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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49화 (49/160)

49.

그녀는 깃펜을 잉크에 푹 담갔다가 양피지 위에 올렸다. 그녀는 삐뚤거리는 동부 해적들의 은어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리버 놈에게 들켰음. 밀고할 생각은 없어 보임. 예의 주시할 것. 언제든 몸을 뺄 수 있게 해상 은행 쪽에 있는 은닉 재산에 접근해 볼 것.’

그녀는 금방 말라서 삐걱거리는 깃펜을 잉크에 한 번 더 푹 담갔다.

‘두 번째, 닉을 찾을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것. 해상 연맹과 접촉할 수단 찾기. 누가 적당하지? 벤조? 해리엇? 편지로라도 접촉해 볼 것.’

‘세 번째, 칼립소가 말한 저주에 대해 알아보기. 한 번에 한 저주씩? 그녀가 아닌 다른 마녀도 있나?’

‘네 번째, 황태자, 칼립소, 닉, 연결? 대체 어떻게?’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나열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체 어떻게?’ 부분에만 여러 차례의 진한 동그라미를 반복해서 덧그리고 있었다. 산만하던 머릿속만큼이나 결과물도 엉망이었다. 로제타는 더 이상의 정리를 포기하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툴롱의 일등 항해사였던 해리엇이나, 단골 여관의 요리사였던 벤조에게 편지를 쓰려던 계획도 즉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 잡놈들 중 단 한 놈도 제대로 된 글을 배운 적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야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엷은 두통이 일기 시작한 이마를 문질렀다. 뭐가 됐든 방법은 이제부터 천천히 고민해도 좋을 일이었다. 몬트로사와 결혼한 이상 동부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확정이었으니까.

다만 닉의 목덜미에 올가미를 조이는 것은 지극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귀족만큼 해적의 호의와 경계를 동시에 사는 존재도 없었고, 닉은 경계심이 미친 오소리만큼이나 대단한 놈이었으니까.

한끝만 삐끗해도 놈은 그녀의 그물망에서 쉽게도 벗어날 것이다. 직접 몬트로사의 이름을 빌리는 게 아닌 이상에야. 그녀는 배신자에겐 죽음으로 그 값을 받아 낼 작정이었지만, 그 처단을 카드리어나 몬트로사의 힘을 빌려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복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이자 포기할 수 없는 욕심이었다. 레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기로 작정했다고 지난 삶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소금 바다에 가라앉은 ‘붉은 여명’의 무덤 앞을 지키는, 묘지기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복수를 위해 다른 누군가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일찍 일어났네.”

그녀는 갑자기 들려온 카드리어의 목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로는 쓰고 있던 양피지를 반사적으로 구겼다. 그걸 입 속에 넣어 삼키지 않은 것이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침착함이었다.

“노, 놀랬잖아.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로는 재빨리 구긴 양피지를 아직 불티가 남아 있는 벽난로 속에 집어던졌다. 카드리어의 시선이 개처럼 그것에 따라붙었다가, 다시금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문을 두드리긴 했는데. 놀랐다면 미안해.”

“……그렇다고 사과할 필요까지야.”

신방에 드나들면서 노크까지 하는 정중함이라니.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깨닫자 로제타는 머쓱해졌다. 이 와중에 언제 또 부엌까지 다녀왔는지 카드리어는 한쪽 팔에 쟁반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건 뭐야?”

“아침 식사. 떠나기 전에 뭐라도 좀 먹어야지.”

“떠난다니? 이렇게 곧바로?”

“그래. 출발 준비는 새벽에 이미 끝냈어.”

카드리어는 그녀가 잔뜩 어질러 놓은 테이블의 한쪽 구석을 치우고, 용케 빈 공간을 찾아내어 쟁반을 올렸다. 쟁반에는 탐스러운 포도알과 갓 구운 흰 빵,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와 몇 종류의 치즈가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로제타의 소박한 취향대로였다.

로는 이 음식들을 카드리어가 직접 준비했으리란 것에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 발데모어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이런 기름지고 소박한 음식은 단 한 번도 맛본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돌았다.

빵부터 덥석 집으려는 로제타의 손을 카드리어가 부드럽게 막았다. 그리고는 한 입 크기로 잘라 낸 빵에 치즈를 올려 그녀의 입가로 가져왔다.

“자.”

“……뭐?”

로제타는 대체 이놈이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카드리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다는 얼굴이었다.

“손에 잉크가 묻어 있길래.”

“그게 이…… 짓과 무슨 상관인데?”

“건강에 나쁘다고 하더라.”

“……대체 누가?”

“글쎄. 중요해?”

그가 재촉하듯 치즈를 올린 빵 조각을 그녀의 입 가까이 가져다 댔다. 로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잉크가 범벅되어 지저분해 보이기는 했지만, 진흙 묻은 손으로도 잘만 음식을 집어먹던 과거가 있는데…… 이 정도에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는 건 좀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녀는 자존심과 배고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입을 벌렸다.

“……맛있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빵은 눈물 나게 맛있었다. 버터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스튜 그릇을 바짝 코앞으로 끌어당기곤,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정신없이 해치웠다. 씹을 때마다 터지는 고기의 육즙이 기꺼웠다. 종종 빵을 먹고 싶을 때마다 턱짓을 하면 카드리어가 한 입 크기로 떼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 주었다.

“부족하면 말해.”

그동안 워낙 새 모이만큼 먹어 왔기 때문인지, 스튜 한 그릇만으로도 배가 무지하게 불렀다. 로는 고개를 흔들면서도 아쉬운 눈으로 포도송이를 쳐다보았다.

“더는 안 들어가.”

“그러면 네 옷시중을 들 하녀들을 부를게.”

그가 그릇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던 로는,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 당장 출발해?”

“그래. 아래층에서 장모님이 기다리셔.”

장모님이라니. 멀쩡하던 속이 또 불에 덴 것 같았다.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사이, 그릇들을 다 정리한 카드리어가 그녀가 앉은 의자 쪽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로제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전에.”

그는 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녀들이 옷을 갈아입힐 때 아무 흔적이 없으면 말이 나와.”

“아, 그래.”

로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별 고민 없이 한 쪽 어깨를 훌렁 내렸다. 순간, 카드리어는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그가 마른 손으로 성마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거 외에 허튼짓하면 죽어.”

로는 여유롭게 경고했다. 주머니 속의 페이퍼 나이프가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감히 그럴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는 듯 카드리어는 콧등으로 웃었지만.

“어떻게 네게 감히.”

말투만은 지극히 정중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메마른 채였다. 그 귀족적인 눈매 아래 숨겨진 불티 같은 욕망이 선연했다. 그가 그녀가 팔을 얹은 책상에 손을 짚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툭 불거졌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탄탄한 활시위가 당겨지듯 등이 굽었다. 콧날이 가깝게 맞닿을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이마저도 싫겠지만, 참아 봐.”

싫다니……. 그 말에 본능적으로 부정하듯 고개를 젖힌 것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우아하게도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숨이 연한 피부 위로 간지럽게 흩어졌다. 로는 의자의 팔걸이를 바짝 붙잡았다.

“읏…….”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리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따갑고, 녹진하고, 습한 감각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묘한 감각에 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발끝을 오므렸다. 염병할. 미칠 노릇이었다. 차라리 수도원에 종신 서원을 하고 말지.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다 됐어?”

그녀의 목소리는 잠깐 사이에 꼭 목이 쉬어 버린 개구리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로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보다 카드리어의 손에 들린 페이퍼 나이프에 더더욱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가 산뜻하게 웃었다.

“위험한 건 내가 맡아 두지.”

“…….”

젠장……. 미인계를 썼다, 이 말이지? 심지어 그녀는 의자를 부서져라 잡느라, 카드리어가 언제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붉은 여명의 수치였다.

“그럼 준비해.”

카드리어는 얄궂게도 웃고는 바짝 얼어붙은 그녀의 옷깃을 추슬렀다. 방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녀들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하나같이 눈들을 초롱초롱 빛낸 채로.

* * *

“오, 내 아가.”

공작 부인이 우아한 눈매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훌쩍였다.

“작던 네가 언제 이리 자라, 결혼까지 했는지…… 정말 믿기지가 않아.”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야말로 귀족다운 것이라고 믿는 공작 부인에게는, 삶의 지침마저 잊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역사의 한 장면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신파적인 눈물 때문에 마차가 벌써 두 시간째 지체되고 있는 마당엔, 더 이상 감동도 무엇도 아니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렴.”

그리고 지긋지긋한 두 시간짜리 신파극을 찍고 있던 공작 부인이 깜박 정신이라도 차린 양, 부산스럽게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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