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물론, 전 해군을 동원해 해안가를 수색할 작정이지만…… 배를 띄우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부서진 전함의 잔해들과 함께 부상병들이 떠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배를 띄우는 건 오히려…….”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군요.”
로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 믿는 시늉이라도 하지. 장교들은 이제 그녀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저들이 숨기는 게 있다는 소리였다. 그게 뭐든 상당히 구린내를 풍겼다.
“변명이 아닙니다. 해군 인력이 빠지게 되면…….”
“그딴 소리나 늘어놓을 거면 당장 꺼지고, 그게 아니라면 속 시원하게 이유가 뭔지 말해 봐요.”
“…….”
장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쉽사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기랄, 작금과 같은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저치들이 더 잘 알 터였다. 제독과 그 후계자를 실종 위험이 있는 임무에 같이 내보내? 그전까지야 어렵지 않은 토벌이라는 말을 황금같이 믿었지만, 이제는 저게 다 거짓임을 안다. 하나같이 상식에 어긋났다. 하물며, 수색조차 늦어진다고.
로는 숨을 몰아쉬다가 한순간에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난 사흘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 했던 후유증이 정신적 충격과 맞물려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새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로 비틀거리자 장교 중 한 명이 반사적으로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귀부인!”
로는 그 손이 제게 닿기도 전에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 몰골이 안쓰럽다는 양 젊은 장교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일단, 일단 제발 좀 진정하시고…….”
“진정하라고요?”
로는 그들의 가슴팍에 달린 휘장을 통해, 그들이 한때 몬트로사의 장학금을 받아먹던 놈들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두 장교의 얼굴에 희미한 죄책감이 어렸다. 로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쪽이 날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제발 도움이 될 정보를 내놔요.”
“…….”
“내 남편이, 어딘지도 모를 망망대해에서 죽어 가고 있다고요.”
장교들의 뺨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해군 내에서 함구하라는 명령과 몬트로사로부터 받은 은혜를 두고 양심이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들끼리 한참을 쑥덕거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이니 귀부인께서 함구해 주십시오.”
“그럴게요.”
로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확답을 듣고서도 장교들은 조금 더 미적거렸다.
“사실, 윗선에서 수색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윗선이라니. 황실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니오.”
장교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태자께서 몬트로사 공작의 부재 시 해군을 통솔할 임시 제독을 임명하셨습니다.”
“새, 제독?”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몬트로사 부자가 실종되길 기다렸다는 걸 이런 식으로 만천하에 알려도,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는다고?
“소식이 끊긴 게 닷새 전이라면서요. 반파된 배가 도착한 건 오늘 아침이고요. 그 먼 수도에서 황태자 전하께선 대체 언제 어떻게 알고 임시로 제독을 부임시켜요?”
“이번에 맡으셨던 임무가 워낙 위험하다 보니, 일이 어긋났을 때 차질 없이 작전을 이어받기 위해 진작부터 준비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염병할, 개도 안 믿을 소릴. 로는 불량스럽게 눈을 치뜨고는 팔짱을 꽉 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해도 군사령관을 마음대로 임명을 해요?”
“폐하께서 칩거하신 지 두 달째라더군요. 모든 의사는 황태자 전하를 통해서만 전달하고 계시고요.”
“제기랄, 그게 무슨…….”
장교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의 발언을 막았다.
“지금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곧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2 황녀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대리로 시클리드의 공관에 내려오셨습니다. 임시 제독위는 지난 밤 수여되었고요.”
“임시 제독께선 당장 수색을 시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셨고요.”
“이틀 뒤 폭풍우가 올 예정이라더군요.”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하나같이 기가 막혔다. 로가 얼어붙어 있는 사이에 장교들은 다시금 딱딱한 태도로 돌아갔다. 찰나의 동정심에 너무 많은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다시 각 잡힌 자세로 되돌아가, 경례를 올려붙였다.
“부군과 관련된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로는 그들이 응접실을 나가는 모습을 미동조차 없이 바라보았다. 앞선 대화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임시 제독은 수색대를 꾸릴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 로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이제는 정말, 단 하나의 방법밖엔 남지 않았다.
* * *
다음날 오전에는 누더기를 걸친 시체가 무더기로 해변으로 밀려들었다. 대부분은 해적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뗏목을 잡고 살아남은 부상병들도 있었다.
시클리드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서 어디를 가도 온종일 그 이야기들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제독의 실종이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자잘한 해전에서조차 패배한 적 없는 동부의 자부심이 일시에 꺾인 것이다.
로는 수색대가 꾸려지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우호적인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는 직접 사병들을 이끌고 가 해안가를 수색하고, 부상병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매일같이 병원을 찾아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평범한 여자들과 섞여 천이나 옷가지를 빨고, 부상병들의 붕대를 갈고 식사를 챙겼다. 바쁜 일정을 핑계로 자주 끼니를 거르다 보니, 몸은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다.
바싹 말라가는 그녀의 모습에 부상병들은 감사와 죄책감을 먼저 느꼈다. 그들은 앞다투어 카드리어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정보를 풀었다. 포트머츠 인근, 작센과 맞물린 군도, 툭 튀어나온 절벽 근처…….
하나같이 제멋대로인 정보였지만, 로는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부상병들은 자기들의 부정확한 정보를 더듬더듬 일러 주는 끄트머리에 늘 그녀를 위로했다.
소제독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그분과 같이 훈련에 참가해 본 제가 압니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분이에요. 괴물 같으신 분이니 걱정 마십쇼…….
로는 그게 마치 어떤 주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음에 새겼다. 그러면 초조하던 마음도 조금쯤 괜찮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폭풍우가 끝난 닷새째 오전. 로는 드디어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더 가져와. 더 많이.”
로는 후추와 소금을 뿌려 구운 아보카도와 수란을 볼이 미어져라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녀의 재촉에 하녀들이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가서 갓 만든 요리들을 잽싸게 가져다 날랐다. 하나같이 위에 부담 없는 음식들이라 먹기에 편했다.
“천천히 드세요.”
안나가 미지근하게 우려낸 홍차를 찻잔에 따라 주며 말했다. 로는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어서 단숨에 마셨다. 그전까지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몸은 동정심을 사기에 적절했지만, 덕분에 체력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길고 긴 싸움이 될 테니 무엇보다도 잘 먹고 체력을 회복하는 게 중요했다.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는 것만으로도 팔다리에 미적지근한 혈기가 도는 것 같았다. 로는 접시의 남은 소스에 부드러운 빵까지 찍어 남김없이 먹었다. 한동안 굶다시피 했던 위에 음식이 들어가니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로는 굴러다니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트롤리를 밀고 들어온 안나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준비해 줘.”
“벌써 다 드셨어요? 그래도 모처럼의 제대로 된 식사인데 좀 더 드시지…….”
“이만하면 충분히 먹었어. 이따 저녁에도 이만큼은 먹을 거고.”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요. 마차라면, 또 병원에 가시게요?”
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군 공관.”
* * *
로는 잔뜩 격식을 차린 차림새로 해군 공관으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공관 안에 외부인은 들일 수 없다고 그렇게 뻗대던 에이번도, 이번엔 정중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전까지야 외부인이라는 인상이 강했지만, 부군이 국가의 임무를 수행하다 실종된 이상 어느 정도의 예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남편의 실종에도 부상병부터 보살피는 몬트로사 소공작 부인에 대한 시민들의 긍정적인 여론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덕분에 로는 헤매지 않고, 지극히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임시 제독의 집무실 앞에 섰다. 평시라면 카드리어가 썼을 이 공간을 황태자의 사주를 받은 놈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표정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자, 그녀는 문 앞을 지키고 선 사환에게 명령했다.
“임시 제독께, 내가 왔다고 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