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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실패 후 다시 사는 천재 카이스트생-20화 (20/134)

#20. 노예계약

#20. 노예계약

“무너졌으면, 다시 세우면 돼.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서면 되고.”

대체 지금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늪에 빠진 건, 아무리 혼자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어.”

처음엔 그런 생각부터 들었으나.

“빠져나올 힘이 없는 건 아니야.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실 깊이도 발이 닿을 정도라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어.”

곧 이어진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지만 편안하겠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부터 천천히 잠식해오는 왠지 모를 그 안락함이. 지금은 너무나도 편안해서. 그냥 힘 빼고 있고 싶을 거 아니야.”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침전해버려서, 결국엔 익사하는 거다. 사람은.”

그야 지금 그는 현 내 상황을 줄줄이 실황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직접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건방지게.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괜히 퉁명스럽게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난 그에게 화가 아닌 사과와 고마움부터 표해야 하는 건데.

마치 정곡을 찔린, 제 발 저리는 도둑처럼,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 잘했던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니가 뭐라고―!”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감췄던 고개를 확 들어버리고 말았다.

“알아.”

그리고 봐버리고 말았다.

아마 처음으로.

그의 눈을, 정면에서.

“알 수밖에.”

더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어떻게 아는지, 아까의 실황 같은 자세한 부연은 없었다.

이것으로 그저 그만이라는 것처럼.

드디어 고개를 들어, 가만히 자신의 두 눈동자만 내게 내보이고 있었을 뿐.

그건 분명 극한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밀듯이 터져 오르던 염치없는 화를 단숨에 집어삼켜 버릴 정도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형형한 회색빛의 눈동자.

니체의 심연.

그는 분명 그 안에는 괴물이 자리 잡고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저 심연과도 같은.

하지만 칠흑은 아닌 저 잿빛의 눈동자 너머에는 대체 무엇이 자리하고 있기에.

저렇게나 감정 없는 비애를 내보일 수 있는 걸까.

“아······.”

그렇게 가만히 잿빛 심연에 빠져 말문을 잃어버리고만 있었을 때.

“의외로 너도 눈이 좋네.”

갑자기 그가 피식 쓰게 웃었다.

“아마 이걸로 두 번째, 아니 세 번짼가. 아니면 그냥 공감 능력이 쓸데없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고.”

“뭐······? 그게 뭔 소리······.”

“됐고, 닦기나 해.”

그가 옆의 거즈를 대충 내밀었다.

무슨 상처라도 난 걸까 생각하며 이해 못 하고 있자, 그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가 아닌, 내 쪽을 의미하는 거였다.

“······!”

눈물이 나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신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그건 그렇고 건네준 게 손수건도 휴지도 아닌 거즈라니.

어이없음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재빨리 대충 눈을 훔치고 다시금 무릎 사이로 고개를 박았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송유미.”

새빨개진 얼굴을 보이기 싫어 좀 더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가 숨는 고양이 같은 목소리로.

“왜······.”

겨우 대답만 했다.

겨우 대답했는데.

“넌 수학에 재능 없어.”

갑자기 저 디스는 또 뭐야······.

“물리는 그나마 나을진 몰라도, 또이또이해. 애초에 수학이 애매하니까.”

예전처럼 핏대 세우며 바짝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인제 와선 그럴 기력조차 사라졌어.

탁.

아마도 책을 덮는 소리.

이내 볼펜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옆의 탁상에 노트를 뒀다고 생각했을 때.

“그런데 왜 하필 과학고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 왔다.

“너라면 아마 외고나 자사고는 쉽게 붙을 텐데.”

저 말을 안 들었던 건 아니다.

실제로 나도, 외고나 다른 자사고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내신도 충분했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외워서 성대경시 은상은 타냈을 정도로, 그리고 그의 독일어를 대충 알아들었던 만큼.

언어적 능력을 포함해 외우는 것 하나에는 자신 있었으니까.

“······우리 집 그렇게 풍족하지 못해.”

여전히 고개를 박은 채로.

“못 사는 건 아니지만, 문과론 안 돼.”

이어서 잠시 말없이 고민하다가.

“······의대.”

다시금 입술을 뗐다.

“한국과고······ 거기 졸업하면 무조건 의대 가잖아······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하고.”

한국과고에서 꼴찌하면 연고에 가고, 공부 못하면 설카포에 간다.

그리고 간혹 해외로 뜨는 애들을 제하면, 그 위로는 전부 서울대나 의대로 진학한다.

그중 의대가 훨씬 압도적이고, 그 최고봉에는 통칭 설의.

서울대 의대가 있다.

수학 과학 잘하는 애들이 연구자나 과학자가 되지 않고, 전부 의대로 가버리는 현재 입시가 문제라는 건 슬슬 머리도 차는 나이라 대충 이해는 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어쩌겠어.

주변 말 들어보면 다들 의사가 최고라고 하는데.

특히나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집안에선, 의사만큼 돈 잘 벌고 안정적인 월급쟁이가 또 없다고.

“학부 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게 역시 의대 때문이었나.”

“······학부?”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악?!”

내 머리를 강아지 다루듯 마구잡이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성대경시 보기 전 이후로 이걸로 두 번째였다.

“뭐, 뭐하는 거야 지금!”

“의대는 포기해.”

“······뭐, 뭣?”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으면서.

“그럼 한국과고 붙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된다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아까도 보였던, 저 알 수 없는 깊이의 오묘한 그만의 눈빛에.

“저, 정말······?”

나도 모르게 미끼를 물어버리고 말았다.

“응. 정말이지.”

아마도 나는, 비록 한국과고에 떨어진다고 했어도.

“대신 평생 물리만 할 자신이 있다면.”

그 미끼를 절대 물면 안 됐었다.

그걸 완전히 나중에 가서야, 대학원까지 가버리고 나서 깨달은 게 문제였지······.

* * *

“예? 일성 그룹 본사에서 사람이 온다고요? 직접?”

김 실장은 한영근의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닌 듯, 한영근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아니,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답니까? 조건도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해줬고, 우리로선 겨우 본전만 건지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라고······ 서, 설마 제가 뒷말했던 그 어린놈의 자식이 실은 뭐 이사 아들이었다던가 그런 겁니까?”

“······아마 그런 건 아닐 거다. 무슨 도청기라도 달린 게 아닌 이상.”

“아니, 그럼 대체 왜······.”

오히려 이쪽에서 더 묻고 싶었다.

지금까지 일성 쪽에서 온 사람 중 높은 사람이라고 해 봐야 전무는커녕 상무대우급이 전부이지 않았나.

“그것도 4차까지 달려서 극진하게 대접해주고 그 떡뚜껍 새끼······ 아니, 그분 사모님 다 보는 대문 앞까지 모셔서, 허리까지 숙이며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한영근이 회사의 대표라고 해도 대기업과 중소업체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영파이프는 최근에 중국이 치고 올라오면서 지속적인 경영 악화로 중견은커녕 중소사업체로 몰락할 처지였으니.

“일단 말하기론 본가 쪽 직통이라고 하던데······.”

“예, 예? 본가요? 그게 무슨 말씀······ 아니, 본가라면 설마 그 유근철 회장 쪽······?

한영근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였다.

김 실장은 그게 참말이냐며, 잘못 들으신 게 아니냐며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한영근의 반응은 똑같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일 끝에 일성 본가에서 보낸 사람이 한영파이프로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유근철 회장님의 비서 오유희라고 합니다.”

각 잡힌 자세로 품에 봉투를 안은 여인.

한영근은 전혀 다른 인상과 목소리에 크게 당황 수밖에 없었다.

“저 그게, 실례일 수도 있습니다만······.”

“예.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분명 전화에서는 남비서 분, 오정택 비서님께서 직접 찾아오신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혹시 다른 분을 보내오신 겁니까?”

“아, 그거 말입니까.”

‘그거’라고 말하며 짧게 코웃음 치던 오유희의 표정에는 경멸 혹은 멸시 같은 게 느껴졌다.

“아쉽게도 회장님의 전 비서였던 제 오라버니는 개같이 잘렸습니다.”

“······예?”

“미성년자 소녀를 몰래 도청하다가 걸렸거든요.”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무척이나 난감했던 폭탄 발언.

옆에 쥐 죽은 듯이 서 있던 김 실장은 어색한 웃음조차 내보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괜한 질문 송구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천박한 발언 죄송합니다. 욱했습니다.”

“아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쓰레기, 아니, 회장님의 전 비서에게 못 들으셨습니까?”

“예, 그냥 회사 대표 권한이 요구될 거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한영근은 앞에 말은 못 들은 거로 치고 뒷말만 생각해서 대답했다.

“일성의 회장님께서 관심 가지실 만한 그리 대단한 곳은 결코 아닐진데, 대체 회장님께서 어떠한 의향을······ 곧 말씀해주실 건 압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영근의 긴장 서린 질문에 오유희는 잠깐 말의 유예를 구하며 품 안의 봉투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그건 분명 모종의 계약서 양식이었는데, 슬쩍 봐도 본문이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오유희는 그 공란 계약서를 한영근에게 건네면서 함께 말했다.

“귀사를 인수 혹은 합병하고 싶습니다.”

“예?”

한영근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이 놀라거나 말거나.

오유희는 전혀 미동 없는 무표정으로.

스윽.

이번엔 적을 만년필까지 건네면서.

“한영근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무조건적인 조건으로 말입니다.”

“예, 예?!”

연이은 폭탄 발언을 남겼다.

* * *

일성 그룹 저택의 별실.

그곳에 한 노인과 소년이 마주 보며 바둑을 두고 있었다.

“분명 바둑은 처음이라 하지 않았나?”

유 회장이 바둑판을 가져왔을 때 분명 소년은 그렇게 말했었다.

룰하고 어떻게 두는지 정도는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바둑돌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고.

그런데 예상외로 게임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전 네 판 전부 유 회장의 승리라서 더이상 승패가 뒤집힐 일은 없었다.

그러나 유 회장은 머리가 하얘진 지금까지 평생을 취미로 바둑을 두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이렇게 대국을 이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즉, 결코 처음도 아니고, 이제 막 중학생 된 지 반년도 안 된 아이가 가질만한 실력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이렇게 치졸해서야.”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요 당돌한 꼬맹이가 거짓말을 친 게 분명하다고.

툭.

유 회장의 백돌이 방금 두었던 흑돌의 퇴로를 막았다.

누가 봐도 바둑판의 판세는 백돌이 유리했다.

그야 대부분의 흑돌은 백돌에 잡아먹힌 뒤였으니.

“거짓말이라뇨.”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아직 진 게 아니라는 걸 흑돌은 아주 잘 깨닫고 있었다.

그야 바둑은 상대의 돌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느냐가 아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집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의 싸움이었기에.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백돌에 맞춰 흑돌을 두면서, 소년이 말했다.

“돌을 직접 둬본 건 이번이 처음이 맞아요.”

확실히, 그가 돌을 집고 놓는 자태는 누가 봐도 처음인 것처럼 어색했다.

가끔 돌을 집다가 미끄러트려 판을 망가트리는 일도 잦았으니.

처음에는 그게 승부에서 진 걸 인정하기 싫어서 일부러 엎은 것인 줄 알고 노발대발했더랬다.

“그렇다면?”

“대신 컴퓨터로 좀 두었죠. 로우 바둑이라고 아십니까.”

어쩐지.

“······그런 걸 보고 치졸하다고 하는 게다. 요 고얀 놈아.”

탁!

바둑판 위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승패는 났고 이번에도 유 회장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긴 사람치고는 아까부터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던 그.

“에잉, 쯧쯧. 나 원 참 이리도 재미없게 두어서야.”

소년의 실력과 자태에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있다면, 두는 방식에 있었다.

“게임을 이기고 싶은 건지 아니면 지고 싶은 건지, 그렇다고 장난치는 것도 아닌 듯하고.”

그가 두는 흑돌에선 이기고 싶은 욕망도 그렇다고 일부러 지려는 듯한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만의 정해진 규칙대로 두고.

그것이 안 먹히면 수정해서 다른 방법을 가져오고.

이런 단순한 반복.

즉, 눈앞의 소년은 감정이란 것 자체가 아예 결여된 듯한 느낌이었다.

“콤퓨타로 바둑을 두면 다들 이렇게 되나?”

마치 컴퓨터처럼 말이다.

“글쎄요.”

소년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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