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로는 한 번 더 가로막혔다. 이번에는 ‘가장 사악한 꽃’이 피어 있는 정원의 앞에서였다. 그러나 별다른 수상쩍은 눈초리를 받지 않았던 것은, 정원을 산책하려는 귀족들과 그들의 수행 시종들이 수시로 가로막히는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변명도 기가 막혔다. 연회 때 공개할 특별한 꽃을 위해서라나. 그렇긴 하겠지. 특별하다 못해 아주 끔찍한 종류의 꽃일 테니까. 로는 속으로 잔뜩 빈정댔다.
어쨌든 정원에 지금 당장 들어가는 짓은 어려울 것 같았다. 로는 해가 완전히 저무는 새벽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는 요령껏 하녀들 사이에 섞여 들어 부엌으로 갔다. 본래라면 안나를 보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상태가 상태이다 보니 그녀가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예쁜 언니, 스튜 조금만 더 주세요.”
“참 나.”
음식을 배분하는 하녀는 그녀의 넉살에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면서도 한 국자를 더 얹어 주었다. 갓 구운 빵은 덤이었다. 로는 씩 웃으며 사과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아가씨’가 되는 것보다 이쪽이 더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녀들 중 몇몇의 상태가 눈에 띄게 이상하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들은 멍하고 몽롱한 표정으로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오랜 기간 사악한 꽃의 독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그녀 혼자인 것만 같았다. 로는 이게 꽃의 독이 멀쩡해 보이는 사람한테까지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결과인지, 아니면 일과에 과중하게 시달리다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하녀들이 원래부터 많기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안나. 나 왔어.”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잠금쇠를 푸는 소리가 났다. 안나가 멍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별일 없었지?”
“네……. 아가씨가 시킨 대로, 문을 잠그고 있었어요.”
“좋아. 식사부터 하자. 큰일을 치르려면 배가 든든해야 하니까.”
로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하녀들에게 배분되는 음식이었지만 맛은 근사했고, 양도 넉넉하다 보니 둘이 나누어 먹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내내 멍하던 안나도 음식을 먹고 나자 조금씩 기운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로는 일찌감찌 랜턴의 기름을 확인하곤, 작은 가방 안에 부시 주머니와 함께 넣었다. 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기사들의 교대 시간이었다. 로는 건물의 그늘에 숨어 있다가, 기사들이 교대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찰나에 철창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날카로운 철창의 끝부분이 그녀의 옷을 찢었다. 살갗도 적잖이 쓸린 듯했다. 로가 잇새로 억누른 신음을 흘렸을 때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그녀의 앞에서 멈췄다.
“잠깐만.”
“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로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기사 둘 중 한 명이 로가 숨어 있는 풀숲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기사가 철창을 붙잡고 정원 안쪽을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나머지, 기사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가만히 서 있던 기사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짐승이겠지.”
“그런가.”
“그건? 입에 잘 물고 있냐? 효능이 다 한 거 아냐?”
“아니야. 오늘 아침에 새로 받은 거다.”
“이걸 써. 아주 새 거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로는 총소리를 들은 여우처럼 풀숲에 한동안 꼼짝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야 조금 더 앞으로 기어갈 수 있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정원은 마치 작은 숲처럼 느껴졌다. 축축하고 습한 기운이 어디에서나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들은 빽빽했는데, 로는 그 나무들의 가지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더욱 빽빽해졌다. 로는 마치 미로처럼 우거진 작은 관목들을 타 넘어 연못 근처로 다가갔다.
황궁의 한가운데에 있으니 분명히 인공적인 연못일 텐데, 가까이 갈수록 맑은 연못이 아니라 진득한 늪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냄새 또한 그랬다. 그것도 아주 근원부터 썩디썩은…….
연못 중심부터 거대한 검보라색 꽃봉오리에서 나는 향이 아니었다면, 진작 황궁 전체를 덮고도 남을 것 같은 불쾌한 냄새였다. 로는 꽃에서 나는 냄새가 더 끔찍한지, 연못의 냄새가 더 끔찍한지 분간조차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뿌리 조각을 잘라 입에 어떻게 하라는 부분에서 잘려 있었지. 아까 군인들끼리 말한 내용을 보면 입에 물고 있으면 되는 건가? 그러면 독에서 벗어나 멀쩡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거고?’
모든 게 가정이었다. 책에 적힌 지식이야말로 죽은 지식이라며 공부라면 죄다 질색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눈앞의 검보라색 꽃을 볼 때면…… 데메카론을 한낱 책으로 치부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부터 들었다. 그녀가 아는 한 이런 생김새의 꽃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로는 가죽 가방을 열어 부시 주머니와 랜턴을 꺼냈다. 아주 주의 깊게 불씨를 틔워서 랜턴의 불을 밝혔다. 그 전에 심지를 짧게 조절해서 밝기를 최소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리서 본다고 해도 부엉이의 눈 정도로나 보일 것이다. 로는 발밑을 주의 깊게 살피며 연못의 가장자리에 섰다.
‘가장 사악한 꽃’의 뿌리는 마치 뱀의 넝쿨처럼 연못의 안팎과 가장자리까지 모조리 휘감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연못에서 꽃을 키운다기보다는, 꽃이 뿌리로 연못을 삼키는 모양새였다.
로는 랜턴을 이리저리 비춰 보다가 꽃의 뿌리가 큼직하게 잘린 흔적을 발견했다. 아마 기사들이 물고 있었던 조각을 여기서 잘라 낸 것 같았다.
로는 작은 칼을 꺼내 뿌리를 검지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 냈다. 그 순간 로는 꽃이 잎사귀를 일시에 오므리는 것을 목격했다. 마치 인간으로 치면 진저리를 치는 것 같았다.
그건 상당히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심지어 뿌리를 잘라 낸 지점에선 끈적하고 불쾌한 액체가 퐁퐁 샘솟았다. 무심코 손을 랜턴의 불빛에 비춰 본 로는 비명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발간 액체는 일반적인 식물의 진액이 아닌, 그야말로 인간의 피 같았다.
‘염병……. 이딴 걸 어떻게 입에 넣으라는 건지.’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바로 옆의 뿌리도 더 잘라 냈다. 기왕이면 여러 번 들락거릴 필요 없이 한 번에 해치우는 편이 좋았고, 기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효능도 그리 길지 않은 모양이었으니까. 로가 막 앞치마에 손에 묻은 액체를 닦아 내며 굽혔던 허리를 피던 찰나였다.
급작스레 뒤에서부터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다리를 속박하고, 입을 막았다.
* * *
로는 재갈이 물리고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습한 공기와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딱딱한 돌바닥, 그리고 점점 더 고약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보아하니 지하 감옥인 것 같았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무엇도 확신할 순 없었지만.
끌려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로는 해묵은 공포를 느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다면 이토록 끔찍하진 않으리라. 이윽고 군홧발 소리가 뚝 멈추더니, 그녀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로는 냄새로 오드리 영애가 근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곧장 잔뜩 성질이 난 오드리 영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내가 멀쩡히 데려오라고 했잖아!”
“하지만 발견할 때부터 이 상태였습니다.”
“피는!”
“피가 아니라 잘린 뿌리에서 묻은 수액입니다.”
“……뿌리는 얼마나 잘랐다고? 얼마나?”
“하나. 여기 있습니다.”
“됐으니까 풀어 줘. 이번엔 상처 하나 내지 말고.”
기사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즉시 공손해졌다. 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드리 영애는 레아의 몸을 벌써부터 아주 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내 묶였던 손과 눈 가림막이 풀렸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랜턴 빛에 로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빛에 익숙해지자 모든 게 그제야 선명히 보였다.
그건…… 아주 많은 사람들의 유골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멍한 얼굴로 지하 감옥 안에 바글거리고 있었다. 제 바로 옆에 있는 게 해골인지 인간인지 관심 없다는 듯 초연한 로제타와 오드리 영애, 그리고 황태자비의 호위 기사들이 있는 이 철창을 비롯해 몇몇 개만 비워 둔 채로.
“레아.”
오드리 영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전설 속에 나오는 오래되고 사악한 나무 요정 같았다. 목소리로 홀려서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는다는. 뾰족한 이빨이 붉게 칠한 입술 사이로 반들거렸다. 그녀가 로의 턱을 잡아 올리며 활짝 웃었다.
“이제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겠어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