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아르바이트 (1)
오늘은 일요일, 가게는 쉬는 날이다.
날씨가 좋다.
나비는 소파에 앉아서 다 마른 빨래를 차곡차곡 접었다.
“냥냥.”
인간의 손은 아니지만, 고양이의 앞발로도 빨래 정도는 갤 수 있다.
수건은 네 번 접어서 서랍장에 쏙 들어갈 사이즈로 정리한다.
양말은 짝을 맞춰서 한 번 접어서 포개어두고, 용사님의 와이셔츠는 따로 분류해 뒀다가 다림질도 한다.
“냐냐냐~ ♪~”
나비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세탁물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은하의 빨간 스웨터를 들어 올리고는 분홍코를 벌름거렸다.
“냥? 초장이 덜 지워졌구냐.”
어제 입었던 옷인데 소매에 묻은 초장의 흔적이 역력하다.
은하는 평소엔 완벽한 식사 예절을 지키지만 어제의 생선회는 정말 맛이 없어서 울면서 먹다보니 흘렸었다.
“불쌍한 은하냥.”
하지만 좋은 일이긴 했다.
그 10개가 넘는 그릇 중에 정확하게 맛없는 그릇을 고르다니, 테라로 치자면 겹경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은하는 그냥 맛없어서 싫어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어제 흘린 걸 바로 세탁했는데냐.”
초장의 자국이 남아 있다니!
나비의 꼬리가 팡- 하고 소파를 쳤다.
“냐아, 세탁기가 별로다냐.”
일전에 대명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 이것저것 사왔지만 세탁기는 사지 않았었다.
이미 가게를 전에 운영하던 사람이 남기고 간 세탁기가 있어서였다.
용사님은 잘 돌아가는 세탁기가 있는데 또 살 필요는 없다며 사지 않았지만.
“최신 세탁기가 필요하다냐.”
가정살림을 도맡아서 하는 나비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최신의 세탁기!
현대과학이 모여서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세탁기가 필요하다.
테라에서야 세탁물에 드라이어드가 만든 비누를 잔뜩 바르고 나무 몽둥이로 때려서 빨래를 해왔지만, 여기는 지구다.
과학기술의 차원! 지구!
“냥. 용사님에게 부탁할까냥?”
나비가 꼼질꼼질하며 고양이세수를 했다.
마음을 차분하게하고 생각해 보자.
부탁하면 분명히 사주시긴 할 것 같다.
용사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시다.
필요성을 설명하면 냉큼 사주시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아일루로스의 이름이 운다.
일을 편하게, 쉽게 하기 위해서 사는 도구를 용사님에게 부탁해서 마련하다니!
자고로 제대로 된 아일루로스라면 집안에서 필요한 물건은 모두 자기가 구하는 게 미덕이고, 법도였다.
이건 사냥을 위한 도구, 무기를 용사님에게 부탁하는 격이었다.
무사로서-! 전사로서-! 가정부로서-! 아일루로스는에겐 있을 수 없는 일!
“할머니는 용사님을 위해서 드래곤도 잡았다고 하셨다냥.”
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세탁기를 구하는 것 정도는 해야지!
세탁물을 정리한 나비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아일루로스의 가방은 여러 가지 비상도구를 잔뜩 담아두고 있었는데, 상비약이나 로프.
가위나 단검, 랜턴과 물주머니, 라이터나 수건과 물수건, 손소독제와 진통제 같은 잡동사니가 대부분이었다.
당장은 필요 없지만 언젠가는 필요한 그런 물건!
그런 잡동사니 가운데 나비가 꺼낸 건 지갑이었다.
나무껍질을 망치로 쾅쾅 눌러서 부드럽게 만들어낸 아일루로스족의 전통지갑.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지갑에는 지금까지 모아온 용돈이 있었다.
용사님이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외출하라고 준 용돈!
아끼고 아끼던 돈이다.
나비는 지갑을 보고 냥 하고 울었다.
“모자르다냥.”
용사님이 용돈을 넉넉하게 주시는 건 맞지만, 결국 용돈은 용돈이다.
최신형 세탁기는 너무나 비쌌다.
진짜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 세탁기는 마석을 사용하는 녀석이었는데, 이 녀석은 뒷자리에 0이 두 개 더 붙어 있었다.
“용돈으로 이걸 사려면 10년은 모아야 한다냥.”
10년이라고 해도 모을 수는 있다.
사냥은 끈기와 뒷다리로 하는 거라고 배웠다.
10년쯤 참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10년이면 은하의 스웨터가 망가져 버린다.
아니, 삭아서 없어져 버리겠지.
그리고 그동안 몇 벌의 와이셔츠가 망가지겠는가.
악독한 김칫국물은 강적이라 몇 벌의 와이셔츠를 버려 왔는가!
“세척력이 강하고 주름을 펴주는 세탁기가 가지고 싶다냥.”
용사님이 입는 와이셔츠는 항상 나비가 칼각을 잡고 있었다만, 양말이나 다른 세탁물의 주름도 펴준다면?
용사님은 더욱 더 멋있어질 수 있었다.
“냥……. 하지만 돈이 없다냐.”
나비는 침착하게 배털을 핥았다.
차분하게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우냥……. 우냥…….”
배부터 시작한 그루밍이 다리로 가고, 이윽고 꼬리로 향했다.
그렇게 전신의 그루밍을 끝낼 때쯤.
나비가 생각을 정리했다.
“알바를 해야겠구냥.”
돈이 없다면 돈을 벌면 된다.
단순한 일이다.
나비는 빠르게 빨래를 정리하고 은하와 같이 고른 노란색 후드티를 입었다.
도도도 하고 문을 걸어 잠근 나비가 달렸다.
* * *
휴양지도 아닌데, 알로하셔츠를 입고 갈지자로 걷는 남자.
백강혁은 오랜만에 홈그라운드인 A섹터로 돌아와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실수를 했다.
‘칫, 선물을 안 샀어.’
비록 싸장님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예의를 차려야지.
먼저 한국으로 튀어버린 유승우와 괭이, 꼬맹이, 슬라임에게 줄 선물 정도는 챙겨줘야 스마트하고 멋진 사람이다.
싸장이 버려도, 나는 인의예지를 지킨다.
강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말이다.
지현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보 아니에요? 버리긴 누가 버려요. 사장님은 ISAC 직원도 아닌데 있을 이유가 없죠.”
“아니, 그래도 정이라는 게 있지 않아?”
“없어요. 누가 오더 같은 사람한테 정이 붙겠어요.”
“말이 너무 심하네. 그리고 바보라니, 바보는 너무하잖아.”
지현이 풋 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전 이미 선물은 다 샀는걸요.”
지현은 이미 중국에서 선물을 사서 준비해 뒀다.
대머리, 아, 아니, 이정훈의 몫부터 페로나 다른 직원의 몫까지 다 사둔 모양이다.
그렇게 선물을 살 거면 미리 언질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너 인마, 내 부관이잖아. 나부터 챙기라고!”
“휴가 중에는 부관 아니거든요? 별꼴이야, 정말.”
“매정하기는…….”
“이직 신청 안 한 것만으로도 정은 넘친다고 봐요. 아, 진짜 민 씨 담당으로 가고 싶었는데.”
이정훈이 직접 인사 명령을 내렸었다.
네가 아니라면 저 또라이를 감당할 부관은 없으니, 말뚝 박으라고.
지현이 눈썹을 꿈틀했다.
“대머리, 두고 보자.”
“두고 보고 자시고, 나한테 좀 잘해 달라고.”
“사직서 마려우니까 조용히 하고 다른 데로 가요. 어떻게 휴일 쇼핑까지 따라와요?”
“따라온 게 아냐. 여기서 쇼핑할 곳이라고는 대명 백화점뿐이잖아.”
그것은 틀리면서도 맞는 말이었다.
A섹터는 비록 대재앙 시절에 완파되어 지금은 재건 중이라고 해도, 과거 서울이었던 가락이 남아 있었다.
쇼핑할 곳도 많고 대형 쇼핑몰도 많은 편이다.
모로 가도 서울!
서울의 위상이 사라질 일은 없다.
그런데도 맞는 말인 것은 ISAC에게 대명 백화점은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총장의 안 사람이 대명의 회장인 만큼, 내부 지원 차원에서 ISAC 직원 할인이 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퍼스트 오더가 돼서 수억씩 받는 사람이 할인가를 신경 써요?”
“나 거지야. 이번에 받은 보상금으로 황금상을 하나 더 만들어서리 아껴야 돼.”
“이 미친 인간아! 돈이 썩어?!”
지현이 바로 강혁의 등짝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펴졌는데, 과연 헌터라서 그런지 등짝 스매싱의 위력이 대단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그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맞은 당사자인 강혁은 등짝에서 폭탄이 터지는 줄 알았다.
“커흑. 나, 나 죽어!”
“뭘 아프다고 엄살이에요!”
“야, 나 원거리 딜러야. 방어력 약해.”
“쯧.”
“기집애, 손 한번 매콤하네. 레벨 올랐냐?”
“중국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2개 오르긴 했네요.”
“마력이 죄다 근력으로 갔나, 드럽게 아프네. 어우, 담즙 올라왔어.”
고거 맞았다고 엄살은.
진짜 한심한 인간이야.
지현은 그리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곧, 그녀의 표정이 풀렸다.
“오더, 저기 봐요.”
“왜……. 풉.”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행사 중인지, 벌룬도 있고 진행자도 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은 진행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냐아~ 헥헥. 냐아~”
야광봉을 들고 춤을 추는 고양이의 존재감이 너무 강했다.
꼬리에도 야광봉을 들고, 양발에 하나씩.
두 발로 서서 춤을 춘다.
진행자는 아무도 자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짜증이 났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스마트폰을 팔려고 저러나 본데, 반반의 성공이다.
사람들을 모으는 건 성공.
자신의 말에 주목시키는 건 실패.
진행자가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야 그렇지, 저걸 이기려면 옷 정도는 벗어야지.
그러면 바로 외설물 진열죄로 체포할거지만.
강혁은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거 사장님네 고양이잖아.”
“나비가 알바 중인가 봐요.”
“아니, 왜? 저 집이 그렇게 궁했나?”
“그거야 모르죠. 숨은 고충이 있을지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 사람 졸라 부자야.”
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자라는 짐작은 있었다.
억대의 수익을 턱턱 기부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확신까지?
강혁이 단언했다.
“그 사람 집 주변에 땅을 사두려고 했거든.”
“왜요?”
“졸라짱짱 쎈 귀환용사가 지켜주는 땅이니까 땅값 오를까 싶어서.”
“이 속물이…….”
“아무튼 그래서 사려고 했는데, 그 일대의 땅이 다 저 양반 땅이더라고. 오자마자 가게 사면서 싹 사버렸더라.”
“그래서요?”
“그래서는 뭔 그래서요야. 저 근처 땅값이 두 배나 뛰었다고! 대머리꼰대가 진짜 당황해서 쩔쩔매더라니까.”
쩔쩔맬 법도 했다.
부동산값이 갑자기 그렇게 오르고, 그게 다 한 사람이 구입한 거라면 뭔가 특혜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니까.
“기획재정위원회랑 국토교통위원회에서 감사까지 나온 건 알아?”
“알아요. 내가 그 대머리 부관도 겸임하는데 모르겠어요? 와, 그때 긴급 감사가 그래서 나온 거구나. 나만 몰랐네.”
“어쨌든 괭이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알바 중이잖아. 방해 말고 우리는 가자.”
“그래도 좀 걱정되네요.”
지현은 걱정을 담아 나비를 봤다.
열심히 일을 하는 건 좋지만 시장 반응이 너무 격하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 판매를 유도하는 건데 시선을 끌었지만 그게 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저러다가 돈 안 주면 어쩌죠?”
“어쩌긴, 아주 등신짓 하는 거지.”
저 판매자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 터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 떨어지면서 빡친 사장님이 직접 오시거나.”
강혁이 긁적 하고 턱을 긁었다.
“저 괭이가 빡치거나. 둘 중 하나겠지.”
* * *
사람은 모였다.
그러나 그것이 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태는 그 문제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모아놓고 못 팔았다는 게 뭔 뜻인가.
판매자로서 말빨이, 기량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닌가.
아버지는 쥐 잡듯이 기태를 잡았고, 기태는 한껏 뿔이 났다.
그것도 모르고 고양이가 말했다.
“알바비 주세요냐.”
“주겠냐!”
“냐, 냥?”
“폰을 한 개도 못 팔았는데 알바비를 주겠냐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냥?!”
나비가 깜짝 놀라서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연달아서 기태가 폭언을 쏟아부었다.
생전 처음 듣는 욕설이었다.
나비는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는 한 마디도 못 했다.
인간의 악의를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비의 왕방울만 한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에 기태가 거만한 웃음을 지었으나.
“컥-!”
바로 웃음기를 지워야 했다.
나비가 화를 내며 앞발을 휘둘렀다.
“어?”
잠시 후 기태는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음을 알았다.
거인족도 한 방에 날려 버린다는 전설의 일격, 냥냥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