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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실패 후 다시 사는 천재 카이스트생-35화 (35/134)

#35. 빨랑 능력이나 내놔

#35. 빨랑 능력이나 내놔

최근엔 리만브라더스 사태 등으로 회사 일이 바빠 하버드에서도 양해를 구하며 교수 일을 등한시하고 있는데.

이런 바쁜 와중에 논문 리뷰라니.

“아쉽게 됐지만 거절해야겠군. 다른 추천인에게 양도해야겠어.”

얀 틴베르겐은 거절 답장을 보낼 생각으로 메일을 클릭해 내용을 보았다.

그래도 조금 궁금하긴 했으니, 어떤 논문인지만 살짝 보기로만 했다.

그런데.

“······이래서 나한테 리뷰를 부탁했던 건가.”

논문 제목 시작부터 양자역학이 들어갔다.

그런데 끝은 주식 투자 알고리즘이었다.

한데 경제학 교수 중에서 경제학뿐 아니라 전산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까지 전부 섭렵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수밖에.

리뷰를 부탁할 교수가 있다면, 얀 틴베르겐, 그밖에 없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리학을 접목하는 학자는 분명 나 말고는 거의 없었을 텐데.”

순간 흥미가 돌았다.

“누구지?”

그는 곧바로 첨부 파일의 pdf 문서를 열어 보내온 논문 초고를 확인해보았다.

우선 저자와 소속부터······.

“······켱준 한, 세옹남 미들스쿨, 퍼스트 그레이드······?”

얀 틴베르겐은 어리둥절을 넘어 아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전.

끼익.

오유희에게서 도핑제 봉투를 챙긴 경준은 유설하의 사저에 와 있었다.

“여긴 언제 봐도 진짜 넓네.”

그녀가 부르길 통칭 정신과 시간의 방.

저택 본관에도 그녀의 방이 있었지만, 이곳은 한층 더 컸다.

무려 방을 넘어서 건물 자체가 오로지 그녀의 공부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했다.

벽 전체가 전부 하나의 칠판이었다.

수식을 길게 적어놓고 한참을 들여다 봐야 하는 이론가들에겐 그야말로 꿈만 같은 공간.

어쩌면 그녀가 천재로서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공부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런 공간을 고작 피시방으로 쓰고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상관없어.”

타닥, 타닥.

유설하는 경준이 왔는데도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계속 컴퓨터만 키보드만 두드렸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마우스의 현란한 컨트롤을 보건대 분명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가끔씩 미네랄을 달라는 영어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어떤 게임인지도 짐작이 갔던 그였다.

“얼레, 독일어 안 쓰네.”

“······익숙해졌어.”

무려 한 달.

오유희에게 듣기론 무려 한 달을 저리 지냈다고 했다.

“Konferenz.”

회의, 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의미 없다고 느꼈어. 더 해봤자.”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게임 화면에만 고정된 채였다.

“물리는 고체뿐만이 아닌데.”

“전부였어. 나한텐.”

그녀가 답지 않게 한국말로, 그리고 길게 부연했다.

“근데 네가 깨우쳐줬어. 무의미했다는걸.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인생 절반 손해 봤을 거야. 고마워.”

저게 고맙다는 건지 비꼬는 건지 참.

경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좀 더 현실적인 사안을 묻기로 했다.

“곧 3찬데 어쩌게. 계속 이러고 있으려고?”

2차 시험도 반강제적으로 끌고 와서 겨우 봤던 게 아닌가.

하지만 이 모양 이 꼴이어서야 아무리 천재 소녀라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부해봤자 의미 없어.”

“의미가 없다니.”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데?”

유설하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 텅 빈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돈? 이미 다 벌었다.

―흥미? 잃었다.

―사회적 명예? 등등? 관심 없었다.

이미, 충분했다. 일성이라는 이름이 있기에.

“할아버지도 내 마음대로 살랬어. 그러니 마음대로 살 거야. 게임만 하면서.”

그건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다.

자유가 아닌 방종.

그걸, 경준은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저벅.

오히려 붙잡을 생각 없다는 듯 유유히 걸음을 돌렸을 뿐.

“그럼 난 여기 좀 쓴다.”

무려 벽 전체가 연습장인 곳이다.

주인이 쓰지 않겠다면 지나가던 객이라도 써주는 게 덜 아깝겠지.

“······마음대로.”

“그래.”

그렇게 생각한 경준은 마커를 챙겼다.

이어 주변의 거대 화이트보드에 쓰기 직전.

“아, 맞다.”

바스락.

그는 오유희에게서 받은 봉투를 열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많네.”

* * *

봉투 안에는 경준이 부탁했던 도핑제들이 구분 없이 잔뜩 담겨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굳이 이름을 적어주지 않아도, 바로 구분해낼 수 있었기에.

‘이해류 스킬, 안력.’

【카페인 농축 알약】

【▶커피콩에서 추출한 카페인을 치사량 이하로 하여 농축하였다. 집중력을 비롯한 공부계열 스탯이 상승한다.】

【니코틴 희석액】

【▶담뱃잎에서 추출한 니코틴을 치사량 이하로 하여 농축하여 희섞하였다. 집중력을 비롯한 공부계열 스탯이 대폭 상승한다.】

【테오브로민, 페닐에틸아민, 잔틴계 복합알약】

【▶카카오에서 추출한 각성 효과 물질들을 압축해 알약에 담았다. 집중력을 비롯한 공부계열 스탯이 대폭 상승한다.】

【모다피닐, 메틸페니데이트계 복합알약】

【▶ADHD를 비롯한 항우울증, 항불안제 계열의 성분을 압축해 알약에 담았다. 집중력 및 창의력을 비롯한 공부계열, 보조계열 스탯이 대폭 상승한다.】

【제산제, 소화효소제, 진경제 계열 복합알약】

【▶섭취한 알약들을 안정적으로 견디고 흡수할 수 있게 도와준다. 섭취를 통해 발생된 모든 스탯버프의 효율이 50% 상승한다.】

【타우린계 복합알약】

【▶아미노산 계열의 피로회복 성분을 조합해 농축했다. 체력이 순간적으로 대폭 상승한다.】

【간장제 농축 알약】

【▶홍삼, 인삼 등 간의 회복 및 보호에 도움이 되는 성분을 조합해 농축했다. 체력이 순간적으로 대폭 상승한다.】

【나프록센 계열 진통제】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진통제와 달리 간에 무리를 주지 않는 진통제. 고통 감내량이 일시적으로 대폭 상승한다.】

【고혈압 계열 혈압약】

【▶아테놀롤, 프로프라놀롤 등을 적절한 비율로 조합해 계산한 혈압약. 한경준의 정상 혈압에 일치하도록 혈압을 조절해준다.】

본래는 한국과고 입시를 대비해서 준비해달라고 했던 것들.

하나, 더이상 시험에 필요 없게 된 이상, 더욱 좋은 곳에 쓸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과고 시험보다도 오늘 하려고 하는 게 훨씬 더 어렵고 머리를 쓰는 일임은 분명할 테니.

꿀꺽, 꿀꺽!

경준은 모든 알약을 삼켰다.

당연히 사용했던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포도당이 듬뿍 녹아든 물이었다.

설탕은 단당류가 아닌 다당류, 정확히는 이당류이기에 흡수가 느렸으니까.

직후.

[······상승합니다!]

[······가 대폭······!]

[······!!]

대폭 소폭 증폭.

체력, 집중, 창의, 끈기, 계산, 기억 등등.

온갖 문구가 담긴 상태창이 그의 눈앞을 뒤덮었다.

“······?”

순간 경준이 무얼 하는지 궁금했던 걸까.

유설하는 몰래 힐끔 시선을 보내보았다.

만약 눈이 마주친다면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리라.

그렇게 무심한 듯 다짐했던 그녀였으나.

“!”

그럴 수가 없었다.

그야 그녀가 경준은 보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쿨럭!”

경준이 당장 그 입에서 피를 토했으므로.

* * *

아무래도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긴······.”

나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다행히도 요단강이 아님은 확실했다.

“아아.”

그리고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송유미의 기억 회랑을 재생할 때 잠깐 거쳐 가듯이 나왔던 현상.

이건 분명, 상태창의 힘이었다.

그도 그럴게 보아라.

-안녕?

지금 눈앞의 ‘나’라는 존재는 이런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됐으니까.

-어때, 회귀는 만족했어?

소년의 모습은 아니었다.

서른여섯 살, 어른의 모습을 한 나.

생화학을 다루는 것도 아닌데 굳이 멋지구리하게 차려입은 저 새하얀 실험복 가운.

그리고 정작 실험할 때는 제대로 착용하지도 않으면서 이마에 걸치고 있던 레이저 보호 고글.

눈앞에는 분명, 회귀 전의 ‘나’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던 것.

저건 나이지만, 내가 아니었다.

“암. 만족했고 말고. 상태창 네 덕분에.”

-푸핫.

숨김 없는 직설적인 대답에 피식 웃어버리고 마는 ‘나’였다.

내 행동 패턴을 완벽히 따라 해버리고 마는 저 모습은 왠지 조금 기분이 묘했다.

마치 내 노랫소리를 녹음한 다음에 재생해버리는 것처럼.

-맞아. 나는 만들어진 너일 뿐. 네가 상태창이라고 부르는 존재이기도 하지.

‘나’가 말했다.

-원래는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 나타날 기믹이었는데, 이렇게 일찍이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역시 그랬던 건가.

-왜 이렇게 일찍 찾아온 거야? 회귀는 만족했다면서, 결국엔 모든 게 다 허망해진 거니?

나의 물음에 내놓을 답은 이미 정해두었다.

“확인하기 위해서.”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리고, 확인했지.”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순간 ‘나’의 실없던 표정이 굳었다.

그러더니 두 눈이 화등잔만치 커지더니 이내 푸하핫 참지 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이런 게 있을 줄 알고 있었다는 말투네.

“뭐, 물리학자들은 죄다 괴짜니까.”

-아아, 그러네. 잊고 있었어.

‘나’는 곧 웃음을 멈추더니 삽시에 표정을 바꿨다.

-그렇담 더이상 잡담은 필요 없겠어.

삽시에 감정 없는 회색빛으로 감돌았던 ‘나’의 눈동자.

그 두 눈은 나를 꿰뚫듯이 하여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이런다고, 네가 정말로 천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총론.

과연 범재는 천재가 될 수 있는가.

-평생을 범재로 살아왔던 너야. 그런 네가, 회귀를 통해 분에 맞지 않는 ‘천재'’를 손에 넣었지. 하지만 인생은 길어. 100년은 거뜬히 넘을 미래의 인생에 비하면, 네게 남은 건 22년 뿐이지.

22년.

무얼 뜻하는 건지는 안다.

회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한계점.

그 이후로는, 나 역시 겪어보지 못했던 미래일 테니까.

-네가 미래의 지식을 끌어당기면 끌어당길수록, 그 밑천은 더욱 빠르게 드러나겠지. 지금 네가 키우고 있는 송유미 역시, 반쯤은 그런 이유에서일 테고.

정확히 꿰뚫어 보는 그였다.

퀘스트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었지만.

실은, 확인해보고 싶었다.

나와 같은 범재인 그녀가, 과연 천재로 변모할 수 있을지.

혹은 적어도 그에 준하는 존재라도 좋으니까.

직접 한 번 실험하여 확인해보고 싶었다.

-만들어진 천재여. 정말로 네가 천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나?

그러니 눈앞의 ‘나’는 그걸 부정하려는 거였다.

뼈 아프게도, 확실하게 핵심을 찌르면서.

-흉내 낸 천재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나. 범재여.

“애초에, 천재가 될 생각도 없었어.”

애초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물론 전혀 안 그랬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들이 부러워, 그들처럼 되고파 나를 갈아 넣으며 그 뒷꽁무늬를 쫓았다.

그런 인생이었다, 전생은.

어쩌면 이렇게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범재인 나 자신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에, 그랬던 거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끝에 가서는, 받아들였다.

“그들이 부럽긴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스스로를 부정해본 적은 없었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범재인 나 자신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고, 나를.”

범재인 내가.

범재에 불과한 주제에.

감히 그들의 뒤를 쫓으려고 한다는 사실에.

나는 충분히 만족했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이미 나는 송유미처럼 더욱 일찍 갔겠지. 졸업도 못 해보고.”

그렇기에 1회차의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유혹이 있었음에도.

계속해서 버텨왔고, 계속해서 느껴왔다.

“애초에 범재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째지는 기분도 못 느꼈을 거 아니야?”

범재가 천재를 뛰어넘는다.

비록 내가 저 천재들보다는 못하다는 건 인정해도.

그렇다고 못 이기는 건 아니다.

분명, 이길 수 있었다.

“안 그래? 나?”

틀림없이 나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회귀했을 때처럼 괜히 유혹일랑 말고 빨랑 능력이나 내놔. 퀘스트 통과했으면 뭐라도 줘야 할 거 아니야. 상태창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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