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 나라의 간택을…… 실은 내가 막고 있었다고?
“소랑아, 소랑아!”
신원의 외마디 외침은 들리지가 않았다.
소랑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사거리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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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전시에 가야 한다고?”
강녕전.
내시 세장이 전한 소식에 왕 이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네에, 전하.”
요새 헌에게서는 예전보다도 더 진한 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소랑이와 있을 때보다 더욱 여원 광대, 마른 몸매, 짙어진 눈 밑 그늘.
그리고 어둡고 탁한 눈빛에서 나오는 폐쇄적인 기운.
어째 그런 것들이 왕 이헌에게서 더욱 퇴폐적이고 색스러운 느낌을 더하고 있었다.
무섭지만 너무나 잘생긴, 어둠의 마왕 같은 느낌.
감히 한마디 말도 거역할 수 없게 하는 폭군의 분위기가 더욱 진하게 흐르는 요즘이었다.
“하아, 민가에 나간단 말이지?”
그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무과 전시라, 임금의 참석 하에 무과의 복시 합격자들이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큰 행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만의 공식 행차인만큼 그 행렬이 짧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내키지 않으십니까?”
“내키지 않은들 어떻게 하겠느냐, 가야지.”
그는 탐탁지 않게 턱을 쓰다듬었으나, 속내는 전연 달랐다.
이 궐 밖이 모두 소랑이의 영역도 아닐진대, 민가에 나가게 되면 어쩐지 그녀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요새 소랑이는 어디에 있느냐? 선혁과 활로부터 소식은 들었느냐?”
“전하, 묻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장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헌이 지금보다 더 무너지는 걸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소식조차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간택에 집중하신다면서요.”
“허나,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이 죄가 되느냐. 한때 사랑했던 여인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아야지.”
그러나 잠시 후.
내시 세장이 전한 소식에 왕 이헌은 그야말로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지고 말았다.
“뭐라……?!”
“전하…….”
“신원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이정학 대감 댁에?!”
그에게서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아무리 저번 잠행에서 소랑과 신원이 안고 있는 걸 보았다 한들…… 소랑이 아예 그 집에 들어가서 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개이의 건강을 이유로 사가에 나가려 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심지어 개이와도 떨어져 신원과 함께 살고 있다니.
헌은 그녀가 강물에 빠져 죽을 뻔한 소식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오해는 그야말로 정신적 붕괴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신원과 살고 있다니.
가슴에 수백 개의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었다.
민가의 행차에 나간다는 것만으로 살짝 들떴던 그의 가슴은 모조리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의 기대와 긴장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준비 되었느냐.”
행차를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헌은 표정 없는 얼굴로 왕의 가마인 연(輦)에 올랐다.
경복궁의 광화문이 열리자 수많은 백성들의 그곳에 모여 있었다.
모여든 백성들의 바람은 한결같은 것이었다.
전하, 어서 간택을 마무리하시어 이 나라의 국모를 간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무릎 꿇고 빌었다. 제발, 제발……
그중에 감정이 격해지는 이도 있었다. 이제 모든 민심은 간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나간 것 같았다.
“그래, 이번 간택이 온 백성들의 희망이로구나.”
이제 더 이상 백성들의 기대를 무너뜨려서는 안 되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헌이 작은 창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바로 이때.
구름떼같이 모여든 백성들 사이에 황망히 뛰어나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양반가 규수의 옷을 입고 있으나, 장옷으로 얼굴을 가릴 새도 없이 바람같이 뛰쳐나오는 이.
그녀는 바로…… 소랑이었다.
그야말로 단숨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헌의 동공이 단숨에 커졌다.
‘소랑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반갑고, 그립고, 미웠던 그 얼굴이……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두둥실 떠오른 것이었다.
‘전하……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듯한 소랑의 간절한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그 눈빛이 마치 채찍처럼 자신의 심장을 관통해 닿을 수 없는 저편 끝까지 내리치는 듯했다. 육신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의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서 남김없이 해체되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모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
허나, 바로 뒤에서는 신원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소랑이를 향해 있었다. 그녀가 혹여라도 인파 틈에 밀려 다칠세라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미 둘이 함께 살고 있다고……?
차오르던 그리움을 짓누른 배신감이 그를 휘감았다.
아무리 둘이 원하는 대로 살라 말하고 뒤로 돌아섰던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던 소랑의 말을 믿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배신감이 더 큰지 모르겠다.
그는 결국…… 간절히 와 닿는 소랑의 눈빛을 차갑게 외면하고 말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을 보고도 시선을 거두는 헌의 모습에서 소랑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쪽을 보고 있다가 혹여 신원과도 눈이 마주칠세라……
왕 이헌은 열려 있던 문을 탁― 닫아버렸다.
문을 닫자 수많은 인파들의 소리는 웅웅 대는 것처럼 점점 작아져 뚜우― 하는 공명으로 그의 귀에 울려 퍼졌다. 가마가 사방팔방으로 빙글 빙글 돌아가는 느낌에 헌은 머리에 손을 짚고서 비틀거렸다.
어지럽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오만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머리에서 소용돌이처럼 돌았다.
그녀와의 짧은 재회는……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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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순간,
소랑은 천국에 올라섰다가 다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설마설마 했었다.
왕 이헌을 진짜 볼 수 있을까.
꿈에서만 그리던 그 모습을, 진짜로 볼 수 있을까.
결국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먼저 달려 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사거리에서 수많은 인파에 휩쓸렸다.
어마어마한 왕의 행차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화려한 궁인들의 행렬.
그녀는 그 위압감에 눌려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왕 이헌은 너무나 화려하고 높은 곳에 있어, 자신과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와 헌의 거리가 이렇게나 멀었단 말인가.
이 수많은 사람들 속, 그녀가 그 어떤 소리를 낸다 하더라도 이는 왕에게 닿을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냥 수많은 백성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보고 싶을까. 영원히 닿을 수 없다 해도, 한없이 바라보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그녀는 힘겹게 사람들을 헤치고 왕이 탄 가마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런데……
‘전하……!’
놀랍게도 작게 열린 창문으로 왕 이헌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나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상황이었다.
내가 왕 이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가, 소랑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주 짧았지만, 그녀에겐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은 이 공간에 둘만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 어떤 말도 소리쳐 전할 수가 없으니, 그녀는 애달픈 목소리를 그저 눈빛에만 담았다.
전하, 잘 지내셨습니까.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꿈에라도 전하의 곁에 가고 싶은 이 마음을 아십니까.
그러나 헌은 그런 소랑의 눈빛에서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변해 버린 눈빛……!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 못해 무거운 철퇴가 내리친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는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듯, 작은 창문을 탁― 닫아버렸다.
‘전하……!’
왕이 탄 가마는 빠르게 그녀의 앞을 지나쳤다. 영원 같았지만 또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를 따르는 행렬의 뒷자락이 사람들 사이로 넘실넘실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가버리는 듯한 느낌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소랑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잡아주는 건…… 바로 신원이었다. 언제부터 그가 내 곁에 있었는지, 그조차 알아챌 경황이 전혀 없던 그녀였다.
임금의 행차가 지나간 뒤, 구름같이 몰렸던 인파는 빠르게 흩어져 각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의 시선만은 황망히 임금이 사라진 자리를 쫓고 있었다.
방금 전과 지금의 공기가 너무나 달라, 마치 실제가 꿈처럼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인파의 틈을 헤치고서 선혁과 활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누나, 이렇게 갑자기 튀어 나가면 어떻게 해요.”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찾아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자.”
소랑을 안타까이 내려단 보던 신원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좀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
집에 도착한 신은 그녀를 안채의 방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녀의 두 눈엔 희망의 불씨가 모조리 꺼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 참, 아까 하려던 말 뭐야? 내가 그 말도 다 못 듣고 달려 나갔었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 위에 잔뜩 복잡해진 신원의 눈빛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서씨부인에게서 소랑이를 데리고 청나라로 떠나지 않으면, 계속해서 살변의 위협이 있을 거라는 협박을 들은 뒤였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그 얘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삶의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것만 같은 그녀인데.
신원은 도저히 이 말을 어찌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소랑아.”
“응, 무슨 일인데.”
“있지, 우리말이야.”
신원은 아예 소랑을 방안으로 이끌어 자리에 앉았다.
“우리, 청나라로 갈래?”
“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왕 이헌의 눈빛이 자신에게 닿았다가 차갑게 돌아섰던,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청나라에 가자고? 이렇게 갑자기?
“아직, 이곳은 많이 위험해. 너 말고도 수많은 여자들이 보쌈 당하고 있어. 알잖아. 그 여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하는지.”
해영이 당할 뻔한 일이었다. 그녀 역시 산적들에게 끌려갈 뻔했었고.
그걸 잘 안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아예 범위를 넓혀서 삼간택에 오를 만한 여인네들이 납치를 당하고 있어.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다고. 우릴 다시 한 번 죽이려 하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뭐라고?”
신원의 그 말에 잊혀졌던 기억이 소랑의 뒤통수를 타앙― 때렸다.
그녀가 보쌈을 당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너무나 꿈결처럼 지나가 그만 잊어버린 그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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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해 있던 소랑의 눈에 희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눈이지만, 쉽사리 떠지질 않았다.
매캐한 향이 코를 훅 찔렀다. 납치를 했을 때, 반항하지 않도록 향을 쓴 것이었다.
때문에 소랑의 정신이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온몸을 덮은 거친 헝겊의 감촉.
아직 자루 안인 것인가.
자루의 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저쪽에서 무언가를 공모하고 있는 것인가.
쉽사리 몸을 가눌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귀에 들려오는 말도 현실의 것인지, 꿈결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아차. 이 일이 끝나면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가씨들 몇 명을 더 보쌈할 것입니다.”
대화를 하는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해오던 일이 아니오?”
“허나 지금보다 더 힘든 일이 될 것이에요. 모두 있는 집안 댁 귀한 여식들이라, 경계가 삼엄할 것입니다.”
“혹……?!”
남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집안 좋고 미색 좋고 교육 잘 받은 여식들이지요.”
“미리 간택의 싹을 미리 잘라 버리겠다?!”
정신이 혼란한 와중에도 그들의 음모는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미리 중전 후보가 될 만한 아가씨들을 제거하여, 차기 간택을 조작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금혼령이라는 시대를 이용해 혼란을 조장하고 범죄를 저질러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이들.
바로 이들이 저 바깥에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자루를 찢고 나가 정체를 확인하고 금부에 찔러 넣고 싶은데. 몸이 조금도 움직여주질 않았다. 오히려 힘을 쓸 때마다 머리에서 향이 도는 것인지,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때.
한 사병이 그들에게 다가와 급히 고했다.
“금군들이 들이닥칩니다. 몸을 피하시지요.”
“뭐라? 여긴 어찌 알고!”
혼비백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도망가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거꾸로 뒤집히면서, 소랑은 다시 정신을 까마득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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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게 했던 향을 맡았던 지라, 모두 겪고 나서도 한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여인들이 납치되고 있다고 하니.
꿈결인줄 알았던 그 얘기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힘이 모두 빠져나갔었던 소랑의 눈빛이 파르라니 번쩍, 빛났다.
“신원아, 차기 간택은…… 조작될 거야!”
“뭐?!”
“이건 단순한 납치가 아닐 거야. 아마 내명부에도 사람들이 속속들이 매수되어 있겠지. 막아야 돼.”
“소랑아.”
“일단 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연통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분명 보쌈꾼들 세력이 모든 걸 장악하고 있을 거야.”
정신없이 말하는 그녀의 손을 신원이 타악― 잡아챘다.
“그러다가 간택이라도 미뤄지면……?!”
“뭐?”
“이미 너로 인해서 간택이 많이 미뤄진 거, 몰라?”
충격에 휩싸인 그녀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나로 인해서라고?”
이 말까지는 안하려 했는데…… 신원은 고통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하께서 너를 정비로 만들기 위해 간택을 미루어라, 조정의 대신들을 진정시켜라, 그런 명을 내렸어. 실은 이 나라 간택이…… 너에게 달려 있었던 거야.”
미,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나라의 간택을…… 실은 내가 막고 있었다고?
“아까 백성들 목소리 들었지? 이번에도 간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모두 폭도로 변할 이들이야. 이제 간택을 위해 니가 할 수 있는 건…….”
“……!”
“이 나라에서 너의 존재가 완벽히 사라지는 거야.”
소랑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신원 역시 잔인하게 튀어나와 버린 말에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넌 모를 거야. 전하께선, 이미 날 잊었어.”
소랑은 아까 왕 이헌의 그 눈빛을 떠올리며 말했다. 자신에게 닿았던 시선을 차갑게 거두던 그 모습.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았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아냐, 그거랑 니가 죽는 거랑은 다른 문제야. 세자빈의 의문사에 7년을 매달리셨는데, 니가 죽으면 마음이 편하겠니? 넌 그런 소식 전하고 싶어? 니가 어디 강에서 익사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
“그러면, 그래서 더더욱 이 나라의 금혼령이 길어지게 되면…… 이 조선의 미래는 없어. 전하께선 다시 한 번 정사의 의지를 잃어버리실 거고, 후사는 더더욱 없을 거고. 그땐 역성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야. 이 나라의 끔찍한 운명이 모두 니 목숨 하나에 달려 있단 거, 모르겠어?”
이 말을 듣는 소랑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에 가자고……?!”
“차라리 생사도 확인되지 못할 만큼 멀리 있는 게 낫지. 그래야, 전하께서도 이 모든 걸 잊고 새로이 간택에 힘을 쓰실 수 있을 거야. 그래야 너도 살고, 이 나라도 사는 거야.”
내 나라 조선을 위해서 이제는 내가 떠나야 한다라……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말을 하는 신원의 가슴도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해서라도 그녀가 안전해지는 게 나았다. 이 조선에서 그녀가 죽는 걸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차기 간택의 조작으로 인해서 부패한 새력이 정권을 잡는다면? 그래서 이 나라 조선을 잡고 뒤흔든다면……?!”
“그 어떤 상황도 지금 보단 나을 거야.”
신원의 말을 듣는 소랑의 동공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혼인할 수 없는 지금의 조선이, 백성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암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