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당황 (2)
은하는 당황했다. 덩치 큰 아저씨가 엄청 느렸기 때문이다.
살살 쳤는데 한 방에 기절했다. 피하지도 못한 것과 못 받아친 건 실수라고 하자.
하지만 셔틀콕에 맞았다고 기절이라니, 몸이 순두부로 되어 있나?
영식이도 나비도, 승우 삼촌도 백강혁 오빠도 리비 오빠도 이걸 못 받아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배드민턴 하다가 기절한 사람은 없었다. 하다못해 한유성 오빠도 피하기는 했다.
물론 은하가 생각하는 거만큼 여유롭게 피한 게 아니라, 못 피하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몸을 던진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한유성조차도 피한 걸 이제황은 못 피했다.
마음속 파워 밸런스가 한유성 > 이제황으로 굳어졌다. 이제황이 들었다면 피를 토했겠지.
이제황의 마음은 어떻든 은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저씨 느려요.”
사람이 어쩜 이렇게 둔하지?
나비가 이제황의 다리를 질질 끌고 그늘로 갔다.
“일단 치료다냐.”
“아, 맞아! 치료해야죠!”
너무 당황해서 잊어버렸다. 그런데 영식이는 잊지 않았다.
맞아서 기절할 줄 알았다. 그래서 먼저 호떡부터 부치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호떡 소를 철판에 올리고 호떡 누르개로 꾹꾹 누르는 손길이 야무지다.
이래 보여도 천 개가 넘는 호떡을 부쳤기에 영식이는 호떡의 달인, 아니, 달슬라임이었다.
“호떡 머겅.”
기절한 이제황의 입 안으로 호떡이 욱여 들어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입 안이 홀라당 데였다.
* * *
기시감, 데자뷰가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기시감도 데자뷰도 아니었다. 기시감과 데자뷰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걸 경험한 거처럼 느끼는 것인데, 기억을 더듬으니 경험해 본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랬었지.’
승우는 이세계에 떨어져서 치트 능력은 하나도 받지 못한 채 변방에 버려졌다. 그리고 노예 상인에게 발견되었고 검투 노예로 콜로세움에 팔렸다. 다짜고짜 검을 주고 싸우라고 하고, 살기 위해서 싸우고, 이겼다.
명예와 명성을 얻은 제일 어려운 방법은 작은 명예와 명성을 모아서 차곡차곡 쌓는 일이고, 제일 쉬운 방법은 명예와 명성을 가진 자를 쓰러트려 대적자의 명성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일이다.
데뷔전을 이기고, 급하게 편성된 2차전을 이기고, 몬스터와 싸우는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이겼으며 급기야는 유명 검투 가문의 장자를 쓰러뜨렸다. 승우의 명성은 치솟아서 단번에 검투계의 샛별이 되었다. 승우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엉겁결에 명성을 쌓는 최단루트를 밟은 것이다. 그렇게 명성을 얻으니, 뒷일이 귀찮아졌다.
자유를 얻은 후에도 수없이 도전자가 달려들었다. 끝없는 싸움이었지. 지루하고, 귀찮았어.
승우는 그렇게 옛일을 회상했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였다.
“야! 네가 그렇게 검을 잘 써?! 따라와!”
저 멘트는 국룰인가, 아니면 마법적인 의식의 말인가. 그도 아니면 나라에서 저런 말을 하라고 교육이라도 하는 걸까.
어째서 난입하는 사람마다 다 똑같은 말을 하는가. 이세계로 간 긴 시간 사이에 지구에는 뭔 일이 있었던 걸까.
“또요?”
은하가 동화책을 보다가 나이답지 않은 장탄식을 내뱉었다.
여덟 살짜리 아이치고는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한숨이었으나, 세월의 풍파로 치자면 저 소리를 내지른 거한이 더했다.
2미터가 넘는 덩치, 130㎏이 넘는 체중. 그 체중에 어울리지 않는 레이피어라는 세심한 무기.
그리고 세월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다 못해 온몸으로 싸워 이긴 얼굴.
상태 창에 보이는 믿을 수 없는 글자인 13살이란 나이.
또다.
또 왔다.
은하를 이기고, 국가가 주목한 최고의 유망주라는 자리를 가져가기 위한 도전자가 또 왔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은하를 이기면 몸값이 단번에 열 배는 뛴다.
서경수가 넌지시 말한 은하의 계약금은 이백억이 넘었다. 그래도 그렇지 또 올 필요가 있을까.
은하를 향해 소리치는 거한을 보곤 황지현이 말했다.
“결국에는 도봉구 브록 레스너도 왔네요.”
“도봉구 브록 레스너…….”
“쟤가 올해 최고의 인재였죠.”
“과거형이군.”
“은하가 있으니까요. 저 아이의 몸값은 15억입니다!”
15억이면 유망주에게 줄 수 있는 한계 금액에 가깝다. 하지만 역시 이제황보다는 낮았다.
실적이 적은 탓이겠지.
하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도봉구 브록 레스너라니?
“송파구 드웨인 존슨도 그렇더니만, 도대체 별명이 왜 그래?”
“사장님도 솔직히 알잖아요. 생긴 게 문제죠. 별명이 왜 별명이겠어요. 임팩트 넘치는 홍보문구로 쓰이는 게 별명인데, 이 이상 저 녀석을 설명하고 임팩트를 줄 이름이 또 있겠나요.”
승우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부정할 수 없는 게 슬프다.
본명은 벌써 가물가물한데, 도봉구 브록 레스너와 송파구 드웨인 존슨은 잊히지 않는다.
얼굴과 도치되니까 박력이 두 배가 되고, 인상이 백 배는 강해진다. 명함을 직접 주고받는 거보다도 효과가 좋다.
“세월이 다가오면 좀 피하고 그러지…….”
“피한다고 피해지나요. 그리고 요즘 애들이 원래 발육이 좋아요.”
“좋아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
“피자. 치킨. 햄버거 같은 서구적인 식단을 거듭한 끝에 한국인도 결국 미국인 같은 체형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김치와 나물 같은 한식을 먹어야-!”
“그건 내가 어릴 적에도 듣던 말인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하다니…….”
승우는 진지하게 관찰안으로 도봉구 블록 레스너, 본명 곽희철을 주시했다.
혹시나 상태 이상이나 병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방사능 탓일 수도 있고 마나가 범람하여 과성장을 촉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병은 없었고, 상태 이상도 없었다. 곽희철 군(13세)은 지극히 정상이고 건강 체질이다.
스킬에 철인(鐵人)이 있으니 병 따윈 걸리지 않겠지. 아마 태어나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은 우량아일 것이다.
차라리 상태 이상이라도 발견될 것이지. 노화라던가, 저주라던가. 아니, 이런 생각 자체가 실례로군. 승우가 다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끄응… 다시 생각해 보니까 합리적인 결과였군.”
어렸을 때만큼 피지컬이 중요할 때가 없다. 모든 격투기는 체급을 나눈다. 마나 코어가 발달하고, 스킬이 발달하기 전.
범인(凡人)끼리 싸울 때는 체급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체중이 30㎏ 차이가 있다면 무기를 들지 않는 이상 체중이 큰 쪽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어릴 때 유망주로 꼽히는 이들은 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자일 것이고, 은하와 싸워서 몸값을 올리려는 아이는 다 한 피지컬 하는, 저런 몸일 수밖에 없다.
황지현이 하품하며 물었다.
“사장님, 그래서 어떻게 하실래요. 역시 신문지 빡빡?”
“애들을 때리겠냐……!”
“이대로 두면 끝이 없을걸요.”
싸워서 이기면 대박.
지면 본전.
그렇다면 안 도전하는 게 바보다.
이제황과 곽희철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많은 도전자가 온다.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오고, 콜라를 마시면 트림이 나오듯 확실한 미래다.
어떻게 할까. 아니, 우선 저 곽희철이라는 녀석은 어떻게 하지? 잠깐 고민하는 동안 결과가 나왔다.
“야! 내 말 씹냐!”
뭘 해도 반응이 없으니 곽희철이 은하가 들고 있던 동화책을 쳐서 날려 버렸다.
“!”
팽그르르 동화책이 회전하며 날아가 풀밭을 뒹굴었다. 이만하면 선전포고로는 충분하겠지.
곽희철이 씩 웃을 때였다. 은하가 천천히 일어나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나비가 인벤토리에서 목검을 꺼내 은하에게 주었다. 알리스터가 세계수의 묘목으로 만들어준 마법봉이자, 목검인 아티팩트다.
“어? 뭐야. 한번 해 보자고?”
은하의 마나 속성은 바람.
바람이 회전하며 뭉쳤다.
그 심상치 않은 기색에 곽희철이 히죽 웃었다.
드디어 싸울 마음이 들었구나, 내심 반기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레이피어, 덩치에 안 맞는 무기였지만 나름 합리적인 무기였다.
레이피어는 허리의 회전과 다리의 힘으로 적을 꿰뚫는 무기다.
덩치가 작은 사람도 쓸 수 있는 좋은 무기지만, 덩치가 좋은 사람이 쓰면 위력은 곱절이 된다.
날이 세워진 진짜 레이피어는 곽희철이 어려서 쓸 수 없다.
당연하지만, 무기 소지는 헌터 라이센스를 가진 성인에게만 허용된다. 윤은형조차도 성인이 아니라 진검은 작전 중에만 착용 가능하다. 법이 그렇다!
그러니 진검은 보호자 동반, 책임자 동반인 훈련 상황에서나 가끔 건네지고, 보통은 날이 없고 단단하지 않은 재질의 훈련용 레이피어를 쓴다.
이제황이 강한 까닭은 그 치사한 놈은 무거운 대검을 쓰기 때문이다. 날이 서지 않은 점은 이제황의 무기나 곽희철의 무기나 같지만, 이제황의 대검은 진짜 철이 아니라 헬스 트레이너들이 자주 쓰는, 마나를 흡수하여 무거워지는 특수 합금강을 쓴다.
무게는 곧 힘. 무게로 밀어 버리니 강할 수밖에!
하지만 곽희철은 자신이 있었다. 훈련용 레이피어라고 해도 기절은 시킬 수 있다.
가벼운 만큼 더 빠르다.
빠르게 적의 급소를 찍어 버리면 이긴다. 이제황처럼 근육의 갑옷을 두른 것도 아니니, 서은하란 아이는 아주 약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 빡!!
바람을 두른 은하의 목검은 곽희철보다 스무 배는 빨랐다. 레이피어를 뽑기도 전에 은하가 목검으로 곽희철의 머리를 내려쳤다.
“꽥!”
수박을 쪼개는 듯한 강력한 타격음이 퍼지고, 비명을 지르며 곽희철이 뒤로 고꾸라졌다.
* * *
거한이 하나요.
거한이 둘이요.
거한이 셋이요.
거한이 넷이요.
나무 그늘에 눕혀진 거한이 점차 늘어난다. 나비가 또 하나의 거한을 질질 끌고 나무 그늘에 갔다.
이걸로 눕혀진 거한은 모두 다섯.
다섯 명의 평균연령은 13살이었으나, 외모 평균은 40살은 된다.
노안인 점은 모두 같았고, 거한인 점도 모두 같았으나 쓰러진 이유는 다 달랐다.
셔틀콕이 복근에 박혀 기절한 아이. 목검으로 정수리를 맞아 기절한 아이. 나비의 꼬리를 밟았다가 얻어맞아서 기절한 아이.
아무리 도발해도 시큰둥한 은하의 관심을 끌려다가 패드립을 날려, 울컥한 태지가 기절시킨 아이까지. 이 개구쟁이들은 각양각색의 기절 방식을 보여 줬다.
그래도 같은 점이 하나 더 있군.
전부 다 입에 호떡을 물고 있다.
승우가 상황이 웃기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점점 글로벌해지는걸.”
세 번째부터는 한국인이 오지 않았다. 외국의 아이들도 왔다. 소문이 외국에도 퍼졌단 뜻이다.
강한 각성자는 웃돈을 주고도 모셔 온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마치 야구선수, 축구선수 같다.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승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하늘을 보았다.
“어두워지는군.”
슬슬 저녁 시간이 다가온다. 기절한 터라 아이들은 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제황은 점심도 거른 게 분명하다.
성장기에 한 끼를 거르면 배가 쥐어짤 듯 아파진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도전자는 천천히 생각하고 우선은 먹일 때다.
“저녁을 준비해야겠군. 메뉴는 뭐가 좋을까.”
한국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네덜란드, 스페인. 국적이 다양한 만큼 입맛도 다를 수 있다.
거한이며 노안이라는 외모 탓에 헷갈리지만, 아이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입맛이 매우 까다롭다.
생선이나, 채소는 싫어할 가능성이 크겠지. 한식도 애매하다.
한식은 의외로 취향을 매우 탄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나라의 음식은 한국인 두 아이에게 안 맞을 수도 있다. 인종이 섞이면 원래 요리하기가 힘들다.
승우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아이들은 고기지.”
고기를 구워서 먹는다. 단순하면서 호쾌한 요리 BBQ(barbeque)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설마 채식주의자가 있진 않겠지. 채식주의자가 있으면 옥수수라도 구워 주면 된다.
“나비야. 오늘 저녁은 BBQ로 할 거야.”
“애옹애옹. BBQ 좋다냐.”
“비비뿌!”
“바비큐다!”
고기! 고기! 고기!
나비와 영식이. 은하도 바비큐는 아주 좋아했다.
아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
“바베큐우우우-! 완전 좋아요!”
고기 좋아하는 한 성인 여성이 포효했다.
“고기 별에서 온 고기성인 같으니라고… 그리 고기가 좋아?”
“완전 사랑해요. 너무 좋아요.”
황지현이 헤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