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6)

{ 24 }

“아가씨……!”

마차에 내리자마자 날 반갑게 맞이해 준 건 집사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짙은 안도감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집사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저택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깍듯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로 다들 나와 있는 건 아닐 거다. 나는 내 뒤를 따라서 내리는 에반의 손을 잡고 마차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리는 황제를 바라봤다.

마차에서 우아하게 내린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본 집사의 고개가 바로 숙여졌다. 나와 있던 고용인들도 바닥에 닿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지만, 저게 맞았다.

지금 말라크와 내 사이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를 대해야 하는 방식과 맞지 않게 행동할 때가 더러 있었다. 아닌가. 계속 그랬던가. 앞으로는 둘이 있어도 조심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말라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지 그러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어차피 황제가 있으니 백작에게 당장 들볶일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내가 곧장 방으로 올라갈 수 있게끔 해 주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옆에 서 있던 에반의 뒤통수도 잡아 눌렀다. 그런 우리들을 보던 말라크는 기사 둘을 대동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듯 집사가 따라붙고, 나와 있던 고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신속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에반을 내려다봤다. 마음 같아선 에반을 붙잡고 오늘 일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었다.

하지만 에반의 옷은 꾀죄죄했고 안색도 피곤해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에반도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으리라.

나는 에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방으로 올라가서 쉬고 싶지?”

에반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각자 방으로 올라가서 쉬자.”

에너지를 비축해 둬야 황제가 가고 난 후, 백작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바로 오늘이 백작이 광산을 완전히 잃게 되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던 집안의 보물을 강탈당하게 되는 셈이니 백작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분명 날 불러선 ‘대체 뭘 했던 거냐’면서 길길이 날뛰겠지. 백작이 하는 말을 듣고 나도 열 받아 급발진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차분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남아 있던 하인에게 에반을 방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한 후, 내 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방 안에서 명상이라도 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다가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잔느가 보였다.

“……아가씨!”

한달음에 달려온 잔느는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돌아오질 않으셔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전 앞으로 영영 아가씨를 못 뵙게 되는구나 싶었다니까요.”

하긴 얌센 저택에서 일어난 일은 워낙에 큰 사건이었으니 입단속을 했겠지. 그래서 잔느의 귀에까진 들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음이야 어떻든 날 걱정해 주었다고 하니 그건 고마웠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고마워, 라고 말했고 잔느는 내 뒤를 졸졸 따랐다.

“혹시 아가씨 폐하와 함께 오신 거예요?”

“…….”

“세상에, 전 오늘 폐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곤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랬는데 정말로 황제가 백작저를 찾아온 데다 며칠 동안 증발해 있었던 나도 돌아왔다. 빠르게 굴러가는 잔느의 눈동자만큼 그 머릿속도 요란하게 회전하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곧장 소파로 향했다.

“죽겠다-.”

앉자마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아서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그대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내가 벗은 구두를 정리하는 잔느를 내려다봤다.

“에반을 시중드는 건 누구야?”

“도련님의 시중은 거의 집사님이 드시지요. 그분이 믿을 만한 하인들 몇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때때로 댄 님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세요.”

아비게일을 데려오기 전까진 에반이 백작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집사가 전담으로 붙어서 시중을 들면서 노련한 하인들 몇이 돕는 식이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집사라면, 에반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 오늘 에반과 아이들의 대화를 들었을 땐 그놈들과 어울리는 대가로 적잖은 보석이나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넘겼던 것 같다. 보석 한두 개면 모를까, 계속 사라졌다면 이상을 감지할 만도 한데…….

“아니면 에반이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재물이 있나.”

내가 있던 세계에선 어린 자식들에게 투자 감각을 익혀 주려고 어렸을 때부터 주식이나 부동산 공부를 시키기도 하니까. 이쪽에선 백작도 그 나름의 방식대로 에반이 재물을 불리는 법을 익히게 했을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보석함 하나 정도는 있어서 거기서 하나둘, 빼내 줬을까. 아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들 아무런 소용없었다.

“그냥 직접 물어보는 게 낫지.”

나는 머리 장식을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서 잔느를 돌아봤다.

“나 혼자서 쉴 테니까 웬만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마.”

“……폐하께서 오셨는데 거기에 가지 않으세요?”

“가 봤자 아버님과의 대화에 끼워 주지도 않을 텐데, 뭘.”

언제 대화가 끝날지도 모르는데 바깥에서 마냥 대기할 순 없었다. 난 나가 보라는 손짓과 함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침대로 가서 일단 눕고 봤다.

그래도 내 방이라고 황궁 안의 그 화려하고 넓던 곳보단 마음이 편했다. 물론, 이 방도 넓었다. 원래 내가 살던 곳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늘 깔끔하게 세탁이 되어 있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예전의 이불 냄새마저 잊혀진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는데 어느덧 이 삶에 익숙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익숙해지면 안 돼. 원래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떠올려.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빙의되어서 해피엔딩을 맞는 건 그 사람들이지, 네가 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반드시 여기서 벗어나야 해. 나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몇 번 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옅은 잠에 빠져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각이 둔해지면서 머릿속도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이대로 잠들겠구나 싶었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즉, 알아서 방에 들어오지도 말라는 의미였다. 그걸 잔느가 모르지도 않을 텐데 왜 들어왔을까 싶어서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런데 눈이 떠지질 않았다.

“…….”

가위에 눌렸다.

피곤해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불쾌함이 느껴지면서 나는 바로 일어나려 했다. 어떻게든 이 불유쾌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내 몸과 정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방 안으로 들어온 존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침대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렇게 가만히 서선 날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옆얼굴로 진득하게 닿는 시선에 불길함이 점점 커진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데 맞으면 어쩌지.

쿵쿵, 거리면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가 내 옆에 서 있는 존재에게도 들리면 어쩌지. 내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존재가 허리를 굽혔다.

긴 머리카락이 끝이 얼굴에 닿는 순간, 나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공포를 넘어선 불쾌함에 이를 악물자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버둥거리지 마. 결국 네 몸은 내 것이 될 테니까. 내게 먹히든지, 황제에게 삼켜지든지. 어차피 둘 중 하나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몸을 일으킨 나는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고,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꺅!”

날카로운 비명에 주춤해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싼 잔느가 있었다.

“아, 아가씨. 저는 너무 안 일어나셔서 깨우려는 것뿐이었어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잔느는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리고선 감쌌던 손을 내리자 왼쪽 뺨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손을 휘두른 모양이었다. 나도 놀랐지만 잔느는 더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침대 아래로 한쪽 다리를 내렸다.

“잔느, 정말 미안해.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어서 백작님께 가 보세요.”

“…….”

“두 분의 대화가 끝난 것 같았어요.”

대화가 끝나고 황제가 돌아갈 것 같으니까 그걸 알려 주려고 한 거구나.

나는 재차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다 이마에 닿는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걸 깨달았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을까. 단순한 악몽이었을까. 아니면 종종 나타나던 정체 모를 그것이 과감하게 행동에 나선 걸까.

가위에 눌렸을 때 나타났으니 꿈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불쾌하리만치 생생했다. 손바닥은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지만, 손끝은 차게 식어 있었다.

“아가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잔느를 올려다봤다.

“괜찮으세요?”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을까.

나에게 뺨을 얻어맞았으면서도 날 걱정해 주는 말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내 몰골이 어떤 것 같아?”

“머리를 다시 묶으면 좋겠지만, 지금도 자연스러워 보여서 잘 어울리세요.”

백작과 대화를 끝낸 황제는 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거다. 인사라도 하려면 여기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 없었다. 잔느의 말에 알겠다고 중얼거린 나는 급히 방을 나섰다.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서 계단을 내려가자 1층으로 내려가는 중인 황제와 백작이 보였다. 내가 그들을 본 순간, 말라크도 뒤를 돌아봤다. 정확히 날 바라보는 눈빛에 이끌리듯 계단을 내려간 나는 백작 옆에 섰다. 옆얼굴에 닿는 백작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말했다.

“두 분께선 대화를 잘 끝내신 모양이네요.”

내 질문에 말라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내 얼굴에서 떨어진 눈동자는 백작에게로 향했다.

“유익한 대화였는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백작에게 달린 문제인 것 같군.”

“…….”

다른 때라면 ‘아, 그러시구나.’라면서 물러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가위에 눌렸을 때, 날 내려다보던 그것의 시선이 더없이 생생했다. 나는 말라크 쪽으로 다가가 서서 백작을 올려다봤다.

“아버님, 폐하를 배웅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이제야 보게 된 백작의 얼굴은 초췌했다. 며칠 전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순간 말라크를 배웅할 게 아니라 백작을 부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당황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백작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폐하를 잘 배웅해 드리거라.”

“…….”

배웅에 대한 허락까지 받았으니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머뭇거리는 동안 말라크가 먼저 움직였고 나와 백작은 나란히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바로 멈춰선 백작은 움켜쥔 손을 가슴 부근에 올리곤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먼저 여식을 무사히 제 품 안으로 돌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폐하께서 정정하신 게 기뻤던 만남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턴 전 뒤로 물러나고 에레즈에게 배웅을 맡기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나도 모처럼 백작과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네. 다음에 또 보지.”

백작은 고개를 더 깊이 조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걸 확인한 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장서 걷는 황제의 옆을 조용히 따라가다가 저택을 나오는 순간 나직이 물었다.

“백작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백작이 바로 그댈 찾아 이것저것 캐묻겠지.”

눈동자만 움직여 날 내려다본 말라크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니,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얻게 될 거야.”

그러기 위해 난 또 눈치싸움을 몇 판이나 깨고, 얼마나 머리를 굴러야 할까.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답을 얻어 내느라 어찌나 고생하고 있는지, 이러다가 뇌만 노화가 올 판이었다.

“그냥 답을 알려 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순간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스치듯 들려왔고 설마 말라크가 웃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나는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 멈춰 선 말라크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연광이 주는 눈부심 때문일까. 날 내려다보는 말라크의 눈빛이 평소와 좀, 아니, 많이 다른 듯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다른지를 알아내려 말라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때 말라크의 입술이 열리더니 처음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을 아꼈지. 그 다음에는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말해 줘 봤자 내 입만 아플 것 같았고, 그리고 지금은…….”

“…….”

“지금은,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리면 안 될 사람인 것 같아서 말을 아끼게 되는 걸지도.”

그건 뭔 소리야. 내가 모든 걸 알게 되면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자폭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분위기 잡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말이었다.

나는 약간 짜증을 담아서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뭐라는 거야.”

아무것도 알려 주기 싫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굴 거면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빤히 쳐다보자 말라크의 입가로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그런 게 아니라, 확실하게 웃는 얼굴을 한 채로 말라크는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아는 게 많아지면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지지.”

말라크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내 팔뚝을 감싸듯 쥐었고,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그렇게 계속 다가와 거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췄다.

입술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의 호흡은 느껴졌다. 왜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붙이는 거야. 긴장으로 뒷머리가 당기는 걸 느끼면서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왜 이래.”

“이렇게 하고 있으면 우리가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겠지.”

“…….”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사이처럼 여겨질 테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그가 떠난 후에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방지해 주려는 건가.

나도 그 황제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괜찮은 방패인지 안다. 알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걸 앞세워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솔직히 말라크는 나처럼 그 타이틀이 욕심나거나 간절하지도 않을 텐데.

어쩌면 날 아비게일 몸속으로 밀어 넣은 게 미안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는 거라면…….

나는 말라크의 단단한 허리로 손을 뻗었다. 두툼한 근육을 느끼면서 고개를 조금 들었다. 입술로 부드러움이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뒤로 물린 말라크를 바라보면서 웃었던 것 같다.

여기 사람들이 바보냐. 적어도 이 정도는 해 줘야 속을 거 아니야.

잘 배웠느냐는 의미로 말라크의 허리를 토닥이곤 물러나려는데 바로 뒷목이 잡혔다. 뒤통수까지 감싸 쥐는 단단한 손길에 당황해 눈을 치뜨는 순간 입술이 막혔다.

“……!”

고개를 기울인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말라크를 보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두 손을 위로 들었다.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더 단단히 날 감싸듯 끌어안은 말라크가 입을 크게 벌렸다.

덮어지듯 입술이 막히고 그 사이로 축축한 혀가 닿았다. 꾸욱 다물어진 입술을 열라는 것처럼 옆으로 길게 핥아 대는 질척함에 나는 입술이 막힌 채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했으니까 그만, 거기까지!

딴에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댄 거였지만 뒷머리가 단단히 잡혀서 티도 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는 동안 몇 번 더 내 입술을 핥던 혀가 떨어졌다. 이걸로 끝인가 싶었을 때 말라크가 내 입술을 전체적으로 빨면서 떨어졌다.

“…….”

내게서 떨어진 말라크는 무척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간신히 똑바로 서 있을 뿐인 내 뒷머리에서 손을 뗀 말리크가 한 걸음 물러나면서 말했다.

“그대와의 다음 만남을 고대하겠소.”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엔 내가 널 안 만날 거야.

내가 입술을 내밀었던 건 어디까지나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둘러대며 넘겨도 되는 일이 아니란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말라크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난데없이 그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입을 맞춰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나는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말라크를 태운 마차가 멀어져 갔다. 마차의 꼬리가 사라져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내쉰 나는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배웅을 위해서 나온 많은 고용인들을 발견했다.

차마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척 얼굴을 가리면서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대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붙잡는 인물이 있었다.

“아가씨.”

이번에도 어김없이 호출을 당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가기 싫다는 생각이 앞섰다.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본 집사는 머뭇거리면서도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주인어른께서 부르십니다. 서재로 올라가 보십시오.”

늘 반복되는 패턴이었고, 내게 거부권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순순히 서재로 가야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조금 전 말라크의 예상치 못했던 행동으로 살짝 멘붕에 빠져 있기도 했다. 멘탈이 흔들리는 와중에 백작과 마주하게 되면 무슨 실수를 하게 될지 몰랐다.

“피곤해서 그러는데 오늘은 쉬고 내일 뵈러 가면 안 될까?”

“아가씨께서 황궁에 머무르시는 동안 백작님께서 무척 걱정을 하셨답니다.”

그렇게 걱정을 해 준 분을 피하면 안 되는 거 아니겠니. 딱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어조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백작은 날 걱정해서가 아니라, 황궁 안에서 있었던 일이 궁금해서 부르는 것뿐일 텐데. 마치 대리인처럼 백작이 하지도 않았을 생각을 포장하느라 고생이었다.

나는 백작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 거라면 조금이라도 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셨어?”

“아직이십니다만…….”

“그러면 준비 좀 해 줘. 내가 배가 너무 고파서 뭐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거든.”

“…….”

“날 무척이나 아끼고 걱정해 주시는 아버님이시니 내가 굶는 건 원치 않으시겠지?”

백작이 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건 집사가 먼저 꺼낸 소리다. 본인이 먼저 한 말이 있으니 그걸 물리진 않겠지. 그런 의미로 한껏 웃어 주자 집사의 입매로 힘이 들어간다. 집사는 알겠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생각해 보니 황궁에서 머무르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쪽에서 일부러 날 굶긴 건 아니지만 타이밍이 맞질 않았다. 끼니 때마다 일이 있거나,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감옥에서 먹은 게 그나마 제대로 된 한 끼였네. 그때 먹은 빵이 무척 맛있었던 게 기분 탓만이 아니었던 거다.

황궁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보낸 시간이 나흘, 정신이 돌아와 감옥에 꼬박 하루를 갇혀 있다가 하루를 더 보냈다. 그동안 제대로 챙겨 먹었던 게 한 끼뿐이라니.

옆에서 폭탄이 날아들고 사건이 터져도 여주 배를 굶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말도 안 돼.”

나는 왜 계속 끼니를 챙겨 먹지 못했던 거지.

아비게일은 다이어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날씬한데.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면서 저도 모르게 불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식사 시중을 들던 하녀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본인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머뭇거리는 것 같기에 나는 얼른 웃는 얼굴로 하녀를 올려다봤다.

“고마워. 이제 되었으니까. 가서 쉬어.”

“……맛있게 드세요. 아가씨.”

하녀가 뒤로 물러나자 나는 앞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내려다봤다.

전에 먹을 땐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혀 위에 고인 침을 삼킨 나는 수저에 살짝 손끝을 갖다 댔다. 당장 수프를 퍼먹고 싶었지만 백작이 도착하지 않았다. 식사 준비는 한참 전에 끝나서 집사가 부르러 갔는데 왜 이렇게 늦장인지 모르겠다.

언제 오려나 싶어 닫혀 있는 문을 흘깃거리는데, 마침 그 문이 열리고 백작이 들어왔다. 시중을 들기 위해서 식당에 남아 있던 하녀들이 백작에게 허리를 숙였다. 백작은 그들의 인사를 당연한 듯 받으면서 내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물리적인 거리만도 5미터는 떨어져 있었지만, 백작의 불편한 심기는 생생히 전달되었다.

내가 서재로 안 가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해서 저렇게 뚱한 얼굴인 걸까. 두 번 부르면 테이블도 엎겠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아버님, 서재로 불러 주셨는데 제가 너무 배가 고팠어요.”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백작의 눈동자가 위로 움직였다.

정확히 날 바라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난 더 밝게 웃어 보였다.

“황궁의 음식이 암만 훌륭해도 집에서 먹는 것만 못하더라고요.”

보통의 부녀 사이라면 ‘우리 딸이 집밥 맛을 아는구나.’라면서 기분 좋게 껄껄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작과 나 사이에 그럴 일은 없었다.

내 말에도 별 반응 없는 백작에게 물이 담긴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러면 우리 맛있는 식사를 해요.”

물을 한 모금 마신 나는 바로 수저를 들어서 수프를 떠먹었다. 고기부터 뜯고 싶었지만, 꾹 참고 차근차근 순서대로 음식을 맛봤다.

역시 가끔 먹어야 귀한 줄도 알게 되는 거야. 매일 먹을 땐 김치찌개나 얼큰한 라면 생각이 간절했는데 지금은 크림소스도 맛있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 같아 기분 좋게 식사를 이어 가다가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고개를 들었다.

백작은 물 잔도 건드리지 않은 채였다.

나하고 다르게 그는 저택에 있으면서 매 끼니를 잘 챙겨 먹었을 거다. 그러면 한 끼 정도는 패스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갑자기 제가 사라지거나 할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 계속 쳐다보지 않으셔도 돼요.”

백작이 날 쳐다보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백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로 뻔뻔하구나.”

“…….”

어느 정도 애틋한 부녀 사이를 연출한 후에 공격해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네. 어쩌면 황제와의 대화가 유쾌하지 않아서 그 화풀이를 나한테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백작을 빤히 바라보면서 얇게 썬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고기를 씹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서 웃어 준 건데 대번에 백작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백작이 한 손을 들자, 그 손짓에 식당 안에 있던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는 것을 보며 나는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폐하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저한테 화풀이하시면 안 돼요. 애초에 저는 두 분께서 나눈 대화 내용도 모르잖아요.”

“폐하께선 광산을 넘기라고 하시더구나.”

“그래요?”

새삼스럽지 않은 말이었다.

백작이 나를 딸이라면서 데려온 후부터 시작된 줄다리기였다. 황제는 백작의 실수를 빌미로 광산을 완전히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그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화낼 일일까.

어쩌면 내심 광산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러게 주변 사람들 단속을 잘하셨어야지요.”

얌센을 포함해서 꽤 많은 자들이 백작의 광산에서 나오는 요석을 빼돌리고 있었다. 원작에선 백작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백작 메이든은 본인이 소유한 것에 대해 집착하는 남자였다.

“얌센이 정말로 다른 나라에 요석을 넘기고 있었다면, 아버지가 먼저 폐하께 광산을 바쳐야 할지도 몰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작의 손이 테이블보를 당겼다.

널찍한 테이블 위에 작품처럼 차려진 모든 것들이 중심을 잃거나 당겨진 탓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음향에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오자마자 테이블을 엎지는 않네, 했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반도 넘게 남은 고기가 담긴 접시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걸 봤다. 아까우니까 들고 와 볼까.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접시가 테이블 밖으로 추락했다.

챙그랑.

산산조각 난 자리에 새로운 접시 한 개와 고기가 추가되었다.

나는 아직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저 앞까지 날아간 손수건을 집어 들어서 입술 주변을 닦았다. 입매까지 꼼꼼하게 닦고는 백작을 똑바로 바라봤다.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말로 하시지 왜 이러세요.”

“…….”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움츠러들지 않는 게 대단하다 싶었을까. 날 바라보던 백작은 헛웃음을 흘리더니 곧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성큼성큼 걸어온 백작은 내 옆에 서서 테이블과 의자 뒤쪽에 각각 손을 댔다. 그대로 내 쪽으로 구부정하게 상반신을 기울였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다가오다니. 무척 위협적이었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나는 입을 닦은 손수건을 곱게 포개면서 말했다.

“오늘따라 정말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네요. 왜 이러시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

“…….”

누구긴요. 아버님의 사랑스러운 딸이지요.

평소대로 말해 볼까 싶었지만 참았다. 부담스러우리만치 백작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 빈정거렸다가는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백작이 그렇게까지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구석에 내몰린 사람은 갑자기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경솔하게 굴지 말자 스스로를 타이르며, 잠시 생각하는 척하던 난 입을 열었다.

“전 아비게일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타나신 후에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지금의 전…….”

나는 백작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에레즈지요.”

“…….”

백작이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고 틀린 답도 아니지.

아비게일이 에레즈가 될 수 있었던 건 백작이 수녀원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확실하게 확인해 보자던 원장 수녀님의 입을 막대한 후원금으로 막기까지 했지.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날 에레즈로 소개한 건 다름 아닌 백작 그였다.

그렇게 그가 만들어 낸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체가 뭐냐니.

“아버님이 원하는 에레즈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아직도 좀 부족했나 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 노력할 테니까요.”

“…….”

“더는 아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짧은 순간 백작의 얼굴로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분노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와중에 허탈함과 낭패감이 짙어지더니 천천히 허리를 세운 그는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지금 백작은 엄청나게 낙담하고 있었다. 딱히 호감이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깊은 좌절감을 드러내니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까 갑자기 급발진을 한 것도 그렇고, 분명 말라크와 뭔가가 있었던 거다.

이번에야말로 광산을 확실하게 빼앗겨서 저러나.

테이블 위에 올려 맞잡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너와 함께 내 광산의 요석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

“네가 요석을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다면서 말이야.”

백작이 먼저 꺼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이 이상했다. 나와 함께 요석을 확인하고 싶다니. 말라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의아해할 새도 없이 백작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대로 너와의 관계가 진척된다면, 케이틀린 백작과 황실 사이에 경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면서……. 어렵게 되찾은 딸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광산을 지참금으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

아, 말라크. 너 정말 못됐다.

차라리 광산은 이제부터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을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거다. 그런데 핑곗거리로 날 들먹이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난 진짜 딸도 아닌 데다, 나를 데리고 온 후로 백작가에는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나고 있고, 백작에게 고분고분하지도 않았다. 그냥 반품해 버릴까 싶을 정도인 와중에 황제가 날 들먹이면서 광산을 달라고 요구한다, 라. 내가 백작이라도 광산을 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날 데리고 온 목적이 진짜 딸인 에레즈를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백작 입장에선 딸의 문제나 집안의 저주 등,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니까. 일이 꼬여도 너무 꼬여 버리니까 백작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거다. 그래서 괜히 날 붙들고 늘어지면서 ‘네 정체는 뭐냐.’ 같은 소리를 하는 거고.

그 앞에서 뺀질거리면서 ‘당신 딸이라니까.’ 운운하는 건 삼가야 할 듯했다.

나는 여전히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서 있는 백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 아니라도 폐하께선 아버님의 광산을 빼앗으려 하셨을 거예요.”

순간 백작의 눈을 덮고 있던 손가락이 움찔, 하면서 떨렸다.

“절 운운한 건 아버님의 마음을 풀어 드리려 농담을 하신 거고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지만, 일단은 포장해 주기로 했다. 백작이 계속 열 받은 상태로 여기저기를 들쑤시면 피곤해지니까.

“그리고 제가 정말로 폐하와 잘되면 그때 다시 아버님께 광산을 돌려드리라 할게요.”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말라크가 내 말을 듣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래도 대충 백작을 달래서 이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별 탈 없이 안전하게 이 순간을 벗어나야, 저택에 머무르면서 에레즈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얌센 때문에 벌어진 사고로 인해 황궁에 머무르는 짧은 동안 또 정보를 얻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날 공격하는 그림자가 에레즈라는 것 말이다.

여태껏 에레즈에게 당연하게 육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었다. 에레즈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백작저에 붙어 있어야 했다. 아니면 백작과 가까워져서 그에게 정보를 얻어 내거나.

하지만 지금 날 내려다보는 저 꼬라지를 보니, 영 글렀다.

“네가 황제와 잘되면, 나에게 광산을 돌려달라는 말을 하겠다고?”

“지금은 어렵겠지만, 언제라도…….”

“네가 정말로 황제와 잘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냐.”

묻는 목소리에는 짙은 회의감이 담겨 있었다. 진심으로 나와 황제가 잘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다.

뭐, 그게 당연한 거겠지. 그냥 대충 맞아떨어지는 고아를 데려왔는데, 그게 황후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기가 찰 수밖에. 그래도 꼭 저렇게 말해야 하는 걸까.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던 난 지나치듯 물었다.

“제가 정말로 아버님의 딸이 맞나요?”

“…….”

지금의 백작을 더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테지만, 한 번 정도는 해 볼 만했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굳은 얼굴로만 있던 백작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진다.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자, 곧 화를 냈다.

“너와 폐하 사이를 축하해 주지 않는다고 그런 걸 묻는 거냐. 넌 당연히……!”

“그게 아니라요.”

백작의 말허리를 잘라 낸 나는 오른쪽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이 저택 안에 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서요.”

“…….”

“누군가 자꾸만 잘 쳐다보는 것 같고, 이상한 느낌이 들거든요.”

이곳에서 그림자가 확실하게 접근했던 건 지하실과, 조금 전 낮잠을 자면서 가위에 눌렸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횟수를 꼽아 가며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가 여기에서 와서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내 말에 백작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굳어졌다. 원래 표정 없던 사람이긴 했지만 유독 심하게 경직되었다.

“이곳에 온 첫날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저 말고 다른 누군가 있는 것 같았지요. 처음엔 그게 낯선 환경이 주는 착각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닌 것 같더라고요.”

“…….”

“저 말고 다른 존재가 계속해서 느껴지고, 마치, 그것은 때때로 절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절반의 과장이 보태어진 사실을 전한 나는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백작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그 얼굴을 확인한 난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요. 제가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괜히 이러나 봐요.”

“…….”

먼저 한발 물러서자 백작의 표정도 살짝 느슨해졌다. 하지만 백작의 눈동자가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걸 확인한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손길이 닿자마자 움찔한 백작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난 더 세게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앞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살짝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아버지는 다정하셨는데, 요즘 들어서 계속 화만 내시는 것 같아요.”

백작은 첫날부터 냉랭했고 나에게 벽을 세웠다. 그때 백작의 표정과 눈빛, 한 말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지만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지금 상황이 아버님을 힘들게 한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 최대한 이해하려고요.”

“…….”

“그래도 아버지께서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실 만큼 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해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백작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내 상냥한 말에 감격해서가 아니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어이없음의 표출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백작을 이해한다는 포지션을 밀어붙였다. 모든 잘못은 그에게 있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회사 다닐 때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당할 땐 억울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내가 해 보니까, 이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 맛에 다들 그런 식으로 재수 없게 말했던 건가, 생각하며 나는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

날 바라보는 백작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

아예 무지하면 모를까. 이제야 비로소 내가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깨달은 모양이었다. 단순히 딸의 대역으로 데리고 왔지만, 잘못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겠지. 이로써 나를 쉽게 치워 낼 수 없는 존재로 인지해 주면 좋으련만.

나는 한 번 더 힘주어 백작의 손을 잡고는 그대로 놓았다.

“즐거운 저녁 식사였어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보라는 듯 백작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 돌아섰다.

그대로 식당을 문을 열고서 나가자 그곳에는 집사 한 사람만 서 있었다.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날 바라보는 눈동자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버님께서 실수를 좀 하셨어. 들어가서 정리해 줘.”

“……먼저 올라가서 쉬십시오.”

식당 안에서 들려온 접시와 그릇이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는 단순한 실수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집사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부 알고 있을 거다. 굳이 내 입으로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웃는 낯으로 집사 앞을 지나쳐갔다.

그렇게 복도를 나와서 계단에 오르는 순간 깊은 한숨이 나왔다.

“사이좋아지는 건 글러먹었어.”

백작이 저 모양이면 나라도 좀 살갑게 굴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이가 좋아지기 위해선 서로에게 조금씩이라도 틈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데 지금 백작과 나는 누가 더 가드를 잘 올리나 경쟁하는 듯한 상태였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날 이용하려고만 하는 인간들은 이젠 신물이 났다. 현생도 그런 일로 고달팠는데 여기서도 그러면 어쩌나, 한숨을 쉬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계단을 다 올라왔으니 이제 왼쪽 복도로 가면 되었다. 그런데 가기 싫었다. 혼자 있을 때라면 몰라도 자다가 또 가위에 눌리면 어떻게 해.

말라크에게 가위에 눌렸다는 말을 했어야 할까. 그런 말을 한다고 당장 해결책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보나 마나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지그래.’ 같은 말이나 듣게 될 텐데 뭘.

“…….”

솔직히 황궁이나 백작저나, 둘 다 마찬가지다.

둘 중 어디가 더 낫고 못하고를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로 오겠다고 한 건 말라크에게서 무언의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내가 〈영애의 생존일기〉를 쓴 작가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정말로 내가 썼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나 장편인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으면 이상한 거잖아.

그래. 정말로 내가 직접 쓴 거였다면…….

멍하니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타닥, 타다닥, 하고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에 숨을 삼켰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지만 곧 키보드 타자음이라는 걸 떠올렸다. 회사에서 늘 듣던 익숙한 소리였지만, 그게 왜 여기서 들리는 거지.

당황한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뒤를 돌아봤고, 막 계단을 올라오던 하인과 시선이 부딪쳤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나와 시선이 부딪치자 하인은 당황한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인은 여러 가지 디저트가 담겨 있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저런 음식을 한가득 주문할 사람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황궁에선 같이 돌아왔지만,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각자 방으로 올라가야만 했었지.

“그거 에반에게 가져다주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져다줄 테니까 이리 줘.”

“아가씨께서요?”

설마 내가 들고 가겠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지 하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믿기질 않는다는 듯 쳐다보기에 나는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면 제가 도련님 방 앞까진 가져갈 테니…….”

“어차피 한 층만 더 올라가면 되는 거잖아. 괜찮으니까 이리 줘.”

아예 하인 앞으로 내려가선 쟁반을 빼앗듯이 가지고 갔다. 내가 이렇게까지 행동하자 하인도 더는 붙잡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중에 문제 생길 일 없게 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가서 다른 일 봐.”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꼭 도련님께 가져다주십시오?”

내가 중간에 가로챌 것처럼 말한다. 하인의 입장에선 에반에게 제대로 전달해 줘야 안심이 될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걱정이 되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지라 난 웃음을 꾹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보다 한 층 더 위에 있는 에반의 방을 찾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