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구원자라니. 로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가 대체 언제 적 과거까지 들먹일 작정인지 궁금했다. 물론 그 시절은 그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카드리어가 강아지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었으니까.
그러나 몇 번이고 그때를 되짚어 봐도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다. 살기 위해 도망쳤고, 살리기 위해 죽였을 뿐이었다. 해적의 방식대로.
머리를 장식물쯤으로 달고 다니는 빌티의 멍청함에 대해선 사흘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를 지경이지만, 글쎄…… 이놈이 이렇게까지 애틋해질 이유에 대해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건 온전히 그녀의 의지로 이루어졌던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널 구하러 갔던 거.”
“응.”
“네 아버지의 협박이었던 건 아냐?”
“알아.”
“난 대가도 받았어.”
“그것도 알지.”
“…….”
대답은 족족, 심지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돌아왔다. 로는 그의 얼굴에서 배신감을 읽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카드리어는 그녀의 손을 그대로 쥔 채였고, 감정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넘어서기 힘든 벽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아는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기본이었다. 준 것이 허상인데 돌려받는 것은 묵직한 진심이라니. 이런 거래는 사기꾼들이나 할 것이다.
“오늘 네게 저들을 보여 준 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였어.”
로는 간신히 대꾸했다.
“걱정이라니.”
“네가 이루지 못했던 염원들이잖아.”
“…….”
“지금 네가 가진 삶을 누리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야.”
그건 복수를 내려놓는 게 어떠냐는 조언처럼 들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과녁을 잃은 화살처럼 휘청였다. 로제타는 그제야 카드리어가 단 한 번도 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닉의 배신에 대해 그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했다면, 그녀의 앞에서 해맑게 한 번쯤 언급해도 될 일이었다. 그저 멀리서 돌보았던 해적 고아들과 달리, 그들은 한때 진짜 가족이었으니까. 그녀는 간신히 침을 삼켰다. 말라서 붙어 버린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닉, 그 새끼는…….”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드리어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순간, 그의 눈매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죽이지 않았어. 툴롱의 선원들도 전부 살렸지.”
“…….”
“하나같이 네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었잖아.”
그 조각 같은 입가에 언뜻 비친 것은 냉소였다.
“감히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리가.”
“……행방은 알아?”
“아니.”
단호하게 대답한 카드리어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명백했다. 아쉽지만 그에게서 닉과 관련된 다른 정보를 받아 내긴 힘들 모양이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로는 어깨를 움츠렸다.
“춥다.”
추위에 발개진 얼굴을 그가 양손으로 감쌌다. 서늘해진 몸에 그의 체온은 적당하게 느껴졌다. 로가 어깨를 가볍게 떨자, 그가 계단을 향해 턱짓을 했다.
“올라가. 감기 걸리겠다.”
“너는.”
새삼 우스운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은 다소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다시 만났을 때의 그가 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았다면, 지금은 억지로 고여 있는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먼저 쉬어.”
“…….”
“피곤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에선 절제된 욕심이 느껴졌다. 그제야 로는 그가 요 며칠간 그녀를 피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다시금 재촉했다.
“들어가.”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닷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그가 커다란 손을 올려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로부터 잠시간 멀리 떨어진 시선에선 나른한 권태가 묻어 있었다. 사내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일순 말문이 막힐 지경으로.
염병할,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다 변명이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그를 가지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의 욕심이라 느꼈던 시선조차, 그녀의 욕망을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사람은 타인의 모습에서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니까.
로는 충동적으로 카드리어의 뼈대가 툭 불거진 두꺼운 손목을 잡아챘다.
“너, 나랑 자고 싶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그가, 비스듬히 입매를 올렸다. 짙은 사향과도 같은 미소.
“내가 널 바라지 않은 적이 있기나 할까.”
* * *
“……흣.”
로는 녹녹한 신음을 흘렸다.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흘린 카드리어가 그녀의 납작한 배 위로 캐미솔을 걷어 올렸다. 무의식중에 팔꿈치를 들자, 한 겹 남은 옷가지까지 남김없이 벗겨졌다. 그의 뜨거운 손과 입술이 스칠 때마다 로는 어깨를 떨었다. 유독 예민해진 몸엔 이조차 자극이었다.
제기랄,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손이 닿기만 해도 얼간이처럼 흥분하는 건 사내들이었지,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고작 이 정도에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으로 온몸에 열이 올랐다. 벌써부터 다리 사이가 뻐근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가슴을 부드럽게 뭉갰다.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이 정점을 문지를 때마다, 허리가 움찔거리며 저절로 튀었다. 흥분은 지나치게 빨랐다. 피부 위로 흩어지는 숨결이, 촛농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뜨거운 흔적으로 남았다. 그녀가 고개를 젖히자 카드리어가 목덜미를 빨듯이 물었다.
그의 손 아래에서 로는 몸을 뒤틀었다. 허리가 들썩거렸고, 저도 모르게 다리가 벌어졌다. 그의 손이 불쑥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려는 허벅지를 그가 커다란 손으로 잡아 눌렀다. 잠깐, 잠깐만……. 애원은 쉽게도 나왔다.
“차, 차라리 내가…… 내가 위로 올라갈래.”
뒤늦게라도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아 오겠다는 얄팍한 속내였다. 그러나 카드리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왜…… 이렇게 여유가 넘쳐?”
그가 진짜로 응할 줄 몰랐던 로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드리어가 그녀의 코끝을 이빨로 살짝 물었다. 연달아 뺨과 턱에 자잘히 키스한 그가, 피부에 입술을 붙인 채로 웃었다.
“솔직히 좀, 불안하긴 해.”
“……읏.”
“처음이니까. 하지만 몇 번이나 상상했거든. 널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녀의 다리를 벌려 놓은 채로, 카드리어가 셔츠를 벗었다. 옷 아래로 가늠해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빈틈없이 짜인 복근이 불그스름한 랜턴 빛을 부드럽게 반사했다.
“적어도 만족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난 대체로 다 잘하니까.”
맞닿은 아래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부피감은, 애초부터 실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저게, 다 들어가기나 할까. 로는 입안에 저절로 고인 침을 삼켰다. 그녀는 카드리어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맡을 짚었다. 그의 체중이 완전히 실린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거대한 그림자에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짙푸른 눈이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 순간, 생전 느껴 본 적도 없는 수치심이 일었다. 제기랄……. 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딴 식으로…….”
“널 보는 게 싫으면, 눈이라도 가릴까?”
그 순순한 음성에도 화가 치밀었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은 감정이었다.
“나는…….”
치마만 입으면 동한다는 게 사내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이 몸은 레아의 것이었다. 그와 잠을 나누지 않기로 한 결심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치졸하고 조악한 속내에 지나지 않았다. 로는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여기까지 와서 자존심을 지키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짓씹듯 내뱉었다.
“가끔, 네가 보고 있는 게, 누구인지 헷갈려.”
“로제타. 나를 봐.”
눈을 가린 손을 카드리어가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잔뜩 곱아든 손가락마다 그가 입을 맞췄다. 장난치듯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이 손바닥과 손목을 지나, 팔꿈치, 팔뚝, 그 아래로 내려갔다. 로는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내내 저를 바라보고 있던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눈. 단 하나의 암컷을 바라보는 짐승과도 같은, 바로 그 눈.
카드리어가 무릎 사이에 그녀의 몸을 결박하듯 가뒀다. 그대로 손목이 양옆으로 잡혀 눌렸다. 어깨에 이를 아프도록 박아 넣은 그가, 조금씩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가, 아릿한 통증과 함께 떨어졌다. 피부가 빨리는 감각에 등줄기에 자르르 소름이 돋았다.
“……으, 흣.”
흘리는 신음마저 아깝다는 듯, 그가 다시금 그녀의 목을 뒤로 젖히게끔 하고 입을 맞췄다. 벌이라도 되는 양, 부드러운 둔덕의 정점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잘도 사서 해.”
손이 아래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젖은 입술을 타고 재차 신음이 흘러나왔다. 로. 귓가에 바짝 붙은 입술이 은밀한 진실을 속삭였다.
“네 영혼을 담고 있기만 했다면, 그 몸이 길거리의 돌멩이라고 해도 욕정 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