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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내 손이었다.
아무도 잡아 주고 있지 않은 그 손을 바라보면서 힘주어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그리고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말라크가 옆에서 내 손을 잡아 주었었는데.
현실 감각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여기가 백작저고 내 방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걸 아는데도 여전히 꿈속인 것만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창가로 걸어가서 커튼을 옆으로 치워냈다. 그러자 저택 아래쪽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발견했다. 처음엔 마데손 남작 부인이 타고 온 마차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른 손님이 오신 걸까.
아니면 말라크를 태우고 가 버릴 마차인 걸까.
“……갈 거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 주지.”
뭐, 눈을 뜨자마자 그가 있었으면 했던 건 아니었지만 안 보이니까 좀 그랬다. 말라크가 잡아 주었던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고 뒤를 돌아봤다.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옷장으로 향했다.
정말로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라면 내려가서 인사를 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황제인데 방구석에서 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을 테니까.
옷장에서 가볍게 걸칠 가운을 챙기곤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왔을 때 기사와 마주치면 폐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복도엔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벌써 가 버린 거야?”
여기에서 자고 갔다는 게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해서 새벽에 조용히 떠난 걸까.
말라크가 저택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초조해졌다. 나는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쟁반을 들고 올라오던 하녀와 마주쳤다.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날 본 하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그런 차림으로 어딜 가세요.”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선 이게 뭐 어떠냐 싶었지만, 하녀는 달랐을 거다. 그렇게 다니면 안 된다는 의미로 빠르게 고개를 젓는 걸 무시하고서 두 칸씩 계단을 내려갔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서 마차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런 날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기다리십시오, 아가씨-.”
귀에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멈춰 선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다.
집사를 발견한 난 곧장 그리로 걸어가 폐하께서 벌써 떠나신 건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 전에 집사의 등 뒤에 서 있던 인물이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세상에, 에레즈 영애-.”
나는 내 앞으로 와서 내 손을 붙잡는 상대를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움찔할 만큼 크고 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성은 다름 아닌 시엘라였다.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시엘라의 눈부신 미모는 무척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당황한 나는 고개를 뒤로 뺐지만, 와중에도 시엘라는 내 안부를 물어 주었다.
“어제 가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들었답니다. 괜찮으신가요?”
“…….”
“두보아 자작과는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예요. 그 댁 둘째 자제분이 문제가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설마 영애에게 해를 끼칠 줄이야.”
내 목 부근을 본 시엘라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거리며 맺혔다. 내게 벌어졌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내가 오히려 그녀를 위로해 줘야만 할 것만 같았다. 목이 졸리긴 했지만, 죽지 않고 무사하지 않으냐면서 넉살이라도 떨어 볼까.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엘라는 굵직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 손을 붙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당황해선 집사를 쳐다봤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좀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집사가 눈치껏 움직여 주었다.
“시엘라 영애, 지금 아가씨께서는…….”
“어디 갔나 했더니 거기에 있었군.”
“…….”
집사의 말을 중간에서 뚝 잘라 내고 끼어드는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왜 저 목소리가 여기에서 들리는 걸까.
믿기질 않아 나는 굳은 채로 잠자코 있었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등 뒤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내 옆에 멈춰서더니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저는 화장실도 깔끔하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큰일 날 뻔했는데, 일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줘서 살았어. 고맙네.”
바로 옆에서 들으니까 목소리가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건강한 구릿빛에 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닌 남자를 확인하곤 낯빛을 굳혔다.
“당신은-.”
“백작님의 배려에는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지만, 숙녀들 앞에선 말을 좀 가려서 하셔야지요.”
내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남자를 타박한 시엘라는 내 손을 꼬옥 쥐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먼 친척인데, 그곳은 여기만큼 예의범절이 엄격하지 않다 보니…….”
뒷말을 흐린 시엘라는 민망한 듯 남자에게 굳은 시선을 던졌다. 이제부터라도 말할 때 주의하라는 눈빛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미소 띤 얼굴이었다. 올라간 입꼬리에는 특유의 오만함과 장난기가 묻어났다.
나는 그런 그를 가리키면서 시엘라에게 물었다.
“먼 친척이라고요? 이 사람하고 시엘라 영애 당신이요?”
“그렇습니다. 정말 너무 먼 사이인지라 남이나 다름없지만요.”
뭐야. 그 정도라면 남이라고 소개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해 줬으면 했다. 그도 그럴 게, 메돈의 왕인 베르디가 시엘라와 친척 관계였다니. 이건 어떻게 꼬여 버린 족보인 걸까.
그보다 베르디가 메돈의 왕이란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시엘라는 왜 그와 함께 여기에 있는 거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대체 뭔가 싶었을 때,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당황한 내가 뿌리칠 새도 없이 베르디는 본인을 가리키고 있던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듯 쥐고는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가 떼어 낸 베르디는 눈을 반으로 접었다.
“내 아름다운 친척이 애타게 걱정하던 분이 누군가 했더니, 그럴 만하군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분과 만나게 될 줄 알았다면 저도 더 신경 써서 단장했을 텐데 말입니다.”
“…….”
웃기고 있네. 멋대로 날 납치했을 땐 ‘네가 말라크의 애인이라고?’라고 했으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모욕했던 놈팡이가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난 바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손을 빼내려 하자 더 세게 붙든 베르디는 올라간 입꼬리를 내렸다. 그리곤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고, 납치되었을 때 주고받은 대화는 극악했다. 내게 있어 베르디는 엮이지 말아야 할 인물로 진즉에 분류되어 있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제멋대로인 인간성만큼 기억력도 별로인가. 그래서 나와의 만남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것인가. 나는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손이 아픈데, 좀 놓아주시지요?”
“일부러 빼내려고 하지 않으시면 아플 일도 없을 텐데요.”
베르디는 보란 듯이 내 손을 더 꼬옥 쥐었다.
가뜩이나 크고 단단한 손이 힘을 주니까 더 아팠다. 하지만 물리적인 통증보다는 베르디와의 접촉 자체가 별로였다. 나는 이를 악문 채로 재차 손을 빼내려 했고,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시엘라가 움직였다.
“잠깐, 지금 대체 뭘 하시는…….”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려던 시엘라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에 나도 뭔가를 감지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날카로운 칼끝이 베르디의 어깨에 올려졌다.
“지금, 뭘 하는 거지.”
가라앉은 목소리의 끝엔 진득한 불쾌함이 묻어나 있었다. 베르디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베르디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돌려 어깨에 칼끝을 올린 자를 확인했다. 베르디와 내 시선이 닿는 곳엔 말라크가 서 있었다.
“…….”
아직 떠난 게 아니었구나.
바깥에 세워져 있던 마차를 보고는 설마 해서 뛰어 내려왔지만, 아직 저택에 남아 있는 말라크를 보자마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깨가 축 늘어뜨려질 정도로 안심해 버린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저 인간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까지 안심할 일인가 싶었고, 베르디에게 잡혀 있는 손은 더더욱 꺼림칙해졌다.
한 번 더 손을 빼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젠 손뿐만이 아니라 팔도 얼얼한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으…….”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말라크의 눈동자가 바로 베르디에게 잡힌 내 손으로 옮겨졌다. 그는 어깨에 댄 칼날을 베르디의 목으로 더 밀착시키면서 말했다.
“말로 할 때 그 손 놓아야 할 거야.”
“…….”
칼날은 베르디의 목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실수로라도 베르디가 고개를 돌리면 바로 피부가 베일 것만 같았다. 그랬다간 나라 간에 큰 문제가 발생할 거다.
시엘라가 무슨 생각으로 베르디를 먼 친척으로 포장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메돈의 왕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메돈의 왕의 목에 칼날을 겨눈 데다 상처까지 입힌다면…….
순간 내 머릿속으로 피와 살점이 난자하는 전쟁터가 그려졌다.
안 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해선 안 된다. 나는 시엘라가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 대신 칼의 맨질거리는 면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당장 베르디의 목을 날려 버릴 기세였던 말라크가 주춤했다.
“아침부터 집 안에서 검을 빼 드시다니요. 그러면 안 됩니다.”
“…….”
내 말과 행동에도 말라크는 여전히 베르디의 목에 칼을 겨눈 채였다. 그러자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한 것인지 베르디가 뺀질거렸다.
“그렇습니다. 남의 집 안에서 다짜고짜 칼을 꺼내 드시면 안 되지요.”
말라크 쪽으로 눈동자를 옮긴 베르디가 깐족대는 순간, 나는 칼날이 대어진 방향, 그 머리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꺄악!”
“헉, 아가씨……!”
퍽, 하고 주먹이 시원하게 들어간 순간 시엘라의 비명과 집사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얻어맞아서 고개가 옆으로 확 기울어진 베르디의 정색한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감히 날 때려?
본인이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나한테 맞은 것만을 기분 나빠하는 반응에 코웃음을 쳤다.
“뭘 봐.”
나는 여전히 내 손을 붙잡고 있던 베르디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허락도 없이 귀한 백작가 영애의 몸에 손댄 대가로 꿀밤 한 대는 가볍지.”
“…….”
“다음으로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내 손 놓으시지.”
얌센 꼴 나기 싫으면 망할 그 손 치워야 할 거다.
다른 사람들 듣기엔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베르디라면 바로 알아들었을 거다. 실제로 그의 눈빛이 굳는 걸 본 나는 잡혀 있던 왼손을 힘줘서 빼냈다. 이번엔 베르디도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다. 겨우 손의 자유를 되찾은 나는 얼얼한 그 손을 주무르면서 집사에게 말했다.
“여기에 계신 손님께선 더는 용무가 없으신 것 같으니 배웅해 드려.”
나는 시엘라를 바라봤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엔 서로가 상황이 좋을 때 다시 만나 담소를 나누지요.”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표정을 굳힌 시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따라오겠다는 그의 말을 믿은 제가 잘못한 거겠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엘라는 베르디를 바라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이리 오세요.”
내게 늘 친절했던 시엘라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냉랭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베르디는 순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나쳐 가면서 다음에 또 보지, 라는 말을 남기는 베르디였지만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주물렀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힘만 믿고 멋대로 구는 건 최악이었다. 마음 같아선 말라크가 목을 베든지 말든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가오는 말라크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검을 거둔 말라크의 표정은 대단히 심각했다. 지금 그가 내 손을 보고 있음을 깨달은 난 웅얼거렸다.
“난 괜찮아.”
베르디의 머리통을 후려쳤던 주먹을 위로 들었다.
“더 세게 때려 줄 걸 그랬어.”
“……그냥 목을 베어 버리는 게 나았을지도.”
“…….”
나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말라크가 저렇게 말하니까 오싹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 정말로 그런 생각 하는 건 아니지?”
“…….”
“아니라고 해. 저 인간 헐렁해 보여도 메돈의 왕이잖아.”
그래. 베르디는 메돈의 왕이었다. 그런 그를 백작저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시엘라의 친척으로 가장해서 화장실을 잠깐 이용한 것처럼 꾸미고 있었지만, 거짓말일 거다.
베르디만 나타나도 놀랐을 텐데 시엘라와 마주칠 줄이야. 이런 준비되지 못한 사자대면은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미 발생한 사건들로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상황이 추가되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그때 나는 문득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계단 중간에 서 있던 백작을 발견했다.
“…….”
바깥이 소란스럽다 보니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보긴 했는데 나와 말라크를 보고 얼어 버린 것 같다. 지금 단계에선 백작에게 가장 껄끄럽고 불편한 인물 1위와 2위가 우리일 테니 당연하겠지.
나도 백작 보기가 마냥 편한 건 아니었지만, 시선까지 부딪힌 마당에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맞잡은 손을 내리고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버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내가 먼저 건네는 인사에 대답을 해 주던 백작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흠칫한 그는 바로 흠흠, 목을 고르면서 계단을 내려와 말라크 뒤에 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누추한 곳에서 간밤에 편히 주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제야 말라크도 백작을 돌아보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수상쩍게 움직이는 자들이 없어서 편안하게 잘 잤네.”
“…….”
간밤의 소란에 대해 알고 있는 백작에겐 조금 찔릴 만한 인사였다. 하지만 백작은 표정의 동요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그런 백작을 계속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내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꿋꿋하게 말라크만을 바라봤다.
백작에게 나는 진짜 딸도 아니고, 이용하려고 데리고 온 장기말이다. 어제의 말도 안 되는 사건 때문에 내가 크게 다치거나 잘못되었더라도 그가 신경 쓰지 않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해 버리면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시엘라와 베르디를 배웅하러 나선 집사가 돌아왔다.
백작 옆으로 가서 선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주인어른, 시엘라 영애께서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가. 에레즈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겠노라 일부러 찾아왔는데, 바로 돌려보내 미안하군.”
“영애께서 챙겨 오신 선물을 아래층에 보관해 두었으니, 아가씨와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백작과 집사가 주고받는 대화는 전부 다 나와 관련되어 있었다. 보통 이런 대화를 하면 당사자인 나를 끼워서 함께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나? 사람을 옆에 세워 두고 ‘이런저런 이유로 시엘라가 찾아온 거다.’라고 말하는 게 우스웠다.
이전부터도 내게 살갑다고 생각해 본 적 없긴 했지만 이걸로 보다 확실해졌다.
어제 일 때문인지 말라크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날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있으면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다가 어영부영 이 자리를 피하려 들겠지.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잔느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 바로 만나러 가고 싶은데, 가능하겠지?”
마지막 말은 집사를 쳐다보면서 했지만 정말은 백작에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일찍 잔느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땐 자고 있다고 해서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말라크와 함께였다. 과연 황제 앞에선 어떤 변명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집사는 어제처럼 당황하지 않고 백작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묻는 시선에 그제야 백작이 날 바라봤다.
“잔느는 상태가 이상해졌다. 만나 봤자 위험할 뿐이야.”
“하지만 궁금하잖아요. 왜 갑자기 눈이 뒤집혀선 내게 덤벼들었는지 말이에요.”
“…….”
“꼭, 날 죽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요.”
순간 백작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잡혔다.
“……네 예의범절이 부족하단 걸 알고는 있었지만 폐하 앞에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괜한 문제 일으키지 말고 방으로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어라. 지금 그 몰골이 대체 뭔지, 부끄럽지도 않으냐.”
잠옷 위에 착실히 가운까지 걸쳤다. 가릴 거 다 가렸는데 부끄러울 게 뭐야.
할 말 없으니까 괜히 예의범절 운운한다는 걸 알지만, 외출복은 아닌지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신 입을 꾹 다문 채로 쳐다만 보자 누군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손가락을 감듯이 붙잡는 손길에 말라크를 올려다봤다.
“내가 그녀와 함께 갈 테니 백작은 걱정할 것 없네.”
“…….”
“나도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를 위험하게 한 자를 만나 보고 싶군.”
나에게 뭐라고 하던 백작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설마,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의 요구인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잘한다면서 말라크를 응원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굳은 얼굴로 있던 백작이 가벼운 저항을 시도했다.
“폐하, 어제는 갑작스럽게 백작저를 방문하시고 하룻밤 머무르기까지 하셨습니다. 입궁이 늦어지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걱정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심이 어떨는지요.”
어제 네 멋대로 찾아온 것도 모자라 여기서 자기까지 했으니, 더 민폐 짓 하지 말고 썩 가 버리라는 뜻이다. 용케도 돌려서 좋게 말하는구나 감탄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때 오지 않으셨으면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
“폐하 덕분에 제가 무사할 수 있었으니, 원하시면 하룻밤이든 열흘 밤이든 얼마든지 주무시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지적에 백작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백작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음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원작에서도 백작에게 아비게일은 저주를 풀어 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까. 그걸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안 좋은 건 왜일까.
그때 말라크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날 품 안으로 끌어당긴 말라크가 말했다.
“이리 보니 백작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딸에 대한 애착이 나보다 덜한 것 같군. 나는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 걸 알게 된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
“그녀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그 태도를 계속 이어 갈 참이라면 이번에 입궁할 때 그녀를 데리고 가겠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1절까지만 들었을 때가 좋았지, 나와 함께 입궁하겠다는 발언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백작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그래서 잠자코 있자니 낯빛을 굳힌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 오긴 했지만 제 딸에 대한 애착이 없을 리 없습니다. 폐하께서 제 딸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건 감사할 일이나, 이런 식으로 부녀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정상적인 부녀 관계였다면 내 이런 말 몇 마디에 틀어질 일은 없을 것 같네만.”
“말씀하신 대로 저와 에레즈는 정상적인 부녀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웬일로 백작이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이번에 황제가 날 데리고 가면 그땐 백작저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와 말라크 둘이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불안해서라도 호락호락 보내 주진 않겠지.
예상했던 반응에 입맛이 써진 나는 고개를 들다가 우연히 계단에 서 있던 하녀를 봤다. 하녀는 계단 위에 서선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복도에서 나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종도 발견했다.
“…….”
우리 때문에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못 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나는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말라크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지 잔느를 만날 수 있는 거지요?”
열심히 황제를 상대로 가드를 올리던 백작은 내 질문에 낯빛을 굳혔다.
“덕분에 죽을 뻔했는데, 왜 그랬는지 물을 수는 있는 거잖아요. 잔느의 상태가 이상하면 바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내가 쉽게 물러서질 않자 백작은 눈을 감았다. 막아 봤자 소용없다 싶었을까. 다시 눈을 뜬 백작은 무척 피곤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잔느를 만날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말라크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오나 폐하께선 에레즈가 잔느를 만나는 동안 방 바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 정도는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여기서 더 백작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난 말라크에게 그렇게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 위로 탐탁지 않은 기색이 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집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조용히 상황을 보고만 있던 집사가 말했다.
“아가씨, 절 따라오시지요.”
드디어 잔느를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사람 하나 만나기가 참 험난하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택의 뒤로 가면 시종과 하녀들의 숙소가 있었고, 거기서 더 들어간 곳에 창고가 있었다. 낡고 창문도 없이 문만 덜렁 달려 있는 건물은 튼튼해 보였다. 저런 곳이라면 바깥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나오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사를 바라봤다.
창고에 도착한 집사는 품에서 꺼낸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날 따라온 말라크를 향하고 있었다.
“나만 들어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절 불러 주십시오.”
정말은 무슨 일이 아니라 말라크가 따라 들어갈 걸 걱정하는 주제에.
나는 자물쇠를 열고는 자리를 피하려는 집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잔느가 아직도 그 상태인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혹여라도 여전히 눈이 뒤집혀서 내게 덤벼들던 상태 그대로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집사의 손을 놓은 나는 문을 열고 창고로 들어갔다.
정면으론 창문이 없었는데, 반대편엔 꽤 큰 통창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들어온 빛이 창고 안을 밝혔고, 덕분에 상자가 쌓여 있는 곳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잔느를 쉽게 발견했다. 누가 보더라도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러다가 갑자기 덤벼들진 않겠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는 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잔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잔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래도 내가 하는 말이 들리긴 한 모양이다.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나에게 저질렀던 일을 기억하니?”
“…….”
“만약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그때 내게 달려들던 잔느의 표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던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내게 모든 걸 말한다고 해서 네가 이 저택에서 계속 일할 수는 없을 거야. 일단 넌 모시던 주인에게 해를 끼쳤으니까.”
적어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되지 않을까. 그걸로 잔느의 인생은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잔느의 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본 그녀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아가씨…….”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초췌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나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앞으로 기어 온 잔느는 두 손을 모으고는 내게 빌기 시작했다.
“아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어제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로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요석이나 백작 부인의 유품에 손을 댄 건 기억할 거 아니야.”
“…….”
“알랭 그 나쁜 놈에게 속았다 쳐도, 훔친 범인이 너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 지적에 잔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생각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불가능하단 걸 아는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 나쁜 인간에게 속아서……, 저는 정말이지 너무 억울합니다.”
가슴을 쥐어뜯은 잔느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을 질끈 감는 게 마치 일부러 눈물을 쥐어 짜내는 것만 같았다.
“제가 잘못되면 고향에 계신 병든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은 어찌해야 할지. 제가 돈을 벌어서 보내지 않으면 제 가족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제발, 아가씨…….”
날 바라본 잔느는 두 손을 비볐다.
잔느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란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잔느를 동정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
“…….”
“거기다 넌 가족도 없잖아. 네가 고아란 걸 내가 아는데 무슨 헛소리야.”
원작에서 잔느가 아비게일에게 텃세를 부렸던 건 본인과 비슷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잔느도 수녀원을 전전하다가 운 좋게 백작저로 들어와 하녀로 일하게 되었는데, 아비게일은 딸로 들어왔으니까. 잔느 눈에는 자신과 처지가 똑같은데 운 좋게도 백작의 딸이 된 것으로 보였던 거다.
설마 가족이 없단 걸 내가 알고 있을 줄 몰랐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잔느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잔느의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어제 일, 기억하고 있지?”
“…….”
“왜 갑자기 그렇게 변하게 된 건지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가 조금은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계속 거짓말만 늘어놓는다면, 네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어.”
할 말을 마친 나는 입을 다물고 잔느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잔느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내려는 듯, 내 안색을 살피던 잔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이 역력한 표정을 짓던 잔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분이 좋아졌어요.”
“…….”
“그걸 사용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으면서, 마음이 즐거워졌어요.”
전형적으로 요석에 중독되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꿀처럼 달콤하게 스며들다가, 이윽고 독으로 변했다. 그 독이 숨통을 조여들어, 문제를 인지하게 되었을 때는 모든 게 늦어 버린다. 요석에 중독되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걸 넘어서서, 안 좋은 영향력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요석에 중독된 인간은 마치 돌림병의 숙주처럼 되어 버리는 거다.
예전 같으면 ‘왜 이제야 이 사건이 일어나는 거야?’ 하고 당황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여기에 있는 것부터가 잘못이니까.
더군다나 내가 이 글을 쓴 사람이라잖아. 물론, 아직 전부 기억 나는 건 아니지만.
그때 잔느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날 바라봤다.
“힘들게 살고 있는데, 그렇게나마 즐거움을 얻는 게 잘못된 일인가요?”
“…….”
“아가씨와 다르게 제 삶은 변하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혀요! 그래서, 조금만 기분이 좋아지려고 했었던 것뿐인데……!!”
자기 딴에는 억울한 포인트를 호소하고 싶은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내겐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나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잔느를 바라봤다. 그것이 잔느의 기분을 건드린 것인지, 그녀는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요……!”
“…….”
“노력해 봤자 결국엔 제자리걸음,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지는데 저만 남겨진 듯한 그런 기분……!”
여전히 자기변명을 할 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잔느의 울분을 담담하게 들어 주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머리를 움켜쥔 잔느는 바닥 위에 엎드려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 내는 절규와도 같은 울음에도 나는 여전히 내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은 나도 해 본 적이 있다. 아니, 언제나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과 비슷해지기라도 해 보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다가가려 할수록 점점 더 밀려나기만 했었다.
스스로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때로는 그 노력만으로도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안 되는 게 있고, 내 것이 아닌 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게 뒤틀려 있는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첫 단추일 테니까.
나는 보란 듯이 더 크게 우는 잔느에게 말했다.
“넌 이곳을 떠나게 될 거야.”
더없이 차갑고 인정머리 없게 들리는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본인만 억울하다는 사람에게 더 해 줄 말은 없었다. 내가 도움을 줘도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욕할 상황이었다. 끊임없이 빼앗아 가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내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할 말은 여기까지. 잔느와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잔느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면 앞으로 만날 일도 없겠지만.
내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잔느가 빠르게 바닥을 기어 왔다.
“아가씨, 기다려 보세요! 잠시만요!”
기어 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기괴함에 놀랐다. 혹, 전날처럼 뭔가에 홀린 상태로 내게 접근하는 건가 싶어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 전에 잔느가 외쳤다.
“그게, 아가씨를 해쳐야 한다고 했어요!!”
“…….”
어느덧 내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잔느는 필사적으로 내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그게, 아가씨를 해치고 불행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내가 즐거워질 거라면서……! 타인의 불행을 양분으로 삼아서 내 행복을 얻으라 했어요. 그게 아니면 전 평생 불행해질 거라고 했어요……!!”
치마가 찢어질 듯 세게 움켜쥔 잔느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분명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게 점점 더 크게 제 귓가에서 들려왔어요. 이렇게, 저렇게 해라. 계속해서 떠들어 대니까 듣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제 머릿속엔 저도 모르는 뭔가가 있는데, 그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어요-.”
믿어 주긴커녕 미친 거냐면서 손가락질할 게 분명한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는 잔느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실된 얼굴이었다.
지금 잔느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건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떠들어 댔다는 게 누구인지도 말이다. 에레즈겠지. 잔느를 이용해서 날 공격하게 했던 거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이었기에 놀라울 게 없었지만, 한가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잔느가 들었다는 ‘불행을 양분으로 해서 행복을 얻으라’는 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비게일이 아닌 나였을 때, 힘들기만 하던 내 주변 상황들이 생각났다.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었던 나날들이 있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났을까.
문득 든 생각에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진 나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딜 가세요! 저는 솔직하게 모든 걸 말했잖아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이것 놔.”
“그러지 마시고 제발 저 좀 용서해 주세요!!”
매달리는 잔느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잔느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필사적인 감정을 읽어 냈다. 여기서 날 놓아 버리면 자신의 인생은 끝이라는 걸 아는 거다. 그러니까 놓아줄 수가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으면서 이러는 건 제멋대로인 게 아닌가 싶지만, 또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던 삶이 떠올랐다.
“네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줄게.”
잔느와 내 상황이 같다고는 볼 수 없고, 날 해치려고 했던 사람을 신경 써 뭐 하나 싶기도 했다.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해야 할 거고, 앞으로 십 년은 제국엔 발도 못 들이게 될 거야. 그동안 네가 뭘 잘못했는지를 생각하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다시 날 찾아온다면…….”
“…….”
“그때도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겠어.”
이건 잔느에 대한 배려일까, 아닐까.
앞으로 평생 저택의 하녀로 일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선 큰 배려였지만, 다르게 보면 앞으로도 평생 하녀로만 일해야 된다는 의미였다.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길 바라고 요석에 손을 댄 건 아닐 거다. 다른 삶을 원했기에 알랭의 거짓뿐인 유혹에도 넘어간 것일 테고. 그래도 여기까지였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뭔가를 더 해 줄 순 없었다.
끝끝내 날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던 잔느는 손에 들어간 힘을 빼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새파란 하늘이 눈을 찔렀다.
그러자 떠오르는 건 커튼을 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던 여자의 잔상이었다. 외부와 연락을 끊어 버린 채 폐인처럼 하루하루를 살던 내가 떠올랐다.
아, 그래.
나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던 거였구나. 어떻게든 잘 버티어 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결혼 실패, 돈만 달라는 가족, 걱정해 주는 척 뒤에선 숙덕대던 회사 동료들. 그들의 말과 시선이 아프게 날 찔러 댔고 더는 거기서 버틸 수 없어졌다. 나는 도망치듯 떠났고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새롭게 옮긴 집에서 뭘 했더라.
그때 귓가로 빠르게 뛰는 타자 소리가 들렸다. 타다다, 하고 빠른 타자 소리와 식탁 앞에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는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날 감시하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검은 그림자를 떠올리자,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러 대는 듯한 두통에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결혼이 파투 나고선 회사에서 버틸 수 없어서 휴가가 아닌 퇴직을 신청했다. 여행을 하고 돌아와 엉망이 된 집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엄마한테 찾아가 한바탕 해 버렸지. 오랜 세월 쌓아 온 울분을 토해 냈지만, 오히려 그런 날 비난하는 엄마와 그녀 뒤에 숨어 있던 동생의 모습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그대로 모든 걸 챙겨 도망치듯 먼 곳으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날 아는 누구라도 날 찾아낼 수 없도록, 그렇게 꼭꼭 숨어 버렸다.
며칠은 좋았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유와 내 삶을 되찾은 것처럼 더없이 뿌듯했었다.
그 감각에 취해서라도 잘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난 그렇지 못했다. 하루하루 갈수록 기분은 가라앉고 집 안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가 간신히 일어났던 건,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식탁에 앉아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쓴 글에는 완결이라는 마침표가 찍혀 버렸다.
대체 누가 완성한 결말이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