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생활 실패 후 다시 사는 천재 카이스트생-49화 (49/134)

제49화

#49. 사진 기억

“흥. 의대에선 그런 거 안 기다려 줘.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잘 적었어야지. 너, 번호하고 이름.”

“……18번 송유미요.”

“필기가 그게 뭐냐. 꿈이 서기야? 중요한 것만 딱딱 적고, 키워드만 잡아내야지. 너 같은 애들이 의대에서 항상 꼴찌 하고 그러더라.”

“……의대 안 갈 건데.”

“뭐?”

“……아뇨.”

“의대에서만 그럴 것 같냐?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너 그래 가지곤 바닥에서 놀 거야. 제대로 선행했으면 이 정도는 버텨야지. 꼴찌 하기 싫으면 당장 필기 방식 바꿔.”

“……네.”

“흥.”

전봉임은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엄청난 속도로 칠판을 하얗게 채워 나갔다.

그의 속사포 같은 설명은 이미 교실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대충 따라오는 학생은 절반 이하인가.’

그는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반응을 일일이 전부 다 관찰하고 있었다.

‘이번 기수는 똑똑한 애들이 많다더니 다 헛소리였네.’

전봉임은 한국과고의 선생답게 항상 최고치를 기준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의 악명 높은 생물 수업은 2학년, 3학년들한테도 유명하다던가.

실제로 그 덕분에 전봉임은 한국과고에서 의대 진학률을 낮추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어쩌면 계획된 것이기도 했다.

‘과학고고 영재고인데, 졸업하고 과학자가 돼야지 의대는 무슨. 그럼에도 정 갈 거면 이 정도는 견뎌야지.’

그렇게 노도와도 같은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Zzz…….”

이런 폭풍과도 같은 수업 속에서도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

“어떤 녀석…….”

……이야! 라고 외치려다가 순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저건 분명 일성의.’

손녀, 유설하.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선생이고 수업 중에 자고 있는 학생이더라도, 일개 선생이 어떻게 일성의 재벌 3세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

‘오호라!’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녀석이! 거기 17번 유설하 앞에 남자!”

남자 여자 순서대로, 그리고 키 순서대로 번호순으로 앉았던 학생들.

반에서 두 번째로 작은 송유미가 18번이었고, 그다음 가장 어리고 작았던 유설하가 17번.

그리고 16번은 남자로 바뀌어서 가장 키 큰 학생이 앉아 있었다.

“이, 이 녀석이 미쳤나?”

더욱 가관이었던 건, 이런 와중에도.

그는 아까부터 계속,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코 자고 있던 건 아니었다.

‘포도당의 TCA 회로. 원형 순환회로에 동화작용과 이화작용이 위아래서 동시에 진행되는 그림이고, 차례대로 시트레이트, 시스, D. 알파, 석시닐의 조효소 A 합성…….’

이미 전봉임이 가감 없이 지워 버린 칠판 필기.

경준은 그걸 실시간으로 머릿속에서 복기해 내고 있었다.

* * *

‘이, 이 녀석이 미쳤나 진짜.’

한국과고의 1학년 생물 선생 전봉임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자신의 수업 시간에 필기도 안 하고 눈 감고 자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기는 하고 있었다.

‘저 가증스러운 수식들, 그리고 역학적인 그림……! 물리다! 이 새끼, 내 생물 시간에 물리 공부하다가 지루해서 처자 버린 거라고?!’

책상 위에 있는 까맣게 볼펜으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는 필기 노트.

거기에 적힌 수식과 그림들은 전혀 생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심지어 일반 대학 과정도 아득히 넘어간 것 같은 내용들.

‘이 새끼가 1등으로 입학했다고 건방지게……!’

전봉임은 자기 실력만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학생들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물리하고 수학 잘한다고 생물을 등한시하는 학생들.

특히나 한국과고에서는 그런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기에.

생물 선생으로서 그의 사명이란 그들에게 생물 과목의 만만치 않음을 제대로 때려 박아 주는 것이었으니.

“중요한 것만 딱딱 필기하랬지, 누가 전혀 상관없는 공부하면서 눈 감고 처자랬어? 안 일어나?!”

그림도 많고 글도 많아 여타 과목보다 훨씬 두꺼운 한국과고의 생물 교과서.

부웅!

그게 전봉임의 커다란 손에 딱 잡혀서 그대로 남학생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때.

“……!”

눈앞의 남학생이 갑자기 눈을 뜨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 때문일까.

전봉임의 두꺼운 생물 교과서가 남학생의 바로 코앞에서 뚝 멈춰 버리고 말았다.

“수업, 안 하십니까.”

그리고 멈춘 게 아니라 멈춰진 거였다.

‘허억, 허억…….’

알 수 없는 기묘한 압박감.

분명 중 1 입학생으로, 2009년인 지금 고작 15살에 불과할 텐데.

하지만 방금 전봉임은 순간 태산을 맞이한 것만 같았다.

이 기분은 마치 의대 다닐 적 허구한 날 폭력과 부조리를 행사했던 교수에게서 느꼈던…….

“……수업은 무슨!”

그저 예상치 못한 저놈의 반응에 지레 놀란 게 분명했다.

그리 판단하고 전봉임은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방금 눈 감고 자고 있던 게 누군데! 적어도 방금 18번처럼 어떻게든 필기라도 하려고 했어야지, 뭐? 생물 시간에 물리? 네가 그리 잘났어? 조금 선행했다고 그렇게 자만하다가 한순간에 뒤집힌다는 거 몰라? 여기가 그렇게 만만해? 네가 천재라도 된 것 같아?”

그의 일갈 섞인 물음 아닌 물음.

“선생님.”

거기에 굳이 휘말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눈앞의 남학생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이런 갈굼과 체벌은 아주 일상이었다는 것처럼.

“아무래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신물 섞인 표정이기도 했다.

“뭐?”

“수업은 잘 듣고 있었습니다.”

“뭣, 뭐?”

“단지, 외우는 중이었죠.”

순간 전봉임의 목울대에 불뚝불뚝 핏대가 올랐다.

화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차가운 분노로 바뀐다고 했었나.

“하, 참. 너 이름하고 번호 뭐야.”

이미 입학 전부터 알고 있는 정보였다.

심지어 안 그래도 2차 시험 때부터 그를 안 좋게 눈여겨봤던 생물 선생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굳이 물었던 그였다.

“16번, 한경준.”

“……새끼 선생한테 말 짧게 하는 거 봐라. 그래, 이런 놈일 줄 알았지. 좋아, 외웠다 이 말이지? 그 말이지? 응?”

이 녀석 잘 걸렸다.

바깥과 속에서 둘 다 헛웃음을 터트리던 전봉임은 그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기로 했다.

“그럼 어디 나와서 지금까지 수업한 거 다 적어 봐!”

“예.”

드르륵.

“알겠습니다.”

경준은 조금도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갔다.

그 모습에 전봉임은 여간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보통은 저 체벌에 가까운 부조리한 지시에서 꼬리를 내리기 마련이었다.

스윽.

그러나 경준은 처음부터 생물 선생이 저렇게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어느새 분필을 집어 손을 올리고 있었다.

중 1 입학생, 햇수가 바뀌어 14살에서 15살이 된 그.

그러나 그 키는 이미 170을 넘어 일반 성인 남성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닥, 탁.

그가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적어 나가는 새하얀 분필 글씨들과 그림들.

그건 결코 학생이 적을 수 있는 필체가 아니었다.

숱하게 칠판을 써 봤던 교사들처럼.

혹은 비슷하게 대학 강당에서 여러 번 강의를 해 봤던 대학 교수의 그것과 같이.

어쩌면, 아까 생물 선생이 지웠던 칠판 필기보다도 더욱 정갈했고, 정돈되어 있었다.

‘10년 넘게 모든 수업, 강의. 전부 다 판서였어. 내가 들었던 수업도, 했던 수업도.’

다른 공대나 자연대와 달리 수식에서 시작해 수식으로 끝났던 물리학 수업들.

경준 그가 수업을 들었을 적부터 이후 대학원생이 되고 교수가 되어 직접 강의를 진행하게 됐을 때까지.

오로지 손과 적을 것 하나만 있으면 됐었다.

다른 과의 수업과 달리 PPT 활용도가 지극히 적었다.

대충 수업하는 교수는 PPT에 수식 붙여 놓고 슥슥 넘어가는 식으로 진행하기도 했지만.

공식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 공식을 유도하고 증명하는 게 더 중요했던 물리학의 특성상, 그에게 있어 적는 건 일상이었다.

“와…… 진짜 선생님 같아.”

“난 분필로는 저렇게 예쁘게는 절대 안 나오던데.”

“어? 저거 방금 선생님 필기랑 완전 똑같이 않아?”

주변 학생들 사이서 감탄과 놀람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순히 전문가처럼 판서를 잘 적었던 것만이 아니었다.

적은 내용에 있어서도 완벽했다.

그뿐이랴.

“카타볼리즘, 이화작용. 본래 판서에서는 o가 하나 빠져서 오타였죠. 수정하겠습니다.”

전봉임이 빠르게 수많은 양을 판서하면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던 오타들.

그 부분까지 정확히 기억해 내며, 또 그걸 알맞게 수정하기까지 했다.

범상치 않은 기억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의 기억력은 평범을 초월한 지 오래였으니까.

【스킬 『사진 기억』 : 미개방(숙련도…… 100%)】

[기억류 스킬 『사진 기억』의 숙련도가 100%가 되었습니다.]

[숙련도가 100%가 되어 완전한 스킬로서 개방됩니다.]

【사진 기억 - 기억流】

【▶내용 : 포토그래피 메모라이즈. 보는 순간 눈앞의 광경을 사진처럼 그대로 머릿속에 담는다.】

【▶효과 : 본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정보를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 너무 자주 사용하게 되면 큰 두통에 시달릴 수 있다. 고유 스킬 『범재의 의지』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서번트 증후군, 장애를 가진 대신에 그 반작용으로 가지게 되는 인간을 초월한 인지 능력들.

그중 하나였던 ‘사진 기억’의 능력이 경준에게도 생겼다.

한국과고 입학 전부터 계속 수련해서 95%대에 달했던 숙련도를 어제 오늘 마저 100%까지 채웠던 것.

즉, 오늘 전봉임이 칠판에 적었던 판서들은 이미 하나의 사진이 되어 경준의 머릿속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여기 분자식 그림에도 오타가 있군요. 수소인데 산소처럼 크게 그렸습니다. 이것도 수정하겠습니다.”

“크윽……!”

선생은 툭 치면 터질 것처럼 새빨간 토마토가 되어 있었고, 주변에서는 감탄 어린 탄성만이 나왔다.

결국 이 압도적인 수업은 선생이 “됐다! 들어가!”라고 말하며 포기하기 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눈에 띄는 학생들은 있었습니까?”

한국과고에서 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이뤄지는 1학년 교무회의.

특히 홍지학교가 시작된 후 첫 1회로 개최되는 지금은 꽤 깊은 의미를 가졌다.

“영재반 학생들이 똑똑하긴 하더라고요. 몇 명 골라서 발표시켜 봤는데 대답도 잘했고요.”

“영재반 학생들이 확실히 선행이 잘돼 있긴 했지. 근데 창의반 학생들은 영……. 쉬는 시간에 보니까 벌써부터 동아리 얘기나 하고 있더만.”

“그래도 동아리나 전람회, RNE 같은 걸로 대학은 더 잘 가지 않았습니까? 특히 아이비리그 진학률이…….”

“재능반은 서동현이란 학생이 수업 첫날부터 MP3로 만화영화 보다가…….”

영재반, 창의반, 재능반.

이렇게 총 세 반으로 나뉘어 있는 한국과고.

홍지학교 첫 주 동안 수업을 진행했던 선생들은 각 반의 학생들이 어떤지, 어떤 학생이 좀 괜찮아 보이는지, 어느 반의 누가 문제아인지 등.

서로 수업하면서 겪었던 것들을 공유하곤 했다.

“그 요번에 창의반 들어간, 면접 때 노래 부른 학생은 어떻게 됐나? 듣자 하니 아버지가 ZYP에서 나와 소속사 하나 세웠다고…….”

“아유, 말도 말아요. 자기가 관심 있는 수업 아니면 듣지도 않고, 그렇다고 괜히 건드려서 피 볼 것 같고. 그 일성인데.”

“재능반에 이아람이란 학생이 참 괜찮았습니다. 벌써부터 반을 휘어잡아서 완전 반장감이던데요? 과연 검찰총장을 아버지로 둔 아이답달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눈여겨볼 만한 학생들이 추려지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특히나 가장 중심이 되었던 학생은 단연 그였다.

“들었네, 전 선생. 생물 수업 때 고놈이 한 건 저질렀다더만?”

“윽…….”

교무부장이 씨익 웃으며 묻자 전봉임, 전 선생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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