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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오히려 오해만 쌓여가고 (10/40)

4장 오히려 오해만 쌓여가고

목욕물에 들어간 로미안은 눈과 코만 빼고 물에 푹 담갔다.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는 물은 따뜻해서, 경직되어 있는 몸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경직된 몸이 부드러워지면 부드러워질수록,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또한 강해졌다. 로미안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더러워.’

시하브의 모든 것들이 다 끔찍했다.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놔주지 않겠다는 말이 그토록 지독할 수가. 로미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동시에 시하브가 눈에서 멀어지니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현실감각도 돌아왔다.

-그렇게 하면 벨데가르트는 모든 것을 잃을 텐데도? 그대의 어미와 아비가 그댈 원망할 텐데?

분하지만 시하브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런 식으로 시하브와 이혼을 하게 되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벨데가르트를 손가락질 하며 비웃을 것이다. 갑자기 바닥으로 내려오게 된 부모는 그녀를 때리고 욕할 테지.

‘끔찍해.’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하지만 왕궁에 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평안한 건 아니었다. 로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내가 이러고 버티면 우리 부모님은 행복하겠지.’

로미안이 버티면 로미안 자신은 불행할지언정 적어도 두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이렇게 잠깐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과연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로미안은 몸을 길게 폈다. 물 밖으로 머리카락이 나오면서 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그러면서 가슴팍에 꼭 꽃잎을 떨어뜨린 것처럼 붉게 남은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악.

로미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로미안은 자신의 손으로 자국을 문질렀다. 처음에는 지우려는 것처럼 문질렀으나, 점점 그 손짓은 강해지기만 했다.

벅벅.

계속 문질러도 자국은 지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그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를수록 로미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문 밖에서 베셀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이제 아이들을 들일까요?”

“……그래.”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던 로미안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미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앉아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미안의 허락이 내려지자 대기하고 있던 시중인들이 수건과 향유, 빗 따위를 들고 안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먼저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카락과 몸을 닦아주려던 시중인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어머, 마마. 이렇게 문지르시면 아니 되어요. 고운 피부가 상하잖아요.”

로미안의 가슴팍에 붉은 자국이 넓게 퍼져 있었다. 로미안이 키스마크를 지우기 위해서 마구 문질러댄 결과였다.

하지만 그곳만 문지르면 뭐하나. 로미안의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잇자국과 키스마크가 시중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누가 새겼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이미 왕세자 부부가 앙리 4세의 서거날 합방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를 급하게 찾던 이들이 왕세자비의 침실에서 가운 한 장만 걸치고 나오는 왕세자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 뒤로 바로 장례식이 있었지만 부부는 눈인사조차 주고받지를 않았다. 그래서 사교계에는 다시금 부부 관계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시중인들끼리 눈짓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부부간에 금슬이 좋지 않다더니 다 거짓말인가 봐요.’

‘역시 혼절했던 것도 마차에서…….’

‘몸소 안고 오셨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왕궁에서 가장 큰 권력자는 이제 시하브였다. 곧 왕비가 될 로미안에게 그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만큼 가장 큰 힘은 없었다. 그리고 윗사람이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면 아랫것들의 처우도 자연히 좋아지기 마련이다. 시중인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둘러서 로미안의 몸을 단장해주었다.

오로지 한 사람, 베셀 부인만이 이 상황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시하브의 유모였다. 이 왕궁에서 시하브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젊은 부부 사이에 감정적인 삐걱임이 있음을 눈치챘다.

“마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베셀 부인이 조심스럽게 로미안을 불렀다. 가운을 걸치고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던 로미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오. 나는 괜찮소.”

“…….”

그저 괜찮다는 말을 믿기에, 로미안은 심하게 야위고 있었다. 보들레르의 미인형이 날씬하고 가녀린 여인이기에 다들 로미안이 왕세자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부러 살을 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셀 부인의 눈에는 보였다. 로미안은 천천히 말라죽어가는 중이었다.

‘식사라도 잘하셔야 하는데.’

마음에 병이 있더라도 식사를 잘 챙기고 잠을 잘 자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정신적으로도 한계까지 내몰리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로미안은 식사도 보통 사람에 비하면 현저하게 적게 들고 있었다.

베셀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로미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식사를 올릴까요?”

“되었다.”

로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물을 많이 털어낸 머리카락을 굵은 빗으로 빗어 내리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한 시녀가 달려왔다.

“마마! 마마!”

“무슨 일인데 그리 경거망동하느냐?”

달려오는 시녀를 꾸짖은 건 베셀 부인이었다. 시녀는 고개를 푹 숙여 사죄하는 듯했으나 잔뜩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로미안에게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국상 중에 왕세자비를 찾을 손님이 누가 있단 말인가. 로미안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시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정말 낯선 것이었다.

“알프레도 린하르트 자작님이십니다.”

* * *

알프레도 린하르트 자작. 린하르트 공작과 줄리에타 공주의 장남.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미혼남이기도 했다. 곧 공작위를 물려받을 그인지라 그와 정략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가문도 보들레르에는 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혈통도, 높은 지위도 아니었다. 바로 그런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하고 소탈한 성격이었다.

갑자기 왕세자비를 찾아온 알프레도는 응접실을 한 바퀴 돌며 걸려 있는 그림들을 구경했다. 막 목욕을 마친 뒤인 로미안이 치장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음에도 조금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가벼운 검은 드레스 차림의 로미안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머리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탓에, 앞머리를 작은 핀으로 고정하고 긴 고수머리는 등 뒤로 넘긴 단출한 머리모양이었다.

알프레도는 잠시 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로미안은 아름다웠다. 다만 그것이 그 나이 대의 생생하고 활기찬 아름다움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처연한 아름다움이었다.

‘많이 야위었군.’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시하브의 결혼식 전, 바로 넬라 왕비의 유품 사건 때였다. 그 뒤로 몇 달 사이, 로미안은 굉장히 많이 살이 빠져 있었다.

‘그때도 무척이나 가녀려 보였었는데.’

오라버니의 사형, 결혼, 그리고 불화. 무엇 하나 그녀에게 가벼울 것이 없는 단어들이 두 사람 사이의 시간에 존재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알프레도는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로미안에게 말했다.

“못 뵌 사이에, 많이 아름다워지셨군요.”

“감사합니다.”

로미안이 고개를 숙였다. 칭찬을 받았음에도 얼굴에는 그 흔한 미소 한 점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알프레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알프레도는 시하브보다도 키가 컸다. 그런 그를 마주하니 자연히 로미안의 시선이 높아졌다. 알프레도는 로미안이 그를 경계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로미안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상심해 계신가요. 이제 이 나라에서 가장 지고한 여인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행복해 하셔야지요.”

바로 아까 시하브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노라고.

하지만 알프레도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미안의 감정이 메마른 것 같던 얼굴에 반짝 불쾌감이 스쳤다. 그녀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행복할 리가 있습니까? 애초에 그런 것을 원한 적도 없습니다.”

“역시.”

그녀의 즉답에 알프레도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로미안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프레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로미안에게 곧장 직구를 던졌다.

“어째서 그런 마음을 왕세자 저하께 전하지 않으십니까? 저하께서 하도 화가 나 계시기에 저까지도 정말 왕세자비 저하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가 궁금해져 찾아왔답니다.”

이제야 이 낯선 방문객의 정체가 밝혀졌다. 로미안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얕은 방법으로 그녀의 속내를 확인하려는 시하브가 우습기만 했다. 로미안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그녀는 누가 들어도 기운이 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솔직하게 말해도 믿지 않으십니다.”

그 목소리에는 로미안이 그동안 겪었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알프레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알프레도가 한층 진지한 눈으로 로미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

그의 부름에 바닥의 카페트만 바라보고 있던 로미안의 시선이 다시금 알프레도의 얼굴로 향했다.

“제가 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지요?”

“예?”

무슨 말인지 몰라서 로미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알프레도의 얼굴에 신사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상냥하고,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다정한 미소였다.

그가 내뱉는 말도, 그 미소만큼이나 달콤했다.

“정말 견딜 수 없으실 땐 꼭 저를 찾으시는 겁니다. 제가 어떻게든 마마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요?”

“예, 어떻게든.”

로미안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동그랗게 뜨인 눈과 달리 뺨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본 알프레도가 서둘러서 덧붙여 말했다.

“지금 당장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니면 말씀해주실 때까지 매주 왕비궁을 방문하도록 하죠.”

아니, 대답을 들을 때까지 매주 방문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나?

“하하.”

어이가 없었는데 왜인지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맑은 웃음소리였다. 로미안은 처음으로 맑게 웃었다. 저 남자의 저 말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웃던 로미안이 마른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며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 상냥하십니까?”

그녀에게 이유 없이 상냥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마저도 말이다.

로미안의 물음에 알프레도는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저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은 아닙니다. 마마께만 친절한 사람이지요.”

“그러지 마세요.”

거부하기 어려운 다정한 말에 로미안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프레도가 자신을 가엾이 여겨, 저리 친절을 베푼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시적인 감정이 얼마나 이어질까. 로미안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보답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음.”

로미안의 강경함을 느낀 알프레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런 여인이 왕비가 되었다고 좋아할 리가 없어. 시하브, 하여간 사람도 못 보는 멍충이 같으니.’

어쩌겠는가. 머리가 꽉 막힌 사촌은 이 몸이 구해주는 수밖에. 그리 결론 내린 알프레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손수건은 어떨까요?”

“예?”

“제가 이렇게 나이가 꽉 찼는데도 아직 약혼녀가 없답니다. 그래서 사냥제 때마다 누구의 손수건도 받지 못해서 얼마나 난처하던지.”

그냥 너스레였다. 린하르트 자작인 그에게 손수건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다들 주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혼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받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손수건만큼 로미안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확실히 받아낼 선물이 있을까. 그는 붙임성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로미안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번 사냥제에서는 손수건을 하나 선물해주세요. 그 대신 마마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마마께서는 영영 제게 부탁을 하지 않으실 거 같으니까요.”

사실 로미안에게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였다. 알프레도는 전혀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수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던 로미안은 이번에도 완고하게 거절했다.

“주변에 말이 나올만한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말동무도 마찬가지고요.”

약혼녀도 없는 젊은 남자와 자주 동석하는 모습은 딱 다른 사람들의 입 위에 오르내리기 좋았다. 로미안은 개인적으로 그런 종류의 루머는 이제 신물이 났다. 되도록 조용히,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싶었다.

그런 로미안의 조심성 많은 태도 또한 알프레도에게는 호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로미안처럼 귀족 뒷배가 없는 사람이라면 구설에 조금 오르더라도 린하르트와의 연줄이 생기는 것을 더 기꺼워할 터였다. 알프레도의 눈에 로미안의 태도는 결벽적이기까지 했다.

‘역시 시하브가 뭔가 오해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오해라는 것은 자꾸 사람의 됨됨이를 겪다보면 알게 될 터였다. 알프레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저하께서 허락하셨으니 괜찮습니다. 뭣하면 말동무 자리에 저하께서도 참석하라고 하지요.”

“네?”

로미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프레도는 보란 듯이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제가 저하의 하나뿐인 사촌 형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동생이.”

“그럴 분이 아닌데.”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로미안이, 그제야 알프레도의 말이 자신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과자를 잘게 부순 것 같은 나지막한 웃음이었다.

“하하.”

왜 이렇게 이 남자랑 있으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는 걸까. 시하브 앞에서는 찡그리듯 미소 짓는 것 외에 해본 적이 없는데.

웃으면서도 로미안은 그런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따뜻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알프레도가 눈을 곱게 접으며 마주 웃었다.

“웃으시니 이렇게 예쁘신데, 제가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

그 말에 로미안은 다시 정색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지나간 웃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입술 끝에 남아, 자꾸만 입술을 씰룩이게 했다.

‘이게 다 나를 마주보고 웃고 있어서야.’

웃는 사람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내게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나. 로미안은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알프레도가 저리 미소 짓기 때문에,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거라고.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다들 앙리 4세가 네게 준 그 많은 것들이 어디 갔냐고 물을지 몰라도, 현실이 그러했다. 지금의 로미안은 빈껍데기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었다.

“……손수건은 만들어드릴게요. 하지만 매주 찾아오진 않으셔도 돼요. 그 말은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리 말하는 로미안의 표정은 처음 알프레도와 대면할 때에 비하면 확연히 풀어져 있었다. 금빛 속눈썹에 감싸인 다갈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던 알프레도가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네에.”

로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눈썹과 색이 같은 숱이 많은 금빛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어졌다. 알프레도는 잠시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늘게 떴다.

알싸한 통증이, 그의 가슴팍을 찌르고 빠르게 사라졌다.

* * *

알프레도가 떠난 그날 밤.

그 뒤로 로미안은 정신이 없었다. 대관식 관련하여 여러 상의해야 할 안건들을 들고 궁내부 대신들이 쳐들어왔던 것이다. 다 죽어가는 것 같던 로미안은 뜻밖에 무슨 힘이 생겼는지 빠르게 궁내부 안건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대강 대관식에 관한 부속 사항들을 해결하고, 다시 대성당에 다녀오니 금방 밤이 되었다. 편안한 넓은 셔츠 형태의 흰 잠옷을 입은 로미안이 자신의 침실 창틀에 걸터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달이 밝네.’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본 것이 얼마만인가. 로미안은 다소 제 나이와 맞지 않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그녀를 보좌한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로미안에게 물었다.

“마마, 등을 끌까요?”

잘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로미안은 하루 일정을 굉장히 규칙적으로 소화하는 편이었다. 시녀도 물음이었지만 사실 로미안이 거절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진 확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만.”

기계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던 시녀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멈추고 로미안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시선을 뗀 로미안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시녀에게 말했다.

“자수를 놓고 싶구나. 바구니를 가져오너라.”

“예.”

로미안의 명에 시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수 바구니를 찾아 떠났다. 로미안의 자수 솜씨는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으뜸이라고 할만 했다. 하지만 결혼 이후에는 거의 자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좋은 일이야.’

시녀에게 그 사실을 전해들은 베셀 부인은 매우 좋아하며 몸소 자수 바구니를 들고 로미안에게 찾아왔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이 궁 안에서 생겼다는 건 무척 긍정적인 일이 아닌가.

자수 바구니를 받은 로미안은 그 안에서 손수건 두 장을 꺼냈다. 앙리 4세의 장례식 때문에 미뤄졌지만, 장례식의 슬픈 분위기가 좀 가시면 곧장 이어질 행사가 왕실 사냥제였다. 이 시기에 손수건을 만드는 것은 그 의미가 뻔했기에, 베셀 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로미안에게 말했다.

“저하께서 정말로 기뻐하실 겁니다.”

“글쎄.”

베셀 부인의 말에 로미안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10년 동안 시하브는 단 한 번도 로미안의 손수건을 받아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시하브 말고도 그 손수건을 받아줄 상대가 있었다. 삐뚤게 수를 놓아도, 어딘가 부족한 문양을 만들어도 환하게 웃으며 받아줄 상대.

‘이런 게 친구일까?’

자신에게 상냥했던 알프레도의 얼굴을 떠올린 로미안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수건에 무슨 문양을 수놓을지 미리 본을 그리기 시작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손수건에 수놓을 꽃들이 바로 떠올랐다.

시하브에게는 화사한 노란 국화를, 알프레도에게는 친절에 감사를 표하는 라그라스를.

* * *

시하브의 대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선왕의 생전에 관을 물려주었다면 모를까, 서거 뒤에 물려받았기 때문에 자연히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에게 관이 씌워지기 전, 읊조리는 맹세는 꼭 결혼식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대는 보들레르의 국왕으로 용맹하게 백성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그리 대답하는 시하브의 까만 머리카락 위에 단단한 황금색 관이 씌워졌다. 그 다음 대답은 로미안에게 돌아갔다.

“그대는 보들레르의 왕비로서, 사랑으로 백성을 돌볼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로미안의 모습을 시하브가 돌아보았다. 그녀의 머리에 씌워지는 왕비의 관은, 그녀의 가녀린 목에 너무나도 무겁게만 보였다.

“이로써 보들레르의 새 국왕과 왕비가 탄생하였음을 알립니다.”

본래라면 환호성과 함께 꽃을 뿌려야 하는 행사였으나, 상복을 입고 참석한 귀족들 중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들 사이로, 이 엄숙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 벨데가르트 백작 부부가 시하브의 눈에 띄었다.

‘자랑은 하고 싶은데 자랑할 분위기가 아닌가보군.’

나이가 어릴지언정, 사람을 많이 대하고 차기 국왕으로서 많은 교육을 받은 시하브였다. 벨데가르트 백작 부부의 얕은 속을 꿰뚫어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최근 그가 읽지 못하는 얼굴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로미안.’

단정하게 땋아서 틀어 올린 금빛 머리카락 위로 아름다운 왕비의 티아라가 빛을 뿜었다. 보들레르에서 가장 큰 루비가 박힌 아름답고 화려한 왕관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장신구를 찼으니, 그 나이 대 소녀답게 들뜰 만도 하건만, 로미안의 얼굴은 완전히 무표정했다.

‘어떤 게 그대의 진심이지?’

권력을 탐하는 모습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상황에 쓸려왔다고 주장하는 모습. 그 둘 중에 어떤 것이 진실된 로미안의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옆모습을 쏘아보던 시하브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지루했던 대관식이 끝나고, 시하브도 로미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서로를 만날 수가 없었다. 대관식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그것이 끝나기 무섭게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새로운 일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찾아왔다.

‘이미 아바마마를 대신해서 정무를 보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벅차다니.’

누군가를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과 그것이 완전히 자신의 일이 되는 것은 전혀 달랐다. 대관식 이후 한 2주일 간, 시하브는 로미안을 찾아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거의 집무궁에 갇혀만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로미안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쁜 와중에도 잠깐잠깐 로미안을 떠올릴 때마다, 시하브의 감정은 딱 그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이 당연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너무나 끔찍했으니까.

‘아무리 못 배운 천민이라도 마차에서 붙어먹지는 않겠지.’

너무나 화가 나는 바람에 저질러진 일이었다. 시하브도 자신이 로미안에게 지나쳤다는 건 알았다. 마지막에 그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역시 사과를 해야겠지? 아니다. 그 모습조차도 연기일 수도 있는 터.’

시하브는 혼자서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서명을 해야 하는 서류에는 서명 대신 혼란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듯 복잡한 선들이 죽죽 그어졌다. 명랑한 목소리가 그런 시하브를 일깨웠다.

“개미집을 그리시나요? 그런 재주가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

“알프레도.”

다름 아닌 알프레도 린하르트 자작이었다.

“……그건 뭐지?”

시하브는 눈살을 찌푸리고 제 앞에 선 알프레도를 바라보았다. 진한 청록색 정장도 생소했고, 고수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 시하브의 시선을 끈 것은 알프레도가 두 팔로 꽉 안아야 안아질 것 같은 커다란 흰 튤립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시하브의 시선을 따라 꽃다발을 바라본 알프레도는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꽃다발이지요, 전하.”

“내 말은 왜 여기 그런 걸 들고 왔냐는 거지. 설마 내 선물인가?”

“하하하. 새 국왕 전하의 즉위 선물로는 지나치게 약소하지 않겠습니까?”

린하르트는 시하브의 가장 큰 우방이었고, 알프레도는 죽을 때까지 그를 지지해줄 충신이었다. 그 관계를 과시하기 위해 국왕의 즉위 선물들을 다른 가문들이 앞다투어 보낼 때, 린하르트는 선물을 하지 않았다. 그런 물질적인 것으로 얽히지 않아도 우리의 관계는 튼튼함을 주변에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웬 꽃다발?’

게다가 시하브는 꽃을 싫어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짖궂은 사촌을 꾸짖으려고 할 때였다.

알프레도는 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왕비 전하께 가져다 드릴 선물입니다. 전하께 오늘 오후 티타임에 초대를 받았거든요.”

“…….”

시하브의 입술이 열리지는 않았으나, 그의 까맣고 굵은 눈썹이 쓰윽 하고 올라갔다. 기민하게 그 기색을 눈치챈 알프레도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 물론 전하를 초청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겁니다. 질투로 저를 미워하시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능글맞기는.”

시하브가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툴툴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시하브의 수석 보좌관 로테어 남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질투라니, 무슨.’

로테어 남작은 시하브가 아주 어린 소년일 때부터 그를 보필해왔다. 그런 만큼 로미안과 시하브의 사이에 얼마나 감정의 골이 깊은지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도.

‘린하르트 자작님이 괜한 놀림을 시도하시는군. 저래서야 전하의 심기만 건드릴 텐데 말이야.’

그리 생각하며 로테어 남자가 입술을 삐죽였을 때였다. 알프레도를 쏘아보며 시하브가 그를 불렀다.

“로테어 남작.”

“예, 전하.”

부름에 로테어 남작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사실 린하르트 자작에게 예전에 수여한 적 있는, ‘언제든지 독대할 권리’를 다시 빼앗으라고 명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들려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라넌큘러스 꽃다발을 준비하도록.”

“예? 예.”

‘설마 왕비님께 드릴 건가? 국왕 전하께서도?’

시하브는 로테어 남작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런 명을 내렸다. 로테어 남작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서둘러서 꽃다발을 준비하라고 명을 내렸다.

* * *

아름다운 햇살이 정원을 환하게 빛나게 하는 오후. 늘 조용하고 차분하던 왕비궁에 처음으로 소란이 일었다. 바로 알프레도 린하르트 공작과 시하브가 동시에 왕비궁의 티타임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방문 소식을 듣고 가든의 문 앞까지 마중을 나간 로미안은 알프레도의 곁에 선 시하브의 얼굴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두 분이서 함께……?”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적절하게 섞인 표정은, 로미안의 작고 마른 체구와 어우러져서 더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그런 로미안을, 시하브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알프레도가 넉살좋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왕비 전하. 괜찮으실까요?”

“네, 물론이죠.”

얌전하게 대답했지만, 로미안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고 딱딱했다. 그 모습이 시하브의 눈에는 고깝기만 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당황하지? 내가 오는 것이 싫은 것인가.’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미안의 뒤를 따르는 알프레도에게 흘렀다.

‘알프레도와는 왜 이렇게 친근해 보이고?’

로미안의 표정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로미안을 대하는 알프레도의 표정은 봄바람처럼 훈훈했다. 차가운 겨울 같이 대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일방적으로 저리 훈훈할 수 있겠는가. 필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시하브와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왜 그것이 자신의 신경에 거슬리는지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시하브는 무작정 신경질만 내었다. 하지만 그가 쿵쿵 소리를 내며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그들의 앞장을 서는 로미안의 어깨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알프레도가 슬쩍 혀를 찼다.

미리 준비된 티 테이블에 도착하기 무섭게 알프레도는 자신이 안고 있던 흰 튤립 꽃다발을 내밀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왕비님.”

“감사해요.”

로미안이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는 활짝 피어난 아름다운 튤립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붉은 튤립은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백색의 튤립은 처음 보아요. 꼭 눈을 뭉쳐놓은 것 같네요.”

“네. 그 모습이 왕비님을 닮은 것 같아서요.”

알프레도의 넉살에 로미안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던 시하브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로테어 남작이 긴급으로 공수해온 진한 분홍색 라넌큘러스 꽃다발이 내밀어졌다.

“이건 내 선물이다.”

“……예쁜 꽃이네요.”

연이어 건네지는 커다란 꽃다발에 로미안이 약간 당황하다가, 옆에 선 시녀에게 눈짓을 했다. 시녀에게 시하브의 시종이 꽃다발을 넘겼다.

시하브의 시선이 그녀가 안고 있는 흰 튤립 다발을 보다가 시녀에게 건네진 자신의 꽃다발을 보았다. 로미안에게 어떤 감사 인사가 더 있을까 기다렸지만, 시하브 앞에서 바짝 얼어붙은 로미안의 입술은 열릴 줄을 몰랐다.

‘역시 괜한 시간 낭비였군.’

시하브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꽃을 주었으니 나는 가겠다.”

“예?”

“전하!”

깜짝 놀란 로미안이 고개를 들고 시하브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이미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알프레도가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따라붙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장단에 맞춰주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인내심을 조금 더 발휘해 보시죠.”

“바쁘다.”

“그래도요.”

시하브의 걸음이 멈췄다. 검은 눈동자가 알프레도를 쏘아보았다. 알프레도는 이 사촌 동생이 왜 자신에게 이런 선명한 적의를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시하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로미안이 창백한 얼굴을 살짝 숙여서 시하브에게 인사했다.

“조심히 가시어요.”

“…….”

예의상 붙들지도 않는 그녀를 보고 시하브의 입술이 다시 삐뚤어졌다.

‘나만 보면 또 얼굴을 굳히는군.’

인사를 건네면 바로 돌아가 버릴 줄 알았던 시하브가 뜻밖에 로미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로미안은 난처한 듯 입술을 꾹 깨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시하브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눈도 마주치기 싫고, 선물도 제 손으로 받기 싫을 정도로?

아무리 국상이 끝났다고 해도 앙리 4세의 서거가 많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로미안의 드레스는 아무 장식 없는 수수한 연한 회색의, 가슴이 넓게 파인 디자인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가느다랗고 흰 목에서 반짝이는 목걸이가 눈에 바로 띄었다.

‘또 저놈의 목걸이.’

앙리 4세가 걸어준 바로 그 목걸이였다. 시하브는 한숨을 내쉬며 휙 돌아섰다. 이번에는 알프레도가 뭐라고 말을 해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알프레도도 한 열 걸음 정도 따라오다가 결국 따라오기를 멈추었다.

저벅저벅.

복도에 시하브의 발소리만이 가득 찼다. 시하브의 머릿속에는 온통 로미안의 목에 걸린 목걸이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저 목걸이가 뭐길래 저리 애지중지하나.’

앙리 4세가 로미안의 목에 저 목걸이를 걸어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건 시하브에게 큰 충격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약혼녀가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해였지.’

눈으로 본 것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탓에, 로미안의 아니라는 부정을 믿지 않았다. 계속 잘못을 부정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무작정 그녀를 찍어 눌렀지.

‘그래, 그때도 내가…….’

그때를 떠올린 시하브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그를 따라오던 시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하브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작은 보석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로미안은 그에게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었다.

-당신이야말로 야비하군요, 시하브. 그걸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쓸 시간이 있었다면 정정당당하게 앞으로 나섰어야죠.

-나섰어야 했다고? 내가 나서서 오쟁이 진 남편이 되어야 했다는 건가?

-나섰다면 나의 명예는 물론이고, 당신의 명예 또한 지켰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배신감에 몸을 떠느라고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던 탓에, 결국 그는 로미안을 상처 입히고 스스로는 치졸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시하브는 독단적인 성격이 강할 뿐이지,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은 그는 처음으로 제 발걸음을 망설였다.

‘……혼자 생각하지 말고 한 번 물어볼까.’

그렇게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시하브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제 발로 걸어 나온 로미안의 티파티 테이블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 많이 걸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정원 한가운데 앉아 있는 로미안과 알프레도의 모습이 보였다. 시하브와 있을 때와 확연히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로미안이 리본으로 감싸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약속했던 선물이에요.”

“와.”

흰 정사각형의 작은 천은 멀리서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손수건이었다.

‘로미안이 손수건을?’

그녀가 자수에 솜씨가 훌륭하다는 것은 그녀의 남편인 시하브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왜 알프레도의 손수건을 로미안이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손수건은 약혼자나 가족…….’

그리고 정인(情人)에게나 주는 것 아닌가.

‘설마 두 사람이…….’

로미안과의 초야를 통해 풀렸다고 생각했던 머릿속이 또다시 어지럽게 꼬여들었다. 시하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프레도가 그럴 리 없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또 무시무시한 오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왜 알프레도가 로미안을 만나러 왔겠어?’

그저 사촌의 부인, 한 나라의 왕비를 걱정해서 베푸는 친절이라고 보기에는 과했다.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는 남자와, 답례로 손수건을 주는 여자라니.

‘누가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시하브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멈춰 있던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다정한 대화도 선명하게 들렸다.

“무척 섬세하네요. 대단합니다. 그동안 많은 손수건을 보았지만 이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처음 보아요.”

“과찬이십니다.”

“이 자수는 뭐지요?”

“라그라스입니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해요, 라는 꽃말이지요.”

“아아.”

로미안의 말에 알프레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시하브의 속내를 비틀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지, 두 사람?”

“……!!”

로미안의 다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얼굴에는 미소가 사그라들고, 시하브가 익히 알고 있는 조금 창백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하브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알프레도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서며 정중하게 물었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그런데 두 사람은 뭘 하는 거지?”

시하브의 시선이 알프레도의 손에 들린 손수건으로 향했다. 흰 손수건에는 여러 가지 색의 강아지풀 같은 것이 수놓여 있었다. 바로 라그라스였다.

로미안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알프레도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약혼녀가 없어 사냥제 때마다 손수건이 없어 난감하니 왕비 전하께 한 장만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손수건이 없다고? 네가?”

웃기지도 않는 변명에 시하브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시하브가 기혼이 된 이후, 이 나라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미혼 남성이 바로 알프레도였다. 쏟아지는 손수건을, 아직은 공작부인께서 챙기시니 어쩔 수 없다며 거절하고 있는 판이었는데.

‘수작을 부리고 있군.’

믿음직하던 사촌 또한 더 이상 믿음직스럽게 느껴지질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하브의 속을 뒤트는 것은 로미안이 그가 달라고 했다고 또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내 부인인데!’

자신이 여태까지 한 번도 로미안의 손수건이나 리본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시하브의 매서운 시선이 로미안을 향했다.

“그럼 내 것은?”

시하브의 질문이 로미안은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마, 만들고 있사옵니다. 다만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서…….”

“흥, 볼 것도 없군.”

움찔.

시하브의 차가운 말에 저절로 어깨가 떨려왔다. 로미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수는 원래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아직 사냥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먼저 알프레도의 것을 완성하고 시하브의 것을 수놓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시하브의 것부터 만들 걸 그랬다. 로미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왜 자꾸만 시하브와의 일은 다 꼬이기만 하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시하브는 울상을 짓고 있는 로미안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비틀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돌아가겠다.”

시하브의 말에 로미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사, 살펴 가시지요.”

“잠깐만, 로미안.”

“예?”

정중하게 국왕을 배웅하는 인사를 올리는데, 시하브가 불쑥 로미안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로미안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시하브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시하브가 로미안의 어깨를 짚고는 로미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그대의 침실에 들 것이니 준비하고 있게.”

“……!!”

로미안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 * *

그 뒤로 티타임은 있는 둥 마는 둥이었다. 알프레도는 심하게 떨고 있는 로미안을 몇 번 위로하려고 했으나, 결국 분위기를 돌리는데 실패했다.

‘왜 저렇게까지 시하브를 두려워할까?’

알프레도는 로미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무거운 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부부였고, 시하브는 이 나라에서 이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가 현재로써는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알프레도가 떠나고 난 뒤, 로미안은 방에 앉아서 자수틀만 붙들고 있었다. 시하브에게 주어야 할 국화를 마저 수를 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마음이 이리 심란한데 자수가 제대로 놓아질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자신의 것은 만들지 않고 있다고 오해한 것은 아니겠지?’

왜 시하브 것을 먼저 만들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말도 없이 찾아온 시하브를 데려온 알프레도가 원망스러웠다. 마지막으로는.

‘무서워.’

밤이 되면 찾아올 시하브가 두려웠다.

-오늘은 그대의 침실에 들 것이니 준비하고 있게.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긴 뉘앙스를 모를 정도로 로미안은 어리지 않았다. 수틀을 내려놓고 로미안은 몸을 웅크렸다.

‘……싫은데.’

이미 앞전에 있었던 두 번의 관계가 모두 로미안에게는 아프기만 했기에, 이제는 모두 거절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로미안의 심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하브의 말이 또 떠올랐다.

-그대에게 이 몸뚱이 말고 내게 줄 것이 뭐가 있지?

로미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톱을 딱딱 깨물었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만 어지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부산스러운 시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마마! 마마!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고?”

로미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침소에 들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

‘그런데 지금 왜?’

그건 로미안에게 희망의 여지를 주었다.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뜻이었을지도 몰라.’

커다란 행사를 연이어 치르느라 피곤한 국왕 부부가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로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왕의 마중을 나가기 위해 발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큰 키의 청년이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시하브였다.

“전하? 어찌 여기까지 벌써…….”

깜짝 놀란 로미안이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딱딱하게 굳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하브는 딱딱한 표정으로 로미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로미안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바라보다가 서둘러서 제 앞에 놓여 있던 자수 바구니를 뒤졌다.

이파리와 줄기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흰 천에 커다란 노란 꽃송이는 완성되어 있었다. 오직 오해를 풀겠다는 일념 하나로 로미안은 시하브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것이 제가 전하께 드리기 위해 만든 손수건…….”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않았다. 로미안이 내미는 손수건을 흘긋 본 시하브가 무거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벗어.”

“……!!”

단도직입적인 말에 로미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손수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로미안이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콱!

“……!!”

시하브의 구둣발이 그 손수건을 꽉 밟고 짓이겼다. 로미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시하브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수건은 무슨. 그런 것을 그대와 나 사이에 나눌 필요가 있던가. 우리는 서로의 필요를 위해 주고받을 것만 챙기면 되는 사이 아닌가.”

“저, 저는…….”

목이 메여왔다. 로미안은 떨리는 눈으로 더럽혀진 손수건과, 자신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는 시하브를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저절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마. 울면 안 돼.’

지금 여기서 우는 것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과 서러움이 크게 밀려오니 어쩔 수 없이 눈물이 고였다. 시하브가 그런 그녀의 처연한 얼굴을 보더니만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웃어라.”

“예?”

갑자기 다른 곳으로 튀는 말에 로미안의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시하브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딱하게 비틀어 웃었다.

“아바마마께도, 린하르트 자작에게도 헤프게만 짓던 웃음 아니냐. 내게도 웃어 보이란 말이다.”

“전하.”

저리 말하는데 웃음이 나올 리가 없었다. 로미안은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축 늘어뜨린 특유의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시하브를 폭발하게 했다. 그는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또, 또, 또! 그런 표정, 당장 집어 치워!”

깜짝 놀란 로미안이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물러났다. 소리를 지르고 나서 몇 번 씩씩거리며 바닥을 노려보고 있던 시하브가 로미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잘 벼려진 칼날과 같은 시선이 로미안의 심장을 그대로 찔렀다.

“정말 그대의 낯짝만 보아도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구나.”

그가 로미안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험한 말이었다. 그 말, 그 눈빛을 받은 로미안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로미안은 꽈당 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시하브는 그런 로미안을 잡아 세워주기는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나가버렸다.

로미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끔찍함뿐이었다.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인연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것을 주변에서 억지로 부부로 만드니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부부가 아니었다면 서로를 이토록 싫어하게 되진 않았을 텐데.’

이제는 슬그머니 정말 나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로미안은 또다시 죄책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도통 답이 보이질 않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본 적이 없는 로미안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다시 소극적인 위치가 되었다. 자신이 시하브를 버리거나 모든 것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하브가 버려주길 기다리는 입장 말이다.

당연히 로미안이라고 그 상황이 편하지는 않았다.

‘해가 지나?’

방 전체가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불이 꺼진 것처럼 말이다. 로미안은 눈을 비비려고 했지만 자신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은데다가, 연이어 국상과 대관식을 치룬 로미안의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그런데다가 갑자기 시하브 때문에 마음의 고생까지 하니, 몸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로미안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툭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알프레도는 이른 아침 단장을 모두 마쳤다. 원래 느릿하게 일어나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책을 읽으며 아침 시간을 죽일 수가 없었다.

‘불안해.’

전날 만났던 왕세자 부부가 영 눈에 아른거렸다. 시하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리던 그녀가.

‘그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더라면 시하브를 그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을 텐데.’

미혼의 알프레도와 단둘이 티타임을 가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남편인 시하브를 초대한 것이었는데, 괜한 배려였다. 오히려 두 사람의 사이를 더 꼬아놓은 것 같았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해결해야지.’

흰 튤립 다발을 받고 희미하게 미소 짓던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아른아른거렸다. 알프레도는 잠시 로미안을 떠올리다가,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인 로미안이 선물한 손수건을 쥐었다.

‘나를 위해 이런 것까지 만들어주다니. 색이 다양하고 모양이 복잡해서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그저 흔한, 이니셜이나, 검은 실로 테두리만 두른 손수건을 줄 거라 생각했더니 화사한 자수 손수건을 선물 받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자수를 덧그리던 알프레도는 그것을 제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는 것으로 마지막 단장을 마치고 아래로 걸어 내려오니, 가운을 걸치고 아침 산책을 다녀오던 린하르트 공작부인이 마침 계단을 오르려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 어딜 가니?”

“어머니.”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알프레도의 입맞춤을 뺨에 받았다. 다정하게 어머니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 알프레도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입궁하려고 합니다.”

알프레도의 대답에 린하르트 공작부인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전하께서 일찍 일어나시는 성품이긴 하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입궁하라 하신 적은 없는데.’

알프레도도 절대로 서둘러서 하루를 시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국왕이 서둘러 알프레도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 린하르트 공작부인이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있니?”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고…….”

무슨 일이 있느냐,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시하브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국정을 물려받게 된 것에 비해 아주 능숙하게 업무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와 삐걱거리는 인물은 왕비인 로미안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 사실 부부는 세상 누구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존재여야 하는데.’

린하르트 공작 부부가 워낙 금슬이 좋았기에, 알프레도의 눈에는 시하브와 로미안의 사이가 전혀 부부처럼 보이질 않았다. 한쪽은 마주치면 맹렬한 혐오를 드러내고, 다른 한쪽은 무작정 두려워하는데 그게 어떻게 정상적인 부부 관계인가.

‘이대로는 왕비님이 너무 가엾어. 어떻게든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데.’

시하브가 이제 막 성인이 된 것처럼, 로미안도 아직 여인이라기보다 소녀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런 나이에 갑자기 일국의 왕비가 되어서, 익숙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왕궁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겠는가.

‘선물이라도.’

하지만 남편도 아닌 알프레도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신기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건네주는 것 정도였다. 그리 생각을 정리한 알프레도가 린하르트 공작부인에게 물었다.

“여인들은 보통 무엇을 좋아합니까?”

“흐음?”

왕궁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인으로 튀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린하르트 공작부인의 눈썹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휘어졌다. 알프레도는 숙맥이 아니었다. 학창시절에 적당한 가문의 적당한 영애와 적당한 기간 연애도 했었다. 연애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도 너무나 깔끔해서 부모로서 뭐라고 말을 보탤 필요도 없었던, 그런 연애.

‘그때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도 수수께끼처럼 웃기만 하더니.’

이대로 누군가와 결혼하면 정말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지푸라기처럼 맛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아서 혼약자를 구하지 않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 새삼 묻는 이유가 뭐지?”

“잘 알기는요.”

린하르트 공작부인의 말에 알프레도는 손사래를 치며 순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더더욱 수상쩍었다. 린하르트 공작부인은 가운을 붙들고 있던 손의 방향을 바꿔 쥐었다.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긴 거니?”

“아니에요.”

“흐음.”

바로 나오는 부정이 오히려 긍정의 뜻이었다. 그동안 알프레도는 여자 친구가 생기면 바로바로 공작부인에게 보고를 했었다. 감춘다면 이제야 진심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자유연애에 유독 깨어 있는 공작부인 입장에서는 아들의 변화가 달가웠다. 그녀는 꼿꼿하고 위엄 있는 공작부인의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유부녀만 아니면 된다. 어서 내게 보여주렴.”

이 얼마나 열린 생각이란 말인가. 문제가 있다면 그 말을 듣고 있는 아들은 정작 그 말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오히려 공작부인보다 더 보수적인 알프레도는 그냥 어머니의 말을 흘리는 길을 택했다. 즉, 도망이었다.

“가, 가볼게요! 전하께서 기다리시거든요!”

허둥지둥 사라지는 알프레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린하르트 공작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유부녀인가…….”

꽤나 사실에 근접한 추론이었다.

* * *

결국 알프레도가 선물로 고른 것은 분홍색 장미 다발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자신의 몸뚱이만한 커다란 다발을 안고 가는 알프레도를 모두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알프레도는 긴장해서 그런 시선을 느끼질 못했다.

‘기뻐해주셔야 할 텐데.’

꽃을 준 게 바로 얼마 전인데, 또다시 꽃이라니. 뭔가 센스가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민해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황실의 요리사가 있는데 디저트류를 사가는 것도 적절하지 않고, 어떤 사이도 아닌데 보석이나 리본 같은 걸 선물하는 것도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뵈면 어떤 것을 좋아하냐고 물어봐야지.’

그리 생각하며 알프레도는 시하브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도 많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니, 왕비궁에 방문하기 적절한 시간이 될 때까지 집무실에 숨어서 시간을 죽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앞으로 두 시간은 있어야 집무실로 나와야 하는 시하브가 이미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전하?”

집무실에 들어온 알프레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브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이리저리 구겨진 셔츠도 그렇고, 가뭇가뭇한 눈가도 그렇고. 여러모로 평온함과는 먼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계세요? 얼굴은 왜 그리 수척하시고.”

“그냥 짜증나서.”

시하브는 머리카락을 대충 흩트리고는, 다시 깃펜으로 서류에 사각사각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일 처리를 시작한 지 오래인지, 상당히 많은 양의 서류가 시하브의 양옆으로 쌓여 있었다.

알프레도는 슬쩍 집무실 문가로 가서는, 이제는 시하브의 시종장이 된 로웰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른 로웰은 근엄한 목소리로 깎듯이 대답했다.

“어제 밤새 여기서 계셨습니다.”

“뭐라? 침궁에 드시지 않으셨다는 뜻인가?”

“잠시 왕비궁에 드셨다가 곧장 이리로 오셨습니다.”

로웰의 말에 알프레도의 가슴이 지끈 아픔을 토했다. 알프레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해.’

두 사람은 부부이다. 사이가 설령 나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합방은 의무였다. 두 사람은 나폴리나스의 혈통을 많이 낳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합방조차도 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알프레도는 좋게 상황을 생각하기로 했다. 알프레도가 애써 상처 입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로웰이 작은 목소리로 알프레도에게 부탁했다.

“어서 쉬셔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래.”

시하브는 옛날부터 고집이 세고, 자신의 마음에 무언가 걸리는 일이 있으면 일에 몰두하곤 했다. 자신이 무리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무리하는 그를 침대로 데려가는 것은 친한 사촌 형인 알프레도의 일이었다.

“나만 믿으시게.”

믿음직스럽게 대꾸하며 알프레도는 안고 온 장미 다발을 로웰에게 건넸다. 로웰이 두 손으로 안다시피 들어야 하는 커다란 꽃다발에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런데 이 꽃다발은?”

“잠시만 들고 있지.”

국왕에게 주는 것이면 로웰에게 정리하라고 했을 텐데, 알프레도는 들고 있으라고 했다. 로웰은 이 꽃다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노련한 궁인답게 테를 내지 않았다.

한결 가벼워진 몸이 된 알프레도가 시하브의 책상 가까운 곳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친근한 어조로 시하브에게 말했다.

“전하, 몸은 괜찮으신가요? 지금이라도 침궁으로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프레도의 말에 시하브는 눈도 들지 않고 계속 서류에 서명을 하며 대답했다.

“되었어. 오늘은 대신 회의가 있어. 미룰 수도 없고, 그렇게 컨디션이 나쁘지도 않다.”

“하지만 얼굴은 무척 안 좋으신 걸요. 왕비마마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제 왕비궁에 들었다가 바로 이쪽으로 왔다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알프레도의 지적에 시하브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왜 이렇게 로미안에게 관심을 가지지?”

알프레도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더없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저 신하로서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죄송합니다.”

“내, 그대를 누구보다 신뢰하니까 하는 말인데.”

평소라면 알프레도가 고개를 숙였을 때 그냥 더 말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흉포한 감정이 어지럽게 그의 마음속을 들끓었다.

시하브는 인정했다. 마주보고 앉아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본 그 순간부터 계속 그는 알프레도가 거슬렸다.

시하브는 사냥개처럼 사납게 눈을 빛내며 알프레도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내 거야. 신경 꺼.”

누가 들어도 도발적이면서 동시에 경계심이 가득한 한마디였다. 알프레도는 잠시 침음을 삼키며 뜸을 들였다. 이 정도로 날이 선 시하브를 자극하는 건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으나, 이 말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하, 전하의 사촌 형으로서 한 말씀 올리자면 왕비님은 물건이 아닙니다.”

바다처럼 푸른 눈이 똑바로 시하브와 시선을 마주했다.

알프레도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어서, 잔잔한 호수처럼 깊었다. 초조한 감정을 혼자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하브는 심기가 뒤틀렸다.

“그게 지금 무슨 의미이지? 그래서 짐의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

알프레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사용하는 펜 한 자루도 아끼고 조심히 달래가면서 사용하면 느낌이 다른데, 하물며 왕비님은 사람입니다.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게 옳습니다.”

알프레도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이미 로미안과 여러 가지 사건으로 얽힌 것이 있는 시하브에게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웃으며 기뻐하고, 너와는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는 창부처럼 야한 슬립에 술을 마시며 기다리던 여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지랖 부리지 마. 자작에게 수여한 ‘언제든지 독대할 권리’를 회수해오고 싶어지니까.”

이제 시하브는 자신이 알고 있는 로미안이 누구인지도 헷갈렸다. 이 모습이 진실한 모습 같으면, 또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 튀어나오니 말이다.

시하브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알프레도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런 건 언제든지 회수하셔도 됩니다. 저는 곧 아버지의 뒤를 이을 테니까요.”

그는 린하르트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시하브의 고모인 줄리에타 공주였다. 시하브가 일시적으로 그를 금해봤자, 결국엔 오래 정치적 공조를 이어갈 사이였다.

냉정하게 그 사실을 짚어준 뒤, 알프레도는 한숨을 내쉬며 한 템포 말을 끊었다. 시하브와 미래를 담보로 줄다리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그저 로미안이 걱정될 뿐이었다.

“전하, 계속 조이기만 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가엾지도 않으셨습니까?”

“…….”

알프레도에게 강한 반발을 가진 시하브였지만, 알프레도의 호소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를 보는 순간 얼어붙던 얼굴은 시하브에게도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입술을 꾹 다무는 시하브를 흘긋 바라본 알프레도가 재차 말을 이었다.

“게다가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마르셨더군요. 마음이 분주하신 탓이겠죠. 왕비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휴식?”

알프레도의 말에 시하브의 미간이 꽉 찌푸려졌다. 알프레도는 천천히 자신의 말을 풀어주었다.

“혼례식에, 장례식에, 대관식까지 굵직한 행사가 많지 않았습니까. 왕비님께 짧게나마 휴양을 허락하여 주시죠. 며칠이라도 분주한 수도에서 떨어져 있으면 금세 건강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시하브는 결국 반박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알프레도의 말은 옳았다. 아직 황실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왕비에게, 최근 이어진 커다란 행사들은 큰 부담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많이 마른 것도 사실이지.’

눕혀놓으면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본래도 살집이 없는 가녀린 체형이었지만, 최근에는 정말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가느다란 허리는 팔 한쪽에 휘감길 정도였고…….

“윽.”

“전하?”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때리는 시하브를, 알프레도가 기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시하브는 고개를 흔들어서 슬그머니 피어오르던 음란한 생각들을 털어버렸다.

‘중증이야. 중증이라고.’

늘 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여자가 어디가 그렇게 예쁘다고. 하지만 몸은 욕구에 충실했다. 밤이 되면 그녀가 보고 싶었고, 아침이 되면 그녀가 떠올랐다. 시하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를 곁에서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휴양이라니 멀리, 꽤 긴 기간을 가야 할 터인데.’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그의 곁에서 한 송이 꽃처럼 말라죽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로미안은 삐쩍 말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내 마음 또한 멀어질지도 모르지. 머리가 식을 수도 있고.’

그리 생각하니 나쁜 방안은 아닌 것 같았다. 시하브는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그 일은 누가 맡아서……?”

사실 왕비의 휴양은 내명부의 일이므로, 왕비가 스스로 처리하거나 왕비의 사교계 파트너가 되는 대부인이 맡아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현재 로미안은 왕비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땅히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알프레도는 이 부분에서 시원스런 대답을 내놓았다.

“제 어머니께서 기꺼이 맡아주실 것입니다. 마침 어머니께서도 린하르트의 온천에 갈 예정이셨으니까요.”

“줄리에타 고모님이.”

그런 예정은 없었지만, 알프레도는 뻔뻔스럽게 자신의 어머니를 팔아넘겼다. 당장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머니의 원성 한마디 듣는 게 뭐가 어려울까.

‘이 맘 때의 린하르트는 축제 기간이니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지.’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알프레도의 마음은 포슬포슬해졌다. 그런 알프레도를 흘긋 응시한 시하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로미안의 휴양이 정해졌다. 국왕 부부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있던 사교계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를 재평가했다. 시부모상으로 피로한 부인을 온천 도시에서 쉬게 해주는 국왕에 대한 칭송도 널리 퍼졌다.

“으으,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인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린하르트 공작부인은 성실하게 왕비의 휴양을 계획했다.

그렇게 다음 달 초, 로미안은 휴양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마차로 이틀 거리에 있는 린하르트 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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