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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159화(외전 9화.) (159/160)

외전 9화.

여태껏 머리털 하나 비추지 않은 총독, 구령이나 그럴듯하게 붙여 댈 뿐 훈련이라곤 받아 본 적도 없이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해군들, 관저를 돌보는 시중인이 한 명도 없다는 점까지. 그전까지 사소하게 미심쩍었던 부분들은, 함정이라고 생각하면 전부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그는 몬트로사의 장자였다. 해군 관저에서 그를 해한다는 건, 시클리드에 있는 본성에서 그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제독과 몬트로사에 대한 해군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인 영역에 가까웠다. 그러니 답은 언제나처럼 하나뿐이었다.

‘……숙부.’

계승권이 있는 또 다른 몬트로사. 카드리어가 죽거나 실각하기만을 바라던 시퍼런 눈동자가 생생히 떠올랐다. 혈육의 변심이야 반나절 통곡 거리도 못 되었지만, 입맛만큼은 지독히 썼다. 처음부터 숙부가 사주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간에서 가로챈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게 전부 우연의 일치거나 오해일까?

“…….”

카드리어는 우울한 눈빛으로 정원을 훑었다. 차라리 착각이나 치졸한 의심이라면 좋으련만. 그는 정원에 있는 적잖은 이들이 대부분 숙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등줄기를 타고 기묘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지극히 은밀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세상의 누구도 그가 여기서 죽었는지 모르도록.

서늘한 저녁 바람 때문인지 봄인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는 침실로 들어와 테라스의 문을 안에서 잠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반쯤 가려진 커튼 사이로 긴 어스름이 방 안을 가로지르듯 내렸다.

똑딱, 시곗바늘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시간이 없다. 적들이 언제 움직일지 몰랐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똑, 똑.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생각은 자꾸만 한쪽으로 빙빙 돌았다. 붉은 여명, 로제타. 그와 여기까지 동행했던 여자. 그녀도 이들과 한패였을까?

똑똑.

카드리어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땐 물방울이 부딪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테라스에 있었다.

똑똑똑.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소리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유리문 근처로 다가갔다. 커튼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커튼을 젖혔다.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상대를 확인한 순간,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로제타?”

높게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카락, 날렵한 뺨과 입술, 이글거리는 눈동자. 역광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어느 것 하나 강렬하지 않은 부분이 없는 여자. 카드리어는 얼떨떨하게 입매를 매만졌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서 있던 사람이 그대로 현실에서 들이닥치는 건 다소 얼떨떨하면서도…….

‘문 열어.’

여자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카드리어는 엉겁결에 손을 뻗어 잠갔던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만약 로제타가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온 자객이라면 그보다 더 멍청한 짓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비켜서자 열린 문틈으로 여자가 잽싸게 들어왔다.

다시 문을 닫고 커튼까지 꼼꼼히 내리자 어둑한 어둠이 방 안에 닥쳤다. 카드리어는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날랜 입매가 호선을 그리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안녕, 소공작.”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와 호칭은 조롱에 가까웠다. 그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여자가 뒷머리를 긁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째 곤경에 처한 것 같은데.”

“…….”

“뭐, 도와주랴?”

도와준다고? 그는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해적 은거지를 탈출할 때 여자의 능력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긴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공관을 둘러싼 경비들의 숫자만 수십 명이었다.

더구나 저 해적, 로제타. 능력은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 여자의 의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른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여자는 그를 바르나 해군 공관으로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로제타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십이었고, 믿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여기서 더 떨어질 나락도 없으니까.

그러니 없는 초를 쪼개가며 생각을 거듭해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로제타가 내민 손을 잡았다.

* * *

‘시간 더럽게 안 가네.’

로는 시계를 흘긋 바라보곤 혀를 찼다. 마을에서 고용한 용병이 폭탄을 터트리기까진 아직도 삼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도 무료했지만, 큰일을 앞둔 초조함까지 더해지니 죽을 맛이었다. 로는 손톱에 핀 거스러미를 뜯다가, 양다리를 바꿔 꼬다가, 마침내는 턱을 괴고 맞은편 의자에 앉은 소공작을 살폈다.

‘생각보다 침착하단 말이지. 그것도 아주.’

어찌나 침착했던지, 소공작은 심지어 그녀가 내민 손을 덥석 잡기까지 했다. 그쯤 되자 도리어 얼떨떨해진 건 로제타였다. 도대체 뭘 보고 사람을 그렇게 덥석덥석 믿냐고 윽박지르자,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 표정과 태도는 마치 여기서 더 최악은 없으리라 장담하는 듯했다.

‘못 믿겠다느니, 증명하라느니 설치는 것보다야 백배 낫기야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긴장이 풀리다 못해 눈까지 감고 있는 소년을 보면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로는 아예 작정하고 그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기로 했다.

세필로 섬세히 그린 듯한 이목구비, 살짝 벌어진 입술, 뺨에 드리운 속눈썹 그늘과 그 나이대 특유의 우울감이 우수처럼 어린 눈매……. 앞으로 오 년만 지나면 제국, 아니, 세계를 뒤흔들 미모의 징조는 벌써부터 싹이 보이다 못해 찬란했다. 로는 입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영 답지 않게 오지랖 부린다 했더니, 저놈의 얼굴 때문이었네. 얼굴 때문이었어.’

그래, 저런 놈을 죽게 내버려 두는 건 그야말로 전 인류적 손실에 가까웠다. 그녀는 해적으로서, 재물 순환의 수호자로서 인류의 찬란한 유산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키르고스 영감 놈에게 겸사겸사 엿도 좀 먹이면, 뭐, 더 좋고.’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웃고 있자니 시계탑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뎅, 뎅, 뎅……. 로는 모두 일곱 번의 종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년의 팔뚝을 붙잡았다.

“시간 됐어. 일어나.”

“아…….”

그가 부스스 깨어났다. 로는 소공작의 코앞에서 손마디를 딱딱 부딪쳤다.

“정신 차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설명할 테니까. 첫 총성이 울리면 폭발이 시작될 거다. 모두 다섯 번. 그사이에 저택의 서쪽으로 돌아가는 거야. 담을 넘으면 마차가 있어. 거기서 보자.”

“거기서 보자고? 당신은…….”

“난 정문에서 시선을 끌 거야. 삼십 분 안에 내가 도착하지 않으면 먼저 출발해.”

“출발하라고? 선착장으로?”

“아니. 선착장은 안 돼. 절벽 아래로 내려가. 거기에 우리 배가 있어.”

“우리 배라니.”

“우리가 타고 왔던 배.”

고분고분하던 카드리어의 표정이 곧장 기묘해졌다. 선착장에 반쯤 처박듯 정박했던 마지막 기억이라도 떠올린 것 같았다.

“……그게 아직도 물에 떠 있다고?”

“대충 부서진 덴 때웠는데 물이 좀 새긴 하더라. 양동이 받쳐 두고 왔으니까 먼저 도착하면 비우고. 그리고 이거.”

로는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총 중 하나를 풀어 카드리어에게 넘겨주었다.

“최대한 검을 쓰고 총을 쓸 상황은 피해. 큰소리가 나면 저놈들이 피 냄새 맡은 상어 떼처럼 몰려들 테니까.”

“알겠어.”

대답은 잘한다. 로는 미심쩍은 시선을 숨기지 않은 채 카드리어를 아래위로 훑었다.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멀리서부터 총성이 들렸다.

탕!

그 날카로운 소리를 시작으로, 둔중한 폭발음과 함께 저택의 동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약속했던 신호였다. 로는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리기 직전, 오른손을 뻗어 카드리어의 어깨를 가볍게 꾹 눌렀다가 놓았다.

“그럼 살아서 보자.”

* * *

로제타의 손이 붙잡은 난간을 놓자, 늘씬한 몸이 테라스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건 마치 추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드리어는 놀라서 굳어 있다가 테라스로 달려가 난간을 부여잡았다. 상체를 숙여 아래를 살피니 로제타는 이미 고양이처럼 착지해 정원의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요령 좋게 몸을 숨긴 뒤였다.

“…….”

그는 얼떨떨하게 로제타가 꾹 눌렀던 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버석한 옷감 위로 어쩐지 여자의 체온이 잔열처럼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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