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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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물속에 앉자마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여태껏 알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목욕 시중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에이다 부인에게 등 좀 밀어 달라고 말할 뻔했다. 그걸 꾹 참고 천근만근인 팔을 움직여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카락을 말리는 거나,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에는 부인과 시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그녀들이 알아서 해 주었기에 세상 편했다. 그래서 재차 눈이 감기는 것 같았던 나는 영애, 라는 부름에 움찔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앉아 있던 화장대 거울 안에 비치는 에이다를 봤다.

“눈을 좀 붙이시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그랬다간 반나절 꼬박 자 버릴 것 같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도 부인은 걱정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이럴 땐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부인을 돌아봤다.

“괜찮으면 편지 한 통만 전해 줄 수 있으세요?”

“그럼요. 누구에게 보내시려고요.”

“마데손 남작 부인에게요.”

“알겠습니다.”

백작이 아닌 남작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에 의문을 드러낼 만도 한데, 부인은 되묻는 일 없이 바로 종이와 펜을 준비해 주었다. 거기다 주변 사람을 물려서 내가 편하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줬다. 나는 미리 쓸 내용을 정리하곤 빠르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

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글씨를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이 세계에서의 적응력이 몇 단계나 올라갔으니까.

나는 마데손 남작 부인에게 내가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백작저를 찾아가 에반에게 내 소식을 전달해 주길 부탁했다.

원래라면 백작에게 전달해야겠지만, 애초에 그 인간은 내가 죽든지 말든지 전혀 관심 없을 테니까. 나중에 돌아가서 얼굴을 마주하고선 다녀왔습니다, 정도면 충분하다.

잉크가 마르길 기다린 후 잘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에이다 부인이라면 실수 없이 마데손 남작 부인에게 잘 전해 줄 거다.

나는 편지를 손에 든 채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라시드는 날 보자마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태도가 정중해졌다. 앞서 있었던 일들로 내가 황제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런 사람과 척질 필요는 없을 테니, 그냥 좋게 좋게 가야겠지. 나는 양 입꼬리를 올려 보이곤 그 앞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세 번째 들어가는 방이라서인지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았다. 주눅들 만큼 으리으리한 방에도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전에는 없던 침대 옆 의자가 바로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 저기에 앉아서 황제놈 간병을 하라는 거지. 의자로 직진한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뒷머리를 기대었다.

“…….”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멍때리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진짜 피곤하네. 예전에 프로젝트 때문에 일주일 동안 야근할 때에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데 아까는 눈만 붙이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점점 맑아진다.

그래서 다시 눈을 뜨며 자세를 바로 잡고 앉아 말라크를 바라봤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보는 이쪽도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쓰러질 정도면 그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감옥까지 찾아와 주었단 말이지.

가만히 말라크를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때마침 방에 들어서는 궁의와 시선이 부딪혔다.

딱히 수상쩍은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를 눈치가 보여서 눈을 굴리다가 슬그머니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러자 내 앞으로 다가온 궁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폐하를 위해서 쉬지도 않고 바로 이리로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거야 뭐, 그쪽에서 당장 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잖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딱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만 있자니 궁의가 말라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의 건강이 이렇게나 안 좋아지셨던 적은 처음입니다.”

여태껏 내내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걱정해 줄 사람은 충분하니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으면서도, 자꾸만 말라크에게로 시선이 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식을 잃고 있던 나흘간 말라크가 버티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정말은 나만큼 몸이 안 좋았는데, 내가 일어날 때까지 버텼던 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하던 난 쓰게 웃었다.

……아니다. 이러면 너무 애틋해지잖아.

나하고 말라크의 관계에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선 눈을 뜨시자마자 영애를 찾으셨습니다.”

“…….”

“제가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듣질 않으셨지요. 영애께서 폐하께 중요한 분이시라는 걸 제가 모르고 크나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궁의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고개를 숙이자 나도 당황했다.

“이러지 마시고 어서 고개를 드세요.”

“부디 폐하께서 정신이 드실 때까지 영애께서 곁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시게 된다면, 그땐…….”

“…….”

“요석을 사용하는 걸 그만두시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는 궁의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와 말라크까지 연달아 쓰러진 건 요석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는 요석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다시금 살아난 검은 불꽃이 기사들뿐만 아니라 나와 말라크마저 집어삼켰을 테니까.

위급한 상황에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를 도와서 요석의 힘을 끌어올렸던 것 같다. 덕분에 말라크의 반지가 산산조각 나 버렸지. 어쩌면 그때 나와 말라크도 그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워낙 요석을 좋아하셔서 과연 제 말을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말씀은 드려 보지요.”

“감사합니다. 아마 영애의 말씀이라면 폐하도 들으실지 모르는…….”

“요석에 지나치게 기대게 되면 그것에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까요.”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뜬금없게도 베르디가 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잡아먹힌 게 아니고?’

장난스럽게 찌르는 듯한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가 잘못되셔서는 안 될 일이니까요.”

“…….”

여태껏 내게 부탁할 때에는 조심스럽기만 했던 궁의의 눈빛이 경직되었다. 그 표정에서 요석을 자주 사용하면 안 되는 거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말라크가 요석을 모으는 이유가 뭘까. 처음에는 단순히 취미인 줄 알았던 그 행위에 다른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라크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서 본 그건 대체 뭐였을까.

그건 단순한 무의식의 세계였던 것일까.

아니면 어린 말라크에게 정말로 일어났던 일인 걸까.

그때 말라크의 품에 안긴 채로 날 올려다보던 것을 떠올린 순간 손끝이 차게 식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자, 날 바라보던 궁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웅얼거리듯 말을 건넨 궁의가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나는 이내 눈을 감았다.

아, 답답해.

탄식과도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곧장 침대 위로 걸터앉아 말라크를 내려다봤다. 잠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잘생긴 사람들은 눈을 뜨든 감든 잘생긴 건 똑같은 모양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말라크, 눈 좀 떠 봐.”

이렇게 자고만 있지 말고 우리 둘뿐이니까 일어나서 대화 좀 나누자.

너와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건 이제 질렸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아니라면 최대한 믿어 줄 테니까 한번 말해 봐.

네가 어렸을 때 동굴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거기서 널 끌어안고 있던 그림자의 정체가 지금 내 앞에서도 알짱거리는 그것인지.

지금 날 해코지하려고 꿈이든 현실에서든 자꾸만 나타나는 그림자가 정말로 에레즈라면, 여기서 그녀는 육체도 없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네가 왜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던 건데.”

왜 내 방 컴퓨터에 내가 읽은 소설의 한글 창이 떠올라 있는 건데.

왜 내 꿈속에서 내가 〈영애의 생존일기〉를 쓴 사람인 것 같은 장면을 보게 되는 건데.

어느덧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더없이 심각하게 말라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살짝 요석에게 홀려 버린 걸까.”

요석이 인간들에게 도움만 주는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인간들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해를 끼치는 종류도 있었다.

갑작스레 전염병이 돈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잖아. 빌어먹을 검은 손인지 귀신인지가 내게 충격 요법을 주는 거야. 내게 큰 타격을 입혀서 정신력을 무너뜨린 후에 홀라당 내 몸을 차지할 속셈인 거지.

“어림도 없지.”

내 멘탈은 그 정도로 쉽게 무너지지 않아.

여태껏 거지 같은 직장에서 말도 안 되는 인간관계도 죄 이겨냈었잖아. 가족들이 힘이 된다거나 도움이 되어 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망할 상황에서 용케도 잘 버텨냈었다. 웬만한 걸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꿈속에서 본 엉망진창의 방이 떠오른 순간, 역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나는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한 냄새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주변을 살피면서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그러다가 정말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착각했나.”

하지만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했다.

냄새는 아주 오랫동안 묵은 쓰레기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했다. 정리되지 않은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그 사이에 파고든 또 다른 물건이 합쳐져 나는 냄새들.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치우지 못했던 물건들은 곧 거대한 쓰레기의 산이 되어 버렸다. 그사이에 방치되듯 웅크리고 누워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아니야.”

중얼거린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부정해 봤지만, 환영 같은 장면은 점점 또렷해졌다.

불안에 엇박자로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머릿속이 울리는 듯했다. 낯선 감각에 당황한 나는 급히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말라크-.”

손을 세게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이렇게 계속 누워만 있지 말고 정신 차려 봐.”

나도 아직은 온전하게 회복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자꾸만 이상한 게 보이고 이상한 냄새를 맡는 거지. 어차피 여기 사람들에겐 내 증상을 말해도 제대로 모를 테니까 네가 들어 줘.

계속해서 말라크의 손을 흔들어 봤지만, 이런다고 해서 그가 깨어날 리 없었다. 거기다 몸 상태도 안 좋은 사람을 억지로 깨우면 안 된다. 굳은 얼굴로 말라크를 내려다보던 나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대로 말라크 옆에 작게 웅크리듯 누워 눈을 감았다.

“…….”

그렇게 잠시 있다가 아예 말라크 옆에 붙어서 그의 팔에 이마를 기대었다.

편하진 않았다. 나도 혼자서 침대 차지하고 자는 게 훨씬 더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느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가슴 위에 한 손을 올렸다. 여전히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레 잠들어 버렸다.

*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평생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그런 기억은 할머니였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3년 동안 할머니와 함께 지냈었고 그때 받았던 사랑과 관심이 내 삶을 지탱해 주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았었다는 위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멈추었다. 행복한 기억은 갱신되지 않은 채로, 어린 시절 3년의 기억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버텨 왔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추억도 되풀이해 회상하다 보면 낡아진다는 걸.

시간은 흘러가는데, 날 지탱해 줄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조금씩 아니, 어쩌면 급속히 무너져 내려갔던 것 같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나만, 이라는 생각만이 늘 머릿속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할머니가 해 주셨던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강아지는 나중에 커서 작가가 되면 되겠다.’

‘그게 뭔데요?’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말은 안 했지만 할아버지가 작가셨어. 생계 때문에 그만두셔야 했지만……, 나는 우리 강아지에게 할아버지의 재능이 있다고 믿는단다.’

옆에서 빨래를 개면서 하는 말을 귀담아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할머니가 기뻐했으면 하는 마음에.

‘난 커서 작가가 될래요.’

그런 말을 하긴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렸을 적에 잠시 스쳐 지나간 기억일 뿐이었다. 작가가 되라는 할머니의 말도, 그 말에 되겠노라 대답했던 기억은 오래전 추억으로 묻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꾸게 되는 걸까. 모처럼 할머니 꿈을 꿨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게 말이다.

내가 에레즈의 치밀한 작업에 제대로 걸려 버린 모양이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주욱 늘려질 정도로 기지개를 켜면서 으그그, 신음을 흘렸다.

“……죽겠네.”

어떻게 된 게 기지개를 켜도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면서 입맛을 다신 난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게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파고들자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일정하게 울려 퍼지는 심장 박동은 내 것이 아니었다.

“…….”

순간 잠이 확 깨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바로 눈을 뜨자마자 내 시야를 막는 널찍한 가슴팍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슴팍 위에 당당하게 한 손을 올리고 있는 내 손도.

어떻게 하면 말도 안 되는 곳에 올려진 저 손을 자연스럽게 치울 수 있을까.

망설임과 고민이 교차되는 순간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말라크가 계속 잠들어 있는 상태라면 냉큼 손을 떼어 내곤 모르는 척 굴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옆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던 말라크와 시선이 부딪쳤다.

“…….”

진짜 이렇게 곤란했던 적이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이 올려진 가슴을 세게 움켜쥐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자는 사람을 왜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폐하, 기침하셨습니…….”

내가 벌떡 일어난 순간 방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 사이로 라시드와 궁의도 언뜻 보이는 걸 확인한 나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던 중에 뭔가가 머리에서 툭 떨어지는 느낌에 내려다보자 반짝이는 귀걸이였다.

저걸 줍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가 볼까. 일단은 어디라도 좋으니까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나는 말라크의 가슴에서 손을 떼어 시트 위에 올렸다.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시트 감촉을 만지작거리자 말라크가 한 팔을 들었다.

그러자 얼어붙은 채로 있던 자들이 헛숨을 삼키더니 다급히 문을 닫고 퇴장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내 체면의 문도 닫혔나 보다. 그냥 다 귀찮고 싫어져,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미치겠네.”

“뭐가.”

지금 내가 미칠 것 같은 이유 대부분을 차지할 인간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다. 하지만 침대 위에 기어 올라가 옆에 붙어서 잠든 게 나니까 그에게 뭐라 하는 것도 이상했다. 적당히 누워 있다가 내려왔어야 하는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황제인 말라크를 깨우러 올 때까지 옆에 누워 자 버렸던 거다.

이건 정말 무례한 짓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바깥에 있는 저 사람들이 더 어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말라크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옆으로 누워서 머리를 괴고 있는 모습이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던 거야?”

“조금 전?”

“그러면 나 좀 깨우지그랬어.”

“깨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 품으로 파고들더군.”

품에만 파고들었던 게 아니라 가슴에 손을 올리기도 했었다. 진짜 단단했지. 쓸데없는 감상을 떠올리며 시트를 잡았다가 놓은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내가 다시 누울 줄은 몰랐을까. 편하게 자세를 잡고 있던 말라크가 주춤하나 싶더니 그대로 일어나 앉았다. 그대로 날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천장을 올려다봤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 얼굴 쳐다보기가 겁이 났다. 저건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볼 게 분명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라시드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가 제일 신경 쓰였다.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아픈가.”

“……응.”

힘없이 중얼거린 나는 이마 위로 손 위치를 옮기면서 말라크를 흘깃 봤다.

“널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엄청난 활약을 한 덕분이지.”

내가 아니었더라면 어린 말라크는 동굴 속에서 그 이상한 괴물과 남겨졌을 거다. 그 뒤로 일이 더 있긴 했지만, 일단은 내가 도와준 일에 대해서만 떠들어 볼 참이었다.

그리고 말라크는 내 활약상을 순순히 인정해 주지 않았다.

“활약했다는 것치고는 중간에 날 내동댕이치고 혼자 사라져 버렸던 것 같은데.”

“…….”

이상한 느낌에 나는 말라크를 올려다보았다.

침대에 편안하게 앉아서 내려다보는 그 표정에 약간의 불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때 날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던 건데.’라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기가 찼다.

“……거의 다 빠져나왔어. 있는 힘껏 달리기만 하면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잖아.”

다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뛰어서 탈출할 수 있잖아.

하지만 그때의 말라크는 어린애였다. 지금처럼 몸이 단단하지도 않은, 그저 어린애.

설상가상 우리의 뒤를 쫓던 그림자는 정말로 포악하고 괴상하게 생겼었지. 그런 공포스러운 존재가 쫓아오면 암만 말라크라도 두려웠을 거다.

“……무사히 잘 벗어났어?”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겠지?”

“…….”

그래. 그 괴물에게 붙잡혔더라면 말라크가 지금 여기서 저런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지도 못했겠지. 그대로 동굴을 빠져나와 무사히 탈출해 아카데미로 돌아갔을 거다. 그리고 며칠 지난 후 바로 제국으로 돌아왔겠지. 무사히 돌아온 것과 별개로 동굴 안에서 겪은 일은 어린 말라크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을 테니까.

그때부터 말라크에게 요석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을까.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가던 난 말라크에게 굳은 시선을 보냈다. 내가 이렇게 쳐다봐도 그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날 보는 거냐고 묻는 듯한 얼굴에 내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린 손을 움켜쥔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도와준 걸 기억하고 있어?”

“기억한다.”

“…….”

“아직 생생히 말이야.”

“……그러면 어렸을 적에 본 날 계속 기억하고 있었어?”

여태껏 나는 말라크가 나와 계약 운운하던 순간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그가 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걸로 바뀌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말라크는 훨씬 더 이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는 거다. 

“…….”

순간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옆으로 몸을 굴려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바로 손목이 잡혀서 똑바로 눕혀졌다. 기다렸다는 듯 내 위로 올라타는 말라크를 확인한 나는 있는 힘껏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하지만 내가 암만 용을 써도 말라크 아래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려도 우습지도 않다는 양, 그는 내 오른쪽 어깨를 잡아 누르면서 완전히 내 위에 주저앉았다. 허리 위로 느껴지는 묵직함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야! 너, 무거워……!”

“그렇겠지. 그러니까 괜히 힘쓰지 말고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기는.

너라면 그럴 수 있겠냐. 난 말라크를 노려봤다.

“웃기지 마!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이런 상황이 뭔데.”

“…….”

“에레즈가 호시탐탐 네 몸을 노리고 있는 상황? 툭하면 널 이용해서 나하고 이어 보려는 백작?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널 괴롭히려 용쓰는 주변 사람들?”

말라크의 튼실한 허벅지를 밀어내고 빠져나오려던 난 움찔해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날 짜부라뜨리듯 올라탄 게 기분 좋은 듯, 한껏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봤다.

“그런 상황에선 누가 보더라도 내가 가장 안전한 거 아닌가?”

“…….”

아니, 그건 아니지.

지금 저렇게 수상쩍게 웃는 주제에 자기가 제일 안전하다고 떠들어 대다니.

나는 말라크의 허벅지에 두 손을 올리곤 있는 힘껏 밀어 댔다. 이래 봤자 꿈쩍할 리 없었다. 괜한 힘 빼기란 걸 알면서도 몇 번 더 시도하던 난 결국 포기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헐떡거리는 내 가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

헐떡이는 숨결에 섞인 열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이마가 뜨끈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몽롱하니 모든 것들이 뭉개진 것처럼 보였다. 한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네 무의식에서 본 것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어서 이래?”

말을 함과 동시에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리가 되지 않아 지저분하고 어두운 방. 

켜져 있던 모니터와 내가 글을 썼다고 알려주는 듯한 주고받는 메시지들.

아연실색했던 내가 돌아본 곳에 서 있던 말라크 등.

“거기서 본 것들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그 상황만을 본다면 영락없이 내가 소설을 쓴 원작자가 되어 버린다. 

전에는 왜 하필 나인 거야, 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말라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그런 일이’가 아니라 ‘무슨 수로 나를’이라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왜 하필 나였던 게 아니라, 나라서 이렇게 된 거였다.

나는 말라크의 허벅지에 올려진 손끝에 힘을 준 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아니야.”

“…….”

기어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못 할 말도 아니다. 내가 아닌 게 맞으니까. 내가 〈영애의 생존일기〉를 썼을 리 없으니까.

“넌 뭔가 대단히 착각을 한 거야. 나는…….”

난 아니야.

다시 한번 부정하려고 한 순간, 혀끝이 얼어붙었다.

갑자기 정말로 내가 〈영애의 생존일기〉를 쓴 작가면 어쩌나 싶었다. 여태껏 토막토막 꿈꾸었던 장면들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결론은 너다,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하지?

혼란스러움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문득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바로 코앞에 말라크가 있었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굳은 눈빛은 매서웠지만, 그 안에 감추어졌던 다른 감정이 읽혔다. 나를 향한 그 감정이 부담스러웠다.

떨리는 눈으로 말라크를 바라보던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크게 들썩여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켜.”

만약에 이렇게 말했는데도 말라크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더 큰 소리를 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말라크는 순순히 내 위에서 물러났다. 그가 옆으로 물러서고 나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던 나는 침대 옆으로 내려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휘청였지만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았다. 난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영애…….”

누군가 날 부르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 지나쳤다.

복도로 나오자 근처에 시녀들과 함께 있던 에이다가 눈에 들어왔다. 늘 다정한 그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난 바로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날 보고 미소 짓던 에이다는 놀란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대로 날 품으로 끌어당긴 에이다는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내 어깨를 끌어안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여 주었다.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염려치 마세요.”

숨죽인 채로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에이다는 날 방으로 데려가 주었고, 곧바로 사람을 물렸다. 혼자서 날 부축해서 침대까지 데리고 간 그녀는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따뜻한 차나 시원한 물 중에서 뭐가 필요하세요?”

목이 마르지 않으니 괜찮다고 말하려던 순간 목구멍 안쪽이 까끌했다. 나 목이 말랐구나. 내 상태를 인지하고는 물을 달라 하자 바로 준비해 주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속이 편안해졌다.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기면서 정신없이 방을 빠져나온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싶었다. 난 뺨을 쓰다듬으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많이 놀랐죠? 별건 아니고…….”

“괜찮습니다. 일부러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다정한 속삭임에 나는 에이다를 바라봤다.

온화한 표정을 보는 순간 확실히 몸의 긴장이 이완되는 걸 느꼈다. 에이다가 원하는 건 내가 변명하는 게 아니라 편안하게 있는 거였다.

에이다는 내가 들고 있던 잔을 가지고 갔다.

“마데손 남작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고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릴까 싶었지만, 왜인지 그분의 답장을 기다리실 것 같아서요.”

“……지금 바로 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 대답을 예상한 것처럼 에이다는 안쪽 서랍장에서 편지를 들고 와 건네주었다. 편지를 받아 든 나는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인지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척 손을 움켜쥐었다가 펴고는 바로 봉투를 열어서 편지를 꺼냈다.

[바깥은 소란스럽지만 백작저는 조용하단다. 네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에반의 곁엔 무술 선생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단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나 보살피렴. 바라건대, 사고 좀 그만 치거라.]

짧은 편지 위에는 내가 궁금해하던 것들이 다 담겨 있었다.

말미에 사고 좀 그만 치라는 부분에선 상황에 맞지 않게도 웃음이 나왔다.

“여전하시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웃을 일은 이 편지뿐이었다.

아닌가. 다른 것도 있던가 싶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에이다를 바라봤다.

“……이렇게 빨리 남작 부인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고마워하실 건 없습니다.”

“어떻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에이다는 겸손했지만, 정말은 날 생각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고마움을 표현했다.

“진심으로 고마워요. 나중에라도 꼭 보답할게요.”

“……일단 좀 누워서 눈 좀 붙이세요. 낯빛이 너무 안 좋아요.”

당장 구체적으로 보답할 방법이 있다면 이것저것 해 주겠노라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당장 내 코가 석 자였다. 내 한 몸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는 와중에 누굴 챙기겠다는 건지.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이곤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러자 부인이 내 몸 위에 시트를 덮어 주더니 방 안의 커튼도 일일이 내려 주었다. 대낮이라 밤처럼 어두워지진 않아도 아늑한 분위기가 풍겼다. 한결 편안해진 기분에 어깨를 크게 들썩여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에이다가 방을 나가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릿속은 점점 맑아질 뿐,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겠지. 여기에 오기 전에 황제 옆에 붙어서 그렇게 푹 잘 잤는데.

다시 눈을 뜬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고는 바로 일어났다.

“답답해 미치겠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인상만 긋고 있길 잠시,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향했다. 곧장 문을 열고 나가자 시녀들을 한데 모아 두고서 그녀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던 에이다가 당황한 듯 날 돌아봤다.

“영애?”

분명 잔다고 누웠던 사람이 다시 나오는 게 이상했으리라.

나도 잠이 왔다면 그대로 푹 자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잠은커녕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들로 머릿속만 복잡할 것 같았다. 이럴 땐 차라리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몸을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산책하고 싶어요.”

에이다는 지금 여기서 내 부탁을 가장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과연 그녀가 산책하길 원하는 내 부탁을 들어줄까. 난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에이다는 언제나처럼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궁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면 제가 잘 알고 있지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녀의 말에 한결 숨통이 트였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정원은 산책로까지 겸해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중앙에 자리한 크고 화려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각각 구역이 다른 느낌으로 꾸며졌는데, 그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어때요? 산책하기에 괜찮은 곳이지요?”

“너무 훌륭한데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꽃들이 사방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부인을 돌아보자 그녀는 양산을 건넸다.

“마음 이끌리는 대로 산책을 즐기세요. 저희는 조금 뒤에서 따르겠습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심적으로 복잡한 상태라는 걸 아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걸을 수 있게끔 배려해 주는 거겠고. 나는 양산을 받아 들면서 작게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내 인사에 옅은 미소를 지은 에이다가 뒤로 물러나자 나는 받은 양산을 펼쳤다.

조금 무겁고 천도 두꺼운 편이었지만, 몹시 화려했다. 한눈에 봐도 패션 아이템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걸 알 것 같았다. 이런 것도 있구나 싶어서 양산을 빙글빙글 돌려 보던 나는 한쪽 어깨에 양산을 걸치곤 느린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

그저 말라크가 사기를 쳐서 날 아비게일에게 빙의시킨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나는 지금 이 모습으로 어린 말라크와 만난 적이 있었던 거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말라크는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을까.

날 불러들인 것도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원작자라고 착각하고 이런 일을 꾸몄을까.

작가가 자기 글에 빙의하는 소설은 몇 개 읽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그 사람이 썼던 글이고, 난 아니다. 이곳에 와서 꾼 꿈 중에 ‘네가 이 소설을 쓴 작가야.’라는 어필을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난 믿지 않는다.

“정말로 내가 썼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나 장편을 썼는데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거야말로 정상이 아니라고. 난 비웃으려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웃고 싶어도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그대로 멈춰 선 나는 양산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숨죽인 채로 바닥만 내려다보던 난 작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곳엔 나만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와 마주쳐서 좋을 게 없었다.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에레즈 영애, 라는 단어가 들렸다.

“…….”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대체 누가 그 이름을 꺼내는 건가 싶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산책로 옆으로 키가 큰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그 뒤쪽으로 아담한 원형 파고라와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건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로, 개중 몇은 낯이 익었다. 누군가 하고 유심히 살피자 일전에 칼라데인 옆에 찰싹 붙어서 아부란 아부는 죄 늘어놓던 인간들이었다.

오늘 또 무슨 일로 입궁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들이 모여서 떠들어 댈 말이라면 뻔했다. 나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단 걸 알기에 자리를 피하려 했다.

“황녀님께서 언제쯤 밖으로 나오실까요?”

“폐하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에레즈 영애를 어떻게 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그렇다네요. 폐하께서 보살피고 있던 에레즈 영애를 굳이 끌어내선 감옥에 보냈다던데. 거기까지만 했어야지요. 도를 넘어서니 결국엔 폐하께서 직접 움직여서 영애를 구해 주셨다잖아요.”

“어머나 세상에, 폐하께선 에레즈 영애께 진심이신가 보네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헷갈렸다.

원래대로라면 칼리를 두둔하고 내 욕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날 두둔하고 칼리를 비난하는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걸까.

“이 일 덕분에 확실하게 폐하의 눈 밖에 나신 거지요. 웬만해선 폐하께서도 마음을 풀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황녀께서도 더는 황궁에서 지내실 수 없게 되는 거 아닌가요?”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요.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한번 출가했으면서도 다시 돌아와 황궁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데, 이번 일로 완전히 어긋나 버린 셈이죠.”

“어차피 황후가 생기면 황녀님은 궁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지요. 그동안 주인 없는 우리에서 황후 노릇을 해 왔는데, 안된 일이네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직한 웃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듣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칼리에게 찰싹 붙어 입안의 혀처럼 아부를 떨어 댔지만, 이번 일로 황제와 칼리 관계가 어긋나 버린 것 같자 바로 갈아탄 거다.

그래도 그렇지, 칼리를 조롱하는 데 날 들먹이다니. 지금이야 말끝마다 에레즈 영애라고 불러 주고 있지만 상황이 변하면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가 돌변할 거다.

뒷말하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지만, 이건 참…….

“…….”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에 서 있는 에이다가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는 모습에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자 싶었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영 불쾌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내 불쾌함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을 이어 나갔다.

“그나저나 케이틀린 백작이 아주 제대로 된 딸을 골라 왔네요.”

“누가 아니래요. 첫 만남부터 폐하를 홀리더니, 참으로 재주가 좋아요. 어쩌면 백작가의 광산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도 폐하와 에레즈 영애를 만나게 하기 위한 수작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인데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어요. 하긴 바깥에서 자라서 배운 게 몸 쓰는 것밖에 없을 테니, 초반에 확실하게 폐하의 눈에 들었겠지요. 하지만 폐하가 어떤 분이십니까. 저러다가도 폐하께서 싫증을 내시면 금방 끝날 일이지요.”

“아무렴요. 우리들의 폐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제국의 황후는 제대로 된 가문의 좋은 평판을 듣는 여성이 선택되어야 하지요.”

그래. 그래서 너희들 중 하나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 이거지?

그런데 난 황후가 누가 되든지 하나도 관심 없거든. 그런데도 굳이 날 들먹이면서 그렇게 모욕적인 말을 해야 되겠어? 광산 사건을 일부러 일으켜?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내가 그때 나무 마수에게 걸려서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기나 해?

그때 한바탕 경쾌한 웃음을 흘리던 여자들이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더 듣지 않으려면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게 답이었지만, 나는 당사자인 내가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는 걸 저것들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난 조용히 양산을 접고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있는 힘껏 나무 허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새 몇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새가 앉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네.

다른 방법을 썼어야 했나 싶어 머리를 긁적이자 나무 뒤에서 나와 칼리의 험담을 늘어놓던 여자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던 그녀들은 날 보고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전에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떠들어 대더니 왜 저러나. 나는 양산을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 미소에 정신이 돌아온 건지 한 영애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에레즈 영애,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건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요?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어서 잘 몰랐네요.”

“어쩌면 이리도 뻔뻔하게……!”

“그래요. 난 뻔뻔해요. 그리고 기억력도 아주 좋지요.”

난 양산을 세워선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래서 내 험담하는 것들도 아주 오래오래 잘 기억하는 편이지요.”

“…….”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것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황궁 안에선 어디에나 듣는 귀가 있다는 걸 나보다 더 잘 아실 분들께서 왜 이리도 경솔하실까. 나야 그렇다 쳐도 황녀님까지 욕보이는 건 심하지 않나요?”

“우, 우리가 언제 그랬다고……!”

“내가 들었다고.”

“…….”

딱 잘라 내듯 반말을 내뱉자 영애들은 크게 입을 벌렸다. 어찌 된 게 뒷말하던 걸 들켰을 때보다 더 경악하는 것 같았다. 내 반말이 그렇게나 기분 나빴을까. 그렇겠지. 애초에 나를 자신들과 같은 선상의 존재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니.

얼마나 날 우습게 여겼으면 저러는 걸까.

저것들이나, 원래 내가 있던 곳에서 나에 대해서 떠들어 대던 인간들은 말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내 일을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걸까. 나는 왜 그걸 듣고만 있었을까. 이렇게 앞으로 나와서 대놓고 지적하는 건 별것도 아니었는데.

나에겐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인간들인데.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앞으로 두 번 다시 안 보기를, 오히려 더 바라게 되는 자들인데.

처음부터 정리해야 하는 인간 관계였던 거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어.

“멍청하게도…….”

혼잣말처럼 내뱉은 중얼거림에 앞에 서 있던 여자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아무래도 멍청하다는 말이 자기한테 한 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착각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던 나는 양산을 내리면서 말했다.

“앞으로 나와 관련된 말을 할 때에는 주변을 잘 살펴야 할 겁니다. 다음에 또 이딴 촌스러운 행동을 하다가 걸리면 그땐…….”

“그. 그땐 뭘 어쩌려고요! 여, 영애께서 뭘 어쩌실 건데요!”

힘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겁 주기 용으로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던 나는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엔 발끝도 못 들이게 될 겁니다.”

“…….”

잘은 몰라도 이 시대의 인간들에겐 연회란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연회에 참석해서 새롭게 교우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거나 본인의 입지를 다지고는 했으니.

다양한 정보가 수도 없이 오가는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건 엄청난 벌칙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영애께서 그런 영향력을 행세하실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는 없지만 폐하는 다르지요.”

“…….”

“여러분들께서 말씀하신 대로 폐하는 지금 저에게 푹 빠져 계시는걸요? 입버릇 안 좋은 인간들 몇 걸러 달라고 말씀드리면 충분히 들어주시겠지요.”

그제야 그녀들은 재앙을 맞닥뜨린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런 걸 봐도 딱히 기분이 풀리진 않았지만, 이쯤 하자 싶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제가 기분이 좋지가 않아 여러분들을 보고 있기가 힘드네요. 그럼 이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영애, 제가 사과드릴 테니까……!”

상황 파악이 빠르게 된 영애 하나가 급히 사과하려 했지만, 난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이제 어쩌냐는 울먹거림이 들려왔다.

어쩌긴 뭘 어째. 다음에는 내 뒷말을 안 하면 되는 거지.

해도 안 들리게끔 하든가. 어쩌면 저렇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떠들어 대는 건지. 진짜 내가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다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양산을 다시 펼쳤다. 그러자 꽤 튼튼해 보였던 손잡이 부분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내가 열이 받긴 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슬쩍 웃었다.

그렇게 다시 산책에 나서니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조금 전 그 밉상들하고 한 판 했다고 기분이 조금 풀렸다. 나도 참 성격이 그렇게 좋진 않다니까. 양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걷던 나는 근처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

이렇게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자니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실감이 덜 났다.

물론, 새파란 하늘이나 선명한 구름의 형태가 신기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내가 살던 곳에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바로 다른 것들이 보였다.

예를 들어서…….

“에레즈 영애.”

“…….”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양산을 들었다.

거기엔 몇 번 봐서 얼굴이 익숙한 한 기사가 서 있었다.

일전에 입궁했을 때 말라크에게 데려다주었고, 감옥에서와 지금을 합하면 세 번째 만남이었다. 잘은 몰라도 라시드하고는 다른 의미로 말라크의 측근이라는 느낌이었다. 

칼리 황녀가 그를 오웬이라고 불렀던 것까지 떠올리곤 잠자코 있으려니 그가 말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에레즈 영애.”

“…….”

역시나 그런 건가.

나는 양산 끝부분을 두 손으로 잡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모르는 척 넘겨 버리려고 했지만, 기사의 시선은 집요했다. 어떻게든 날 데리고 가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쳐다보는데 마냥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전 지금 산책 중인데요.”

가벼운 저항을 해 보자 오웬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산책하십시오.”

“진심으로 하는 말이죠?”

농담 같은 게 아니라.

존재감이 약하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서 가만히 쳐다보자 돌아오는 건 진득한 미소였다. 무척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기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다가오는 날 본 오웬은 이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재촉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냥 폐하께서 당장 절 데려오라고 닦달해서 기사님이 이렇게 행동하는 거라고 이해할게요.”

“말씀하신 대로, 폐하께서 아닌 척 재촉하시긴 했지요.”

그냥 농담하듯 꺼내 본 말이었는데 저런 대꾸가 돌아오면 움찔하게 된다.

뭐야. 진짜냐 싶어서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기사는 조용히 앞을 가리켰다. 더 말을 해 봤자 내 무덤만 파게 되는 것 같아서 조용히 움직였다.

나는 바로 오웬을 따라가지 않고 여태껏 뒤를 따라와 주었던 에이다에게 걸어갔다.

“폐하께서 부르신다고 하네요.”

“조금 전까지 함께 계셨는데 또 찾으시네요.”

그리 말하는 부인의 눈동자에는 ‘대단하세요.’라는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걸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황제가 부른다는 소식이 전혀 기쁘질 않았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그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그러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셔서 드레스를 갈아입으시겠어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폐하께선 영애의 자연스러운 모습도 좋아하실 테니, 괜찮으실 겁니다.”

“…….”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걸 알아서 더더욱 뭐라 할 말이 없었던 난 뺨에 손을 댔다.

그래도 오늘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인데 뭐라도 좀 찍어 발라야 하나 싶었던 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싶어서 왼쪽 뺨을 더듬자 에이다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뺨의 부기가 완전히 사라졌네요. 분명 폐하께서 치료해 주신 거겠지요.”

칼리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뺨은 어제까지만 해도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붓기는커녕 손끝으로 눌러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에이다 말대로 치료를 받아서 멀쩡해진 거다. 그리고 그런 걸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말라크밖에 없지.

“…….”

뺨의 부기를 가라앉게 하려고 이번에도 요석을 사용했을까.

그런 거면 말이라도 해 주든가.

아까까지만 해도 황제가 부른다는 게 별로였는데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다. 그런 내 변화를 감지한 것인지, 에이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폐하께 가 보세요.”

왠지 좀 민망해진 나는 에이다에게 양산을 건네곤 고개를 꾸벅였다. 그대로 오웬과 함께 정원을 빠져나와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올랐다. 그러다 아차 싶었던 나는 창문을 열고는 말에 올라타는 그를 올려다봤다.

“나만 가나요? 에이다 부인도 함께 가면…….”

“일단 폐하께서 찾으시는 건 영애뿐이니까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신경 안정제인데.”

그리고 이 황궁 안에서 내 유일한 진정제는 에이다 부인이었다. 사람을 약처럼 쓰는 건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걸.

신경 안정제 운운하자 오웬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날 내려다봤다. 내가 별거 아니라고 손을 저으면서 마차 안으로 도로 들어가려 하자 오웬이 말했다.

“이번엔 영애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얼굴을 집어넣으려다가 멈칫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지…….”

“그 저택에서 저도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을 뻔했지요.”

“…….”

아, 얌센 저택에 있었는데 내가 못 봤던 거였구나. 그러면 세 번째가 아니라 총 네 번의 만남이 있었다는 거네.

머릿속으로 오웬과의 만남 횟수를 정정하던 나는 곧 화상을 입어 괴로워하던 기사들에게 정말로 내가 도움을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말라크일 가능성도 있잖아. 그런 와중에 내가 계속해서 저들의 감사 인사를 다 받아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여유로운 척 미소 지어 보였다.

“여러분들은 폐하와 제국을 위해서 일하는 분들인데, 다치시면 안 되지요.”

차마 제 도움으로 별일 없어서 다행입니다, 까지는 말하기가 뭐했다.

그냥 적당히 이렇게 말하고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그가 말했다.

“저 오웬은 언젠가 영애께서 도움이 필요하실 때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

역시나 확실해진 후에 감사 인사를 받을 걸 그랬나. 이러다가 ‘사실은 내가 아니었다.’ 같은 상황이 되면 어쩌나. 난감한 기분에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고 조용히 마차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몸에 들어간 힘을 빼며 나는 저택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말라크가 조금 밀리는 것 같았지.”

사그라들던 불길이 다시금 살아나자 말라크가 힘겨워했다. 어쩌면 계단을 구른 탓에 어딘가 다친 와중에 요석을 써야 해서 몸에 부담이 간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못 했네.

그때 계단에서 말라크가 날 끌어안아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말라크를 만나러 가게 된 게 어색하고 긴장되었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하자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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