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로는 손톱 끝을 세워 갈라진 틈 사이에 넣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헐거운 나무판자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숨겨진 공간은 깊지 않았다. 로는 그 안에서 가죽으로 된 몇 권의 장부들과 종이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로는 찾아낸 것들을 한 아름 안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대충 훑어보니 서류들은 모조리 닉의 철두철미한 성품대로 암호로 적혀 있었다. 다행스러운 건 모두 로가 해독할 수 있는 암호라는 점이었다. 입맛은 쓰디썼지만. 그도 그럴 것이 이 암호는 키르고스가 닉과 로제타에게만 가르쳐 준 것이었다. 둘 다 죽어 버리자 놈은 마음 놓고 암호를 사용했으리라. 해독할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로는 가장 상단에 놓인 장부부터 펼쳤다. 처음 몇 장은 정말 말 그대로 일반적인 해적 장부였다. 어느 상단과 보호 계약을 맺었는지, 어떤 상선을 어떻게 털어 수익금을 얼마나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나 빼곡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로는 꼼꼼히 장부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도, 뒤로 갈수록 점점 수상해 보이는 계약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에 대규모로 구매한 물건의 이름은 아주 특이했는데, 로는 그 이름을 어디에선가 들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체 언제였더라?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은, 서류에 서명한 이름을 보고서야 선명해졌다. 공작, 바라텔리.
‘어쨌든 물건은 수일 내로 마련해 보겠네. 자네 말대로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니까.’
‘……도 때맞춰 보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뱀 같던 속삭임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계약서에 따르면 이 ‘키올젠’은 한 궤짝당 족히 만 솔에서 만 오천 솔에까지 거래되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뭔진 모르겠지만, 설령 루비나 사파이어라고 해도 원석이라면 한 궤짝당 그만한 가격이 붙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잘 쳐 줘봐야 틸센에서나 나는 희귀한 광석이란 소린데.’
아무리 희귀해도 보석이라면 환장했던 로제타가 듣도 보도 못했다면, ‘일반적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광석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제기랄, 할 수만 있다면 지옥에서 닉의 영혼을 끄집어내서 탈탈 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이런 특수한 광물을 왜 수십 궤짝씩이나 구매했고, 그 돈은 전부 어디서 났는지 말이다.
‘일단 넘어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그녀는 장부를 몇 장 더 넘겼다. 뒤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수상쩍은 계약들 뿐이었다. 에스페란다 황태자의 이름인 ‘디에고’나 ‘오드리’의 이름이 거론되는 서류들도 몇 장이나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거래처럼 보였으나, 로는 점차 그 서류에 이상한 점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부에 물건의 이름 대신 숫자와 국적들이 적혀져 있었다. 마치…… 사람을 거래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때.’
로는 헐겁게 숨을 삼켰다.
‘마지막 수송선의 인원을 확보한다더니……. 정말로 사람을 사고팔았다고? 대체 왜? 그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디에 쓰려고?’
머리가 복잡했다. 전에 들었던 정보들을 조합해 보려고 했지만, 하도 흘려들었던 것들이라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좀 더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이게 마지막 권.’
로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가장 두꺼운 마지막 가죽 노트를 펼쳤다. 그러나 놀랍게도, 장부나 계약서가 아니라 닉의 일기장이 튀어나왔다. 최초의 기록은 그들이 첫 항해를 시작했을 때부터 적혀 있었다. 단조롭고 일상적이던 기록은 뒤로 갈수록 음습한 집착과 기이한 속내, 광증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나의 글이라기보다는 토막토막 낸 단어나 짤막한 감상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애의 눈을 뽑고, 다리를 자르고 싶어.]
[여신? 개도 웃을 소릴.]
[그 여자 근처에만 가도 시체가 부패한 것 같은 냄새가 나.]
많은 것들이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만약 칼립소의 말이 아니었다면, 로는 닉이 환각 증세를 아주 심하게 겪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심코 뒷장으로 넘긴 로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인신 공양이라. 재밌네.]
인신 공양. 그 문장을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거래된 사람들. 인신 공양. 그녀는 허겁지겁 그 장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종이에는 별달리 덧붙인 말은 없었다. 한쪽 구석에 희미한 글씨로, ‘데메카론, 황궁 도서관’이라고 적혀 있는 것만 제외하곤.
‘데메카론’이라니. 그건 오래된 구전 설화들을 엮어 둔 책이었다. 그녀조차 알고 있던 것은 아동용으로 번안된 인형극이 제법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뭐든 상관없어. 칼립소, 그 마녀를 부릴 힘만 얻으면 그만이야.]
[블레이크 계집이 이상한 소리를 하네.]
[로즈를, 되찾았다.]
거기까지 읽고 나자, 스멀스멀 올라오던 찝찝하고 고약한 기운에 숨이 턱 막혔다. 숨통이 짓눌리는 듯했다. 로는 일기장을 덮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맞춰 선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귀부인. 안에 계십니까?”
로는 허겁지겁 장부들과 일기장을 침대 아래에 다시금 밀어 넣었다. 다급한 행동과 달리, 목소리는 아주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죠?”
“정비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요. 이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선실의 문을 열었다. 장교는 별달리 의심하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반쯤 열린 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중요한 정보는 모두 다른 곳에 가져다 뒀으리라 생각하는 안일함이 태도에서부터 엿보였다. 로는 그가 좀 더 자세히 살필세라 문을 닫고 완전히 선장실 밖으로 나왔다.
“벌써 가야 해요?”
“예. 부군께서 찾으십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아쉬워 보이는 그녀의 반응에 장교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달리 산책하실 곳이 없어 답답하신 마음 이해는 갑니다만, 이제 정말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여기서부터 시클리드까진 사흘이면 닿으니까요.”
“사흘.”
넘실거리는 수평선 저 너머로 이젠 익숙한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빌브론 해협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거기서부턴 눈을 감고도 시클리드의 항구까지 찾아갈 수 있다. 문득, 짠바람이 불어왔다. 로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귀 뒤로 넘겼다. 처음 출항할 때만 해도 초가을에 가까웠던 계절은 이제 부쩍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것참, 기대되네요.”
* * *
그로부터 사흘째 아침. 로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공기 중에 부산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던 것이다. 서둘러 옷을 껴입고 갑판으로 나가 보니, 하선 준비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약 상자들과 식량들, 틸센의 해군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들 따위가 차곡차곡 꺼내 올려졌다. 병사들은 시클리드의 민요를 목청껏 부르며 힘을 돋웠다.
오오, 시클리드. 아름다운 아가씨여.
금빛 머리칼을 드리운 아가씨여.
나를 위한 노래를 불러 주오.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을 기억해 주오.
영원히 지나 버린 나날들을.
다시 만날 그날까지 부디 안녕, 안녕히.
로는 근처의 나무상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노래를 들었다. 갈매기들이 울어 대는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지는 걸 보니, 정말 시클리드가 지척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을까. 그녀는 어깨에 내려앉는 손에 정신을 차렸다. 카드리어였다. 그가 씩 웃으며 물었다.
“이 시간에 벌써 일어났어?”
“밖이 부산스럽더라고. 일찍 깬 김에 나와 봤어.”
“좀 더 자도 되는데.”
“별로 안 졸려.”
“춥지는 않고? 옷차림이 너무 가벼운데.”
“조금?”
카드리어는 제 장교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로는 한동안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돌이켜 보면 참 길고 긴 항해였다. 보통이라면 항구로 돌아가는 건 휴식을 의미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싸움은 아직 시작되기도 전이었으니까. 그 걱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카드리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인상을 써?”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글쎄. 우선은 해군 공관부터 들러야겠지.”
“그리고?”
“폐하께 전황 보고도 해야겠고.”
“그다음에는?”
“몬트로사의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우리 집?”
“그래.”
그녀의 손에 단단히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낀 카드리어가, 그녀의 손가락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로는 잠깐 사이에 그가 조금 변했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떤 심정적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져 있는 사이에 그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불길한 예감은 시시각각 선명해지고 있었고, 이제는 단순히 기분 탓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괜찮다고 말해 주면, 정말 앞으로 있을 모든 게 다 괜찮을 것만 같아서……. 로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또다시 너를 떠나면 어떻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