내렸다.
“그런 쓸데없는 거나 확인할 거면 그냥 핸드폰 이리 줘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괜히 뭐라도 찾는 척하지 말고요.”
“데이터가 없어서 이렇게 항상 와이파이 켜놓으시는 거죠. 여기 지금 경찰서 와이파이도 잡히네요.”
나연이 핸드폰 네트워크 화면을 기영에게 보여줬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할 거면 그만합시다.”
눈꼬리를 구긴 기영이 나연에게 핸드폰을 다시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관심 있으신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아까 본 CCTV 제가 다 찾은 건데. 잘 보셨죠? 그거 다 찾느라고 진짜 힘들었어요.”
나연이 기영의 내민 손을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지금 나한테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겁니까?”
기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진짜 서초역 안 갔어요?”
나연이 기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몇 번을 말합니까. 안 갔다고요.”
“CCTV 화면 속 남자 꼭 그쪽 같던데.”
“하- 진짜 미치겠네.”
나연의 말에 팔짝 뛴 기영이 갑자기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두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며 빈정거렸다.
“아- 아- 알겠네. 알겠어. 지금 계속 이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나 몰래 불법 위치추적이라도 한 것 같은데.”
쾅-
갑자기 책상을 내리치며 두 사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경찰이라도 아무 죄 없는 사람 억지로 잡아넣겠다고 영장도 없이 불법 위치추적까지 했다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네.”
나연이 의자에 기대 다리를 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에 위치추적 하는 게 뭐 쉬운 줄 알아요? 개인 위치추적 하려면 영장 받아야지 통신사 협조해야지, 그쪽이 그만큼 노력해야 되는 급도 아니고.”
“뭐요!”
“그리고 난 그런 복잡한 방법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발끈한 기영의 말을 귓등으로 가볍게 넘긴 나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
마치 뭔가 있는 것 나연의 묘한 뉘앙스에 기영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던 그때.
“자- 그럼 이제부터 제가 재밌는 걸 보여줄 테니까. 잘 봐요.”
나연이 빙그레 웃으며 기영의 핸드폰을 그의 앞쪽으로 밀었다.
“…….”
뜻 모를 나연의 행동에 기영이 불안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김 형사도 이리 와서 같이 봐.”
“네.”
나연의 행동이 궁금하긴 성진도 마찬가지.
두 사람 곁으로 한 발자국 다가온 성진의 시선이 기영의 핸드폰에 꽂혔다.
“자- 일단 핸드폰 설정 네트워크로 들어간 뒤 고급설정으로 들어가면, 여기 네트워크 관리 보이죠.”
기영의 불안한 눈빛이 나연의 손끝을 따라갔다.
“여기 보면 지금 잡히는 네트워크하고, 지난 30일 내 사용된 네트워크라고 보이죠.”
“…….”
“30일 내 사용된 네트워크에 통신사 무료 와이파이 잡힌 것도 있네요.”
“지금 이걸 왜 하는 겁니까.”
대단한 게 나오는 건 아닐까 잔뜩 긴장했던 기영이 막상 별거 없는 상황에 짜증 난 얼굴로 말하면서도 속으론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좀 진득이 봐요. 여기서 이 통신사 무료 와이파이를 눌러 보면. ‘위치정보’라는 게 짠!”
“…….”
‘위치정보’라는 팝업 글씨에 기영의 눈동자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위치정보를 누르면 연결프로그램이라는 팝업과 함께 지도 어플이 뜨네요.”
“오-”
성진이 신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영의 당황한 표정을 살폈다.
“자- 그럼 이 지도 어플을 눌러보면.”
“…….”
“짠- 이렇게 이 와이파이가 어디서 연결됐었는지 지도로 나오네요.”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233, 여기 딱 ‘서초역’이라고 쓰여 있네.”
핸드폰 화면에 뜬 주소를 읽은 성진이 기영의 어깨를 지그시 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X발.’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
기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간 적 없다면서요.”
나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영을 노려봤다.
“아- 아- 제가 착각했어요. 그날 저녁에 친구들하고 술 한 잔하고 친구 데려다주느라고 서초역에 잠깐 들렸던 적이…….”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는 기영이 어색한 연기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자.
“홍기영 씨. 추잡스럽게 이러지 맙시다.”
나연이 기영을 벌레 보듯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
“머리 굴리지 말고. 가방 지금 어디 있어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은 성진이 기영을 몰아세웠다.
“내 내가 안 가져갔다고요.”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지금 급하게 이 방법으로 그쪽이 서초역에 갔다는 걸 찾은 거지. 그쪽 좋아하는 영장 받아서 포렌식 하면 결국 다 나와요. 그러니까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냥 다 말해요.”
나연이 기영의 핸드폰을 흔들며 성진을 지원 사격했다.
“…….”
“그렇게 입 다물고 지금만 버티면 해결될 거란 헛된 생각하지 마요. 결국 다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
성진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기영과 눈을 맞추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그 시각 관찰실.
“언제 시작할까요?”
유리벽 너머 사색이 된 얼굴로 앉아있는 기영을 보던 채린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바로 정 선생이 들어가는 건 좀 타이밍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조금 이따 들어가는 거로 하자.”
미간을 찡그린 채 금연사탕을 오물거리던 최 반장이 채린과 인혜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철컥.
“수고 많았어. 수고 많았어요.”
관찰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진과 나연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최 반장이 궁금한 얼굴로 나연을 바라봤다.
“아까 그거 신기하던데. 진짜 모든 핸드폰에서 다 되는 거예요?”
“네. 반장님도 어디 다니시나 제가 좀 볼까요?”
“사양할게요.”
장난기 가득한 나연의 표정에 최 반장이 손사래를 쳤다.
“언제 시작하실 거예요?”
성진이 인혜를 보며 물었다.
“조금 이따가 하려고요. 그런데 같이 데리고 온 그 여자애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놈 끝나면 취조해 보려고요.”
“그런데 너 아까 알고 그런 거냐?”
최 반장이 궁금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봤다.
“네?”
“최정미 요양원에 있는 거 알고 핸드폰 놓고 왔다고 하고 다시 갔던 거 아니야?”
“반장님도 알고 주차장에서 계속 요양원 건물 보고 계셨던 거 아니세요?”
성진이 오히려 최 반장에게 되물었다.
“난 그냥 뭔가 좀 찜찜해서.”
“전 저놈도 그렇고 사무실에 있던 직원이 계속 창고 쪽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성진이 유리 벽 너머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기영을 바라봤다.
“창고? 무슨 창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나연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저희가 앉아 있던 사무실 테이블 뒤쪽에 창고가 하나 있었거든요.”
“아-”
“그럼 거기에 최정미가 숨어 있던 걸 알고 핸드폰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확인하러 가셨던 거예요?”
채린이 성진의 날카로운 직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긴가민가해서 가보긴 했는데. 운이 좋았어.”
성진이 채린의 칭찬에 쑥스럽게 웃었다.
“오- 요즘 아주 타율이 좋아.”
나연이 성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딱 마주쳤을 때 그 여자애 표정을 찍어놨어야 하는데. 완전 당황한 표정 장난 아니었거든요.”
성진이 정미의 놀란 얼굴을 떠올리며 통쾌하게 웃던 그때.
“그런데 지금 상황에선 저 인간보단 바로 그 여자애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그 애는 보이스피싱에 연관된 게 확실하잖아요.”
채린이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네. 반장님 그냥 그 음성 분석 파일 까고 바로 피의자로 전환시키시죠.”
성진이 채린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저번에 반장님 말씀처럼 단순 모집책이면 뭘 아는 게 있을까요?”
인혜가 팔짱을 끼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또 모르잖아요. 모집책이었으면 일단 뭐라도 알겠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저 놈 보다는 그 여자애가 더 최면 걸기 쉽지 않을까요? 저번 그 고삐리들처럼 일단 심리 상담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이후에 피의자 전환해도 되니까요.”
나연이 취조실의 기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성진의 말을 보탰다.
“흠-”
최 반장이 입꼬리를 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도 빨리 보내달라고 난리라는데요.”
“지금 그 애 어디 있어.”
성진의 말에 짧은 고민을 끝낸 최 반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 있어요.”
“옆방으로 데리고 와.”
최 반장이 입안에서 굴리던 사탕을 아그작 깨물며 성진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