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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20화 (20/160)

20.

그녀는 정말 이 잡듯이 수도를 뒤졌다. 도박꾼이며 경마꾼, 말단 군인들, 작위를 물려받지 못해 군대로 쫓겨난 대위들이며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바지만 두르고 있으면 누구도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다.

가련한 귀족 남성들은 씩씩하게 들이닥친 발데모어의 공녀를 두고 쩔쩔맸다.

“아시잖습니까.”

“영애, 곤란합니다.”

“제발…… 제게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은 감히 로의 눈을 바라볼 엄두조차 못 내면서, 죽어도 파트너만은 못 하겠다고 설설 기었다. 그럴 때마다 로는 팔짱을 낀 채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러니까 몬트로사는 무섭고, 발데모어는 만만하다?”

“그런 것이 아니고…….”

“내 말은 말 같지도 않고, 그 개자식의 말만 말이다?”

“부디, 진정 좀 하시고…….”

“발데모어를 이렇게나 하찮게 생각하는 걸 알면, 응? 공작께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지나친 비약을 동원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몬트로사의 소공작은 언제든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해 올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에 비해 공녀는…… 외람된 말이지만, 무척 자그마하고 무해해 보였다. 공녀가 얼마나 흉흉한 협박을 일삼든, 몬트로사의 그 미친개에 비하면 그저 귀여운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앞에서 잼 나이프를 휘두르지 않아서 더 그랬겠지만.

로제타는 제가 이를 드러내든 말든, 발을 구르든 말든 사내들이 끄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로의 몸으로는 어쩌다 인상만 찡그려도 바윗덩이 같은 남자들이 설설 기었는데.

몬트로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자가 한 명쯤은 있겠지…… 자신만만하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도를 한 바퀴쯤 돌았을 때, 더 이상 품위 갉아먹는 짓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작의 전언이 당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도착한 공작 부인에게 붙잡혀 곧장 그 빌어먹을 어린 개새끼의 품으로 내던져졌다. 그녀는 이 모든 사건의 전모에 카드리어의 입김이 적용했으리란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공녀님. 고개를 살짝만 더 들어 주세요.”

“허리를 조금 더 졸라매 드릴까요?”

“부채는 어느 것으로 하시겠어요? 목걸이는요?”

올해의 첫 무도회라는 건 하녀들의 열의를 극으로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안나뿐 아니라 서너 명의 하녀들이 달라붙어 드레스의 주름 하나, 굽슬굽슬한 잔머리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살폈다. 그녀들의 얼굴에선 오늘 제 주인을 허투루 보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입술을 그렇게 비죽거리시면 화장이 지워진다고요.”

안나가 그녀의 뺨에 화장품을 세심하게 펴 바르며 주의를 주었다. 어찌나 가루가 휘날리는지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로는 콧등을 찡그리며 안나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했다.

“대충 해, 대충.”

“어떻게 그래요. 올해 첫 무도회신데!”

“그게 뭐. 뭐가 어떻다고.”

“몬트로사 소공작님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걸 알아요.”

“안다고? 정말 안다면 머리에 이딴 우스꽝스러운 깃털 따윈 적어도 안 꽂았을걸.”

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그 하얀 공작새 깃털은 전혀 우스워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혹시 또 알아요? 오늘 운명의 사람을 만나게 될지.”

운명의 사람 같은 염병 떨고 있네. 로제타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얼굴 허연 귀족들이란 다 고만고만한 애송이들일 뿐이다. 자고로 남자란 짠바람 쬐며 돛 줄과 닻줄로 단련된 근육질이 최고지. 로는 시계를 흘끗 보고, 오른손을 흔들며 하녀들을 물렸다.

“이제 진짜 그만해. 시계들 좀 보라고.”

그녀의 명령에 하녀들의 손길이 아쉽게 몇 가지를 매만지고 떨어졌다. 한 걸음 물러서는 그녀들의 얼굴에 일순 찬탄의 빛이 어렸다.

로제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며칠 새 익숙해졌다고 처음 거울을 마주했을 때처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어깨 부근에 자잘하게 커팅된 다이아몬드가 박힌 흰 드레스를 입고, 구불거리는 머리를 늘어뜨린 레아는 살아 있는 인형처럼 예뻤다.

하기야 그녀의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공작이 돈을 아낌없이 퍼부었는데. 이 정도 결과물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로제타는 제 목에서 자잘하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놈은? 도착했대?”

로제타의 말에 안나는 살짝 표정을 흐렸다. 어쩐지 공녀님께서 찾는 상대방이, 무도회 파트너가 아니라 결투의 상대방이라도 찾는 것 같은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그…… 아시죠? 발몽 부인이 하셨던 말씀 말이에요.”

로제타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발몽 부인의 잔소리야 언제나와 비슷했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게, 사내들의 마음에 들도록 굴라고. 사교계에서 그리 튀고 싶은 마음이 없던 로제타에겐 그럭저럭 수긍할 만한 조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언대로 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도대체가 사내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교를 떨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대개의 경우 로제타는 애인을 따로 두지 않았고, 그때그때의 욕망에 따라 뒤탈 없이 즐기는 편이었다. 육체적 움직임은 언제나 적절한 활력을 선사하니까.

“공녀님.”

머릿속으로 살색이 난무하는 상상을 하던 로제타는, 지레 찔린 나머지 지극히 우아한 자태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 빠르게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던 젊은 하인이었다.

“발데모어 소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아래층에서 공작 부인과 환담을 나누고 계셔요.”

“…….”

올 게 왔다. 로제타는 푹 퍼진 브로콜리를 한 입 먹기라도 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려가시겠습니까?”

“…….”

염병. 진짜 죽을 맛이군. 머리에 멍청한 깃털이나 꽂은 채로 오늘 밤 내내 마주 봐야 한다니. 로제타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대꾸조차 안 하자, 시종이 한 번 더 부드럽게 재촉했다.

“두 분께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해 드릴까요?”

아마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면, 오늘 밤을 새도 모자를 것이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면 빠르게 해치우는 게 좋았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고, 즐기지도 못할 거라면 참으면 된다.

로는 한숨을 내쉬고 시종의 뒤를 따랐다. 이어진 계단을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본 그녀는 결의를 다지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그 씩씩한 기세에 공작 부인의 낯이 뻣뻣하게 굳었다. 부인과 담소를 나누느라 계단을 등지고 서 있던 카드리어가 그 심상치 않은 기색에 뒤로 돌았다.

시선이 곧장 마주쳤다. 카드리어는 입매를 느른하게 휘며 웃었다. 그가 그녀가 서 있는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빈정이 상해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안나가 그녀의 등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로는 엉겁결에 떠밀리듯 그 손을 맞잡았다.

“발데모어 공녀.”

“……소공작.”

“오늘 대단히 아름답군요.”

로는 순간적으로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녀는 카드리어가 레아의 외모를 그다지 인상적으로 느끼지 않았다는 걸 바로 눈치챈 상태였다. 아마 그녀가 홀딱 벗고 서 있었다고 해도, 그에게 별달리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으리라.

전생의 로제타는 빈말로라도 레아만큼 예쁜 외모를 지녔다곤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로제타’는 아름답다기보다는 매력적이라는 미사여구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모든 부분이 다 자그마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레아와 달리 시원시원하고 중성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지녔었다.

남자만큼이나 큰 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길게 뻗은 다리와 길쭉하고 탄탄한 자작나무 같은 몸매. 그리고 로는 카드리어가 새끼 강아지이던 시절, 그런 저를 어떤 눈빛으로 욕망했는지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짙푸른 눈 가득한 동경과 열망, 선연한 날 것 그대로의 불티……. 그 시절의 카드리어는 미숙하여 모든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곤 했다. 가만히 들여다볼 때면 마치 부글부글 끓고 있는 푸른 용암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런 시절을 뻔히 아는데도, 뭐? 대단히 아름다워?

못 본 사이 혓바닥에 고래기름이라도 처바른 듯 아주 빈말이 매끄러웠다. 로제타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삐딱하게 서 있자, 공작 부인이 서둘러 참견했다.

“이런 번잡한 행사는 오랜만이라, 공녀가 조금 긴장을 했나 보네요. 부디 넓은 이해를 보여 주길 바라요.”

“괜찮습니다.”

카드리어가 그녀를 담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제겐 조금도 무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그 위에 입술을 맞췄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고정한 채로.

“레아. 당신을 데리러 왔어.”

순식간에 짧아진 어조에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미숙한 하녀 몇몇은 탄성을 내지르기까지 했다. 곁눈으로 발몽 부인의 놀란 얼굴과 공작 부인이 흐뭇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보였다. 카드리어의 의도란 노골적으로 명백했다.

……이놈이 소문을 내려고 작정을 했군.

그녀는 심드렁한 기색 그대로 손을 빼려고 했다. 발몽 부인의 말에 의하면 손등에 첫인사를 받은 뒤, 가볍게 팔짱을 끼는 것이 보편적인 예의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카드리어는 오히려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잡아당겼다.

당황해서 올려다보자, 카드리어가 한 박자 늦게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손을 잡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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