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생활 실패 후 다시 사는 천재 카이스트생-96화 (96/134)

제96화

#96.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쉽게 달변가가 되는 법

띠링!

[왕우 교수가 당신을 증오하며 볼티모어의 차이나타운에 들릅니다.]

호텔방에서 국장에게 보내 주기로 한 추가 논문을 작성하던 와중, 갑자기 눈앞에 이런 상태 창이 떴다.

미국에 온 중국인이 차이나타운에 들르겠다는 아주 당연한 소리인데.

그게 굳이 상태 창 알림으로 내 눈앞에 왔다는 건,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어 가져왔었는데, 설마 바로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덜컹.

캐리어를 열었다.

분명 따뜻한 겨울 옷가지가 가득해야 할 캐리어에는 온갖 차가운 것들밖에 없었다.

금속, 알루미늄, 광학 마운트와 거울 그리고 렌즈.

따뜻함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싸늘한 공대생의 기운만 느껴지는 물품들만 안에 가득했다.

그나마 하나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게 있다면, 레이저 하나일까.

본래 이런 용도로 쓸 생각은 만에 하나의 염두에 불과했지만.

상태 창 뜬 걸 보아하니 어쩌면 며칠 뒤, 이르면 내일 밤에 당장 쓰게 될지도 몰랐다.

“사람 하나 반병X 만들 정도의 출력은 충분하지.”

이렇게 보니 황 교수한테 레이저 맞고 죽었던 회귀 직전이 생각난다.

물론 그처럼 교양 없이 무작정 출력만을 믿고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살인자가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좋아, 일정 변경이다.”

본래는 여기 미국 물리학회가 있는 메릴랜드주를 바로 떠나서 워싱턴 D.C.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 있는 미 국립 아카데미에 들러서 홀페린한테 인사도 하고 바로 LIGO 중력파 관측 팀에게 소개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일정을 잠시 미루고, 본래 가장 마지막에 들를 생각이었던 존슨 홉킨스 대학에 먼저 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히려 좋아. 라이고 팀에겐 조금 실례가 되겠지만, 동선상으론 이게 맞긴 했지.”

PRL 편집부가 소속된 미국 물리학회 본부가 여기 메릴랜드에 있었다.

그러니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에 존슨 홉킨스 대학에 먼저 들르는 게 동선상으론 훨씬 효율이 좋았으니까.

* * *

끼익.

호텔방 문을 나서서 바로 옆의 방으로 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문이 열렸다.

“……왔구나.”

밤을 지새운 듯한 얼굴로 유주희가 겨우 반겼다.

때마침 그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다.

사실 그녀가 내 일정에 따라와도 전혀 문제없었고 실은 그러라고 데려온 거였는데.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방에 틀어박힐 정도로 건네줬던 대한민국 물류 통합 계획서가 상상 이상으로 충격이었나 보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산더미야. 네가 직접 자금을 댄다는 게 진짜야? 그리고 손악의가 투자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어, 그분의 한국 인맥이 어떤지는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데, 너하고 그런 연줄이 있을 거라곤……. 아, 설마 아버지가 다리를 놔줬다든가? 그런 거지?”

유주희는 나를 방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도 없이 바로 현관 앞에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렇게 성급해서는 곤란하다.

내가 원하는 건 차분하게 내 계획을 있는 그대로 이행해 줄 수 있고, 또 의심 없이 그 의문과 심중도 알아서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루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유주희의 모습은 내 마음속 그녀의 평가를 한 단계 내리기엔 충분했다.

‘아니, 스마트폰도 제대로 보급 안 된 시기를 고려하면 저게 정상인가.’

아무리 유 회장의 성정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그녀라고 할지라도, 아직 서른아홉 살에 불과했다.

회귀 전 나와 비슷한 나이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여지도 있었다.

앞으로 뒷방의 유 회장 대신, 일선에선 나와 함께 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는 미래의 그녀라면 빠르게 자기 아버지를 따라잡겠지.

미래에 유용재가 수익상 반대했던 일성양자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에도 그녀의 노력과 활약이 짙었으니까.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요. 미국을 뜨기 전까지는 좀 더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걸 추천해요.”

내 생각하고 의도는 어제 비행기에서 준 서류에 대부분 담겨 있었다.

다만 친절하지 않게 진짜 핵심은 비워 두면서 단서만 남겨 놓았다.

앞으로 2주간 그녀가 그걸 알아서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내일은 함께 다닙시다. 제 신뢰를 높이는 것도 포함해서 한번 보면 재밌을 거예요.”

“……알겠어. 미국 물리학회에 가는 거지? 오늘도 거기 다녀왔던 거고?”

“아뇨, 거긴 이미 용건 끝났어요.”

“벌써?”

“논문 내는 건 사실상 확정됐고, 이제는 믿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죠.”

“오늘 비행기에서 쓰고 있던 거 말하는 거지?”

“그것도 포함해서 한 126개, 아니, 127개에서 128개쯤 되겠네요. 오늘 밤에 몇 개 더 써서 보낼 거라서.”

“아니…… 농담이지?”

아무리 학계가 아닌 재계의 그녀라도 내가 한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딱히 그걸 설득할 수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1년 만에 백 개가 넘는 논문을 투고한다는 건 말이 안 됐으므로.

어쩌면 특집 저널이 출간됐을 땐 한국물리학회와 광학회는 물론이고.

아예 대한민국 정부 자체에서 눈에 불을 켜고 관심을 가질 법한 업적이었다.

“사실이에요. 나중에 제가 언론 보호 좀 요청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 가서 직접 보시는 게 확실하겠죠.”

단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였다.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하여튼 내일은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에 며칠 존슨 홉킨스 대학에서 머무를 겁니다.”

“존슨 홉킨스 대학? 갑자기? 거긴 물리학보단 의학이 유명한 데 아니야?”

세계 최고의 공대를 뽑자면 MIT와 칼텍.

그리고 수학을 비롯한 순수학문은 하버드.

반면 의학에 있어서 최고라고 평가받는 곳이 바로 존슨 홉킨스 대학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과 똑같이 의대가 더 가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쩌면 세계 최고의 대학은 존슨 홉킨스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최고의 대학은 그냥 서울대가 아닌 서울대 의대라고 평가받는 것처럼.

“거기에서 친구가 연구하고 있거든요. 최근에 도움 받은 것도 있어서 인사차.”

“도움?”

“네, 기말고사 때 생물 과외 좀 해 줬거든요.”

“아하, 친척이 거기 다니는구나?”

“아뇨, 생판 모르던 백인이에요. 그렉 세멘지라고, 노벨생리학상 수상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시험 때 생물 과외를 해 줬었거든요. 스카이프로.”

“…….”

유주희는 전혀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노벨생리학상 수상자가 친구라고?

게다가 또 생물 과외?

그게 도통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진짜 농담 아니지?”

말은 안 됐고 거짓말 같았지만 놀랄 만하게도 사실이고 팩트였다.

그야 실제로 그랬었으니까.

미국 오기 전에 친구로서 감사와 인사차 한번 들르겠다고 한 번 더 통화하기도 했고.

“물론 단순히 감사 인사만 할 건 아니에요. 선물도 가져왔죠. 전에 캐리어 통관 부탁했던 거 있죠? 그거예요.”

레이저를 포함해서 온갖 광학 기기가 담겨 있던 특수 캐리어.

금속투성이라서 나 혼자였다면 분명 통관에 걸렸겠지만, 일성의 힘 덕분에 쉽게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게? 미국 물리학회나 국립 아카데미에서 쓰려는 건 줄로 알았는데…….”

“아마 라이고에서도 쓰게 될 거예요. APS에서도 쉽게 믿어 주지 않았다면 직접 눈앞에서 실험을 선보일 생각이기도 했었구요.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그 친구만 땡잡았죠.”

왕우 교수를 위한 참교육 대비도 할 겸, 그 김에 한번 보여 주는 것도 괜찮겠지.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연구 의사로서 바이오메디컬 분야의 대가였던 그렉 세멘지에게 있어 ‘양자측정’이란 너무나도 바라던 기술일 수밖에 없을 테니.

“한번 두 눈으로 지켜보세요.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서를 준 꼬맹이가 어떤 놈인지. 그리고 직접 판단하시면 됩니다. 따라올지, 아니면 말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몸만 큰 애송이의 건방진 도발이었다.

분명 예전의 그녀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하나, 이미 그 편린을 직접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해 버린 지금의 유주희는 달랐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고 단순히 편린이 아닌 보다 확실한 증거를 캐내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좋아. 내일부턴 기대할게.”

말없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보다, 호기로운 다짐을 목 너머 입 밖으로 내었다.

동시에 나 역시 그녀에게서 편린 하나를 엿보았다.

방금 보았던 그녀의 미소는 분명, 그녀의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나와 준다면 만족이다.

“얼마든지요.”

그 건방진 유희를 함께 즐겨 주는 것.

단지 그것만이, 내가 그녀를 데려온 의무이자 함께할 특권일 테니까.

* * *

-최근에 실적이 너무 없지 않은가. 보고 받기론 칭화대에서도 퇴출당할 위기라고 하던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시뻘건 모니터는 인터넷 통화였다.

그러나 IP는 보라카이에서 온 걸로 잡혀 있었다.

누가 봐도 IP 우회를 써서 접촉한 것.

“그, 그게 실은…… 곧 큰 거 하나를 그간 준비했던 터라……. 그, 그러니…….”

-큰 거 하나?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아무런 논문도 실적도 없이 그냥 있었다는 건가?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묵직하고도 나직했던 목소리.

새빨간 모니터 속 그분의 목소리에 왕우 교수는 순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 그건…….”

그분은 전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실은 큰 거는커녕 아무런 실적도 못 내게 생겼다는 걸.

단지 떨릴 뿐인 목소리에서 그걸 순식간에 잡아냈고, 또 파고들 줄 알았다.

공산당의 중앙위원이라는 직함이란, 본디 그런 존재였다.

‘죽을지도 몰라. 죽을지도 몰라. 죽을지도 몰라. 죽을지도 몰라. 죽을지도 몰라……!’

수많은 정적들을 암살하고 독살시키고.

때로는 자비롭게 죽이진 않고 숨 쉬듯이 나락에 보내 버린다.

동시에 똑같이 그런 위험에 처했었고, 하지만 끝끝내 살아남았던 그들이다.

그렇게 14억 중국에서 단 370명만 들 수 있다는 중앙위원에 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개같이 버려지고 양쯔의 싼샤댐에 소리 소문도 없이 드럼통행이야……!’

그중 한 명이었던 ‘그분’이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토사구팽하고, 치적을 감추기 위해 아예 존재 자체를 기록과 함께 지워 버리는 것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지금 미국에 와 있는 것도 역대급 논문을 내기 위함입니다! 그간 양자통신 연구를 정리한 특집 저널이 곧 발표되면 우리 중화민국의 위대함이 미제를 포함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공산당의 위엄은 더욱 하늘을 찌를 것이며, 저 역시 그 위업에 힘을 한껏 보태어 일본을 짓누르고 한국이 설설 기며 미국은 경악할 것입니다! 곧, 정말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중국몽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 양자기술패권의 초석을 닦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살기 위해서 쉽게 달변가가 되는 법.

왕우 교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말과 아부를 목 터지듯이 외쳤다.

이내 너무 외쳐 대서 목이 쉬어 버리기 직전.

-좋아. 기한을 좀 더 늘려 주지. 내 직접 칭화대엔 말해 놓겠네.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 실적을 내게.

시뻘건 모니터 속 목소리가 다시금 깊게 가라앉았다.

잠깐의 뜸 들인 침묵과 함께, 새빨간 모니터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로가 아닌 실제로 보이는 것으로 말일세. 안 그러면 곧 출범할 양자기술위원회의 의장 자리는 물론이고, 천인계획과 공산당에서 자네의 이름은 제명되는 걸로 알겠네.

천인계획에 이름이 오르게 되면 공산당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만큼의 연구비와 인건비를 지원받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이름과 함께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하게 됐을 때.

더 나아가 공산당에서 제명된다고 함은.

-그게 무슨 의미인진 자네라면 아주 잘 알겠지?

“……!”

결국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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