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
“진짜 피해자들 묶었던 매듭하고 비슷한 것 같네요.”
주철의 말에 나연이 무릎을 굽히고 채린의 왼발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까 항상 이렇게 운동화 끈 묶는 것처럼 피해자를 묶어놓았던 것 같아요.”
“이것 보세요.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매듭 중간 부분이 동일하죠.”
사건 해결을 위해 주철이 핸드폰 속에 가지고 다니던 피해자들의 묶인 부분이 클로즈업 된 사진을 세 사람에게 보이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네요.”
핸드폰 속 사진을 확인한 채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아 그 할아버지를 언제 만났어?”
인혜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아까 아래층 화장실 앞에서요.”
채린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자기 왼발을 바라봤다.
“그 할아버지가 아래층 화장실로 갔다고?”
“네. 위층에 사람 많아서 내려왔다고 했어요.”
“김 형사가 찾으러 나가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아래층으로 화장실 가고 그랬다는 말 없었는데.”
주철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저한테도 그런 말 없었어요. 채린이를 만났다는 말도 없었고요.”
인혜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처음부터 노린 건가…….”
나연이 팔짱을 끼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데 채린이가 여기 있다는 것도 화장실에 갔다는 것도 모를 텐데 노렸을까요?”
“흠- 우연치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인혜의 모습에 주철이 입꼬리를 내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채린아 그런데 아까 왜 만났다고 말 안 했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화장실에서 마주치고 혹시 뒤따라올까 봐 바로 관찰실로 오기 뭐해서 다른 층으로 돌아서 들어왔을 때는 할아버지가 집에 가신다고 역정(逆情 )내고 계셔선 어수선했잖아요. 그래서 말할 기회를 놓쳤어요.”
인혜의 말에 채린이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그때 좀 당황스럽긴 했어. 갑자기 집에 가신다고 막 그려셔서.”
화장실에 다녀온 후 갑자기 피곤하다 집에 빨리 가서 할 일이 있다는 둥 막무가내로 집에 가겠다며 짜증을 넘어 역정을 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인혜도 당황했었다.
“전 그 역정도 왜 일부러 그런 것 같죠.”
나연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팀원들을 바라보던 그때.
위이잉. 위이이잉.
소파 협탁 위에 올려놨던 인혜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 형사님이요.”
핸드폰 화면 속 성진의 이름을 확인한 인혜가 스피커폰으로 돌린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다 모여 있어요. 가게 창고에서 뭐 좀 찾으셨어요?
[“그것보다 그 매듭법 있잖아요. 무슨 매듭법인지 찾았어요.”]
스피커폰 너머로 성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요?”
[“네.”]
“어떻게 찾았어? 검색해도 잘 안 나오던데.”
인터넷으로 수많은 매듭법을 검색했지만 나연 조차 동일한 매듭법을 찾지 못했었다.
[“벨루티 매듭법을 좀 변형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벨루티요? 그게 뭐예요?”
채린이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설마 구두 벨루티(Berluti) 말하는 거야?”
나연이 놀란 표정으로 스피커폰을 향해 소리쳤다.
[“네. 맞아요. 팀장님은 아시네요.”]
“유명한 브랜드예요? 난 처음 듣는데.”
주철이 궁금한 얼굴로 나연을 바라봤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예요. 남자 구두로 유명해요.”
“그런데 그 구두 브랜드하고 매듭하고 무슨 상관인데?”
나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주철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피해자들에게서 발견된 매듭법이 그 구두 브랜드에서 만든 매듭법이래요. 정확히 말하면 그 매듭법으로 두 번 연속 묶은 방법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얼마 전에 동기한테 매듭 사진 한번 보냈었거든요. 혹시 주변에 이 매듭에 대해 아는 사람 있는지 좀 알아봐 달라고요. 그런데 구두 좋아하는 동료 형사가 사진 보더니 바로 벨루티 매듭 방법이라고 했데요.”]
“진짜 찾아보니까 똑같아요. 이 매듭법으로 두 번 묶었다고 생각하니까 피해자들이 묶여 있던 매듭이네요.”
성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색을 시작한 나연이 노트북 화면을 세 사람 쪽으로 돌렸다.
“벨루티 매듭법. 1970년대에 영국의 윈저공이 벨루티의 상속녀인 올가 벨루티에게 소개한 매듭법이다. 열병식이나 공식 행사에서 구두끈이 풀리지 않도록 고리를 두 번 만들어 묶는 매듭법으로 본인이 풀기 전까지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
인혜가 노트북 화면에 보이는 매듭에 대한 설명을 빠르게 읽어가다 이내 굳은 표정으로 팀원들을 바라봤다.
“절대 풀리지 않는다라…….”
주철이 생각이 많은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찡그렸다.
“여기 보니까 채린이 운동화 끈은 이 방법으로 한 번 묶은 거네요.”
나연이 노트북 화면 속 매듭과 채린의 왼쪽 운동화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서 진짜 이쪽만 진짜 안 풀린 건가…….”
인혜의 병원으로 오는 중간에도 몇 번이나 풀렸던 오른쪽 신발 끈과 달리 한 번도 풀리지 않던 왼쪽 운동화를 바라보던 채린이.
“허-”
자신의 운동화 끈을 묶어주며 입가에 흘렸던 할아버지의 묘한 미소를 떠올리자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기(寒氣)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전 일단 다시 경찰서로 들어갈게요. 반장님 관련 제보가 있다고 해서요.”]
“네. 들어가셔서 무슨 제보인지 알려주세요.”
[“네.”]
띠릭.
“설마 채린이 묶는다는 생각으로 운동화 끈 묶은 거 아니야? 이 할아버지가 진짜.”
통화가 끝나자 흥분한 나연이 핏대를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갑자기 채린이 신발은 왜 묶어 준 걸까요? 아무리 신발 끈이 풀려있었다고 해도 분명 자신이 의심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해줄 이유는 없잖아요. 오히려 숨겨야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인혜가 고개를 갸웃하며 팀원들을 바라봤다.
“아니면 오히려 그 매듭은 특별한 것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매듭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한 걸 수도 있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철의 말에 채린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생각해 봐. 인터넷에도 찾아서 배울 수 있는 매듭법이니까 다르게 생각하면 강수복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몰라. 이렇게 되면 피해자들에게서 발견된 매듭법은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 더 이상 쓸모없는 증거가 돼 버린 거나 다름없잖아.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운동화 끈을 통해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는 건 오히려 자신이 이번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하는 꼴이잖아요. 자신이 그 매듭법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걸 스스로 밝히는 꼴이니까요.”
주철의 말에 채린이 반론을 제기했다.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만약 그 할아버지가 우연히 화장실 앞에서 만난 너에게 그냥 어린 손녀 생각하면 운동화 끈을 묶어줬을 뿐인데, 마침 우연치 않게 묶어준 매듭법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벨루티 매듭이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면 우린 할 말이 없어.”
“무조건 우연이라고 하는 건 좀 억지 같은데요. 솔직히 83세 먹은 할아버지가 벨루티 매듭법을 아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요.”
나연이 입꼬리를 내리며 주철의 말에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다고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증명할 방법은 없잖아요. 83세라고 벨루티 매듭법 묶지 말라는 법도 없고 또 운동화 끈 한번 묶어줬다고 갑자기 살인 용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 이이씨. 머리 아프네. 이거 뭐 우리 가지고 논 거야. 뭐야.”
나연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눈가를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일단 반장님이 보고 놀라셨던 폐지 묶음의 매듭은 가게 사장이 한 걸 수도 있고 할아버지가 한 걸 수도 있는 거네요.”
“그렇죠.”
“진짜 그 매듭법이 가게 사장이나 할아버지가 다 할 만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면 그 두 사람은 일단 용의선상에서 제외해야겠네요. 아까 법의관님 말씀처럼 그 매듭법 하나로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 단정 지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모방 범죄를 간관할 수는 없으니까 그 두 분도 완벽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용의선상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채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연과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나도 시간만 많다면 그러고 싶지. 하지만 지금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잖아. 반장님도 찾고 진짜 강수복 잡아야 하는데 두 사람을 계속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하는 건 시간 낭비일 수도 있어. 그리고 일단 가게 사장은 강수복이 아닌 걸 확인했고, 할아버지는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일단 나이가 많잖아.”
“만약 신분을 속인 거라면요.”
나연의 말을 듣던 채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누가? 그 사장이? 아니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요.”
“채린아 그렇게 의심하면 끝도 없어. 이제는 빨리 가지치기하고 진짜 몸통에 집중할 때라고.”
나연이 답답한 얼굴로 채린을 바라봤다.
“가게 사장님은 DNA 검사해서 강수복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지만 할아버지는 지문 확인도 못 하고 신분 확인만 했잖아요.”
“그렇긴 하지.”
주철이 인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 할아버지도 DNA 검사해 보죠. 강수복 DNA 샘플은 있으니까 확인해 보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빨리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고 강수복을 잡고 최 반장을 찾는데 집중하고 싶은 나연이 주철을 바라봤다.
“검사하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 할아버지 DNA 샘플을 구하는 게 문제죠. 좀 괴팍한 구석이 있어서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 집에 제가 한번 갔다 올게요.”
주철의 말에 인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경찰서에 있어요. 할아버지 DNA 샘플이요.”
채린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경찰서에 있다고?”
“경찰서 어디?”
나연과 주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동시에 채린을 바라봤다.
“국밥 그릇이요. 아까 할아버지가 먹은 그 국밥이요.”
“아! 맞다. 국밥. 국밥 그릇이 있었네.”
인혜가 무릎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침 묻은 숟가락 젓가락부터 국밥 그릇까지.
할아버지의 DNA 샘플이 국밥 한 쟁반에 가득했다.
그 순간.
“그런데 설마 벌써 치운 건 아니겠죠?”
채린이 불안한 표정을 짓자.
“내가 김 형사님께 연락해 볼게.”
인혜가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끼이익-
철컥.
“스톱! 스톱!”
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대충 세우고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성진이 전속력으로 뛰어 막 출발하는 배달 오토바이 앞을 가로막았다.
끼이익.
“아저씨! 미쳤어요!”
갑작스런 성진의 행동에 놀란 배달원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허- 허- 죄송해요. 죄송해요.”
거친 숨을 몰아쉰 성진이.
“지금 그릇 수거해가는 거 맞죠? 여기 ‘맛난 설렁탕’.”
오토바이 뒤에 실린 배달통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네.
“취조실 앞에 있던 그릇 가져가는 거죠?”
“네. 그런데 왜요? 저 바빠요. 비켜주세요.”
영문을 모르는 배달원이 짜증 난 얼굴로 묻자.
“후- 그럼 제가 이 그릇 좀 가져갈게요.”
성진이 빙그레 웃으며 배달통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