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한유성의 야망 (2)
지현은 승우에게 블랙 카드를 받았다.
그녀에게 한국 최고의 대기업이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와 혜택, 그리고 무제한의 한도를 가진 블랙 카드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티팩트 같은 것이었다.
감동하고 감탄하며 지하 경매장에 참가했다.
그녀가 거기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할 일이 매우 많은지 유성이 깨어나자마자 다시 시청에 던져두고는 바쁘게 할 일을 하러 갔다.
그 말인즉슨, 그녀는 한동안 없다는 소리다.
자율 운동을 하던 유성이 슬그머니 눈알을 굴렸다.
“흐으음. 오늘은 이만하면 됐겠지.”
유성이 땀을 닦으며 주저앉았다.
10분이나 운동했더니 힘들어 죽겠다.
바벨이나 덤벨, 기구를 써서 몸을 단련하니까 당연히 힘든 일이지만 특히나 오늘은 더 힘들다.
먹은 게 부실해서 그렇다.
“점심이랍시고 그런 거나 먹이고 말이오. 학대요, 학대.”
유성은 아까 먹은 의문의 고기 요리를 떠올리고는 이를 갈았다.
밥 먹다가 기절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보통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기절했다?
다음에는 법원에서 인사하게 되겠지.
하지만 용사의 식당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는 광경이다.
이제는 특이한 일도 아니라 대수롭지도 않다.
그냥 평범하게 챌린지에 실패한 탈락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유성은 아무런 관심도 못 받고 다시 훈련실로 끌려왔다.
그러고 나서 쇠질을 했더니 너무 피곤하다.
감시원도 없겠다 오늘은 쉬어야지.
“이만 할래.”
이런 모자란 후손 놈.
벌크 업해서 구렁이에서 아나콘다로 진화 중인 홍룡이 못 볼 걸 본다는 눈으로 유성을 봤다.
유성은 유성대로 점차 흉악해지고 있는 홍룡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후손을 버리고 근육을 챙기니 좋소?”
좋다는 것 같았다.
홍룡은 이내 츄릅 하고 혀를 날름거리더니 다시 쇠질을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바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풍경은 미스터리했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알아서 자기가 운동하겠다는데!
유성은 배를 매만졌다.
“망할. 아, 배고프다.”
유성은 지현이 두고 간 칼로리 바를 뜯었다.
시꺼먼 칼로리 바.
초콜릿 맛일까?
한 입을 거칠게 씹었다.
“아, 속았다. 맛없어.”
초콜릿 맛은 1g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검은색일까?
포장지를 보니 크라켄 먹물이 사용됐다고 한다.
크라켄이면 그 거대 오징어 몬스터?
“몬스터의 먹물을 오징어 먹물처럼 쓴 건가……. 오징어 괴물이니까 오징어와 비슷한 맛이 나겠지……. 하지만 말이지.”
오징어가 있는데 왜 오징어 괴물 먹물을 쓰냐.
투덜거리면서 한 입 더 먹었다.
퍽퍽하고 애매한 이 맛.
“건두부 같네.”
중국에 여행 갔을 때 먹어본 말린 두부와 비슷한 맛이다.
고소한 맛과 단맛을 완전히 제거하면 이런 드러운 맛만 남겠지.
최악이란 의미다만 그래도 배는 부르다.
하나만 먹었는데 배가 빵빵하게 찼다.
그것뿐인가, 어째선지 조금 피로가 풀렸다.
의아한 마음에 칼로리 바의 포장을 보고 있으니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시청 직원인 박주연이다.
오다가다 안면은 있지만 대화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살짝 토끼 같은 인상을 가진 여자, 박주연이 생글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거 드시네요.”
이 여자가 눈이 삐었나.
유성이 살짝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좋은 거? 이거 말이오?”
“이번에 DnC 푸드에서 새로 나온 신작 칼로리 바죠?”
“그런 거 같소이다.”
“크라켄의 살코기에 마석 가루를 첨가해서 만든 건데 근육 회복과 피로 회복을 도와주는 효과가 있어요. DnC 푸드에서 아주 유명한 요리 전문가를 섭외해서 만든 거라 효과가 정말 좋다더라고요.”
확실히 효과는 있는 것 같다.
지쳐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좀 버틸 만하다.
무엇보다 배고파서 괴로웠는데 지금은 배가 부르다.
한 개의 칼로리 바를 먹은 거치고 정말 포만감이 끝내줬다.
“500개도 생산 안 한 시험 제품이지만 효과가 너무 좋아서 이쪽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물건이에요.”
이쪽 사람들?
이쪽 사람이 누군데?
“이걸 대체 누가 사서 먹는단 말이오. 맛이 고약하구만. 사서 고생들이군.”
“맛이 뭔 상관이죠?”
“맛없는 걸 누가 먹소!?”
“식사는 연료죠. 누가 맛으로 먹나요?”
“…….”
“고단백이고 피로 회복과 근육 회복. 그리고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드는 칼로리 바. 정말 꿈같은 물건이에요. 세상 참 좋아졌다니까요.”
유성은 한 발 물러서서 차분하게 그녀를 봤다.
토끼같이 동글동글한 눈과 작은 체구에 속았다.
자세히 보니 상당히 근육질이다.
우락부락하지는 않고 꽉꽉 압축된 느낌?
그런 몸에 식사는 연료라고 단언하는 저 언동.
“헬창이군.”
헬스 + 시궁창 인생.
헬스에 인생을 던진 사람들.
박주연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생긋 하고 한 번 더 웃었다.
“손님, 맞을래요?”
“…….”
“잘생겨서 좋게 좋게 가려고 했더니, 초면에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진짜 맞을래요?”
입이 방정이지.
유성은 스스로의 입을 가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방긋 웃었다.
“좋아요. 그럼 지현 씨가 부탁하고 갔으니 오늘 훈련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기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는 바벨은 못 쓸 거 같으니, 유연성 운동이나 해볼까요.”
유성은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장딴지에 깃든 코브라 같은 힘줄을 보니 입이 다물어졌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요즘은 재수가 없어.
유성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박주연에게 훈련을 받으면서 알게 됐다.
자율학습이 만 배는 편했다.
“나, 나 죽소…….”
제대로 된 프로 인스트럭터가 붙어서 훈련하니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빈말이 아니라 이대로 간다면 근육맨이 되거나 죽는다.
유성은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도, 도망쳐야 해! 이 생활 패턴으로부터! 이 굴레로부터!’
어떻게 도망치지?
고민해 봤지만 답은 하나였다.
* * *
한유성의 꿈은 소름이 돋도록 현실적이라서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작은 집, 그러니까 타지마할 정도 규모의 집을 짓고 지하에는 핵폭발도 견디는 방공호를 만든다.
그리고 긴 은발에 단아한 각선미와 풍만한 미드를 가진 미스코리아 같은 아내와 아이는 야구구단을 만들 수 있을 정도면 충분.
차는 독일제의 수수한 명차를 타고 퍼스트 오더를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해서 완벽한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집구석에 수수하게 와인 셀러 20개와 바를 설치해서 풍류를 즐기고 뒤쪽에는 헬기포트를 지어서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으며, 앞쪽에는 수영장 5개를, 왼쪽에는 골프장을 지어서 운동을 즐기면 좋겠고 오른쪽에는 산책 삼아서 살짝 드라이빙을 할 수 있는 레이싱 서킷만 있으면 됐다.
이 어찌 수수하고 소박한 소원인지!
더 이상 바라자면 바랄 수도 있지만 여기에 딱 멈추는 게 과연 겸손한 조선제이무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유승우가 차갑게 대꾸했다.
“소박함이 벼락 맞아 죽었냐.”
“너무하오. 이 정도면 충분히 현실적이지 않소?”
“두 발로 걷는 고양이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래보다도 판타지 같은데.”
“귀, 귀환자 주제에 그런 말을!?”
“솔직히 귀환자보다 네가 말한 소원이 더 판타지야. 안 그래요?”
승우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주변을 봤다.
한유성의 개소리를 같이 들은 손님들이 동감한다는 듯한 눈으로 승우를 보다가 째릿 하고 한유성을 봤다.
한 회사원이 ‘태어나서 들어본 개소리 중 최고군’이라 중얼거렸다
그걸 뒤로하고 한유성이 다시 말했다.
“어쨌든 그런 소박한 조선제이무당이 부탁하오. 이 난관을 이겨낼 힘을 주시게.”
“나보고 뭘 어쩌라고?”
지금 유성의 상황은 자업자득이다.
평소에 법의 구멍을 노리고 탈세(본인 말로는 효과적인 절세)를 한 결과 약점을 잡히고 지현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용당하는 중이 아니던가.
그리고 애초에 지현이 하는 일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유성 개인에게도 좋은 일이다.
몸을 단련하고 칼로리 바를 먹여서 이능력을 강화한다.
단련하는 방식도 합리적이었고, 칼로리 바도 좋은 물건이다.
아무렴 좋은 물건일 수밖에.
그 칼로리 바는 대명의 산하그룹인 DnC 푸드와 유승우가 협업해서 만든 보급형 괴식이다.
맛이 적당히 없는 대신에 효과도 적다만, 그건 승우의 관점으로 효과가 적은 거지 일반적인 자양강장제나 피로회복제, 근육보충제보다는 효과가 확실히 좋다.
“그걸 만든 게 당신이었소?!”
“내가 아니면 그런 걸 누가 만들겠어.”
백소향과 태지가 가져온 기획서를 토대로 승우가 만든 물건이다.
그 계획은 참으로 치밀해서 승우에게 부탁하는 과정까지도 철저하게 준비됐다.
괴식을 먹어야만 협조할 거라고 직감했는지 백소향과 태지는 한 달간 몸을 만들어왔었다.
듣자하니 세계의 괴식이란 괴식은 다 준비해서 먹어봤다던가?
그 정성에 감동해서 칼로리 바의 레시피를 만들어줬다.
“맛을 더럽게 만들면서 그에 비례해서 효과도 좋은 새로운 신제품이 나올 거야.”
1단계, 2단계, 3단계 식으로 단계를 올려가면서 맛은 더 없어지고 효과는 더 좋아지는 칼로리 바!
승우는 이미 5단계까지 칼로리 바의 구성을 준비했다.
“그걸 대체 누가 먹소?”
“나도 잘 모르겠지만 헬스에 인생을 건 사람들은 먹는다더라.”
확실히 헬창들이라면 먹겠지.
1단계가 일반인용이고 그 다음부터는 각성자 전용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라면 다음 단계를 먹기 위해서 각성이라도 할 수 있을 터.
“아무튼 그런 걸 먹으면서 훈련하게 해준다니, 다른 사람들은 돈을 내면서도 하는 일이라고? 네 몸을 단련하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단련하기 싫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오!?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싫은 거요! 내 미래 계획에 육신의 단련 따위는 들어 있지 않소이다.”
“하긴 자기가 싫으면 싫은 거지. 그래서 다시 묻지만 나보고 어쩌라고?”
“이 모든 상황을 타파할 요리를 주시오!”
“뻔뻔한 놈…….”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뻔뻔할 줄이야!
“백강혁과 좋은 승부가 되겠군.”
“아무래도 좋소.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소이까!”
“너 말이야. 내가 주머니에서 뭐든지 해결해 주는 마법의 도구를 꺼내는 동그란 미래로봇인 줄 아는 거냐?”
“거 비유를 해도 꼭 왜놈들 이야기를 해야겠소? 하지만 의미는 통하는군. 그렇소. 본인은 귀하를 그렇게 보고 있소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냐. 너란 놈은 진짜…….”
“그래서 할 수 있소, 없소?”
지금 문제는 한유성의 레벨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게이트에 들어가서 싸워서 레벨을 올리면 되는데 저 녀석은 싸울 줄을 모른다.
그러니까 훈련실에서 아주 느리게 훈련을 하고 있었던 거다.
역으로 말해서 레벨만 오르면 되는 일이기에 승우가 만든 요리를 차근차근 먹거나, 벽을 한 번만 넘어주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음식을 쓰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할 수 있지.”
골드 드래곤의 고기로 만든 요리는 번개 속성에 대한 소질이 없어서 못 먹었을 뿐, 한유성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어둠 속성이나 냉기에 대해서는 좋은 소질을 가지고 있다.
소질에 맞춰서 요리를 해주고, 그걸 먹고 레벨 업을 한다면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말이지. 내가 왜 널 위한 요리를 해야 하는데?”
“끄, 끄음. 미운 자식 떡 하나라도 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소이까.”
“아, 그거.”
그런 말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미운 자식에게 왜 뭔가를 줘야 하는가?
대체 마음에 안 드는 놈에게 왜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해줘야 하는가.
교육자로서 좋게 해석하자면, 미워하는 자식이라 회초리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들면 그것은 상처가 되어 맞는 쪽도 때린 쪽도 마음에 응어리가 생긴다.
그러니 회초리만 들지 말고 미운 자식일지라도 하나라도 더 잘해주고 칭찬해 주다 보면 사랑의 마음이 피어오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승우는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교육자로서의 승우의 이야기.
인간 승우는 다르다.
“네가 내 자식이냐? 내가 왜 너에게 그런 거까지 신경 써줘?”
“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안 되오?”
“흐음. 내가 너를 위해서 왜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한유성에 소질에 맞춰서 재료를 선별하고, 그의 체질과 수준에 맞춰서 요리법을 선정한다.
그렇게 해서 정성을 다해서 만든 레시피를 토대로 요리를 만들어서 줘?
이건 보통의 정성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미운 자식에게는 할 수 없는 일!
유성이 낙담하며 어깨를 떨궜다.
그러자 승우가 씩 웃었다.
“하지만 그냥 방치하기도 애매하고 귀찮으니까. 해결은 해줄게.”
“오? 요리를 해주는 게요?”
“아니. 이렇게 할 거야.”
승우가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앗! 저기에 외계인이!”
“외계인!”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승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유성은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슬쩍 아래를 보니 게이트가 있었다.
“잘 가.”
승우가 손짓했고 유성은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