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빗방울이 모여 강을 이룬다 (3)
유승우란 사람의 특징이 하나 있다. 거짓말을 진짜 못 한다. 살면서 거짓말을 해 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승우란 사람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하자고 마음먹은 일은 못 하는 게 없다. 천부적인 능력, 재능이라고 불리는 녀석이다.
거짓말을 못 한다.
뭐든지 잘한다.
무엇이든 꿰뚫는 창과 그 어떠한 것도 막아 내는 방패.
모순(矛盾)이다.
거짓말을 못 한다는 것과 뭐든지 잘하는 것이 서로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민에게는 미안하게도, 거짓말을 해 버렸네.”
하려고 하면 거짓말도 잘한다. 원한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탐지 능력자의 이목을 속이고, 태연하게 넘어갈 정도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승우는 민을 속였다.
시간이 1초가량 거꾸로 흐른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시간의 법칙은 그 무엇보다도 위에 서는 강력한 법칙이다.
신조차도 시간의 흐름에는 저항할 수 없다. 불로불사가 기본인 신이지만, 마모와 쇠약은 피할 수 없다. 오래 살면 누구나 지치고, 약해진다.
나는 평생 즐겁고 활기차게 살 거라고 외치는 사람일수록 빨리 지친다. 쾌락과 행복은 가장 쉽게 질리기 때문에 마모를 앞당기는 감정이다.
그런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민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지구의 시간은 차원 법에 귀속된 정규 시간이다.
지구의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는 말은 차원 법에 귀속된 모든 차원의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는 의미다.
즉, 존재하는 모든 차원의 시간이 1초 되감겨졌다.
“내 허락도 안 받고 말이야.”
역천, 회귀, 시간을 거꾸로 감을 때는 모든 신의 동의가 필요하다.
시간을 거꾸로 감는 행위는 엄연한 공격 행위다. 공격 마법을 후려갈기는 것과 동격이다.
저렴한 비유지만 이것은 유선상으로 본인 확인 절차와 법률적인 동의를 구하는 계약의 일종이다.
이래저래 해서 시간을 감는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동의하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동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없이 시간을 감았다.
승우의 말을 듣고 찾아온 크라이도 상태창을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1초가량이 되감겼군.”
“너도 동의는 안 했지?”
“그래. 시간이 되감긴 것도 네가 말해서 알았다.”
10초면 상태창에 적히는 감각 기록량이 백만 줄은 된다. 바쁜 생업을 하면서 상태창을 붙들고 사는 신은 별로 없다.
크라이는 요즘 제자가 늘어서 제자를 가르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상태창을 볼 여유는 없다.
승우의 시선이 나무에 앉아서 상태창을 정독 중인 테오를 향했다.
“너는 어때?”
“나도 몰랐어. 이거 참으로 혁명적인 공격인걸. 동의도 없이 시간을 감아? 시발, 그레이트한 반역이야. 개부럽네. 나도 해 보고 싶다. 시간 적성이 1만 있어도 해 볼 것을……!”
“시간 적성이 없어서 다행이군. 어쨌든 너도 몰랐구나.”
“나도 엄청 바쁜 몸이거든. 아니지. 여기서 내가 제일 바쁘잖아. 한가하게 밥집 차린 놈, 꼬꼬마들 가르치는 놈, 하하호호 신혼생활 중인 놈. 뭐야, 진짜네. 내가 제일 바쁘네? 이 부르주아지들아!”
테오가 버럭 화를 내니, 하하호호 신혼생활 중인 레나토가 싱긋 웃었다.
“결혼 좋아요. 테오도 결혼하는 게 어때요?”
“결혼이란 반역과 혁명의 반댓말과 같다. 자청해서 자신의 목에 거는 족쇄지.”
“테오는 족쇄가 조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크라이와 승우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내 편이 없네. 하지만 오히려 좋다. 혁명은 고독한 거니까.”
“고독한 혁명은 보통 망한 혁명이라고 하지 않아?”
“테오는 독재자군요. 혼자서만 혁명하면 폭군과 다름없지 않나요?”
“그냥 동료가 없는 거겠지. 저놈 성격에 동료가 우리 말고 있을까.”
“…….”
뼈도 못 추리겠다. 노 딜레이로 들어오는 공격에 테오가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입을 다물자, 레나토가 말했다.
“일단 저에게도 동의를 구하는 말은 없어요. 그리고 테라의 신들에게도 없었네요.”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크라이가 어금니를 보이며 웃었다. 호승심 가득한 웃음이다. 여기 모인 네 명은 피차 전원이 신이다.
경력은 짧지만 다들 나름의 짬밥이 있다. 상황의 흐름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승우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이거, 우리를 노린 공격이 맞네.”
“그러게요. 우리의 약점이 딱 이거긴 해요.”
신명 네 개의 신.
신명 세 개의 신.
그리고 신명 두 개의 신.
혼자서도 작정하면 한 차원을 갈아 버리는 사람이 셋에, 무한 부활의 서포터 신이 하나다.
무력으로 보자면 비교할 세력이 없다. 하지만 약점이 있다.
“너희들의 약점이 시간이니까 어쩔 수 없지.”
같은 시기에 신이 된 크라이와 테오는 시간 선이 엉망인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살다 보니 나이가 상당히 많다. 신으로서 경험도 많고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승우와 레나토는 아니었다.
“너네는 애초에 나이가 몇십 년도 안 되지 않았냐.”
장생하는 엘프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짧다.
고작 수십 년.
사람 인생에서의 수십 년은 길지만, 신의 생에서의 수십 년은 눈 깜짝할 사이다. 인간의 인생을 100년으로 놓고 그것을 차원의 역사로 대조해서 보자면 정말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다.
힘과 상관없는 역사, 경력.
테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40년만 감아도 너희들은 죄다 약해지겠네.”
“약해지는 수준이 아니겠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거야. 그, 네가 40년 전에는…….”
크라이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승우를 봤다. 승우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지. 난 일반인이었다.”
승우는 41년 전에는 중학교 초임 교사였다. 같은 시기 레나토는 평범한 가이아교의 수습 사제였다.
둘 다 확실하게 말해서 일반인이다. 테오가 머리를 긁었다.
“그럼 이거 너희 둘을 향한 공격이 맞겠지.”
“아마도.”
“나와 크라이는 영향이 없어서 다행인가. 너희도 다른 차원 여행 좀 하지 그래.”
“유감이지만 너희도 포함된다. 차원 법의 영향을 안 받는 엉망인 시간 선에서 살았다고 해도, 차원 법의 시간이 압도적으로 법률적 우위를 차지해. 큰 시곗바늘을 돌리면 작은 시곗바늘도 따라 돌아가게 마련이니까. 시간을 감으면, 너희들의 시간도 감긴다.”
“뭐야. 그럼 우리들 다 좆밥이 된다 이거여?!”
“말 좀 이쁘게 해라. 진짜…….”
“말투 따질 때냐.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테오가 주변을 봤다. 크라이도 법은 별로 관심이 없기에 전혀 떠올릴 게 없었다. 레나토는 어렴풋하게 감을 잡은 모양이었고, 승우는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아무래도 시간의 신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모양이야. 에메랄드 타블렛에서 시간의 신을 확인해 봐.”
모두가 동시에 에메랄드 타블렛을 확인했다. 레나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의 신, 6명이 0.187185413초 간격으로 취임했고. 곧 사망했네요.”
“신이 되고 신명을 써서 시간을 당기고, 사망했다는 거지? 이게 말이 되나? 시간을 감고 나서 죽어 버리면, 시간이 되감겼으니 살아나야 되는 거 아냐? 되살아났으니까 대가는 무효고, 시간은 안 감기겠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 발동해야 하는 거잖아.”
“존재를 걸어서 사용한 권능이니까 가능한 거 같다.”
“지구에는 타임 패러독스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야. 정말이지 엉망이군.”
레나토, 테오, 크라이, 승우가 순차적으로 말하고는, 승우가 바로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하나는 알겠다. 이건 죽어서라도 시간을 되감는 자살 특공이네.”
“이게 가능할 리가 없지. 진짜 쓰레기처럼 죽었구만. 어떤 신이야? 얼씨구? 이름도 제대로 안 기록된 지방의 잡신이네.”
“그거까지 알아볼 시간이 없지만, 무슨 의도인지도 알겠다.”
레나토는 테라 사람이고, 충실한 가이아의 신도였다. 크라이는 싸움을 중시하는 무투가. 테오는 제정신이 아닌 테러리스트. 그래서 용사 파티의 모든 정치적인 움직임과 행보는 승우가 정했다.
하기 싫어해서 안 하니 덤덤하게 보일 뿐 승우는 정치적인 식견도 매우 높았다.
“이건 협박이야.”
“협박? 어떤?”
“네가 자꾸 균형을 깬다, 질서를 깬다 싶으면 우리는 자살 특공을 해서라도 시간을 감고 말 것이다, 라는 협박.”
“한 명으로 0.187185413초의 시간을 감는데 감아 봐야 한계가 있지 않냐.”
“글쎄다. 빗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루는 법이야. 만신이 모이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싶네.”
레나토가 쓰게 웃었다. 못할 것도 없다. 할 수는 있다. 다만 몇 가지 말이 빠져 있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 할 수도 있겠네요. 대체 몇 명의 신이 죽어야 41년을 감을 수 있죠?”
“측정 불가능이네.”
“그 오만한 신들이 모여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일은 상상이 안 가요.”
“나도 그래.”
1초가량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여섯 명의 신이 죽는다. 그렇다면 41년을 되감는 데는 몇인가.
파리처럼 가치 없는 죽음을, 신이 해야 한다.
“할 리가 없죠.”
“할 리가 없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승우가 팔짱을 꼈다.
“이건 일종의 허장성세. 허풍을 부리면서 협박하는 거라고 봐.”
“일리가 있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크라이와 레나토가 수긍했다.
합리적인 추론이다.
해결책도 바로 나왔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당분간은 자극하지 않고 두는 게 낫겠지.”
“동의한다.”
“동의해요,”
한 명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모두의 눈이 테오를 향했다.
“…….”
“…….”
“…….”
항상 이상한 놈이지만, 테오의 모습은 오늘 한층 더 이상했다.
눈에 핏발이 섰다.
입가에는 침이 줄줄 흐른다.
“협박?”
“아.”
테오의 눈썹이 꿈틀하고 혁명적으로 움직였다.
“혀어어어업바아아아아악?”
“아앗.”
“나를, 협바아아아아악?”
“아아앗.”
스위치가 눌렸다.
누르면 꾹 하고 튀어나오는 반역의 스위치가 혁명적으로 눌렸다.
“크아아아악!? 나를 협박했다고?! 오냐, 전쟁이다! 전쟁! 당장 레드후드들을 소집해서 반역의 봉화를 피우고 저 잡것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
“크라이, 저놈 잡아!”
발작하듯 뛰쳐나가는 테오를 크라이가 잡았다.
“헹!”
“앗?!”
실수했다. 잡기 기술은 테오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유를 억압하는 CCC 마법이나, 속박기술 따위는 혁명의 신에게는 티끌과도 같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레나토의 빛의 사슬도 마찬가지였다.
작정하고 움직이는 테오를 막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승우가 검을 뽑았다.
“진짜 일 번거롭게 만드는 건 선수라니까.”
“크아아앙-! 반역! 혁명-!”
“시끄럽고, 머리에 열 좀 식혀라.”
승우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의미 없는 검격은 아니다.
저 녀석의 검은 공간을 무시하고 벤다. 이름하여 허공참(虛空斬)이라고 불리는 막지도, 피할 수 없는 절대 명중의 검기다.
하지만 테오가 누구인가.
“헤헹! 허공참을 내가 한두 번 보냐!”
허공참의 저항요령은 하나다. 저건 못 피한다. 못 막는다. 그러니까 전신의 힘을 주고 버티면 된다.
그냥 맞고 버티는 거 말고는 수가 없다만, HP가 많으면 버틸 법하다. 설마 저놈이 친구를 죽일 만큼 강하게 베겠어? 그런 얄팍한 마음으로 허공참을 버텼다.
하지만.
‘얼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유가 있었다.
놈이 벤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테오의 시간을 베어, 단절(斷切)시켰다. 그의 시간이 멈춘다.
멈춘 테오를 뒤로하고 승우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 바보는 잠깐 이렇게 방치하고, 우린 밥이나 먹자.”
동상처럼 굳은 테오.
크라이와 레나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
“이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