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혼령, 조선혼인금지령 (98)화 (98/98)

98화. 만백성에게 고하노니, 사랑하며 살지어다

백성들에게서는 요새 ‘성혼령’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금혼령이 끝나고 나서 혼인 특수가 일었다. 각 고을마다 봇물이 넘치도록 혼사가 치러졌다.

매일매일 혼례식이 있으니, 조선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된 것도 같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혼례를 치르는 남녀들과 그 혼사를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

모두의 가슴에 하루하루 행복감이 깃드는 나날들이었다.

만남과, 혼례식,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이쪽으로 쏠렸다.

헌은 그들이 사랑하고 짝지어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도록 배려한 정책들을 펼쳤다. 이러한 안들은 모두 중전인 소랑을 거쳐 통과된다 하니, 실질적으로 백성들이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하는 이는 바로 그녀였다.

소랑은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마음의 온도를 높이고 싶었다.

불신 불안 가득했던 금혼령 시대에서 이제 따뜻한 정과 배려가 넘치는 사랑의 시대를 만들고 싶었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조선.

그것은 사람들이 품은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헌과 소랑은 그 누구보다도 모범이 되는 금슬 좋은 부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우리가 꿈꾸는 조선에 더 가까워지는 일일 것이다.

예전엔 주변 이들을 밝고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이끌었던 그녀가, 이제는 조선 전체를 환한 기운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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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이헌과 소랑이 만들어 나가고 있는 행복의 시대.

이와 더불어 사주찻집, 애달당도 성황을 이루었다.

혼사를 앞둔 청춘 남녀들의 애정 비사 고민이 더욱 많아진 것이다.

개이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번쩍하는 신기로 탁월한 해결책을 주고 있었다.

운영은 해영과 도석의 몫이었다.

애달당이 너무 바빠져, 해영 혼자 이 일을 처리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도석과 해영이 혼례식으로 잡은 날이 하루 이틀 앞으로 부쩍 다가왔다.

도석은 애달당의 영업을 일찍 종료하고, 그가 예전에 고시 공부를 하던 산속 초가집으로 해영을 이끌었다.

“도석 오라버니. 이곳에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셨습니까.”

해영은 그 초가집을 연신 둘러보며 말했다.

“뭐, 공부를 열심히 한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을 보냈지요. 아, 그리고 이제 서방님이라 부르라니까요. 내일 모레면 혼례식을 치를텐데요.”

“그럼 낼 모레부터 부를래요. 아직, 부끄러워서요.”

그녀가 영 수줍어하는 모습이 귀여워 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요. 그럼. 이번엔 이쪽으로 가시지요.”

도석이 안내한 곳은 초가집 뒤쪽에 커다란 오두막이었다.

대체 이곳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길래?

도석은 오두막의 커다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예전에는 그를 정본좌로 만들어 주었던 수많은 자료들이 있었지만…… 지금 책장 가득 꽂혀 있는 건, 다름 아닌 패설책들이었다.

“아씨를 위해 준비했소.”

해영이 그토록 좋아하던 각종 패설책들. 해영은 신기하다는 듯 그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나와 혼인하면 이것들 모두가 아씨 것이 될 것이오.”

“그런데, 지금은 패설책을 보지 않는걸요.”

해영은 고개를 저으며 그리 답했다.

“그, 그때 말했던 게 진짜요?”

“네. 이제 안 보는데.”

“왜요?”

해영은 두 손을 깍지 껴, 도석의 목에 걸었다.

“현실에, 이렇게 더 멋진 사람이 있으니까.”

“에헴, 내가 알기론…… 패설책의 그 어떤 남주인공도 나보단 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해영 아씨가 대체 왜 나를.

“그래도 날 진짜로 애타게 하고, 미칠 듯이 그립게 하는 사람은 오로지 오라버니뿐이에요.”

그 말에 도석의 얼굴에 싱글벙글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에헴, 내가 패설책 속 주인공 같은 남자가 될 순 없지만.”

“……?”

“실은 내 전문 분야가 따로 있소.”

“전문 분야라 하시면?”

“내가 본좌 본좌 정본좌라 불린 이유가 있지 않겠소? 그것은 모두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이론 때문. 내가 아씨를 조선에서 가장 호강시켜주겠다 다짐할 순 없지만……!”

“……?!”

“이 조선 여인네 중 가장 짜릿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겠소.”

해영은 그에게 잡힌 손을 툭,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 참…….”

“…….”

“개이득이군요.”

꺄르르, 꺄르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 좋은 일이었다.

잠시 후.

그 산속 오두막엔 후끈한 김이 가득 차올랐다.

도석의 말에는 진정 거짓이 없었다.

여자의 몸에 해박해도 이렇게 해박할 줄이야.

해영은 그야말로 최고의 남자를 고른 것이었다.

정도석.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 살며 정분, 혼인, 출산을 포기하려 했던 삼포세대였다.

나라가 불안할수록 고시가 최고의 안전빵이라 생각하며 거기에 매달리려 했지만……

자신의 찌질한 모습을 탓하며 스스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생각했지만……

인간지사, 짝을 이루고 싶은 그 본능은 도저히 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영을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 또한, 꺼질 수 있는 불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오랜 사랑은 결실을 맺었다.

오직 한 여자만을 바라보았던 뜨거운 순정이, 결국은 배신하지 않고 돌아와 그에게 꽃길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이제 그녀를 가졌으니, 세상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는 벅찬 가슴으로 품 안의 해영을 꽈악 껴안았다.

해영.

그녀는 패설책 속 아름다운 이야기들만이 진짜 사랑인 줄 알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너무 완벽한 사랑을 꿈꿔왔던 것이었다.

멀리 보지 말고 바로 내 주변에서 그 사랑을 발견해야 했음을, 그녀는 도석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이제 스무 살.

풋풋한 그녀의 뜨거운 첫사랑은 이제 현재 진행형이 될 것이었다.

이제는 바로 자신의 지아비, 도석을 향해 끝없는 사랑을 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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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애달당은 미친 듯이 바빴으나, 개이의 내면은 쓸쓸하기만 했다.

아무리 남들의 사랑을 접붙여주면 뭘 하나.

나는 금혼령이 끝나도 사랑을 할 수가 없는데.

아직 내 시대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 조선에서 남색이 혼인을 한다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개이는 믿고 싶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운명이 나타날 것이라고.

개이는 요새 장내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며, 뒷산길을 혼자 걸었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새하얗고 찬란한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비의 거리.

분위기는 더없이 낭만적이었다.

이런 날 내 님만 있으면 세상 무엇보다도 좋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흥얼거리는 개이의 노래에 누군가 화음을 넣었다.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이 모든 게 기적이었음을.’

완벽하게 딱 맞는 이 음색. 천상의 화음이 꽃비의 거리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누가 내 노래에 화음을 넣는가.

놀란 개이가 침침한 눈으로 뒤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 뒤에 서 있던 가인은 다름 아닌……

도승지 김설록이었다.

하롱하롱 예쁘게 내리는 꽃잎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감상에 빠진 그이.

그의 영롱한 눈빛이 개이에게 짜르르하게 맞닿았다.

개이는 온몸이 감전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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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별똥별이 떨어진 것만 같은, 강렬한 운명을 직감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낭만에 젖은 김설록의 볼이 설렘과 수줍음에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는 희끗희끗한 개이의 수염이 그 누구보다도 앙증맞고 귀여워보였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난 것이었다.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본 것이었다.

나의 가인, 설록을. 나의 사랑, 개이를.

아직까지는 굳건한 시대의 벽에 가로막혀 있지만……

그럴수록 사랑은 더더욱 비밀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사랑은 오로지 우리 둘만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금지된 사랑은 이미 시작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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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퇴근하셨습니까.”

“아니, 들어가 계시지 예까지 다 나오셨습니까.”

내시 세장의 퇴근길.

원녀가 문간 앞까지 남산만큼 부른 배를 안고 뒤뚱 뒤뚱 걸어 나왔다.

“노산, 노산, 노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조심 좀 하시라니까요.”

“그놈의 노산 소리 좀 그만하세요. 뭐, 내가 늙은 게 죄입니까? 당신 힘이 좋은 게 죄이지.”

에헴, 에헴.

뭐, 내시가 들을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는 원녀에게 딱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그녀를 보필했다.

“노산에 행여라도 위험한 일이 생길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일국의 보모상궁을 했던 몸입니다. 어찌나 젖이 남아돌았으면, 조선 대표로 입궐을 다 했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들어 몸이 망가졌다 한들, 내 아이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할까 봐서요.”

“부인. 그, 그 정도로 대단하셨습니까?”

세장은 새삼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젖 안 나오는 아낙네들 애기까지 충분히 건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니까요.”

“그것,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저도 한번…….”

“쓰읍. 일국의 상선의 말씀이 참으로 저급하십니다.”

“뭐, 부인을 향한 애정에 상급, 저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세장과 원녀는 다정한 얘기들을 나누며 안채로 들어갔다. 세장은 오래도록 뱃속의 아이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며 행복하게 그 배에 얼굴을 묻었다.

누구나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이었다.

없는 내시와 인생이 금혼인 궁녀.

허나, 세상 무엇 하나 ‘절대로’라고 단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힘이 센 사랑 앞에, 사람이 정해 놓은 법칙과 규범은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결국은 이들마저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가져 잘 살고 있지 않는가.

절대, 안 되는 사랑은 없었다.

절대 안 된다고 믿는 사람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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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령’의 시대.

덕훈과 왕배의 얼굴은 사뭇 더 어둡고 칙칙해졌다.

아니, 조선의 대표 모태 설로로 활약하며 돌아다닐 때는 언제고…… 어찌하여 이 축제의 분위기에서 이 둘만 이렇게 음습하게 축축 처져 있는 것인가.

그들은 세상 더없이 외로운 부랑자와 같이 쓸쓸한 걸음을 옮겼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애달당이었다.

“영업 끝났소.”

“개이 할배, 우리들이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푹 내쉬며 들어오는 왕배와 덕훈.

“갑자기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찾아오셨소?”

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아니, 금혼령도 끝났는데 우린 왜 안 생겨요?”

금혼령이 끝나면 생길 줄 알았건만, 대체 왜!

우리같이 잘난 사내들이 왜! 왜!

“이 세상이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이거 진짜 너무 한 거 아닙니까?”

그런 왕배와 덕훈의 푸념에, 개이가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금혼령만 끝나면 하늘에서 여자라도 떨어질 줄 알았소?”

뭐, 그런 거 아니었어요?

“아니, 주변 여인들을 적극적으로 둘러보거나 먼저 다가가 고백을 해본 적 있소?”

이에 왕배와 덕훈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뭐, 그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이는 없어서.”

“애벌레가 하늘에 달린 감나무만 쳐다보는 꼴이구만.”

“네?”

“쓸데없이 눈만 높아가지고는. 본인들 꼬라지는 생각 안하시오?”

“그래도, 이왕 금혼령이 끝났는데 예쁘고 색기 넘치는 색시 만나서 혼인해야 하지 않겠소.”

개이의 표정은 한 번 더 무섭게 변했다.

“그러다가, 이 나라에 금혼령이 또 한 번 내려지면 어쩌려 그러시오!”

허억?!

왕배와 덕훈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런 말씀 하지도 마세요.”

“그렇게 망설이고 미루다간,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할 것이오. 미적미적,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방안에 콩 박혀 있다간…… 평생 모태 설로로 늙어서 여의주 물고 하늘로 승천할 줄 아시오!”

끄응,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주변인들에게 다가가시오. 사랑이란 게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어찌 알겠소.”

이때, 2층의 방문이 열리면서 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영업 끝났다면서. 언제 올라와~”

“아이고, 아직 상담이 남아서.”

“얼릉 와. 나의 꿀벌.”

“기다려, 애기야.”

그 야릇한 목소리의 정체는 분명 남자의 것이렸다!

방문이 닫히기 전, 왕배와 덕훈은 똑똑히 보고 말았다.

허어어억! 저 사람은, 도승지 김설록 영감이 아닌가.

에헴, 에헴.

개이는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빼박 금혼 신세인 나마저도, 결국 이렇게 연을 찾지 않았소.”

“허얼.”

“정 그럼, 둘이 잘 지내보시던지. 내가 이쪽 분야는 소상히 소개해 주겠소.”

“으으. 끔찍한 소리 마시오.”

하아. 개이마저 사랑을 찾았는데, 우린 진짜 뭐하고 있냔 말이냐. 진짜 다시 마음먹어 봐야 할 것 같다.

그래,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어보는 둘이었다.

개이의 이러한 금혼령 충격 요법은 애정비사 상담을 할 때 자주 쓰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용기 내어 다가가지 못하는 청춘에게 얘기했다.

‘그러다 금혼령이라도 내려지면 어쩌시려고?’

끊임없는 과열 경쟁 속, 사랑을 포기하는 이들에게 얘기했다.

‘그러다 금혼령이라도 내려지면 어쩌시려고?’

예전 사랑의 상처 때문에, 또 다른 사랑에 마음 열지 못하는 이들에게 얘기했다.

‘그러다 금혼령이라도 내려지면 어쩌시려고?’

현실의 사랑은 접어둔 채, 이상적인 상대만을 찾고 있는 이에게도 얘기했다.

‘그런 남자가 미쳤다고 너를 만나냐, 너도 양심이 있을 것 아니냐.’

그의 답은 언제나 명쾌했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사랑이 안겨다주는 보석과 같은 행복감을 마음을 열고 느끼라는 것이었다.

눈앞에 수많은 일에 사랑이란 감정을 미뤄두거나 외면하지 말고 ‘바로 지금’ 사랑을 해야 했다.

이 나라에 금혼령이 또 다시 오기 전에,

사랑과 혼인인 금지되는 시절이 돌아오기 전에,

만백성에게 고하노니, 사랑하며 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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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부터 수년이 흐른 뒤.

“우와, 한양이 이렇게나 큰 거였어?”

청량한 바람이 부는 삼각산 위,

토실토실한 볼에 예쁘게 댕기머리를 묶은 일곱 살짜리 여자 아이가 한양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진짜 크다.”

신기하기만 했다.

평생을 담벼락 안에서 자란 소녀였다.

소녀는 인형과 같이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면서, 연신 한양의 풍경을 눈 안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거 알어?”

고개를 돌리니 또래의 사내 아이 하나가 그녀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누구지?

동그란 눈에 하늘빛을 담뿍 담은 이 아이는?

“예전엔 여기 사람들, 누구도 혼인하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집이 많고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뿐 아니라, 조선 땅 전체가.”

소년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녀는 연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

“진짜라니까?”

“그 시절이 길어졌음, 우린 못 태어났을지도 몰라.”

“내가 없었을 수도 있다니, 신기하다.”

소녀는 소녀가 서 있던 바윗부리 곁에 다가와 그곳에 털썩 걸터앉았다.

“근데, 너 나 알아?”

“귀한 옷감인걸 보니, 왕가의 아이 같은데?”

‘에에……?’

공주인 신분을 숨기려 변복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쉽사리 들켜버리다니.

소녀의 입에선 바람 빠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근데 넌 왜 알면서도 반말이냐?”

“나 아홉 살인데?”

소년은 소녀보다도 두 살이나 위였다.

“너나 반말하지 말고 오라버니라 불러.”

“쳇, 그런 게 어디 있어. 니가 말 먼저 놨으니까, 우린 동무지.”

“근데 우리 아버지가, 여자애랑 동무 먹는 거 아니랬어.”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서? 난 일곱 살이라 괜찮아.”

“아니. 동무 먹는 게,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면서.”

“뭐?”

실은 아까부터 소녀와 가까워지고 싶어, 그 주변을 괜히 맴돌던 소년이었다.

“어설프게 동무하지 말고, 마음에 들면 그냥 바로 들이대라 그랬는데.”

아버지는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생기면, 절대로 마음을 숨기지 말고 바로 바로 표현하라고 가르쳤다.

‘가슴이 뛰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마라.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어렸을 때부터 소년은 그렇게 세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리 없는 소녀는 그저 아기 천사처럼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냥, 너 되게 예쁘다고.”

“……!”

소년의 진중한 눈빛이 소녀에게 맞닿았다.

아홉 살 아이답지 않은 그 눈빛에 소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떨려 왔다. 그것이 아마, 소녀가 처음으로 또래 남자 아이에게 설렘을 느꼈던 첫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 이름은 민우야. 넌 이름이 뭐야?”

“나는, 리윤.”

바람결에 복사꽃이 사르르 휘날렸다. 가슴마저 싱그러워지는 복사꽃 향기도 함께였다.

끝끝내 이어지지 못한 연은 세대를 건너 찾아오기도 한다.

둘은 그렇게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았다.

첫사랑이 서로를 향하는 눈부신 기적.

그것이 바로 리윤과 민우가 만들어 낼, 절절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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