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86. 그칠 줄 모른 채 점점 커져만 가는 그의 인맥과 영향력
여기가 정말 과고가 맞는지 의심이 갈 만한 미모.
그 미모를 그녀는 학교에선 촌스러운 교복과 머리, 그리고 도수 높은 안경으로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축제 날에도 다들 그녀를 신하율이 아닌, 그녀가 아버지 인맥으로 섭외한 모델로 알고 있었으니.
물론 내게는 전혀 안 통하는 위장 전술이었지만 말이다.
‘나야 처음부터 안력으로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뭐.’
물론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하지는 않았고.
“머리에서 녹말 냄새가 나서?”
“우씨……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날 머리 감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자업자득 아닙니까?”
그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녹말을 뒤집어쓴 그녀였지 않나.
물론 그걸 탓하려고 이렇게 옥상 자리까지 불러낸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너 노래 잘하더라. 장기 자랑 때 봤어.”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핸드폰을 건넸다.
“자.”
번호 달라는 건 아니었다.
보건대 이미 전화는 어딘가로 걸려 있었으니까.
“……받으면 알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전화로 알아서 하라는 듯 핸드폰만 건넨 채 이미 시선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이내 그녀의 핸드폰을 귀에다 가져다 대자, 얼마 안 있어 딸칵하고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첫 마디는 여보세요? 가 아니었다.
“신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따님에게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양 먼저 선수를 치는 내 목소리에.
“분명 ZYP 소속사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죠?”
“……?!”
일부러 피하려고 했던 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내게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군. 역시 자네라면 거절할 것 같았네.
ZYP의 신 회장.
그는 통화로 경준에게 나중에 졸업하고,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전속 싱어송라이터로 계약할 생각 없냐며 제안했다.
그야 며칠 전 축제 날 들었던 그의 기타 연주와 노래에서 대박의 기운을 엿봤기 때문에.
‘음률이 나를 이끌었다. 마치 운명과도 같았지.’
신 회장은 당시 딸을 보러 잠깐 학교에 왔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딸을 잠시 부스에서 만나고 이만 돌아가려고 했을 적에.
유 회장을 만났던 대강당에서 선율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때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곡가로 활동했고, 이내 ZYP를 창립해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로서.
결코 무시할 수 없던 연주와 노랫소리가, 그를 다시금 그곳으로 이끌고 말았다.
‘그건 분명, 대박감이었다…….’
그리고 만나 버렸다.
이 시대의 진정한 음악 천재를.
‘실력 자체는 흔하다. 아마추어 이상, 프로 이하이긴 해. 하지만, 스스로 작곡했다던 노래는 그야말로 천재였어.’
신 회장으로서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가 들었던 경준의 노래들은, 총 세 곡을 들었는데.
그 셋 다 전부 다 그가 직접 섭외하거나 작곡하고, 또 자기 회사에서 대박을 터트렸던 노래들이었으니까.
‘마치 내 머릿속을 그대로 따다가 작곡시킨 것과도 같았다……. 어쩜 그렇게 내 취향과도 딱 들어맞았을까.’
물론 그 사실을 신 회장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대한민국 연예계를 이끌어 가는 거장이라고 해도, 어떻게 감히 미래의 노래를 예측이나 하겠는가.
그렇다 보니 ZYP에서 머지않은, 혹은 먼 미래에 알아서 작곡해 발표할 노래들을 전부 ‘특종’이자 ‘대박’으로밖에 못 느꼈더라.
‘아쉬워. 너무 아쉬워. 그는 과학같이 어렵고 보답받지 못하는 일을 할 게 아니라, 우리 ZYP에서 내 전속 코칭을 받아 줬으면 했는데…….’
물론 당연히 거절했던 경준이었다.
그것도 그럴 게, 이미 그는 물리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으니.
그건 첫 번째 인생에서도, 그리고 다시 살게 된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첫 번째 인생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던 그였지 않나.
‘베낀 미래의 노래로 성공하는 것도 웃기기도 하고.’
“예. 저로선 스스로 부족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겸손이 너무 과해도 좋지 않네, 경준 군. 그럼 자네에게 구애하는 내가 뭐가 되겠나. 하여튼,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자네의 음반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지.
경준은 전속으로, 정기적으로 활동하겠다는 안은 거절했다.
대신 가끔 내킬 때 작곡한 노래를 내거나 녹음하러 가는 것까지는 허락했다.
‘유명세를 퍼트리는 건 좀 귀찮긴 해도, 장기적으로는 이득이야.’
단순히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안전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연구가 계속되고 기술 개발이 진행될수록 나 개인을 원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거다.’
지금이야 괜찮겠지만, 나중에는 그중 선을 넘어서는 이들도 나오기 시작할 터이니.
법을 악용한 술수나 권력을 앞세운 정치질로 도를 넘어선 작자들이 분명 나오기 시작할 게 뻔했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나중에 가서는 국가 단위로 납치 혹은 감금, 아니면 암살까지도 이뤄질지도 몰랐다.
‘단순한 망상이 아니야.’
전 세계의 핵심 인재들을 중국으로 빼 오는 공산당의 천인계획.
그리고 2020년 중반 이후, 양자컴퓨터의 상용화가 정말로 가능성을 보이면서 시작된, 20년 초의 미·중 무역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치열한 대립.
특히 양자컴퓨터와 양자통신은 인공지능과 보안에 있어 핵심이 되는 기술이었던지라, 정말로 무력 전쟁 직전까지의 사달도 발생하고 그랬다.
‘미국하고 중국 사이만 그런 게 아니지. 한국도 그래.’
황 교수가 바로 그 천인계획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경준은 그 중국한테 사주당해 실제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만약 그때 복수할 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더라면, 경준 역시 황 교수처럼 중국에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다가 팽당했거나.
아니면 영원한 중국의 앞잡이 과학자로 세상을 중국 공산당의 색깔로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을 게 분명하리라.
그러다가 미국에 의해 중국과 함께 지도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
‘오히려 지금이 더 위험하다. 어쩌면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하고도 대적할지도 몰라.’
당장은 아니지만, 수년, 머지않은 시일에 정말로 양자컴퓨터를 상용화시켜 버리고.
그 기술을 헬 래버래토리에서 독점해 버리는 순간, 미국은 많이 불편한 걸 넘어서 국가적인 조치를 취하려고 올 것이다.
그야 상용화된 양자컴퓨터의 계산력이라면 백악관은 우습고, 심지어 펜타곤의 온갖 전자화된 기밀도 단 몇 초 만에 쉽게 뚫어 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기술은, 똑같이 양자 기술을 이용한 양자암호통신밖에 없었고.
‘모티브는 일론 무스크다. 나중엔 그 미친놈처럼 SNS에 일기장도 쓰고 그래야지. 마침 퀀텀코인도 만들었으니까.’
전기 차와 스타링크, 그리고 하이퍼루프와 화성 우주선의 황제 기술자이자 CEO인 일론 무스크 그 이상으로.
단순히 회사와 기행으로 인한 유명세뿐 아니라, 아예 인기 그 자체를 누려 버린다면?
학계에서의 명예와 유명세에 더해, 연예계에서 말 그대로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면?
‘좀 귀찮아지긴 해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하겠지.’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면 집이 아니라 사람 많은 데로 도망치라는 말과 비슷한 논리였다.
지금도 매일 유 회장이 힘내 줘서 일성에게 거의 엄호에 가까운 경비를 남모르게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구멍은 있기 마련이니까.
대중에 의한 감시만큼 가장 확실한 게 어디 또 없었다.
‘클라우드 접속권으로 아무 인기곡 하나를 가져오면 되겠지. 노래는 질리도록 많다. 적어도 앞으로 20년간은.’
전생에 ‘노래 모음’ 폴더에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모아 뒀던 수많은 인기곡들.
당시에는 그냥 논문 읽으면서 듣는 노동요에 불과했건만.
회귀한 이후에는 로또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닌 보배가 되었다.
‘그야말로 창조 경제네.’
심지어 표절을 넘어선 갈취였으나, 어쨌거나 표절은 아니었다.
미래에서 가져온 이상 오히려 역으로 그 가수가 경준을 표절한 게 되는 거였다.
이미 후루사 교수의 논문을 실시간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는 지금, 그의 양심의 삼각형은 진즉 뭉툭해진 지 오래였으니.
“그럼 가까운 시일에 일정을 조율해 봅시다. 제가 지금 비서 번호를 드릴 테니 실무 얘기는 그분에게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서도 있었나?
“본래 회장님 비서이긴 했는데, 최근엔 제 정식이기도 해서요.”
-회장님?
“아, 유 회장님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순간 신 회장이 숨 들이켜는 소리가 전화에서 잡혔다.
-이거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군. 유 회장님께서 자네 뒤를 봐주시는 이상 우리 역시 문제없게 극진히 대접해야겠어.
“하하, 이미 알고 계신 것 아니었나요?”
-손자처럼 대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 그런데 설마 자신의 전속 비서까지 내줬을 줄은 몰랐네. 이렇게 되니 자네가 회장님과 그 따님분이랑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구만.
순간 진지해진 목소리의 신 회장이었으나.
-실례인 건 안다만, 정말로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이라든가, 아니면 유주희 사장이 실은 미혼모였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하하!
거장과들의 대화가 으레 그렇듯 금세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바로 농담으로 바꾸는 그였다.
그렇게 통화는 잠시 서로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 여러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으나, 기본은 아저씨 친구들이 별 시답잖은 농담들로 시끄럽게 떠드는 톤이었으니.
이미 신 회장과도 시간은 짧지만 깊은 유대를 형성한 경준이었다.
“아 참, 저도 실례일 순 있는데 감히 사업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음? 사업 제안?
“예. 저 말고도, 잠재력 충만한 음악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저를 가르치기도 했고요.”
-오오, 정말인가?! 자네를 가르쳤다고?
그렇게 그의 인맥과 영향력은 분야 막론하고 그칠 줄 모른 채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더라.
* * *
-그럼 우리 딸을 잘 부탁하네.
“예, 그럼 나중에 술, 아니, 식사라도 같이합시다.”
뚝.
신 회장과의 생산적이고 가치 있던 훌륭한 대담을 마치고.
“통화 잘했어요. 여기요.”
그 연락망이 되어 주었던 신 회장의 딸, 신하율에게 그녀의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익숙하게 담뱃재가 있는 드럼통 쪽으로 가서 이 시대가 허락한 최고의 마약을 꺼냈다.
탁, 탁, 16년 짬밥의 능숙한 손길로 불을 붙이려다가.
이내 아직도 안 가신 뒤쪽의 인기척에 그냥 그만두었다.
“? 안 가고 뭐 해요?”
모범생만 있는 과학고에서 이런 비행 청소년이 있는 게 신기한 걸까.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과연, 원래 이런 갭이 좀 매력적인 법이지.
“그쪽도 몰래 하는 거 알아요.”
“……뭐, 뭣? 무슨 근거로!”
“이런 데를 알고 있는 사람이야 뻔하죠. 담배 피우는 교사거나, 아니면 몰래 피우는 학생이든가.”
천재들만 간다는 한국과고에서도 어두운 면은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그들이지 않은가.
게다가 집안도 좋아 빽이 있는 자식인 그들로선, 몰래 안 들키게 하는 이런 일탈 정도는 학교에서 눈감아 주는 법이었다.
다만 그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기에, 학교 폭력같이 대놓고 남에게 피해 주는 경우에는 장사 없었지만.
“윽…… 그런 거 아니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등을 홱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교실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거 알아?”
저벅.
유혹하듯,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갑자기 자기 상체를 내게로 확 앞당기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