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2차 시험 치트기
#30. 2차 시험 치트기
한국과학영재고 1차 서류심사 결과가 나왔다.
“아자아아앗!! 붙! 었! 다아아!!”
송유미가 노트북 앞에서 그대로 튀어 오르더니 골 넣은 축구선수처럼 온갖 세레모니를 하기 시작했다.
퍽!
“켁?!”
그러다가 제 풀에 못 이겨 책상 모서리에 배때지를 박아버리고 말았다.
“······lächerlich.”
(······꼴사나워)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데서 피난해 빤히 지켜보고 있던 유설하가 독일어로 쓴소리를 냈다.
“요 싹퉁바가지가 뭐라······ 아윽······.”
송유미는 곧바로 알아듣는 눈치였으나, 응징할 여유가 없는지 배만 부여잡고 쭈그릴 뿐이었다.
“으음.”
나는 단지 그랬던 그녀를 유심히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다친 게 걱정이 돼서는 아니었다.
【송유미의 기억회랑】
【①『자소서 쓰기란 참 어려워』】
【┗(현재 인연 레벨2, 열람 가능)】
벨기에 브뤼셀에서 있었던 일로 그녀와 나름대로 깊은 유대를 쌓았던 걸까.
돌아오고 나니 그녀의 상태창에 『인연 레벨』이란 게 생겨 있었다.
아무래도 상태창은 비참하게 불륜당했던 내 전생을 심히 가엽게 여겼는지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려는 모양인 것 같았다.
‘뭐, 쓸데없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애초에 회귀 후 세상의 태반이 잿빛으로 보이게 됐다는 건 곧, 여자 보기도 돌 같이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지 않나.
송유미 그녀를 한국과고에 합격시키려던 것도 『영구적 1회차 클라우드 접속권』이라는 퀘스트 보상 때문이었고.
겸사겸사 내 입맛에 맞는 인재로 가르치고 키워 추후 미래 계획에 써먹으려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이유에서였으니.
“아으 배야······ 그래도 기쁘다. 붙어서······ 헤헤.”
그렇지만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을 보자니 썩 괜찮았다.
아마도 딸 키우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전생엔 2살을 채 못 넘겼었으니.
애초에 내 피가 이어진 딸도 아니었고.
그래도 이런 학생 놀이가 영 나쁘지는 않기에.
“그래, 하마터면 제출 못 해서 뭐 될 뻔했었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건 니가 억지로 술 멕여서 그런 거잖아!”
나 역시 이렇게 어울려주고 마는 거겠지.
어쩌면 전생에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청춘이 조금은 부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청춘만 구가하며 편히 살고 싶었다면, 이런 학원에도 안 왔을 테고.
내게는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미련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난 하나도 기억 안 나거든?”
“나, 그때 비디오스(Videos) 있어.”
“아아아악! 안 돼!”
유설하와 송유미가 전격 캣파이트를 개시한 지금 슬쩍 물러서며.
아까 열었던 상태창을 다시 보았다.
송유미의 기억회랑.
【①『자소서 쓰기란 참 어려워』】
【┗(현재 인연 레벨2, 열람 가능)】
딱히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일단 새로 열린 컨텐츠인데 한 번 정도는 찍어 먹어보는 게 맞았다.
띡.
열람 버튼을 눌렀다.
-Lüge. 역시 다 기억하고 한 말이었어.
-하, 하, 하나도 기억 안 나거든?!
-안 줄 거야. 아줌마.
-줘도 안 가질 거거든! 아, 아니 기억 안 나! 그리고 2살 차이가 뭐라고 뭐가 아줌마야!
우우웅.
주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듯 하여 새하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로 머리끄댕이 붙잡고 엎치락뒤치락하던 그네들의 모습도 순식간에 뒤틀리며 곧 백지가 되었고.
[송유미의 기억회랑 『자소서 쓰기란 참 어려워』를 재생합니다.]
새하얀 공간은 어느새 색감 있는 배경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 * *
방이었다.
그리고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이불이 있었고.
[이해류 스킬 『안력』으로 사물을 꿰뚫어봅니다.]
【송유미의 애착 이불】
【▶송유미가 초등학교 때부터 쭉 써왔던 9년 된 애착 이불. 알게 모르게 눈물 곳물 범벅이다. 곧 10년 갱신 예정.】
‘아니, 좀 버려라.’
안력이 띄워주는 상태창에 나도 모르게 딴지를 걸었으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공간인 건가.
사사사.
곧 침대 옆에 책상이 하나 생기더니 노트북까지 생겼다.
화면엔 한글 파일이 띄워져 있었다.
-으음, 무슨 내용을 써야 날 뽑아주지······.
어느새 눈앞엔 송유미가 자소서를 두드렸다 지웠다 반복하는 모습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따로 간섭할 부분은 없는 것 같기에, 일단은 영화 시청하듯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실시간으로 적고 있던 자소서 내용에 눈길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잠깐.’
그리고 순간, 위화감을 깨달았다.
‘자소서 내용이 좀 달라?’
마지막 문항에 솔베이 학회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아.’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좋아, 제출 완료! 어떻게든 되겠지. 나답게 썼으니, 됐어.
기억회랑 속 송유미는 인터넷 서류 제출을 완료했다.
-엄마! 나 프린터 하러 피시방 갔다 올게!
그리고 인터넷 제출과 동시에 우편으로 서면 제출도 해야 했던 한국과고 입시를 반영.
그렇게 옷가지와 USB를 챙겨 밖으로 나갔던 그녀였다.
기억에 있다.
한국과고 자소서 인터넷 제출은 단 한 번으로 끝.
임시 저장을 통해 여러 번 수정은 할 수 있었으나, 제출 버튼을 눌러버린 순간 그걸로 끝이었다.
“이 싹퉁바가지년······ 허억, 헉······.”
“schwer(무거워)······.”
재생됐던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유설하 같은 천재도 체육은 수우미양가에서 가인 듯 곧바로 제압된 모습이었다.
그렇게 여중생의 자존심을 건 배틀이 한창이던 와중.
“송유미.”
그녀를 가로막으며 불렀다.
유설하가 화색이 됐고, 송유미는 일단 저 영상은 지우고 봐야겠다며 방해하지 말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송유미에게 물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뭐, 뭐, 뭐야! 니가 내 자소서 초고 내용을 어떻게 알아?!”
“그냥 내가 피드백해줬던 거랑 달라서.”
“그야 너한테 보여줬던 건 수정된 버전이었던 거구······ 그나저나 어떻게 아는 건데?! 너 설마 초석쌤한테 보여준 거 몰래······.”
“응. 맞아. 난 오늘 수업 안 듣는다. 선생님한테 대신 좀 말해줘.”
“야, 야······! 어디 가!”
바로 등을 돌려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붙잡는 목소리는 신경쓰지 않고.
* * *
띡
아까처럼 똑같이 손가락을 앞으로 뻗어서 다시금 새하얀 공간으로 진입했다.
우우웅.
내 것이 아닌 기억이 회상됐고.
“아이구, 어린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이내 다시금 눈을 떴을 땐 모범택시 안이었다.
“성남 중원구 성남동 한진아파트로 가주세요.”
돈은 걱정 없었다.
택시비 정도야 수천 수만 번을 타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벌어놨으니까.
[기억회랑을 재생합니다.]
띡.
그렇게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계속해서 ‘열람’ 버튼을 눌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면 다시 또.
띡.
띡.
띡.
그걸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반복했다.
대체 그러기를 얼마나 있었을까.
털썩.
어느새 나는 집에 도착해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볼펜을 꺼내 들었고, 동시에 새하얀 백지 A4용지를 아래에 두었다.
사사삭!
이어서 쉴 새 없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체의 고민도 없이.
단 한 번의 멈춤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스스슥!
머리에 새겨놨던 것이 사라지기 전에 쭉쭉 적어내려갔다.
탁.
어느 정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잠깐 눈을 감아 ‘재생’한 다음 이내 다시 눈을 떴을 땐.
“좋아.”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이걸로 수학, 1번부터 10번까지 완료.”
아차.
그러고 보니 이게 어떤 종인지 안 적어놨네.
아무렇게나 그냥 두면 분명 어머니가 청소하다가 버려버릴 수도 있을 테니.
스슥, 슥.
방금 적은 것의 제목을, 맨 위에 큼지막하게 적어두었다.
『한국과고 2차 예상 문제.』
일단은 예상 문제라고 적어두었지만.
예상이 아니었다.
【송유미의 기억회랑】
【①『자소서 쓰기란 참 어려워』】
【┗(현재 인연 레벨2, 열람 가능)】
【②『2차 시험의 기억』】
【┗(현재 인연 레벨2, 열람 가능)】
【③『3차 광탈』】
【┗(인연 레벨3 달성 후 개방)】
이것은 예상 문제가 아닌 확정 문제.
즉, 1회차 송유미의 기억 속에 있었던.
“그럼 11번부터 다시 가볼까.”
실제 한국과고의 『진짜 기출』이었다.
* * *
구골의 퀀텀 수석 엔지니어 에릭 무세로.
그는 양자컴퓨터의 가능성을 대학원 연구실 수준에서가 아니라 기업체 수준의 실험에서 실제로 보이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덕에 미국 정부의 환심까지 사 양자기술에 1조라는 유례없을 투자를 끌어내지 않았던가.
특히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본 구골이었으니.
그들에게 에릭 무세로는 구골의 차세대 미래기술을 이끌 내정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지가 단 하루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구골이 선점하고 있던 양자컴퓨터에 대한 입지도.
“홀페린 교수님! 정말이십니까?! 우리 구골의 양자컴퓨터 자문에서 떠나신다는 게······!”
구골이 양자컴퓨터에 투자를 멈춘 건 아니었다.
일개 중학생의 말에 한 회사의 방침이 흔들리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그러나 그 현장에 직접 얼굴을 비추었던.
그리고 그 신비로운 소년이 꽤 마음에 들어먹었던 물리학자라면.
“그 말대로일세. 이미 인사팀에 사직서도 내고 왔지.”
조금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대체 왜입니까······! 돈이 부족했던 겁니까? 아니면 연구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직접 상부에 요청할 테니―”
“그런 게 아닐세, 무세로.”
홀페린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오피스에서 서류와 짐을 챙기며 말했다.
“물리를 하겠다는 이상, 이미 돈에 미련은 버렸지. 그리고 연구 환경도 내 하버드의 연구실과 비하면 가히 최고였지. 다만, 내 향후 연구 방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야.”
“연구 방향이 맞지 않다뇨! 교수님께서는 평생을 고체 이론에 바쳐왔던 분 아닙니까······!”
“그렇지.”
홀페린은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짐을 싸는 중이었다.
온갖 이론적 계산들과 실험 데이터로 넘쳤던 책상은 이미 깨끗해져 있었다.
“하지만 초전도체가 고체의 전부는 아니니. 따져보자면, 아주 일부지.”
“······!”
홀페린의 대답에 에릭 무세로는 곧바로 직감하고야 말았다.
그가 떠나게 된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설마······ 요번 솔베이 학회에서의 일 때문입니까?”
에릭 무세로는 그럴 리가 없다며 헛웃음을 냈다.
자기 부정하듯 도리도리 젓던 고개는 마치 실연한 사람 같았다.
“자네야말로 바로 앞에서 듣지 않았나.”
책상 옆에 놓여있던 철 줄로 묶인 수많은 종이들.
그러나 그가 챙겼던 건 자신의 노트북 가방과 몇 가지 공책들 뿐이었다.
나머지는 두고 간다해도 전혀 미련이 없다는 듯이.
홀페린이 떠날 채비를 마치고 드디어 에릭 무세로를 보았다.
“그 소년의 말을 듣고 그간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걸 마주 보게 됐다네.”
단순히 중학생이라는 나이에 그 정도나 되는 지식을 쌓은 게 대단해서.
그런 시시한 게 아니었다.
나이로 치자면 자기보다 사오십 년은 훨씬 앞선 어른들.
그리고 경력으로 치자면, 세상 그 누구를 내놓아도 결코 밀리지 않을 거장들 앞에서.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년은 조금도 주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했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웠던 내용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친절하게 설명만 해준다면, 지나가던 일반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어려움.
그러나 연구에 매몰됐던 우리들은 간과하고야 말았고.
혹여 깨닫고 있었어도 애써 눈 돌리며 무시하고 있었던 금기.
그것을, 소년이 폭로했다.
“우린 지금까지 과학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해왔을 뿐이었어.”
현대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랬다.
심지어 학계의, 한 학문의 거장이었던 자신도 피해갈 수 없었다.
“논문을 내기 위해서,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전 연구를 그대로 이어받아 어떻게든 후속 연구로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쓸데없이 연구비만 축내며 살아왔지.”
연구를 위한 연구.
거기에 의미는 없고, 가치는 타락했다.
자본주의의 논리 아래 과학은 제 스스로의 신성성에 타격을 입혔고.
과학자들은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 소년은 무려 100년 만에, 5차 솔베이 회의 시절의 정신을 다시금 불붙이고 만 거라네.”
분명 자신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 시절의 패기와 순수함.
별거 아닌 논제로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벌였던 당시의 낭만.
그러나 연이은 타성에 빛바래 사라진 그때의 초심을.
이제는, 되찾기 위하여.
70년 인생.
조금 늦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지 않나.
“뭐,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나.”
끼익.
홀페린이 다시는 손잡을 일 없는 연구실 문을 열었다.
“나만큼 고체 이론을 잘 아는 물리학자가 세상에 없는 것도 아니니. 다만······.”
혹시 가능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지금은 그 소년이 바라던 모습으로 있고 싶군.”
언젠가 그와 함께 머리를 맞대며 연구해볼 날이 올 수 있도록.
그렇게.
소년이 언젠가 이 머나먼 발자취를 좇아 따라오기를 기다리며.
그리고 미래의 어느 때에 가서는, 어느새 자신을 추월한 소년이 만들어가는 미래를 떳떳하게 지켜보기 위해.
“잘 있게, 무세로. 자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래서 떠나는 거다, 거장은.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나게 될.
한 소년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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