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회식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었다.
오늘은 폭우가 내렸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엉망이 된 흙바닥.
이런 날은 쉬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민이 동료를 돌아보며 물었다.
“앞으로 몇 개 더 설치해야 하지?”
“이제 3개 남았습니다.”
“3개, 3개라…….”
누군가의 대답을 들으며 민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이 지금 취급하고 있는 도구는 하이퍼 재머라는 물건이다.
설치하면 방해 전파를 발산해서 공간 이동을 어렵게 만든다.
무게는 개당 400㎏, 최첨단의 기계로 가득 찬 주제에 살벌하게 무거웠다.
그런데도 내구성은 형편없어서 대강 취급하면 고장이 나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설치 위치는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특급 기밀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하청을 줄 수 없으니 퍼스트 오더인 민의 참관 아래 직접 매설하고 있었다.
즉, 비를 맞으며 하루 종일 일했다는 의미다.
“죽겠군.”
“죽겠네요. 이런 단순 노가다를 얼마 만에 해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다른 쪽은 어떨까?”
“어디 보자, 블랙 호크 팀은 생각보다 설치가 지연되고 있네요.”
“그럴 법도 하지.”
블랙 호크, 윤은형의 팀은 능하와 윤은형뿐이다. 능하는 평범한 각성자와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마나코어를 체내에 이식하여 각성했기 때문에 지능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한없이 일반인에 가까웠다.
“윤은형이 고생이겠어.”
“대신 거기는 처음부터 재머를 다섯 개만 가져갔으니까요. 형평성은 맞을 겁니다. 우리보다 먼저 끝날 것 같군요.”
“빡 새끼 쪽은 어때?”
“이미 끝냈다는데요?”
“…끝났다고?”
하이퍼 재머는 백강혁의 팀이 제일 많이 가져갔다. 왜냐하면 자기가 순위는 제일 낮지만 이 중에서 제일 유능하고, 힘이 세니까 누구보다 일을 잘할 수 있다는 억지 주장을 펼쳐서다. 그런데 이미 끝냈다니 이상한 일이다.
민이 가죽장갑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군. 뭔 일이지?”
“짚이는 부분은 있습니다. 제 친구가 그러는데, 현장에 못 보던 잘생긴 금발머리 외국인이 있었다는데, 하청 준 거 아닐까요?”
“금발머리 외국인?”
“힘이 엄청 강해서 이 망할 재머를 몇 개나 번쩍번쩍 들고 다녔답니다.”
누굴까. 금발머리 외국인이라는 인상착의와 강한 근력 강화 능력으로는 한 번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민이 혀를 찼다.
“기밀 유출을 걱정해서 우리가 이러는 건데 하청을 주다니, 뭔 생각인 건지.”
“지부장님에게 허락은 받았답니다.”
“그렇군. 그럼 알아서 할 일이지. 아무튼 우리도 거의 끝나가니 힘내자.”
“예. 그런데 오더, 이 작업이 끝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식당에 가볼 생각이었는데.”
“우리 슬슬 회식해야 할 때 되지 않았습니까. 회식 어떻슴까?”
“회식이라니, 나쁘지 않네.”
“기왕이면 유 사장님네 밥집 어때요?”
“흐음, 지금은 슬슬 문 닫을 준비할 시간이다만.”
용사의 밥집은 저녁 6시가 되면 마지막 손님을 받고 문을 슬금슬금 닫는다.
그런데 만약 그날따라 승우의 기분이 좋다면?
“사장님 기분이 좋으면 가끔 추가 영업도 하잖습니까.”
“그럴 때도 있지.”
“그럴 때는 환상의 숨겨진 메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 아아아.”
그럴 때가 있지. 맞는 말이다.
가끔 얻어먹어서 잘 알고 있다.
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으실 때는 술도 팔고 그래.”
“술도 팝니까? 거기서?!”
“커피도 주고 담배도 피게 해준다고.”
“와-! 대박이네요.”
“그래, 내친김에 연락을 한번 해봐야겠다.”
민은 조심스럽게 폰을 들었고, 잠시 후에는 손으로 OK의 사인을 보냈다.
팀원들이 양팔을 들어올렸다.
* * *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 됐다.
한달음에 밥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불이 켜진 밥집 안에서 이상한 것이 보였다.
안에는 백강혁과 황지현이 있었는데, 둘이 스파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지하여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팀원 중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 저게 사무직이라고요?”
민도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황지현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양팔과 다리에 전자막을 만들어 내는 프로텍트를 끼고 있었는데, 이 에너지 프로텍트라는 물건은 일종의 방탄복이었다.
단 한 번. 딱 한 번의 공격을 전자막으로 막아주는 대신 동작을 정지하는 결함 도구.
하지만 그 한 번이 한 목숨을 살린다. 지속적으로 쓰기에는 결함 도구지만 사무직에게는 그 한 번이 소중하기에 비전투직은 저것을 의무적으로 착용한다.
그런데 그 방어도구로 황지현이 공격을 하고 있었다.
“끄으응-!”
백강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황지현의 돌려차기를 흘렸다. 그 궤적을 타고 얼음과 전기가 춤을 춘다. 그녀의 동작은 낭비가 적어서 다리를 거두는 것과 백강혁이 자세를 추스르는 동작이 거의 일치했다. 이번엔 백강혁이 재빨리 반격을 했다. 허리를 비틀면서 팔을 휘두르는 모양새가 놈답지 않게 매우 민첩하고 우아했다. 분명히 유승우에게 배운 검술이겠지.
그 공격은 지나치게 예리해서 황지현은 막을 수조차 없었다.
빈 옆구리를 공격하는 검- 하지만, 이때 전자막이 펼쳐진다. 파지직 하고 전기막이 백강혁의 검을 막아 세운다.
구경꾼들이 탄성을 내뱉는 것도 잠시. 백강혁이 민첩하게 물러섰다.
놈이 투덜거렸다.
“벌써 다섯 번째야. 뭐야, 그거-!”
“말했잖아요. 전자막을 제 전기로 재충전하는 거죠.”
“그게 돼?”
“전압을 조절해서, 바이패스를 연결해 즉시 주입하면 되더라고요.”
“뭐, 그런 개사기 기술이 다 있냐…….”
“마음만 먹으면 뚫을 수 있으면서 엄살 부리지 마요.”
“그야 번개 찌르기라도 먹이면 뚫을 수야 있지만 그럼 더 이상 대련이 아니잖아. 부관아, 이런데도 진짜로 코트 안 입는다고?”
얼마 전까지의 백강혁을 아득히 상회하는 실력이다. 이만하면 코트를 입어야만 하는 실력이었다.
“못해도 랭킹 90위는 되겠는데.”
“하지만 하기 싫은걸요. 아, 재밌었다. 스파링은 여기까지. 제가 졌어요.”
지현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후,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에 시달린 백강혁이다.
한 번쯤 위계질서를 잡을 필요가 있어서 해본 건데 입맛이 나쁘다.
“제기랄. 명예 회복을 위해서 붙은 건데 전혀 회복 못 했잖아.”
툴툴거리면서 놈이 의자로 돌아간다. 황지현은 기지개를 펴면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티거가 뛰어와서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갔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다냐~ 수건이다냐.”
민과 민의 팀은 나비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몸을 닦았다.
그게 고마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영식이가 스물스물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라뿌?”
“뭐? 나?”
“가만히 있어뿌-!”
“윽.”
영식이가 꾸물꾸물 민의 다리에 붙어서는 천천히 타고 올라왔다.
그러자 이게 어쩐 일인지 녀석이 닿은 부분부터 옷이 빠짝 마르기 시작했다.
민은 금방 영식이가 물기를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것도 할 줄 알다니…….”
“건조 기능이다뿌. 주름도 펴줄까뿌?”
“…….”
별 걸 다 할 줄 아는 슬라임이다.
민이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으니 동료가 ‘너 완전 탐난다.’ ‘우리 집 애 할래?’ ‘집집마다 영식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뿌뿌. 더 칭찬해라뿌.”
“너 빨래도 할 수 있니?”
“물론이다뿌. 청소도 잘한다뿌.”
“얘, 진짜 탐난다…….”
으쓱으쓱 덩실덩실 춤을 추는 영식이와 그걸 보며 사진을 찍는 동료들.
민은 고개를 흔들며 의자에 앉았다.
“수고했어. 배고프지?”
“아, 감사합니다.”
승우가 물을 한 잔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다.
민은 물잔을 받고서 사람들을 한 번씩 살펴봤다.
내가 더 세다, 봐준 거라며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상관의 위엄을 깎아먹는 백강혁. 네네, 그러시겠지요, 그러시겠지요, 라고 말을 흘려 넘기며 티거의 앞발을 가지고 노는 황지현.
영식이를 주물주물 만지며 노는 동료들과 문단속을 하고 고양이 체조를 하는 나비.
처음 보는 다리를 저는 중년과 벽에 찰싹 붙어서 덜덜 떨고 있는 금발의 미청년.
구석에서 조용히 둘만의 젠가를 하고 있는 능하와 윤은형까지.
“오늘은 사람이 많으니까 좋네.”
“그렇군요. 이만큼 모인 것도 오랜만입니다.”
“회식이 하고 싶다며? 한가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봤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폐라니, 그런 말 하지 말고 먹고 마시라고.”
“먹고 마시라니…….”
그렇게 말하는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을 먹고 마시라는 걸까?
승우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서 시선을 모았다.
“그럼, 모두들.”
그가 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즐겁게 먹고 마셔봅시다.”
그 순간이었다.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음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빵- 하고 폭죽이 터지며 와인이 생기고, 칠면조 구이가 생기더니만 커다란 맥주통과 따끈따끈한 이름 모를 빵이 생긴다. 빵은 스스로 구르더니만 차례차례 다른 종류의 빵으로 모습을 바꿨다.
칠면조 구이는 한 번 더 폭죽이 터지자 두 배로 늘어났고, 한 번의 폭죽이 더 터지자 이번에는 통돼지구이로 모습을 바꿨다. 팡- 팡- 팡- 터질 때마다 고기는 수를 늘리고 종류를 바꾼다.
지현의 옆 테이블에는 초콜릿 분수가 생겼고, 그 옆에 놓인 기다란 접시에는 차례차례 해산물이 펼쳐졌다. 그 다음으로는 천장에서부터 빛을 뿌리며 거대한 케이크가 내려왔다. 그런 케이크의 곁에는 천사가 있었는데 천사들이 나팔을 불자 빰- 빰빰-! 하는 소리와 함께 디저트가 모습을 보였다.
“와-!”
마법 같은 광경에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 * *
갑작스럽게 나타난 맛있는 음식과 음료에 모두가 기분이 좋아졌다. 백강혁과 황지현은 이제는 술내기로 넘어가서 둘이서 맥주통을 하나씩 끼고는 누가 먼저 마시는지 내기를 하고 있었다.
민은 평소에 불만을 쌓아뒀던 동료들의 불평을 들으며 음식을 음미했다.
“그러니까 너는 너무 오더를 우습게 안다고오오-”
“우습게 안 보여야 우습게 안 보죠.”
“민 씨는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차가워요, 차가워. 어쩜 5분도 안 기다리고 냉큼 집에 가버려요?”
“제 전임자가 미친 버섯 또라이들인 건 알아요. 안다고. 그 버섯 또라이들이 지금은 다 퍼스트 오더잖아? 우리가 어떻게 걔네만큼 해요. 그럴 수 있으면 우리도 퍼스트 오더 하지.”
“맞아. 사람 부리는 게 너무 험해요!”
“여기가 소꿉놀이하는 곳인 줄 알아? 험하다고 불평할거면 때려치지 그래!”
“그렇게 말할 거까지는 없자나!”
식당이 왁자그르르하다. 여기저기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먹고 마시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영식이와 티거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맛있는 것만 골라서 입에 쏙쏙 넣었다.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는 넥타르 연못에서 떠온 미드주를 마시며 서로의 불만을 내뱉었다.
주로 아내에 대한 일이었고, 사랑에 대한 일이었으며, 나중에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과 아버지에 대한 불만.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이 주를 이뤘다.
“그러니까아아- 저 미친놈이 보기보다는 착하다 이 말이야.”
“착하다고? 저 빡대가리가? 척 봐도 멍청하잖아.”
“멍청해도-! 사람이 뭐 지능이 중요한가! 가슴, 가슴이 중요하지!”
“가슴? 가슴가슴 하다가 내 아내의 가슴을 탐한 놈이 그러니까 아주 기분이 개같구만!”
“그러니까 형이 인기가 없는 거라고오오! 난 어머니 재혼에 찬성이야!”
“이 새끼가 뇌가 알콜에 절여졌나. 너 미쳤어?!”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넥타르의 미드는 취한다. 취한 사람이 말싸움을 했으면 멱살을 잡는 게 당연지사. 둘이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승우의 신문지가 날아왔을 텐데, 오늘은 예외였다.
왜냐, 회식이니까.
회식 자리에서 힘으로 찍어 내리는 것은 풍류가 없는 짓이었다.
승우는 이 난장판을 보면서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다.
“다들 수고가 많았어.”
이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잘 알았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특별히 서비스해 준다.
“오늘은 실컷 놀고, 쉬라고.”
오늘은 어떠한 강력한 게이트라고 해도 A섹터를 뚫을 수 없을 것이다.
승우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게이트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