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생활 실패 후 다시 사는 천재 카이스트생-45화 (45/134)

제45화

#45. 됐네요, 아쉽게도 비혼주의라

홍지학교.

한국과고는 일반고와 다르게 겨울방학 때부터 학교에 나와야 했다.

정식 입학식은 내년 3월이긴 했으나, 그 전에 미리 학교 기숙사에 박아 놓고 적응부터 시키는 것이었다.

‘하긴, 카이스트도 그러긴 했었지.’

과고와 영재고 출신이 70% 이상이었던 카이스트.

카이스트 역시 3월 전 방학 때 미리 학생을 받아 공부시켰다.

수업과 숙제부터 시험까지 모두 영어로 진행됐던 탓인데.

‘과고 출신들이 영어를 좀 못해야 말이지.’

그래서 영어 캠프란 이름으로 한 달간 학교에 가둬 영어 교육을 시켰고, 이후 마지막 날 시험 성적에 따라 통과와 미달을 나눴다.

한국과고도 비슷했다.

카이스트가 영어에만 한정지었다면, 한국과고는 과학과 수학 전반.

매주마다 쪽지 시험 같은 걸 본다고 했었고, 마지막 날 시험에서 미달이 뜨면 정식 입학 후 강제로 보충 수업을 들어야 한다나 뭐라나.

“가기 싫어.”

물론 유설하에게는 그런 성적 경쟁보다도 기숙사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

“친구 만들고 싶다매.”

“바보 언니랑 선생님으로 충분해.”

“평생 그 둘만 보고 살게? 우리 없을 때 너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고용했어.”

“그래, 고용이지. 그래서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이 과외도 그만둘 수 있어. 그리고 네 할아버지가 계속 너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

유설하가 혹부리 영감처럼 심술궂게 양 볼을 부풀렸다.

그러면서 책상 아래 꼼지락거리던 발로 내 허벅지를 꼬집으려고 들면서 항의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야. 단순히 나 자신이 잘났다고만 해서 살아남을 수 없어.”

“……할아버지랑 똑같은 말. 그래서 싫어. 필요도 없고.”

“필요는 스스로 만드는 거야. 나도 너처럼 굳이 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래서 가는 거고.”

단순히 공부하려고 한국과고에 가는 게 아니었다.

원했던 건 한국과고라는 간판, 즉 학벌.

그리고 거기에 있는 인재풀이었다.

거기서 만들 양자컴퓨터 동아리와 인맥은 미래에 차릴 양자컴퓨터 회사의 핵심 될 예정이었으니.

“괜찮아. 강요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이미 한 명은 따라왔고, 지금도 내 실험실에 박혀서 연습하고 있거든.”

솔베이 학회에서 고체 기반 양자컴퓨터를 거하게 깠던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유설하였지 않나.

그래서 양자컴퓨터 동아리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밝힌 후에도, 그녀는 빛으로는 안 된다며 연신 부정할 뿐이었다.

반면 송유미는 ‘그래서 이거 하면 되는 거지?’라면서 별생각 없이 일단 따르고 보았고.

지금도 그녀는 혜화동의 내 실험실 ‘Hell’에 박혀 통조림 당한 채 내가 내준 과제를 열심히 하는 중일 터.

“콜리메이팅 에피선시(Collimating efficiency)가 적어도 70% 이상이 될 때까진 집에 갈 생각 말라고 했지.”

광학 실험의 가장 기초.

레이저에서 나온 빛을 거울에 반사시켜 렌즈를 통해 파이버(광섬유)에 집속시키는 실험.

쉽게 말해 레이저에서 나온 빛을 잘 모아서 광섬유에 잘 넣어 보라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100%는 나와야 해. 조건만 잘 맞추면, 그런 건 식은 죽…….”

“그건 이론이고. 이론하고 실제 실험은 달라.”

머리만 좋으면 되는 이론과 달리 실험은 결코 천재의 영역이 아니었다.

오로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한 경험, 그리고 끊임없이 다시 도전하는 노력만이 중요했다.

물론 좋은 실험을 하기 위해선 이론도 중요하긴 하나, 그건 곁가지에 불과했다.

‘명문대의 똑똑한 교수들이 자기 대학원생들 보고 맨날 멍청하다고 욕해도 결국엔 다들 박사 따고 졸업했지. 나도 그랬고.’

요는 실험에선 머리보다는 ‘얼마나 굴렸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송유미는 구르는 데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었고.

“전에 너도 한번 해 봐서 알잖아?”

참고로 유설하는 머리만 좋았지, 직접 실험에 있어서는 영 꽝이었다.

“……준비된 실험 기구가 이상했어.”

“그 별로인 마운트로 난 바로 80% 달성했었는데? 송유미도 나노미터 단위지만 일단 집속시키는 데 성공은 했고.”

“…….”

유설하는 천재다.

특히 이론에 있어서 명실상부한 천재가 맞았다.

‘세상에 똑똑한 천재는 많아. 하지만 천재라는 톱니바퀴 하나만 가지고 모든 게 잘 돌아가기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

그녀가 쓴 논문들, 그녀의 지식들은 회귀자인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2030년 이후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내가 시킨 실험을 오기로든 뭐로든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될 때까지 때려 박을 줄 아는 범재 송유미가 더 가치 있었다.

게다가 한국과고에 합격한 이후로는 고양이에서 강아지가 된 것처럼 훨씬 말도 잘 들었으니.

반대로 유설하는 머리만 좋았지 정작 시킨 일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어린애에 불과했고.

“가게?”

“응.”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목상의 과외, 그냥 잡담을 나눌 뿐인 시간은 이걸로 끝.

“난 간다. 네 할아버지가 부른 시간이 돼서.”

끼익.

바깥에는 이미 오유희가 골프카 같은 걸 몰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좌석에 오르기 전에 고개만 돌려서 방에 있는 유설하에게 말했다.

“아직 홍지학교 시작하려면 몇 주 남았으니 그간 잘 생각해 봐. 아니면 내가 전에 이코노메트리카 논문 썼던 거 같이 생각해 봐도 좋고.”

“……그런 사이비 물리는 안 해.”

지금 저렇게 말하고는 있어도 당시 내가 칠판에 논문 쓰던 모습을 초롱초롱 지켜봤던 그녀였지 않나.

그 이후에 이게 문제니 저게 문제니 엄청 태클을 걸어 대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내용 수정해서 논문 투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됐었다.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근데 네가 최근에 읽고 있는 초끈이론 책이 솔직히 더 사이비 같던데. 세상이 뭔 실은 10차원이니 11차원이니, 아 M이론에 의하면 한 차원 더 있어서 사실 세상은 12차원…….”

“우씨!”

필기구와 책들이 픽픽 날아오길래 맞기 전에 얼른 문부터 닫았다.

그렇지만 태생이 방에만 박혀서 연약했던 그녀라 문에 닿지 못했고, 힘없이 바닥에 물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 * *

“뭐, 보다시피 아직은 저렇네요.”

오유희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에 오유희도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일 뿐.

천재 사춘기 소녀의 고집을 꺾기란 아무래도 한국과고 입학보다도 어려운 일 같았다.

“차라리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그 방향을 과외로 살짝 틀어 달라고 하셨던 게 회장님의 의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긴 하죠.”

“아니면 그냥 경준 님께서 데릴사위로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러면 작은아기씨께서도 편하게 하고 싶으신 것만 하면서 사실 수 있겠지요.”

“됐네요. 아쉽게도 비혼주의라.”

“어머, 그랬군요. 그렇담 여동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입양으로 해서.”

“우리 부모님 아직 안 죽었습니다.”

은근히 누구 하나 코 꿰려는 제안을 적당히 뿌리치고, 줄지어 다가오는 가로수들의 광경을 보았다.

전동 카트는 막힘없이 유 회장의 별실이 있는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회장님은 바둑 둘 사람을 찾고 계시나 봐요.”

유 회장은 툭하면 바둑 두자고 나를 부르곤 했다.

물론 바둑 그 자체보다는 바둑을 두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 핵심이었다.

과외비라고 받는 거액의 용돈도 사실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매번 이렇게 양로원 대신 어울려 주고 있지 않았나.

몇 주 뒤 기숙사에 입사하고 나면 이렇게 같이 바둑 두거나 함께 밥 먹을 일도 거의 못 하게 될 테니.

“회장님도 그러길 기대하셨습니다만, 아쉽게도 오늘은 게스트가 한 명 더 있습니다.”

게스트?

“예, 최근에 돈놀이를 너무 하셨던지, 태평양 너머의 코쟁이 개관에까지 경준 님의 기행이 전해진 것 같습니다.”

“코쟁이 개관? 아.”

그건 또 뭘 두고 돌려 말하는 건가 싶었는데, 금방 뭔 말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돈놀이, 태평양.

이 두 개라면 무조건 거기밖에 없겠지.

오로지 돈에 죽고 돈에 산다는 재계에서도 특히나 그 본분에 충실한 녀석들.

기업의 본분인 가치 창출이라는 면에서는 한없이 멀지만, 수익 창출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탐욕을 드러내는 자들.

세계 최악의 기업 순위 2위에 당당히 올랐으며, 유대인이 만든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상징하는 곳.

우리나라에서는 외인이자 기관, 개X끼라는 의미를 담아 개관이라 불리는 그들의 대표가―

“실버만삭스의 최고 이사, 얀 틴베르겐이 경준 님을 찾아 친히 행차하셨답니다.”

“아하.”

―돈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

“왠지 논문 리뷰가 늦더라니.”

정확히는, 내가 던진 미끼에 이끌려서.

* * *

재계의 두 거장이 만났다.

“이거이거 참, 설마 일성의 회장께서 벌써 선수를 쳤을 줄은 몰랐군요.”

“끌끌, 무릇 장사치란 누가 먼저 빠르게 잡느냐의 싸움 아니겠습니까.”

한 명은 아무것도 없던 불모지 한반도에서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역군, 일성의 회장 유근철.

다른 한 명은 오로지 돈 장난으로만 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세계 최악의 자본가, 실버만삭스 최고 이사 얀 틴베르겐.

“요즘 금융위기로 경기가 안 좋아서 많이 고생하시는 걸로 압니다.”

“허허, 원래 정직하게 벌수록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남이 힘들고 망할 때 고혈을 빨아먹을 정도로 마음이 강하지 못했지요. 보아하니 최근엔 그리스에서 재미 좀 보시던 것 같은데.”

“원래 누군가가 벌면 어디서는 잃는 법이지요. 그리스는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당사에서는 그저 더 잘되기를 바라며 IMF 대신 힘 좀 써 줬을 뿐인데, 설마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요.”

차이점은 많지만, 공통점은 명확했다.

둘 다 미래를 보는 안목은 확실한 장사치라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경준 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둘 다 한 소년을 두고 열심히 구애 중이라는 사실이 있겠다.

“불법이 아니기만 하면 됐죠, 뭐.”

경준은 피곤한 듯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실버만삭스 쪽에서 돈을 안 빌려줬다면 그리스는 장부 조작으로 유로존에 가입 못했을 테고, CDS니 숏이니 공매도니 그런 걸로 승냥이들에게 이리저리 뜯길 일도 없었을 테지만, 뭐 어쩌겠어요. 기껏해야 국가 부도 정도가 다 아니겠어요?”

“호오…….”

유 회장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였고, 틴베르겐은 놀랍다는 듯 작은 탄성을 냈다.

그의 말에는 현재진행 중인 금융위기와 그 여파로 곧 찾아올 유럽연합 위기의 인과가 전부 담겨 있었다.

심지어 현재 실버만삭스가 승냥이처럼 그리스를 상대로 국가 부도 베팅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단번에 파악해 버리지 않았나.

‘……단순히 물리학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야. 국가 정세, 대국적인 경제 흐름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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