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도서관 (22/40)

8장 도서관

일행은 왕립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편편한 돌길을 걸었다. 둥근 돔 형태의 건물로 걸어가며 베셀 부인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로미안에게 설명했다.

“서책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2층부터 책을 보관하도록 지어졌으며…….”

그녀라고 왕실 건물의 역사를 모두 알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설명은 고작해야 국왕의 정진을 권장하기 위해서 태양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지어졌다, 정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로미안은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1층은 기둥과 벽만 세워져 있을 뿐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계단을 타고 2층에 올라가자 로미안이 기대하던 으리으리한 서가들이 그녀를 반겼다.

“우와.”

둥글게 건물을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도는 서가들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흥분하여 뺨을 빨갛게 붉히고 있는 로미안에게 반백 머리에 외알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도서관의 메인 사서인 시리언이라고 합니다.”

“로미안 나폴리나스라오.”

서가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로미안도 서둘러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붓하게 인사를 올렸다. 벨데가르트 대신 나폴리나스를 발음할 때에 목소리가 느려졌지만,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시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비 전하.”

시리언은 정중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도서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왕립 도서관에 대해서 함께 다니며 설명해드릴까요?”

“여긴 정말 무슨 책이든 다 있나?”

“예, 그럼요.”

왕국 내에서 출간하는 책은 무조건 출간본 한 부를 왕실 도서관에 납품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잠시 우물쭈물거리던 로미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대륙의 마법]이 읽고 싶네.”

“……오, 흔치 않은 책인데 찾으시는군요.”

설마하니 왕족에게서 마법서가 읽고 싶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던 시리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로미안은 얌전하게 두 손을 마주 잡고 대답했다.

“초판본이 사가에 있었거든.”

로미안은 모든 활자를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책은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마법이 나오는 것이라면 동화든, 소설이든, 이론서든 가리지 않고 읽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매우 드문 존재였고, 마법사와 전혀 관련 없는 벨데가르트 집안에서는 로미안이 읽을 수 있는 마법서가 몇 권 없었다.

왕비의 독특한 독서 식습관이 마음에 든 시리언은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법 관련 서적은 모두 4층에 있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아니. 내가 혼자 가고 싶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들떠서 로미안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시녀들에게도 관대하게 말했다.

“그대들도 자기 시간을 보내게. 나는 얌전히 이곳에서 식사 때까지 책을 읽고 있을 테니.”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려던 베셀 부인도, 별처럼 반짝이는 로미안의 시선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이리 대답했다.

“그럼 여기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겠소.”

“잠깐만요, 마마.”

돌아서는 로미안을 붙든 것은 그녀의 건강을 책임지는 여성 의사였다. 어의가 항시 붙어 있을 수 없는지라, 어의가 없는 시간은 그의 조수가 로미안의 건강을 돌보았다.

“하지만 간식거리는 조금 챙겨 가셔야 합니다. 일어나신지 얼마 안 되는데 식사량이 적었던지라 갑자기 어지럽거나 머리가 핑 도실 수도 있습니다.”

“고맙네.”

초콜릿과 캐러멜이 든 작은 손가방이 로미안에게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아든 로미안은 이번엔 정말로 4층을 향해 걸어갔다.

“다녀오세요.”

“힘드시면 저희를 부르세요.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따라온 시녀들도 열의에 가득 찬 로미안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왕실 도서관은 서책 도둑을 막기 위해 엄중히 보호되고 있었으므로 로미안의 안전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홀가분하게 4층으로 올라가려는 로미안에게 시리언이 말했다.

“왕립 도서관의 대출 권수는 다섯 권이랍니다.”

“상냥한 배려 감사하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가져가고 싶은 책은 따로 골라오라는 뜻이었다. 로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4층으로 올라갔다.

“우와아아.”

000.마법으로 분류되는 서가에 가니 그녀가 상상한 것보다도 많은 종류의 책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법 기초학, 마법 응용학, 무지한 자도 2시간이면 깨우치는 마법의 원리…… 와, 진짜 시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들뿐이네.’

마법사들은 괴팍한데다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자신의 지식을 책을 통해 공유하길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집필을 한다고 해도 자기 좋을 대로 적는 법이 많았다.

읽는다고 해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저절로 책들은 잘 팔리지 않았고, 어느 순간 시장에서는 사장되었다. 마탑을 제외하고 이렇게 많은 마법서를 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리라.

‘행복해!’

로미안은 신이 나서 서가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책부터 뽑아들었다.

‘마나. 주문. 마법진.’

단어 하나하나가 로미안을 쭉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로미안은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앉고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책을 읽었을까.

“……?”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책에 파묻힐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책에 몰입해있던 로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샥.

분명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는데 보이는 거라고는 서가 사이로 지나는 작은 통로뿐이었다.

“……?”

고개를 갸웃거린 로미안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또 인기척이 느껴졌다.

샥.

“……?”

분명히 뭐가 있었다.

‘고양이인가?’

로미안은 책을 덮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 건지, 다리가 저려서 잠시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수상한 인기척은 빙글빙글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샥샥.

‘고양이면 좋겠는데.’

로미안은 동물을 좋아했다. 작고 귀여운 아이를 좋아했지만, 사실 크고 사나워도 좋았다.

‘도대체 뭘까.’

로미안은 살금살금 서가를 돌았다. 왕실 도서관의 서가는 마치 미로처럼 빙글빙글 이어지는 구조라서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었다.

샥샥샥.

로미안과 작은 인기척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물며 이어지듯 돌았다. 이대로는 맴돌기만 하는 느낌이라 로미안은 슬쩍 서가 한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연갈색 실 뭉치 같은 것이 도도도 달려와서는 로미안의 앞을 스치듯 지났다. 로미안의 생각보다 제법 크기가 컸다. 로미안은 손을 뻗어서 그 실 뭉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잡았다.”

“꺄아!”

실 뭉치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로미안은 조심스럽게 연갈색 실 뭉치를 정리했다. 자세히 보니 산발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푸르른 숲처럼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로미안을 응시해왔다.

‘여자아이?’

나이는 한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이렇게 작은 아이가 어떻게 왕궁 도서관에 들어왔는지 몰라서 로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마야, 너는 누구니? 혼자 왔어?”

로미안의 말에 여자아이의 흰 빵 같은 통통한 볼이 퉁퉁 부었다. 아이는 와락 소리를 질렀다.

“꼬마 아니야. 나는 안즈야!”

“안즈?”

모르는 이름이었다. 로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미안의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이라면 유력한 귀족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로미안은 안즈의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해주며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뛰어놀면 무서운 언니 오빠들에게 혼날지도 몰라.”

그녀가 언니 오빠로 순화하여 말한 이들은 모두 도서관을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그러자 안즈는 가슴을 으스대듯 내밀며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 오빠야가 제일 세니까.”

딱 아이다운 반응이었다. 로미안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오빠야랑 왔니?”

로미안의 질문에 안즈는 자신의 작은 팔을 있는 힘껏 뻗으며 자신의 오빠를 표현하려는 듯이 휘적거렸다.

“우리 오빠야는 정말 정말 무섭고 힘이 센 사람이야.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들도 우리 오빠야를 보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고 말도 잘 들어.”

“그래, 그렇구나.”

‘귀족인가보네.’

귀족가의 후계자라면 그 집안의 모든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 생각했던 로미안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데 귀족가에서 왕실 도서관에 왔다고? 이렇게 어린 아이와?’

왕실 도서관에 보존 중인 장서들은 대단히 희귀하고 보존 가치가 높다보니 어린아이들의 입장이 엄중하게 제한되었다. 애초에 왕실 도서관에 입장 허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졌다는 반증이었다.

‘도대체 어느 집안일까.’

잠시 궁금해 하던 로미안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집안사람인들 로미안에게 우호적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아이는 순수했다. 안즈는 눈을 반짝이며 로미안을 바라보았다. 로미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즈는 몇 살이야?”

“숙녀의 나이는 묻는 거 아니랬어.”

혼자 심심해하다가 로미안과 이야기를 하게 되어 뺨을 붉히고 좋아하면서도, 안즈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가 새침해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다.

로미안은 망설이듯 살짝 눈을 내리깔며 안즈에게 말했다.

“음, 사탕은 아가라면 줄 수가 없는데…….”

로미안의 말에 안즈는 바로 걸려들었다. 새침하게 군 건 언제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콧김을 팽하고 내뱉으며 소리쳤다.

“안즈는 다섯 살이야! 아가가 아니야.”

“그렇구나.”

로미안은 웃음을 참으며 들고 온 작은 손가방에서 캐러멜을 꺼냈다. 물론, 책을 사랑하는 소녀답게 엄하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책에 묻히면 안 되니까 나가서 먹어야 한다.”

“응. 안 그래도 나도 가고 싶었어. 여기 너무 넓고, 시시하고, 다리만 아프고.”

로미안의 말에 안즈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로미안은 다시 웃음을 삼켰다. 안즈의 말대로였다. 다섯 살 꼬마가 놀기에 왕실 도서관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해 보이는데.’

서가가 어지럽게 놓여 있고 끝없이 이어지다보니 이 길이 이 길 같고 저 길이 저 길 같아 보였다. 로미안은 안즈에게 말했다.

“언니가 오빠야한테 데려다줄게.”

그런데 이게 웬일. 손을 잡을 줄 알았던 꼬마 숙녀는 두 손을 활짝 펴고 로미안에게 도도한 어조로 말했다.

“안아줘.”

“안아달라고?”

뜻밖의 요구에 로미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이 다섯 살 숙녀는 오히려 로미안의 반문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말을 반복했다.

“응. 안즈는 항상 누가 안아줬단 말이야. 안아줘.”

“음.”

정말 많이 안아줬었나보구나. 로미안은 손가락을 턱에 대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좀 난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안을 수 있을까?’

어릴 때 시하브의 약혼녀가 된 로미안은 사실 또래친구나 동생들과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었다. 벨데가르트 백작 부부는 로미안이 사회성을 익힐 시간에, 차라리 시하브에 눈에 들 만한 여러 가지 특기를 익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죽은 넬라 왕비의 특기였다는 쳄발로 연주도 있었다.

-로미안! 몇 번을 말해야 하니! 더 잘해야 한다고. 더더더더더!!

솔직히 말해서 로미안은 좋은 쳄발로 연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음악이 무엇인지 이해했고, 좋은 노래를 작곡할 능력은 있었지만 그것을 연주할 능력은 있지 않았다. 수년을 훌륭한 선생을 구해 배웠지만 실력은 썩 좋지 못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외국어를 배웠으면 지금 유용할 텐데.’

그리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그저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야 하는 삶. 그것이 로미안의 삶이었다. 물론, 그녀가 바란 건 아니었다.

꼬마 숙녀를 데려다주려다가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른 로미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아달라고 두 팔을 뻗었는데도 안아주지 않는 로미안에게 안즈가 볼을 부풀리며 입을 열었다.

“뭐해! 빨리 안아달라니까!”

앙칼진 새끼고양이 같은 목소리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미안이 미안하다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안즈, 찾았다.”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서가의 틈으로 키가 큰 남자가 성큼 나타나서는 긴 팔로 안즈를 덥석 붙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로미안의 눈앞을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로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쾌청한 가을 하늘 같은 푸른 눈이 피할 새도 없이 로미안과 시선을 반짝 하고 마주했다.

“……!”

“……!!”

로미안과 남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순간 스파크가 반짝하고 튄 것만 같았다.

“…….”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고 갔다.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응? 오빠야, 왜 그래?”

안즈가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반짝이며 남자의 옷자락을 꾸욱 하고 쥐었다. 시하브와 달리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바로 알프레도 린하르트 자작이었다.

로미안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린하르트에서 그런 식으로 헤어진 뒤,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당혹스러운 마음과 달리 목소리는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오랜만입니다, 린하르트 자작.”

“오랜만입니다, 왕비님. 인사가 늦었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여기서 뵐 줄 몰랐습니다.”

“그, 그게.”

로미안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로미안이 왕비궁 밖으로 나가기 싫어했던 바로 그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다. 알프레도가 그런 걸로 그녀를 추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린 마음은 저절로 그의 말을 비꼬아 들었다.

‘역시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몸이 아프다더니 왜 돌아다니느냐고 생각할 거야.’

안즈를 대할 때는 밝았던 로미안의 태도가 빠른 속도로 움츠러들었다. 희게 빛나던 얼굴이 우중충하게 가라앉고 시선은 빛을 잃었다. 그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챈 것은 방금 전까지 로미안과 대화를 나누던 안즈였다. 그녀는 세차게 제 오빠의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며 말했다.

“오빠야, 왜 갑자기 딱딱하게 말해? 언니야가 나쁜 사람이야?”

“안즈.”

“언니야 나쁜 사람 아닌데. 안즈한테 사탕도 줬는데. 언니야 괴롭히면 안 돼!”

뜻밖에 자신을 감싸고도는 다섯 살짜리 소녀의 말에 로미안은 감격했다. 로미안의 다갈색 눈동자에 은은하게 물기가 어렸다. 한숨을 내쉬던 알프레도가 그런 로미안의 눈을 보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안즈 쪽으로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사탕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

“힝.”

안즈는 입술을 삐죽이며 알프레도의 다리 뒤로 쏙 들어갔다. 알프레도는 그런 동생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로미안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막상 로미안을 보니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누가 봐도 로미안은 움츠러든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으니까. 알프레도는 말없이 로미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생을 돌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알프레도의 말에도 로미안은 고개를 들지 않고 푹 숙인 채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잘 압니다. 어리광이 심한 편이죠. 안 봐도 마마님을 귀찮게 했을 겁니다.”

“진짜 안 그랬거든?”

알프레도의 말에 안즈가 눈을 흘기면서 툴툴거렸다. 알프레도가 피식 웃으며 긴 팔이 안즈를 능숙하게 안아들었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심통이 난 안즈가 알프레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런데도 알프레도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 결국 져준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며 알프레도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둘이 많이 닮았네.’

막상 붙여놓으니 두 사람은 생김새에 닮은 곳이 많았다. 오로지 눈만, 알프레도는 둥근 아몬드 형이었고, 안즈는 살짝 찢어진 외꺼풀이라는 게 달랐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로미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생이 많이 어리네요.”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차이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열여섯에 혼인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으니까.

로미안의 말에 알프레도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네. 하지만 저랑만 나이 터울이 많지, 동생들끼리의 나이 터울을 생각하면 부자연스러운 건 아니랍니다.”

안즈와 알프레도 사이에 많은 형제가 끼어 있다는 뜻이었다. 듀케인을 제외하면 혈육이 없는 로미안에게는 그 말이 참 신기하게 들렸다. 특히나 고위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낳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생소했다.

“동생이 많으시군요.”

“어머니께서 어차피 낳으면 다른 사람이 다 길러주는데 안 낳을 건 또 뭐니, 라고 하시더군요.”

“그분다우세요.”

시원하다 못해 추울 지경인 말투가 딱 린하르트 공작부인의 말투였다. 로미안은 작게 웃었다. 린하르트 공작부인에게는 로미안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포르미에 공작부인이 그녀를 괴롭힐 때도 그렇게 거침이 없이 끼어들었다.

‘지금도 내게 화가 많이 나 있으실까?’

그런 그녀가 이번 사냥제 때는 부채를 살랑이며 지켜만 볼 뿐,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게 서운하진 않았다. 부모도 나서지 않는데 그녀가 나서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건 서운했다.

로미안의 얼굴에 그늘이 다시 드리워졌다. 알프레도가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마마, 사냥제의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참석해야 했는데, 손수건까지 받아놓고 참석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그 말을 꺼내고 나서야 알프레도는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설령 사냥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야 했어.’

알프레도의 얼굴을 후회가 얼룩덜룩 물들었다. 그의 감정을 눈치챈 로미안이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네? 린하르트 자작이 죄송할 필요는 없지요. 제가 철없이 흰여우를 말한 탓인걸요.”

“그거야 말로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의 말에 마음을 두지 마세요.”

알프레도는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까지 국왕에게 아무것도 받아본 적 없는 여자가, 잡아본 적도 없는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 그저 생각나는 것을 대답한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녀를 나무라하는 이들이 비열한 것이었다.

‘그렇게 충심이 넘치면 제 발로 걸어가서 국왕 전하를 모셔왔으면 될 것 아닌가.’

그냥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데 급급한 태도라니. 알프레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느라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서 진심을 느낀 로미안의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녀는 살짝 볼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감사해요. 그렇게 말해주어서.”

그냥도 가녀린 느낌인데,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니 더더욱 지켜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알프레도는 안즈를 안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 가느다란 어깨를 붙들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도움을 주지 않은 것도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마마께서 첫 번째로 청하지 않아서 조금 토라져 있으실 뿐이에요. 마마의 진심을 안다면 마음을 푸실 겁니다. 화가 오래가는 분이 아니고, 마마에게는 약하시거든요.”

“……감사해요.”

그것도 로미안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로미안은 알프레도의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그냥 두 손 놓고 그분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기보다 직접 행동해야겠어.’

그건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로미안에게 큰 변화였다.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로미안을 알프레도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캐치한 것은 다름 아닌 안즈였다.

“뭐야?”

꼬마 숙녀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안즈는 제 오빠의 얼굴을 흘겨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핵심을 찔렀다.

“오빠, 언니 좋아해?”

“헉!”

생각하지도 못한 인물에게 예상하지 못한 지적을 받은 알프레도가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조, 좋아하다니.’

알프레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쿵쾅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는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왕세자의 약혼녀를 신경 썼는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왕비의 궁에 꽃다발을 안고 찾아가고.

‘……미쳤다, 알프레도.’

그동안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라 줄곧 억누르고 있었다. 자기 자신조차 속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안즈의 지적을 받는 순간, 그는 이것을 감출 수도, 모른 채를 할 수도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연정이었다.

* * *

알프레도와 다른 의미로 로미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프레도는 혼인적령기의 미혼이었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가는 앞으로 혼삿길에 지대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엄한 목소리로 안즈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안즈. 절대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그런데 이 맹랑한 꼬맹이 보소. 안즈는 로미안의 말에 입을 다물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반박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엄마가 요즘 세상이 좋아서 사귀는 것은 흠도 아니라고 하던걸.”

“하아, 안즈…….”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여동생을 보며 알프레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린하르트 공작부인이 평소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건 사실이었다.

-나 때만 해도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내와 얼굴도 모른 채 혼인해야 했지. 하지만 너희들은 절대 그러지 마렴. 요즘 세상에 좋아서 사귀는 건 흠도 아니니 연애를 할 수 있는 한 많이 하고 결혼해야 한다.

재미있는 건 린하르트 공작 부부는 정말 다정한 잉꼬부부이고, 린하르트 공작은 공작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애처가라는 점이다. 많은 아이들이 두 사람의 금슬을 증명했다.

‘그리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다섯 살인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리 생각하며 알프레도는 안즈의 콧날을 살짝 잡아당겼다.

“요 꼬맹이가 못하는 말이 없어.”

“아야야!”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안즈는 커다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알프레도가 손을 떼자, 고사리 같은 손이 곧장 오빠의 코에 복수를 가했다. 로미안을 의식하여 알프레도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안즈는 눈치 빠르게도 슬그머니 손을 풀었다.

알프레도는 다시 안즈를 고쳐 안으며 물었다.

“자주 도서관에 오시나요?”

“오늘 처음 와본 거예요. 시녀장이 권해줘서요. 왕비궁에서도 가까우니 적당히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지요.”

그리 말하며 웃는 로미안의 얼굴이 너무 야윈 것 같아서 알프레도는 저도 모르게 뻗어지려는 손을 힘주어 참았다. 이제는 린하르트 영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부로 그녀에게 다가서서는 안 되었다.

‘이미 이분의 배 속에는…….’

그것만큼 상대방이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로미안의 임신을 떠올리니 슬쩍 가슴 한구석이 고통을 토로했지만, 알프레도는 그 통증을 모른 척 외면했다. 그건 그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통증이었다.

대신 그는 말을 바꾸었다. 그녀는 왕비였고, 솔직히 그녀를 자주 찾아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그럼 자주 오시겠네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로미안의 얼굴은 구름 낀 하늘처럼 다시 흐려졌다.

“글쎄요. 자주 나오면 구설수에 오를 테니…….”

“…….”

로미안의 흐려진 말꼬리에서 그 뜻을 읽은 알프레도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자주 오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왕비가 와병 중인 관계로 처리되지 못하고 쌓인 일도 잔뜩 있었다.

‘역시 어렵겠지.’

그리 생각하며 알프레도가 눈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던 안즈가 조막만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 답답해!”

아무래도 자기 큰오빠가 좋아하는 여자인 것 같아서 어떻게 꼬드기나 구경하고 있었더니, 꼬드기기는커녕 말 한마디도 어렵사리 붙인다.

‘얼굴 보기가 힘들면 얼굴을 보았을 때 말을 많이 해야지, 뭐 하는 거야. 바보 오빠!’

안즈는 다섯 살이지만 알 것은 다 알았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언니랑 오빠들이 별별 연애 이야기를 다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큰오빠가 숙맥이었다니! 어쩔 수 없지. 귀엽고 똑똑한 내가 도와주는 수밖에.’

그리 생각하며 안즈는 로미안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로미안이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안즈는 그런 그녀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언니야, 나 내일도 올 거니까, 언니야도 내일 와! 빨리 나랑 약속해.”

“어? 어?”

로미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안즈가 그런 그녀에게 재차 손을 내밀었다. 로미안은 엉겁결에 안즈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새끼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얽히자, 안즈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린애랑 약속한 걸 어기는 어른은 변변치 못한 거랬어. 그러니까 내일 꼭 와야 돼.”

“그, 그래.”

그냥 어린애라고 무시하고 안 나왔다가는 만날 때마다 변변치 못한 여자라고 놀림을 당하게 생겼다. 로미안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보여서, 알프레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접으며 곱게 미소 지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이어도 좋았다. 가슴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감정이어도 좋았다.

지금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 * *

린하르트 공작 남매와 로미안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안즈는 로미안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여동생이란 다 그런 걸까?’

안즈는 굉장히 야무지고 발랄했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로미안은 그런 안즈가 밉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을 겪어봤음에도, 듀케인 같은 오빠보다 안즈 같은 동생이 훨씬 인생에 이로울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마마?”

내려오는 로미안을 베셀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로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내려온 책을 사서에게 넘겼다. 사서 시리언은 서둘러서 대여 목록 작성을 하고 시녀에게 책을 안겨주었다.

“도서관이 이런 곳인 줄 몰랐네. 정말 좋군.”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나요? 왕궁이 아니더라도 시내에도 좋은 도서관이 여럿 있는 걸로 아는데요.”

“내 부모님은 내가 책 읽는 것을 싫어하셔서…….”

로미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겪은 모든 일을 베셀 부인은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 아픈 얼굴로 로미안을 바라보았다. 이 젊은 왕비는 어린 나이에도 인생에 굴곡이 무척 많아서, 때때로 슬퍼하지 말라고 안아주고 싶었다.

기운차게 올 때와 달리,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래서 귀환하는 길은 걷지 않고, 시하브가 내어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에서 얌전히 시녀들이 건네주는 자잘한 간식거리를 먹으며 로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안해.’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이 언제였던가. 저절로 몸이 늘어졌다.

‘이렇게 편해도 될까?’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현실도피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한 상태 아닌가.

‘역시 시하브를 한 번 만나야 해.’

그리 생각하며 로미안은 나른해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시하브를 만날 생각을 하니 저절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지?’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손을 자신의 아랫배에 얹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 배 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쉬이 놓아주려하지 않겠지.’

이성적으로야 답이 나왔다. 그냥 모른 척, 지금처럼 참고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아이 딸린 여자가 혼자서 어떻게 사는지 로미안은 몰랐다. 하물며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이 경우 이혼이 성립할 수 있는지도 모호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로미안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인지라, 도착은 순식간이었다. 마차가 천천히 멈추고 내릴 채비를 하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본 로미안의 몸이 얼음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열린 문 밖으로 벨데가르트 백작 부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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