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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112화 (112/160)

112.

“제기랄…… 내가 그대를 어떻게 막겠어? 너한테 나는 의미라곤 한 줌도 없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해, 로. 늘 그랬듯이.”

그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손이 눈가를 짚었다. 카드리어의 목소리에서는 떨림이 그대로 느껴져서, 마음을 굳건히 먹은 그녀조차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로는 카드리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린 그의 얼굴에선 물기라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가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저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죽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어떤 나쁜 소식도 내 귀에 들리게 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 제발.”

그보다 더 절절한 사랑 고백이 또 있을까. 그리고 로는 지금이 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는 단 한 번의 순간이라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카드리어는 제 손으로 직접 모든 것을 끊어 낼 터였다. 한 줌 미련조차 없이,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한 적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러니 이게 마지막 기회였다. 모른 척, 닉에 대한 모든 복수심을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가 안기기만 한다면. 짧고도 완전한 행복이 거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태자는? 오드리 영애는? 블레이크 후작 영애와 닉은? 그들의 촘촘하고도 음습한 연계를 깨려면, 그 접점인 닉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치워야 했다. 그래야 몬트로사가, 그녀의 카드리어가 안전할 테니까.

사랑하는 자를 안전한 곳에 누이고 스스로를 무기로 벼려 내는 것, 그리고 온몸으로 치열하게 부딪치는 것. 붉은 여명의 사랑은 이런 거였다. 몸이 바뀌고, 영혼이 갈려 나간다고 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그래.”

마지막까지 목소리가 모질어서 다행이었다. 카드리어의 푸른 눈이 죽음처럼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생기도, 늘 느껴지던 기묘한 열정도 점차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만큼, 그는 금세 괜찮아질 테니까.

로는 그를 뒤로하고 쪽배에 올라탔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멜빈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로는 밧줄을 풀고, 돛을 올리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은 의도적으로 짧게 두었다. 밧줄, 배, 바닷물, 키르고스의 증표, 닉…….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어디에서도 카드리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섬들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는 언뜻 보면 깊고 넓은 강처럼 보였지만,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보면 짠 바닷물이 그대로 느껴졌다. 일반적인 강의 유속보다는 다소 빨랐기 때문에, 로와 멜빈은 노를 젓다 몇 번이나 쪽배를 뒤집어엎을 뻔했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덜 능숙한 선원들이었다면 십중팔구는 벌써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을 터였다.

세 시간쯤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 그들은 잠깐 배를 기슭에 대고 쉬었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으니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닉을 만나자마자 기진맥진해 버릴 순 없었으니까.

그들은 마른 빵과 육포를 씹고 수통의 물은 넉넉히 채워 넣었다. 주린 배에 뭔가를 좀 채워 넣은 덕인지, 다시 쪽배에 올라탔을 때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멜빈이 내내 그녀를 툭 치면 깨질 도자기처럼 취급해 댄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저곳이에요.”

서너 시간쯤 더 흐른 뒤에 멜빈이 어떤 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해안가를 따라 무른 나무를 엮어 만든 건조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물고기며 작은 짐승의 가죽을 말리는 풍경이 퍽 소박했다. 어망이 도사리고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선착장에 쪽배가 부드럽게 닿았다. 로는 선착장의 말뚝에 밧줄을 묶으려는 멜빈을 막았다.

“너는 여기서 돌아가.”

“예? 선장은요? 어떻게 돌아오려고요?”

“다 방법이 있어.”

로는 가슴을 쭉 펴고 입을 놀렸다. 정말로 돌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약아질 대로 약아진 멜빈에겐 통할 리가 없는 허세였다. 멜빈은 미심쩍다는 양 눈매를 좁히더니 팔짱을 끼었다. 조금도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로 굳건히 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네가 전해 줘야 할 게 있어서 그래. 아주 중요한 거야.”

로는 후드의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해진 쪽지와 군번줄을 꺼내 멜빈의 손에 쥐여 주었다.

“휴고 기억해? 몬트로사 소제독의 부관.”

“……알기야 알죠. 그 덩치만 큰 아저씨.”

“그것들 잘 가지고 있다가 내 소식이 들리면 전해 줘.”

“이게 다 무슨…… 아니, 그보다, 무슨 소식이요?”

“뭐든. 이게 꼭 필요할 거야.”

멜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종잇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요청을 들어줘야 하는지, 아니면 끝내 말려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었다. 로는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가.”

그녀의 재촉에 멜빈은 어쩔 수 없다는 양 다시 쪽배에 주저앉았다. 끝내 내키지 않는지 노를 잡은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 머리만 벅벅 긁던 그가 푸념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그거 비싸게 팔아서 그 잡놈 뒤통수나 때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이렇게 혼자 갈 줄 알았으면, 선장 손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가담하지 않았을 거예요.”

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아. 그래서 고맙고 미안해.”

“저쪽은 선장이 몬트로사 소공작 부인으로부터 증표를 훔쳐 낸 것인 줄 알아요. 선장을 단순한 하녀로 생각할 테니까 어느 정도 방심은 할 거예요. 그래도 조심해요.”

마지막까지 당부를 마친 멜빈은, 굳게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꼭 다시 올게요. 쪽지만 전해 주고 바로요. 선장이 시킨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여기서 몸 빼서 섬 아래쪽에 있는 모래톱 근처에 숨어 있어요.”

“그래. 그럴게.”

그녀의 대답에 멜빈이 눈에 띄게 안심하는 것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멜빈은 그녀의 말이라면 소금으로 금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놈이었으니까. 로는 그가 힘차게 노를 저어 멀어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선착장에서 이어지는 짧은 길이 보였고, 그 끄트머리에 지저분한 술집 간판이 보였다. 물고기와 술병이 그려져 있었고, 아래에는 어망의 상징인 커틀러스 두 자루를 교차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는 조심스럽게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에는 지루하다는 기색으로 밴조를 연주하는 남자 하나, 술을 마시는 사내 두엇, 카운터에 기댄 채 지저분한 수건으로 잔을 닦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은화를 카운터에 올렸다.

“어망에 물고기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추레한 남자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그리고는 주방 옆에 붙어 있는 쪽문을 가리켰다.

“안쪽으로 들어가.”

남자는 그 말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끄고 무관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각오했던 별스러운 질문이나 신분 확인 따위의 번잡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쪽문을 열자 둥근 테이블이 보였고, 문을 등진 채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내부가 어두웠기 때문에 그가 닉인지 아닌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무기는?”

“총 하나.”

“올려놔.”

그녀는 망설임 없이 허벅지에서 스트랩을 풀어 통째로 남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놈들은 다른 무기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의 몸을 손으로 훑었다. 남자의 손이 허벅지 아래쪽으로 향했을 때, 로는 잽싸게 그의 손을 쳐냈다.

“저 총이 전부야.”

“그런 말을 믿었던 놈들은 다 끝이 안 좋더라고.”

남자들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의심스럽다는 양 바라보았다. 로는 도리어 더 당당하게 치맛단을 발목까지 드는 시늉을 해댔다.

“의심스러우면 벗기던가. 천하의 어망이 소문 한번 작살나게 나겠네.”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에 사내들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너 홀로 여기서 뭘 더 어쩌겠냐는 시선이 그대로 읽혔다. 남자들은 뒤로 물러섰다.

“……됐다. 들어가.”

로는 안도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숨을 뱉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놈은 그 소란에도 무신경하게 그녀를 등지고 있었다. 이제는 팔을 쭉 뻗으면 닿을 지경으로 가까웠다. 로는 증오를 견디며 나아갔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고 싶었지만,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이윽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넌?”

로는 하마터면 넌 누구냐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닉이 아니었다. 닉이 아닐뿐더러 그녀가 아는 어떤 해적도 아니었다. 남자는 로가 두려워서 얼어붙은 것으로 착각하고 느긋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 물건만 확실하면 별일 없을 테니까 긴장 풀고. 키르고스의 유품을 판다며?”

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맞아.”

“진품이어야 할 거야. 날 사흘이나 이곳에 잡아 뒀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거, 네가 쓰려고 사는 거야?”

남자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어망의 감시인들이 지켜보는 거래의 현장에선 거짓은 용납되지 않았다. 로는 일말의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잦아들었다. 그녀는 발을 쾅 구르며 엄포를 놓았다.

“난 대리인과 거래 안 해. 진짜 거래 당사자보고 나오라고 해.”

“……뭐?”

“안 그러면 나도 물건 못 넘겨.”

“내가 대리인이라고 어떻게 확신해?”

남자가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로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닉의 얼굴을 안다고? 아니면 10만 솔이나 들고 다닐 만한 해적의 얼굴은 모조리 꿰고 있다고? 제기랄, 로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생김새가 딱 그래. 너 같은 얼굴은 딱 대외용이야.”

“큭.”

남자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옆방과 이어진 어둑한 복도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그 억양, 그 존재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귀가 빳빳해졌다. 로는 숨을 삼키고 복도를 노려보았다. 곧 어둠 속으로부터 걸어 나온 인영이 하나의 익숙한 얼굴을 드러냈다.

“아, 재미있네.”

검은 눈, 그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 냉소와 매혹의 경계에 걸친 미소. 의심의 여지도 없이, 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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