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죽은 폐빈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대
“그 어떤 연심도 갖지 않기로 나랑, 약속해.”
소랑은 한참만에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녀의 답은……
“그래.”
이쯤에서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오늘 돈을 주어 사람을 쓴 것이 드러나면, 내가 지금껏 거짓을 말했던 모든 것들이 줄줄이 밝혀지고 만다.
다행히 아직 신원은 그녀가 사짜 점쟁이라는 것까지 눈치채지는 못한 듯했다.
“이미 왕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고?”
이렇게 열심히 나서서 세자빈을 잊게 하려는 모든 것들이, 사실 왕을 향한 연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었던 신원이었다.
“아니야.”
소랑은 고개를 조용히 내저었다.
“어떻게든 이 일을 잘 끝내고, 궐 밖을 나가는 게 내 목표라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 더 큰일 벌이지 말자. 너도, 나도.”
그녀의 말은 신원의 마음도 더 커져서는 안 된다. 당부하는 것이었다.
“비밀, 꼭 지켜 줘야 해.”
“너도 약속, 꼭 지키는 거야. 왕에 대한 그 연심, 더 키우지 않는 걸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혼인 적령기의 아가씨들을 보쌈해가는 범행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예 노총각이 직접 아가씨를 보쌈해가는 것이 아니라, 처녀들의 보쌈을 전문적으로 해 주는 보쌈꾼 조직이 생겼다.
그들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규방의 아씨들을 납치해 돈을 준 노총각들에게 등급별로 처녀들을 팔아넘겼다. 일종의 인신매매이자 약탈혼이었다.
따로 국청을 설치해 그 조직의 윗대가리를 잡으려 해 보아도, 보쌈꾼 조직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혼인 적령기 처녀들의 혼인을 공식적으로 금지해 버린, 금혼령 시대의 어두운 풍경이었다.
아가씨들이 함부로 밖에 발걸음하기가 더더욱 힘들어졌다. 부모들은 혹여나 내 딸들이 납치를 당할까 하여, 더더욱 깊은 안채로 딸들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남자가 꼭 필요하다 그러네.”
인사골의 애달당.
다리를 꼬며 허세를 부리는 이는 예전 신원의 밑에 있던 의금부 졸개, 춘석이었다.
똥똥한 몸에 짧은 다리. 인상으로 봐서는 보쌈꾼들을 만나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갈 듯 하지만, 지금 그는 해영의 앞에서 한 명의 듬직한 남자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차를 내려 주던 그녀는 절레 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허튼수작을 부리실 거면, 그냥 가시지요. 네?!”
“아니~ 해영인 무슨 걱정이 있어. 오빠가 지켜 준다니까. 내가 이래봬도 금부에서 일하는…….”
“졸개가 아니냐.”
문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익, 시익, 끓어오르는 화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정도석이었다.
아니, 저게 우리 해영 아씨에게 무슨 막말을!
뒤에는 덕훈과 왕배가 도석의 뒤에 빼꼼히 숨어 있었다.
“어머, 오늘도 패설책을 갖고 오신 거여요?”
도석을 본 해영의 눈이 화악 밝아졌다. 춘석을 볼 때와는 다른 사뭇 빛. 이에 도석의 화가 조금 풀어졌다.
“중전님 뜻대로, 그 선비의 정원, 폭군을 길들이는 비책?”
요새의 도석은 매일매일 패설책을 들고 애달당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해영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너무 감사해요. 만날 이런 건 다 어떻게 구하시어요?”
“말했지 않소. 요청하는 건 다 구해다가 줄 수 있다고.”
뒤에서 덕훈과 왕배가 킥킥 거렸다.
‘그러니까 십구금 분야의 책들도…….’
‘어헛, 간신히 변태의 인상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조용히 좀 하시오.’
도석이 뒤로 속삭여 주의를 주고서는 해영에게 씨익 달달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춘석은 괜히 다가와 책을 뒤적이며 어깃장을 부렸다.
“아니, 이런 상상 속의 연애 이야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니까. 밖에선 보쌈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해영이같이 예쁜 아가씨라면, 더더욱 조심을 해야 하구.”
“거 금부에 속해 있단 사람이 보쌈꾼들 안 잡아가고 여기서 뭐하고 있소?”
“열 여자 백 여자 지키면 뭐하나. 내 여자를 지켜야지.”
“내, 내 여자는 누가, 이씨……!”
이러다 자칫 도석과 춘석이 서로 달려들어 쌈이 붙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주 개싸움이.
“그만들 하셔요. 더 흉흉한 소문이 있는데, 이는 못 들으셨어요?
“무, 무슨 소문이?”
해영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얘길 꺼냈다.
“바로 죽은 폐빈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요!”
모두 대번, 해영의 말을 부정했다.
“에이, 거짓부렁.”
“말도 안 돼~”
“어떻게 죽은 폐빈이 살아돌아와~ 유령이야?!”
해영은 동그래진 눈으로 똘망 똘망 이야기를 했다.
“진짜 유령일지, 아니면 폐빈이 진짜 살아 있었는지는 모르지요.”
“폐빈이 살아 있었다고? 그럼 7년간 내려진 이 금혼령은 뭐야?”
“또 모르지요. 우리 모두 헛고생을 한 것인지.”
춘석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헛고생이라기엔 너~무 길었다!”
도석은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냥 저잣거리 뜬소문이지 않소. 괜한 이 나라를 들썩이게 하려는 풍문일지 모르오.”
“그렇다기엔 진짜 폐빈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던데요?! 누군가는 절간 연못에서, 누군가는 물가에서 봤다고 합디다. 그것도 아주 대례복을 곱게 차려입고서요.”
가례를 올릴 때 입던 그 옷까지 차려입고?
“에이, 진짜 세자빈이면 대례복 입고 다니겠소?”
“억울하게 죽은 세자빈 안씨의 원한 때문에 이 조선에 저주가 내려졌다는 소문이 있으니, 아마 유령이지 않을까요?!”
이때 개이가 2층에서 내려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영이 네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전하는구나.”
“아이코, 일어나셨어요? 요새 초저녁잠이 많으시다더니.”
“만약 그게 진짜 세자빈의 유령이면, 여기 주인장 소랑이가 하는 일은 뭐가 되겠느냐.”
“그야 언니가 하는 일은 사…….”
흐읍, 말조심하지 못할까?! 개이의 매서운 눈빛이 돌아왔다.
“사, 사, 사랑스러운 일이지요. 언제나 임금님과 함께 있으니, 사랑이 꽃피어나지 않겠어요? 아하하하~”
해영의 어색한 웃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애달당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바로 신원이었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엔 웬일이오?”
개이가 놀라 물었다.
“개이 할배, 잠시 얘기 좀 나누시지요.”
신원은 도석과 일행들을 지나쳐 달빛이 하얗게 내려오는 뒤뜰로 향했다.
“지금은 궐에 있어야 하실 때가 아닙니까?”
“전하의 잠행을 모시다가, 전하와 소랑이를 궐로 들여보내고 나는 이쪽으로 온 것이오. 그보다 저번에 그 전갈은 어찌 알고 보낸 것이오? 궐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 변고를 당할 뻔했소.”
“소랑이의 목숨을 노린 누군가가 자객을 보낸 것이지. 소랑이의 이번 달 운세에 살(殺)이 껴있기에 그리 말한 것이오.”
“누가 자객을 보냈는지는 모르시고?”
“추정이 가는 자가 있으나, 아마 지금은 조사를 해도 증거가 부족할 것이오. 자객들을 다 해산시키든 어떻게든 했겠지.”
신원은 고민스럽게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래가지곤 의뢰한 자를 잡을 수 없지 않소.”
“분명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한번 실패했으니, 그들이 다시 소랑이를 노릴 때가. 그때 역공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소랑이가 떠돌이로 살며 원한을 사지 않고서야…… 누가 그 목숨을 노린답니까?”
개이는 자못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될 사람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따르는 법입니다. 화를 모두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지요. 견디어낼 수 있는 건 견디어내고, 맞서 싸울 것은 맞서 싸워야합니다.”
크게 될 사람이라……?!
“소랑이 목숨을 노리는 자는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
저릿저릿한 초조함이 밀려오는 말이었다.
“애달당에 오는 것은 당분간 삼갈까요?”
“아니오. 살(殺)의 기운은 물러갔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것입니다. 오히려 금혼령의 이러한 풍경을 전하께 생생히 전해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군요.”
얘기를 마친 개이와 신원이 애달당으로 돌아왔을 때.
해영에게 치근덕대던 춘석과 안으로 들어오던 신원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춘석아, 예서 뭐하는 게냐. 할 일이 태산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요새 왕명을 받고 있다 하여 너의 일을 태만히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요.”
도석은 신원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
지난번에 둘은 춘화첩 사건으로 한창 추격전을 벌인바 있었다.
“도사님, 저 춘석이 놈이나 좀 잡아가세요. 금혼령 시대에 아씨에게 추파나 보내고 말이야.”
“아이고, 그럴 리가 업지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제가 그 길을 호위해드리겠습니다.”
춘석은 도석에게 얄밉다는 듯 눈을 한번 흘기고서, 밖으로 나가는 신원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신원이 애달당 앞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춘석이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저, 혹시 이 소문 들어보셨습니까?”
“무슨 소문?”
“이 도성 안에 죽은 폐빈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 말입니다.”
“……뭐, 뭐라고?!”
강녕전의 침소.
왕 이헌이 며칠째 밤마다 내린 명이 있었다.
“술상을 보아오너라.”
원녀와 세장이 심신이 상할까 저어된다며, 말려도 멈추지를 않았다. 소랑이 그만 마셔라, 바로 옆에서 술잔을 빼앗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 세상 살아서 무엇하느냐~ 7년간 그리워했던 빈궁이 사실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싫어했다는데! 우에~”
금혼령 시대에도 언제나 체통을 잃지 않고, 근엄한 기운을 유지하던 왕이었다.
그러나,
‘저는 살아생전 저하를, 사랑하지 않았나이다.’
그 말 한마디에 헌은 제대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며칠 가다 말겠지, 했지만…… 헌의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만 있었다.
요새는 아예 술잔을 벗 삼고 술병을 베개 삼아 잠들고 있었다.
“우에~ 내 7년 세월을 어찌하라고! 돌려내!”
“빈궁, 흑흑, 어찌 내게 그럴 수 있소. 나를 싫어했다니이이. 그 모든 게 거짓이었소오오!”
“우아아아아악! 뿌레꾸렉또핥”
하루는 잔뜩 술을 섞어 마시고는 토사광란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 위에서 헤엄치듯 버둥 버둥 허우적대는 왕 이헌.
소랑은 그날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광란의 ‘광’이란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왕이 제대로 미쳤구나.
“전하, 정신 좀 차리시옵소서. 그게 그렇게 정신붕괴이시옵니까?”
“빈궁, 빈구후후후후훙”
왕 이헌이 앞에 있던 소랑을 얼싸 안았다.
술김에 나와 안씨를 또 착각한 것인가?
소랑은 순간 뺨이라도 한 대 날릴 뻔했다. 정신 차리시라고오오!
젤 싫어하는 게 그 헷갈려하는 눈빛인데, 진짜!!!
“아니, 이제 빈궁마마를 잊고 간택에 임해 새로운 비를 들일 생각을 해야지, 언제까지 과거만 그리실 것이옵니까.”
“나에겐 이제 더 이상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기는요. 금혼령에 고통 받는 이 나라 백성들을 생각하시옵소서. 왜 그들의 미래까지 망치려 하십니까.”
“우오오오오! 왕이 혼인을 못하는데 누가 혼인을 하려 하느냐! 우오옥!”
“이 말 모태설로(母胎雪露)들 앞에서 했다가는 민란 일어납니다요. 아오! 정신 좀!!!”
왕이 며칠째 광란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에 불안해진 건, 신원이었다.
이미 백성들로부터 떠도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그 소문이 왕 이헌에게 닿기라도 하면 그의 불안한 내면은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폭발할 지도 모른다. 그 여자를 당장 잡아와라, 부터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허나 한편으로는 신원 역시 긴가민가해지는 것이었다.
정말, 세자빈이 살아 있는 것이면 어떡하지?
궐에서 분명 죽어서 나갔다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탄탄히 짜여진 음모라면?
이 조선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계획이라면?
하아. 신원은 고개를 저었다.
나까지 이렇게 헷갈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 모두가 뜬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오전 산보를 가던 왕 이헌이 우뚝 서서 갑자기 고함을 쳤다.
뒤에 행렬을 따르던 내관과 나인들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볼 정도였다.
“그래, 결심했어.”
“무엇을 말이옵니까?”
옆을 따르던 소랑이 다가와 물었다.
“이제부터 술은 아니마시기로.”
“아? 정말요? 참으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러다 속 다 버리십니다.”
“이제부턴……!”
“……?!”
“나 혼자 빈궁을 사랑하겠어.”
네에에에? 이게 또 웬 개소리인가?
“소랑아, 들어보아라. 요 며칠째 내가 빈궁을 잊어보려 노력하였지만 그게 잘 안 되질 않았느냐.”
“아니, 그런 과정들을 견디어야 사람을 잊지요.”
“내가 힘든 건 빈궁에게 사랑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돌아가신 분 사랑을 지금 받을 수는 없…….”
“이젠 나 혼자 사랑하겠어. 빈궁이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도무지 잊을 생각은 없으신 것입니까?
“아프다고 여기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 통증에 함락되어 버리셔도 안 됩니다. 그저 억지 부리지 말고 모든 게 자연스럽게 잊혀지도록 기다리시옵소서.”
소랑의 진중한 말에도 헌의 입술은 샐쭉하게 삐죽였다.
“쳇쳇쳇, 싫어 싫어 싫어.”
이분 이거 제대로 삐뚤어지셨구만.
어찌해야, 이 상태를 정상으로 되돌리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담장 너머로 나인들 몇 명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새 소문 들었어?’
‘뭐, 뭐?’
‘죽은 폐빈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대.’
소랑이 깜짝 놀라 담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그 행렬의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뭐어?! 아예 관이 궐에서 나갔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살아서 관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 얼굴 생김새부터 음전한 자세까지, 딱 폐빈이래.’
‘그래, 그래 나도 들었어. 대례복까지 쫙~ 빼입고 도성 내 곳곳에서 나타난다는데? 그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아니 근데 그게 유령이야, 살아 있는 사람이야?’
‘동서남북 신출귀몰한다는 거 보면 유령 아닐까?’
‘피부 혈색이나 숨 쉬는 소리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다던데?’
‘이러다가 왕실에까지 나타나는 거 아냐? 꺄아~ 무서워.’
‘원래 전하께서도 가끔 죽은 폐빈 보고 그러셨잖아.’
그 숙덕거리는 소리에 행렬 모두가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모두들 뜨악한 표정으로 왕 이헌의 안색을 살폈다.
누구보다도 가장 딱딱하게 굳어져 눈만 깜빡이고 있는 것이, 바로 헌이었다.
“……지금, 무슨 소문이라 했더냐?”
“저, 저는 잘 못 들었는데요?”
소랑이 고개를 잘게 저으며 부인을 해 보았다.
“나는 똑똑히 들었는데.”
“저, 전하. 갈 길이 바쁘시지 않았습니까? 어서 마저 걸음을……‘
쾅―! 하는 폭발음같이 헌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하느냐! 당장 저 나인들을 데려오너라!”
호위무사들이 우르르 먼지를 내며 달려가 담 너머 수다를 떨던 나인들을 끌고 왔다. 이것 놓아라, 반항을 하던 나인들이 왕 이헌을 보자마자 사르륵, 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엄마, 나 이제 죽었소.
“방금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렸다!”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만큼이나 무섭고 거친 목소리였다.
“소, 소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하도 몸을 바들바들 떨어 이대로 실신해버릴 것만 같은 나인들. 방금했던 입방아가 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알고 있기나 할까. 이번엔 소랑에게 제대로 정신 붕괴가 왔다.
‘죽은 폐빈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대.’
그 말이 소랑의 귀에 주문처럼 맴돌았다.
안씨가 살아 있다면, 대체 지금까지 소랑이가 빙의연기를 한 게 다 무엇이 된단 말인가.
“소랑아, 이들이 한 말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느냐.”
화의 불똥이 소랑에게로 튀었다.
“그러니까 소녀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까?!”
“모, 모두 저잣거리 뜬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이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하지 않느냐.”
“절대로 빈궁 마마께서 살아 있을 리 없습니다. 말 꾸며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사특한 소리입니다.”
헌의 등 뒤로 더욱더 무서운 검은 기운이 뻗쳐올랐다.
“그렇다면 유령이란 말이냐?”
“……그것도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빈궁의 넋을 받는 자가 어찌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때 어디선가 신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정체는…….”
나인들이 꿇어앉을 때부터 호위무사들의 곁에 있던 신원이었다.
“제가 밝혀내겠습니다.”
“……!”
셋의 격한 감정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격돌했다.
물러서지 않는 왕 이헌과 신원의 눈빛도 매섭게 부딪혔다.
신원은 이미 그 정체를 알게 된 걸까? 죽어서 다시 나타난 세자빈의 실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