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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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에 장작을 더 넣고, 수건을 더 가지고 오렴. 아, 그리고 따뜻한 차도-.”

비 맞은 생쥐가 된 날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인과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일전에 입궁했을 때, 요석을 건드려서 실신했던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본 바로 그 여성이었다. 그때도 다정히 대해 줬던 그 여인은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날 보곤 경악했다.

있을 수 없는 걸 목격한 사람처럼 몇 초간 멍하니 있던 그녀는 다음 순간 바쁘게 움직였다. 덕분에 바로 준비된 따뜻한 물이 받아진 욕조에 들어가 앉을 수 있었다.

따끈한 물에 들어가 앉을 때도 멍했던 정신은 바깥으로 나와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나서야 돌아왔다.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대충 마른 상태가 된 나는 옆에 붙어서 연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부인을 올려다봤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

지금까지 베풀어 준 친절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뭔가를 더 요구하는 건 욕심이었다. 이제부터는 괜찮으니 혼자서 정신을 잘 수습해 보겠노라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걱정해 주는 분에게 굳은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애써 밝은 척하기도 힘들었다.

황녀가 주관한 모임에서 있었던 일뿐이라면 그래도 괜찮았겠지만, 진짜 떠올리기도 싫은 옛날 일까지 떠올랐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혼자 있었다면 욕이라도 해 줬겠지만 지금은 부인과 함께 있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살짝 웃어 보였다.

“눈을 좀 붙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조금 주무시겠습니까.”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부인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보통의 저택도 아니고 황궁이었다.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날 보살펴 줄 수는 있지만, 자고 가라고 선뜻 허락할 순 없을 거다.

친절한 사람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돌려 말했다.

“그러면 한 10분만 누워 있어도 될까요? 생각해 보니 늦게까지 황궁에 머무르는 건 안 될 것 같네요.”

나도 돌아갈 곳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 넓은 백작저에서 진심으로 날 기다릴 만한 사람이라면 에반 밖에 없었다. 그래, 맞아. 내겐 천사 같은 얼굴에 반항미가 넘치는 에반이 있었지. 에반을 생각해서라도 조금만 쉬고 돌아가 보자면서 나는 양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조금만 쉬고 계세요. 몸을 따뜻하게 할 만한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뒷말을 흐린 부인이 내 오른쪽 팔을 내려다봤다. 부인은 내가 드레스를 갈아입을 때 내 오른쪽 팔에 감긴 붕대를 봤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붕대는 조금 젖었고, 부인은 그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부탁하면 새로 치료를 받고 붕대도 다시 감아 주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굴고 싶지 않았던 난 일부러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 이만 나가셔도 돼요.”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부인이 물러난 후 나는 곧장 침대로 기어 올라가 모로 누웠다. 일부러 제일 끝에 붙어서 팔짱을 낀 채로 있으려니 저절로 긴 한숨이 나온다.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속이 편안해질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오히려 한번 내쉰 한숨으로 속이 더 답답해지는 기분에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눌렀다. 손끝에 묻어나는 축축한 물기를 느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청승이야.”

다 정리되어 끝난 과거의 기억이고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일을 떠올리면 질질 짜게 되는 상황이 우습지도 않았다. 정말 왜 이러는 건지. 나는 팔짱 낀 팔에 힘을 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몸속 깊은 곳이 떨리면서 악문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울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고작 그런 놈을 떠올리면서 눈물 짓고 싶진 않은데. 이러지 마, 정신 똑바로 차리자. 나는 심호흡을 했지만, 아비게일에게 빙의된 것이나 여태껏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팔짱을 낀 손에 힘을 더 준 나는 일부러 베개로 얼굴을 묻으면서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조용하길래 뭘 하나 했더니 우는 건가. 꼴사납군.”

“…….”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속 눈물이 쏟아졌다. 감정도 격해져서 쉽게 진정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번쩍 눈을 뜬 나는 내 등 뒤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이를 갈았다. 잠시 후 내가 누워 있는 침대 반대편으로 누군가 앉는 것처럼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나는 바로 베개에 살며시 눈을 문질렀다.

“그만하고 일어나지그래.”

애초에 저 남자에게 기대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섬세함이라곤 단 1그램도 없는 저 반응은 뭔가.

말라크 덕분에 싫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할 만했지만, 지금 그의 행동과 말이 그 고마움을 몽땅 깎아 먹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뒤통수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 뭐 하냐.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황제를 노려봤다.

“……!”

적어도 눈물 자국 정도는 지워내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 아래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난 더 이상 못 해 먹겠어.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게 뭔지나 말해. 아니면 뭐야. 그냥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알아내고 밝혀내서 끝내는 게 계약 내용인 거야?”

정말 그런 거라면 엄청나게 암울은 할지언정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거다.

말라크는 여전히 ‘그래, 네가 어떤 말을 떠들어 대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라는 식이었다. 놀림당하는 기분이라 완전 짜증 났다.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할 것이지 왜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거야. 내가 답답해서 속 터져 죽는 걸 바라나?

순간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침대 위에서 방방 뛰면서 소리라도 지를까 싶었다. 내가 뭘 해 봤자 좋게 생각해 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내 평판은 이미 바닥이었다. 거기에 ‘정신적으로 좀 이상한 것 같다’는 문장 하나 정도 추가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가벼운 흥분 상태로 빠르게 입을 놀렸다.

“전에 널 만나러 왔을 때, 이상한 꿈을 꿨어. 그런데 말이야 나흘 전에 백작저 지하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귀신인지 뭔지 정체 모를 게 나타나서 날 붙잡고 목을 조르더라니까. 나 죽을 뻔했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면서 나는 두 손으로 침대 위를 팡팡 두드렸다.

“사람이 죽을 땐 죽더라도 이유나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내가 정말로 마지막 화에 단 댓글 하나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한 거라면 말이 안 되잖아. 그만한 댓글에 이런 개고생이라니. 그러면 더한 걸 단 사람들은 뭐, 잡초에라도 빙의시킬 거냐?!”

그래서 마차나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즈려 밟히고 으깨지는 거냐고.

이내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황제를 쳐다봤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겠지. 부정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거둘 수 없었던 나는 더더욱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 내 행동이 우스워 보였는지 말라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런 이상한 표정은 집어치우고 어디 계속 떠들어 대 보지그래.”

“설마, 너도 나처럼 빙의한 건 아니……지?”

“그랬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바로 대답해 주지 않던 놈이다. 그런 놈이 이렇게 바로 부정하니까 더더욱 수상쩍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은 나처럼 빙의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고, 미심쩍어하는 내 모습에 말라크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어쩌면 똑같은 처지인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래서 둘 중에서 살아남는 쪽이 승리하는 거지.”

“무슨 말을 그렇게 살벌하게…….”

“내가 한 말이 널 겁먹게 한 건가.”

말라크의 미소가 짙어지고 눈이 가늘게 떠졌다.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지어 보이는 미소였고 그래서 더더욱 기분 나빴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어쩌자 거야. 무엇보다 이 남자라면 ‘둘 중 하나가 살아남아야 하는 미션’에서 양보할 인간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 처리하고 자기가 이겼다면서 좋아하겠지. 그렇다면 황제가 빙의자가 아닌 편이 내게도 좋은 거였다.

머리에 열이 올라 흥분한 상태로 아무 말이나 하다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지게 한 것만 같았다. 원래 하던 대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흘려 넘기고 말 것이지 뭘 저렇게 계속 쳐다보는 걸까. 진짜 부담스러워. 나는 시선을 피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 대체 뭐냐고. 빙의한 내가 그 세계관 최고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야 되는 건 아닐 테고…….”

일단은 에레즈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백작이 아비게일을 입양한 건 친딸인 에레즈의 저주를 대신 받아들인 존재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그 저주를 옮기는 것에도 조건이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지금 날 죽이려는 게 에레즈뿐만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꿈에서 본 검은 손과 지하실에서 내 목을 조르려던 검은 그림자는 같은 존재일까. 그땐 운 좋게 손에 쥔 요석 덕분에 살았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렇게 살아남았어도 오늘 같은 일이 몇 번 더 반복되면 그땐 말라 죽고 말 거야.”

어려서부터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 갈굼당하는 건 익숙하다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내 몸이 아니고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보니 뭘 할 수가 없었다.

저쪽에선 재벌이 갑질한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라도 칠 수 있지, 여기서 대들었다간 목이 댕강이다. 내 몸도 아닌 아비게일의 몸을 가지고서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고……, 나는 정말 미치겠다면서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치겠네.”

더 미치겠는 건 이런 환장할 상황에서 내 유일한 동아줄이 황제뿐이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계약 운운하면서 날 여기로 데리고 온 놈이기도 했으니까. 그랬으면 책임감 있게 날 이렇게 만든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밝힐 것이지…….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누르는데 다시 축축함이 느껴졌다.

그냥 확 목 놓아 울어 버릴까. 아주 황궁이 떠나가라 울어 대면 황제가 여자를 울렸다는 소문 정도는 돌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소소하게 말라크를 욕 먹일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내 턱 아래로 들어와선 그대로 움켜쥐었다.

“…….”

나는 턱이 잡힌 채로 얼굴을 들었다.

목이 불편하게 당겨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개를 들게 된 나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황제를 확인하곤 헛숨을 삼켰다.

뭐야. 왜 이렇게 가까운 건데?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말라크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분수대 옆에 서 있을 때에도 이런 식으로 고개를 숙여 왔었지. 그땐 내 입술 앞에 귀를 갖다 대고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 했다.

내가 혼잣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이번에도 대체 무슨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말라크는 그대로 고개만을 숙여서 내 목덜미에 입술을 대곤 그대로 살을 빨아들였다.

“…….”

부드러운 입술에 빨린 피부 위로, 말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윽고 말라크가 내 목에 입을 맞추며 피부를 핥고 있음을 깨달은 내 눈이 크게 떠졌다. 다음 순간 뭘 하는 거냐면서 말라크를 밀어내려던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든 말라크가 날 내려다봤다.

방금 그게 처음이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전에 황궁에 왔을 때에도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었다.

그리고선 무슨 말을 했더라?

“이상한 걸 달고 왔군.”

“…….”

내 중얼거림에 말라크의 미간으로 얇은 주름이 잡혔다.

“역시나 나에게 나타나는 이상한 것의 정체가 뭔지 아는 거였어.”

꿈속에서 내 손목을 움켜쥐었던 검은 손, 백작저 지하실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까지.

말라크는 그것들이 뭔지를 알고 있었고 내 손등과 목에 입을 맞추는 건 그것의 흔적을 지워 내는 행위였던 거다. 그렇다면 만약, 말라크가 내게 그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난 내가 뭘 물어도 여전히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를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내가 먹잇감인 거야?”

“…….”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정체 모를 기분 나쁜 것들이 나타나는 건가?”

내가 빙의자라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순 없지만, 내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인 거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기분 나쁜 것들이 나타나는 거라면…….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비게일도 원래는 에레즈의 저주를 대신 받아들이는 역할이었지. 그렇다는 건 이 몸에 빙의한 나도 비슷한 포지션이 되겠지?”

그런데 내가 진짜 아비게일이 아니라서 설정이 조금 달라진 거라면, 에레즈뿐만이 아니라 오만 잡것들이 죄 날 노리고서 달려들게 되어 버리는 설정이 된 걸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리면 내가 너무 피곤해지니까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나는 말라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때? 내 추측이 맞아?

원래 입이 무거운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의 힌트라도 줬으면 했다. 나는 약간의 애원과 불쌍함을 가장한 눈빛으로 말라크를 올려다봤다. 피가 흐르고 체온이 있는 인간이라면 쉽게 외면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미끼가 될 만큼 그렇게까지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 널 상대로 뭔가를 바란 내 죄다.

정말이지 아주 대단히 잘못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하하, 마른 웃음을 흘린 난 다음 순간 그대로 말라크에게 덤벼들었다.

어깨를 잡아 있는 힘껏 뒤로 밀어 쓰러진 그에게로 올라탔다.

“……!!”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덤벼들 줄은 몰랐을까.

내 아래에 깔린 말라크는 바로 표정을 굳히며 내 허벅지에 손을 댔다. 그대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난 허벅지에 힘을 조이며 앉아 있는 배 위로 체중을 실었다.

아비게일이 아무리 날씬하다 해도 체중을 실어서 누르면 답답할 거다. 예상대로, 바로 안색을 굳힌 말라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글쎄? 내가 뭘 하려는 걸까?”

“장난하지 말고 물러나.”

올려다보는 눈빛은 짙은 불쾌함을 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 침대 아래로 던져 버릴 기세인데 그래도 꽤 참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내심도 금방 바닥날 거란 걸 알기에 나는 말라크 얼굴 양옆에 손을 대곤 그 위로 고개를 숙였다.

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말라크에게로 쏟아졌다. 덩달아 더 짙어지는 미간의 주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망할 곳으로 오게 된 게 너 때문이라지만, 내가 여기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한 것 같더라.”

“…….”

“황제가 관심을 보이는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꽤, 든든한 모양이더라고.”

차분하게 말하고 싶어도 알게 모르게 빈정거리는 억양이 섞이고 만다.

날 구렁텅이로 처박아 버린 놈인데, 결국 그놈이 내 동아줄이 되어 주어야 하는 현실이 우스웠다. 문제는 그 동아줄이 썩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나 말라크라는 동아줄을 붙들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적당히 버티다가 대체할 만한 게 나타나면 잽싸게 갈아타야지. 나는 보란 듯이 생각하며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매력이 왜 없어.”

아비게일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그리고 나 자체도 충분히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저 삶에 치여서 좀 흔들었다 뿐이지.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 한번 들은 적 없었다. 비록 그것이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 낸 갑옷이 주는 효과일 뿐이라 해도.

“그래서-.”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서 날 올려다보는 말라크의 보라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지금 날 유혹이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

말라크를 깔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일까. 늘 재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남자가 조금은 괜찮게 느껴졌다.

하긴, 말라크는 원작에서 최고의 남자였다. 그런 그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말라크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입장에선 충분히 악당으로 보일 만큼.

“꼭 유혹하지 않더라도 황제와 내 사이가 좋다는 티만 내면 되는 거 아닌가?”

예를 들면, 오늘 그가 날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던 것처럼.

꼭 실제로 사귀거나 깊은 사이가 아니라도 그런 분위기만 풍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나머지는 사람들이 알아서 소문내 줄 테니까.

그제야 말라크도 내가 한 발칙한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여태껏 가만히 누워만 있던 그는 내 오른쪽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면서 밀어냈고 난 여유롭게 물러나려다가 움찔했다. 갑자기 오른쪽 팔이 당기면서 욱신거렸던 것이다.

“아, 잠깐만…….”

이러다간 뒤로 넘어가면서 뒤통수부터 침대에 떨어질 판이었다. 침대는 푹신하니까 아프진 않겠지만 너무 뒤로 자빠지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 앞에서만큼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재차 기다려 보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팔뚝이 잡혔다.

“…….”

어느덧 일어나 앉은 말라크는 내 오른쪽 팔을 내려다봤다.

확 밀어낼 땐 언제고 또 이렇게 잡아 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가 화상을 입어서 붕대를 감고 있는 부위를 정확히 쳐다보고 있음을 확인하곤 손을 뻗었다. 손등까지 내려 온 하늘하늘한 소매를 잡아 팔꿈치 위까지 들어 올리자 젖은 붕대 커버 위로 고름 같은 얼룩이 생겨 있었다.

“이런…….”

그저 나 여기 다쳤으니까 거칠게 대하지 말라는 의미로 소매를 걷은 거였는데.

하루 종일 비를 맞고 이래저래 힘을 주고 있다 보니 고름이 배어 나온 모양이었다. 안 봤으면 모를까. 다시 본 젖은 붕대와 고름이 배어 나온 것까지 확인하니까 괜히 더 아픈 것 같았다. 찜찜하기도 해서 손을 움켜쥔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말라크가 날 내려다봤다.

“…….” 

쓰러뜨린 말라크 위에 올라타 있을 땐 괜찮았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려니 민망해진 나는 작게 웅얼거렸다.

“별거 아니니까 팔 좀 놓지…….”

지저분해진 붕대가 신경 쓰여서 일단 날 잡고 있는 말라크의 손부터 떨어뜨릴 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단단히 움켜쥔 그는 다른 손으로 붕대를 건드렸다.

“잠깐, 뭐 하는 거야?”

백작저로 돌아가서 다시 치료를 받으면 된다. 그러니까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하려던 나는 붕대 아래로 드러나는 화상 자국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녹아내린 살이 기묘한 형태로 붙어선 일부분은 희게 퉁퉁 부어 있었다. 화상이 심하기도 하지만 독한 약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내가 너무 아파하니까 백작이 의원에게 말해서 통증을 느끼지 않게끔 약을 발라 주라 했는데, 그게 꽤 독한 것 같았다. 내 팔을 치료할 때마다 의사가 ‘이건 정말 독한 약입니다. 팔에 마비 증세가 느껴지면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지나치게 독한 약을 쓰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프지 않게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화상으로 인한 통증은, 정말이지 너무 싫었으니까.

그나저나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이건 아비게일의 팔이었다. 나 때문에 생긴 팔의 화상인지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쩌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말라크가 날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두 눈은 팔 위의 화상 자국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상으로 생긴 흉은 잘 사라지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에 뜨거운 물 때문에 고생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주의했다면 아비게일의 팔에 이런 상처가 남지 않았을 텐데.

아닌가. 그나마 불량품인 요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요석을 사용해서 생긴 화상이로군.”

말라크의 말에 멈칫한 나는 그에게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요석 덕후라더니, 그걸 사용해서 생긴 화상이라는 것도 단박에 알아보는 거야?”

“일반적인 화상이라면 이렇게까지 피부가 엉망이 되지 않지.”

“…….”

“이대로 두면 화상 면적이 점점 넓어질 거다.”

의외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구나 싶었지만, 하는 말이 영 무서웠다.

다양한 요석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남자이니 그쪽 전문가겠지. 그런 그가 하는 말을 불신할 수는 없었던 나는 다시 팔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화상 자국이 더 커진 것 같고, 묘하게 점점 더 아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이거 그쪽이 치료해 주시든가.”

“…….”

“요석에 대해서 잘 아니까, 치료할 줄도 아시잖아요.”

원래 불리할 땐 한없이 비굴해지는 게 답이다.

말라크의 말대로 화상의 면적이 넓어지면 고생하는 건 결국 나였다. 그렇게 되기 전에 치료를 받아 둬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나는 바로 덧붙여 말했다.

“일단은 내 계약자잖아. 내가 잘못되면 그쪽도 곤란해질 테고…….”

“그 자리에서 내가 너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애초에 널 부른 건 다른 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

“…….”

“그곳엔 너하고 나만 있었던 게 아닌 걸로 아는데?”

그랬었지. 그 자리엔 황제와 나 외에도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으니, 바로 에레즈였다. 순간 나는 커다란 망치가 내 머리통을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맛봤다.

다짜고짜 계약 운운하기에 황제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 있게 된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걸까. 그러니까, 말라크가 아닌 에레즈가 날 불러낸 것일 수도 있다면…….

“아니, 그건 좀 이상하잖아. 애초에 계약 운운해서 날 아비게일 몸속에 밀어 넣은 것도.”

“넌 그때도 아비게일이었지.”

“…….”

“그때도 지금도 아비게일이었던 거야.”

갑자기 뜨거워진 휴대폰을 떨어뜨린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넘어졌다. 그때부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변해 버렸지. 말라크의 말대로 난 그를 처음 만난 그때에도 아비게일이었다.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받은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나는 낯빛을 굳힌 채로 중얼거렸다.

“아는 게 없는데도 나 왜 이렇게 소름이 돋지?”

아직 A는 B라는 결론이 명확하게 내려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수수께끼에 비밀이 하나 더해졌을 뿐이지만,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대로 말라크 앞으로 얼굴을 내밀곤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에레즈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백작저에 꼭대기 방은 없지만 지하실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에레즈가 살아 있다면 그 그림자가 그녀일 리 없었다. 암만 소설의 진행에 변동이 생긴다 한들, 중요한 인물이 없어지는 경우도 없었다.

나는 말라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넌 진짜 에레즈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

검은 그림자는 진짜 내 앞에 있었다. 황제가 여태껏 잘만 나불대던 입을 다무는 것을 본 나는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잡혀 있던 손을 뿌리치고 싶은데, 상대의 힘이 장사라 내 뜻대로 되질 않았다. 게다가 녹은 피부는 점점 더 욱신거리면서 아파 오는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치료도 안 해 주면서 사람 복장 터지게 할 거면, 당장 이 손 놔.”

울분을 담아서 투덜댔다.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입궁하나 봐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백작저에 머무르면서 나 혼자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말 거야.”

그때가 되면 내용도 알지 못하는 사기 계약 따위 뻥 차 버릴 거다.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라구. 투덜거리며 팔을 마구 당기는데 말라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화상 때문에 아파 죽겠는데, 왜 계속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즐기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너……!”

“폐하.”

똑똑.

노크 소리와 황제를 부르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평소엔 안이든 밖이든 거의 소리가 들리질 않는데 이상하게 노크나 찾는 소리는 잘 들린다. 이것도 참 미스터리한 일이라면서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내가 황제를 상대로 너, 라고 외쳤던 호칭이 바깥에 새어나가질 않길 바라면서.

“들어와라.”

순간 당황한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리라 할 새도 없이 문이 열리고 기사가 들어왔다.

근엄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온 기사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나와 황제를 보곤 당황한 눈치였다. 더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입구에 선 채로 움찔거리던 그는 기사는 흠흠, 목을 고르며 말했다.

“칼라데인 황녀님께서 인사드리러 찾아오셨습니다.”

인사는 무슨, 황제가 날 데리고 간 후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염탐하러 온 거겠지.

그땐 당장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데리고 가 달라 부탁했고, 황제는 바로 날 안아 들었다. 솔직히 그건 좀 좋았다. 만약 황제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쓰러졌어도 신경 써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입맛이 써진 나는 여전히 오른쪽 팔뚝이 잡힌 채로, 걷어 올라간 소매를 내렸다. 말라크라면 몰라도 기사에게까지 팔에 남아 있는 흉측한 화상 자국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손목 바로 위까지 착실하게 소매를 내린 나는 말라크에게 나가 보라는 눈빛을 던졌다.

칼리 황녀와는 이복 남매라도 사이가 좋다는 설정이었으니까, 나가서 만나 봐야지. 그리고 말라크가 칼리를 만나러 가면 그 틈을 타서 몰래 빠져나가야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백작저로 돌아갈 수 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시도도 안 할 수는…….

“지금은 이쪽 일이 바빠 만날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라 전해라.”

“……왜요?”

반문은 내 입에서 나왔다.

황제가 왜 칼리 황녀를 만나 주지 않는 건가, 진심으로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라크는 내 팔뚝을 자기 쪽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내 서재로 가서 요석이 담긴 초록색 상자를 가지고 와라.”

“……지금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기사도 황제가 칼리를 만나지 않겠다는 게 의외였던 모양이다. 더듬거리며 대답한 기사는 급히 방을 나섰고 문이 닫혔다. 그렇게 다시 단둘이 남겨지자마자 말라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힘들어질 거라고 분명 말해 줬는데도 왜라는 반문이라니.”

이거 머리가 안 좋은 거 아닌가.

딱 그렇게 말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진 않았다.

문득 이 재수탱이가 위기의 상황 때마다 날 도와주었다는 게 떠올랐다. 거기다 이상한 걸 만나고 난 후 접촉이 있었던 곳에 입을 맞추어 뭔가 정화해 주는 거 같기도 했고. 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내게 이용 가치가 있어서 챙겨 주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추측을 입에 담았다. 

“나 좋아해?”

“…….”

그 순간 말라크의 미간으로 선명한 내천자가 그려지고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아까 깔고 앉았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 나쁜 티를 낸다. 사람 마음 상하게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의외로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땐 멋있게 나타나니까, 지금은 그걸로 봐줄게.”

아직 나에게 숨기는 게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계속 물고 늘어져 봤자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것도 아니고 나만 피곤해질 테니까.

나는 어서 치료해 달라며 당당하게 내 팔을 내밀었다.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던 말라크의 눈동자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묻어났지만, 모르는 척 넘겼다.

나도 팔에 화상 흉터가 남아 있는 건 무서웠다. 그래서 말라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치료를 받아 두기로 했다. 그리고 치료를 다 받으면 바로 백작저로 돌아갈 셈이었다.

분명 그때 내 생각은 그러했다.

*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면 생각하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다.

아, 정말 하기 싫어.

그냥 사표 내 버릴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곱씹는 생각이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표를 내는 순간 당장 다음 달 공과금이나 카드값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니까.

딱히 과소비를 하진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쪼들렸다. 왜 이럴까.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스팸이나 광고가 아니면 거의 울리지 않는 카톡에 뜨는 엄마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속이 매스꺼워졌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내 손은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동생 병원비 보내.]

무척 간결한 지시문을 확인하는 순간 엄청난 두통이 엄습했다.

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익숙해진 일을 처리하던 내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췄다. 자판 위에 올려진 손을 움켜쥔 나는 고개를 숙이곤 심호흡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과호흡이 와서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를 테니까.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날 진정시켰다. 괜찮다고,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몇 번이고 나 자신을 억누르면서 어떻게든 참아 내려 했다. 하지만 그러는 마음 한켠으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작은 의문이 들었다.

나만 왜 이래야 하는 거지.

설마 이렇게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고개를 숙인 채로 힘겹게 숨을 고르던 나는 자판에 손을 올렸다.

나만의 방식으로도 좀처럼 속이 진정되질 않았다. 차라리 이럴 땐 다른 뭔가를 하는 편이 나았다. 현실을 잊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렇게 내 두 손은 빠르게 자판을 두들겨 갔고, 화면에는 업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

타다다다, 쉴 새 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자판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나는 두 손을 들어 귀를 누르고는 나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듣기 싫어, 라고 말이다.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높은 천장에 나는 바로 눈을 감아 버렸다. 미친 듯 졸음이 쏟아지는 기분에 그대로 잠을 이어 가려던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방금 본 천장이 늘 보던 백작저의 내 방 천장보다 좀 더 높고 새하얗지 않았나. 느낌 탓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순간 잠이 달아나는 걸 느끼고 번쩍 눈을 뜨면서 일어났다.

빠르게 주변을 스캔하자마자 이곳이 백작저가 아님을 깨달았다. 여긴 황궁이었다. 기겁한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어제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거야?”

기사가 초록색 상자를 들고 오자 거기서 요석 하나를 꺼낸 말라크는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거창한 사전 작업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요석을 쥔 손을 내 팔 위에 갖다 댔고, 바로 피부 위로 퍼지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하던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고 머릿속마저 시원해졌다. 나는 기분 좋다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

그래. 그렇게 바로 잠들어 버렸다가 지금 일어난 거다.

“미쳤나 봐. 그대로 자 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아니, 그보다 치료를 끝냈으면 자는 날 깨워서 백작저로 돌려보냈어야 하지 않나? 언제부터 그렇게나 친절하셨다고 날 그대로 재워 준 건데?

물론, 황궁에는 수백 개의 방이 있을 테니, 그중 하나를 내가 쓴다고 해서 불편한 건 없겠지. 본인이 직접 보살펴 줄 필요도 없이, 아랫사람들에게 잘 감시하라고 하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래 버리면 소문이 또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를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이런저런 엄청난 소문이 양산되고 있는데.

물론, 내가 황제와 이렇고 저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말들은 많겠지만 그 소문이 당분간이라도 날 보호해 줄 테니까. 하지만 그걸 알아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난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커튼을 옆으로 치워 내고 바깥을 내다보자 당연하게도 백작저에서 본 것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건물 사이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큰일났네.”

똑똑.

“에레즈 영애, 일어나셨나요.”

순간 다시 침대로 점프해서 자고 있는 척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일어난 걸 알고서 찾아온 사람들을 속일 순 없었다. 그런 쪽 눈치는 백 단일 테니까. 부드러운 커튼을 두 손으로 움켜쥔 나는 머뭇거리면서 일어났다고 대답했다.

내게 친절히 대해 주던 부인의 이름은 에이다로, 남편이 콜드 자작이라고 했다. 

이름을 듣고 나니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에이다는 고인이 된 황후를 오랫동안 모셨던 인물로, 자연스레 황제까지 돌보게 되었다. 입이 무겁고 신중한 그녀는 말라크가 황제가 된 후로도 여전히 황궁 안에서 머무르면서 시녀들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를 맡아 보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일선에 나서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뒤에서 사람들에게 지시만 내려도 되었을 텐데, 오늘도 그녀는 내 옆에서 최고의 친절함을 베풀어 주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말씀해 주셨다면 거기에 맞춰서 준비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식사를 잘 못 하신 것 같아서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요.”

“아니요. 제가 원래 아침에는 소식을 하는지라…….”

“그러셨군요.”

대답을 하면서도 부인의 얼굴엔 여전히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뭐가 저렇게나 걱정스러울까. 난 그저 여전히 황궁에 있다는 사실에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접시를 다 비우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부인 덕분에 잘 씻고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예쁘게 틀어 올렸다. 내 입장에선 고마워할 일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부인이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것 같다며 미안해하는 게, 나는 더 죄송했다.

그나마 부인이 챙겨 주었기에 식사도 한 거지 아니었다면 진즉 튀었을 거라는 말은 꾹 삼키고,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내 웃는 얼굴에도 ‘어쩌면 좋지,’라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부인의 모습에 나는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원래 황제라는 지위가 매일매일이 한가한 것은 아니다.

원작에서 황제의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잘은 몰라도 오전에는 조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날그날 제국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보고를 받는 시간을 가지고선 차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일을 하는 패턴이었던 것 같다.

오후가 되어야 그나마 한가해지는 것 같으니 나는 그 전에 여길 뜨면 된다. 마음을 정한 나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러면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폐하도 뵙지 않고 바로 돌아가시게요?”

지금 같은 상황에 내가 그놈을 왜 만나냐는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폐하께선 늘 바쁘신 분이고,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

“게다가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아버님께 아무런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것도 신경 쓰이네요.”

마지막에 슬며시 백작을 들먹이자 부인은 바로 납득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진짜는 아니지만 이럴 땐 부모님 들먹이는 게 최고긴 하구나.

그러면 이만 가 보겠다면서 일어나려는데 부인이 바로 말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마차가 준비되는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건 제가 알아서…….”

“아니요. 이게 제 일인걸요. 편안히 쉬고 계세요.”

“…….”

상냥한 그녀에게 차마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부인은 우아하게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나는 바로 구부정하게 앉으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

멍하니 있던 나는 오른쪽 팔을 내려다봤다.

부인이 새로 준비해 준 드레스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오는 스타일이어서 그 아랫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덕분에 화상은커녕 흉 하나 없는 팔의 멀끔해진 상태를 잘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화상이 사라져서 좋긴 하다. 나는 매끄러운 피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당분간 시간을 번 셈일까.”

백작은 궁에 들어간 내가 잘하고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거다. 지금쯤 내가 황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은 백작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저기 파다하게 퍼졌겠지. 정말 잠만 잤을 뿐 아무 일도 없었지만, 멋도 모르는 사람들은 저들 좋을 대로 떠들어 댈 테고.

소문 같은 건 정말 싫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문이 날 도와주고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싶어 괜히 입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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