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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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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리아 왕국의 수도 라리사Larisa.
그리스 지역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동시에 풍요롭기로 유명한 곡창지대인 피니오스 강 연변의 평야에서 터를 잡고서 살았기 때문에 농업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리스에 식량을 공급하고 있는 운송의 중심축라고 할까. 남부의 아테네와도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상업적으로도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에게 해를 건너서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서 오는 상단들이 크게 늘었고, 바다를 건너오는 민족들에게서 해양술과 조선술을 배우면서 그 대가로 식량을 제공했다. 특히 트로이인들은 타민족에게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힛타이트에게서 배운 기술은 물론, 에게 해를 건널 수 있는 해양지도까지도 제공했다.
바다 건너에 위치한 트로이인들은 인심이 야박한 그리스인과는 다르게 정이 깊고 참견하기를 좋아한다. 상술에 능하면서 인심이 좋기 때문에 트로이 상인들은 어느 나라에서건 크게 대접받았다. 물론 테살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트로이 상인들을 제 1순위로 대접하면서 그들에게는 관세를 크게 줄였다.
"트로이의 왕녀가 그렇게나 예쁘다던데."
트로이의 제 1왕녀인 헥토르.
요정들이 하사한 신비의 검 '듀란달'을 다루면서 트로이의 적을 모두 쳐부수고 강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눈부신 전희戰姬.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는 자신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재목으로 헥토르를 지목하였고,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왕세녀가 되었다. 왕이자 아버지인 프리아모스의 신뢰에 만족시켜주고자 하였는지 최강대국 힛타이트와의 전쟁에서 몇 번이고 승리하였고, 트로이 인근의 나라들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두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조차도 헥토르의 이름은 익히 들었을 정도로 유명하였는데, 수려하면서도 활기찬 용모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많았다. 가정의 여신인 헤라가 말하기를 특히 아테나가 헥토르를 총애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여신으로서 축복의 가호까지 내려주었다고.
"정말 질리는 녀석이구나."
곡물을 기름에 튀긴 간식거리를 먹고 있던 흑발의 여성이 질린 눈빛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테살리아의 풍성한 곡식들에 축복을 내려주면서 매번 풍년이 찾아오도록 기원하는 여신님이시다.
그녀는 농경과 농업, 곡식을 다스리고 있는 여신으로, 제우스의 친자매로 알려진 데메테르였다. 이미 딸 페르세포네를 두고 있는 유부녀로서, 그 딸의 친부가 제우스라는 사실은 충격적이기만 하다. 신들 사이에서는 근친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친남매들끼리 붕가붕가해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역겹다. 물론 데메테르보다는 그 발정기를 친남매에게까지 향하는 제우스를 역겹다고 생각했지만.
"저기요, 여신님. 가서 일이나 하세요."
"귀찮다. 싫다. 페르세포네도 없는데 내가 어찌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냐."
".....미쳤나."
한낱 인간이 중얼거리면서 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메테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게으름뱅이처럼 굴고 있지만, 테살리아에서만큼은 풍요의 여신으로서 언제나 풍년이 오도록 축복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데메테르의 독단이 아니라 주신 제우스의 명령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면 테살리아는 그리스 전역에 식량을 수출하고 있는 농경생산국이다. 만약 테살리아에 흉년이 찾아와서 곡식들이 모두 죽어버려서 생산량이 대폭 감소한다면 그리스 전역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인간들이 모두 아사하는 최악의 지옥이 펼쳐지리라.
"싫다! 딸을 데려오거라! 어서 딸을 데려와!"
".....지옥에 있잖수."
"그렇다면 지옥으로 가서 하데스를 때려눕히고 내 딸을 찾아와!"
"내가 죽어."
이 망할 여신.
딸 페르세포네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거냐.
아직 후계자로 없는 마당에 내가 죽어버리면 테살리아는 주인이 없는 공백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주변국들은 곡창지대를 소유하고 있는 테살리아를 두고서 전쟁을 벌일 것이고, 테살리아의 곡창지대는 전화의 불길로 모두 타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미래는.... 기아와 굶주림이 넘쳐나는 지옥으로 돌변하겠지.
그를 우려하고 있는 신들은 여러 번이고 내게 후계를 낳을 것을 요청하였고, 나는 그들의 요청을 번번히 거절했다. 내가 무슨 가축 새끼도 아니고 아무 암컷이나 잡아서 떡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물론 헤라와는 열심히 떡을 치고 있지만. 그런데도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을 보면 내 쪽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과 신의 혼혈은 의외로 많다.
특히 제우스를 예로 들어보자.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맛집탐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수많은 미녀들과 떡을 치고서 수많은 자식들을 보지 않았던가.
국가를 다스리는 국왕들의 가계를 보면 제우스의 핏줄인 자가 많았다. 제우스의 피를 이은 혼혈들은 왕으로서의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말은 좋지 않다. 신의 힘은 인간 사회에 있어 축복이 아닌 저주에 가까울 테니까.
"내가 일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
데메테르의 말에 답했다.
"제우스가 당신의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번개를 박아버리겠지."
솔직하게 답변해주었다.
테살리아 왕국의 곡창지대를 번창하게 만들라는 것은 주신 제우스가 직접 내린 엄명이다.
제우스의 친남매라고는 해도, 데메테르는 사실상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아랫 서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 의해 지옥에 감금당하면서 모조리 내던지고 깽판을 친 전력이 있지만, 어마어마한 피해가 생겨나자 제우스가 만류하면서 데메테르를 다시 작업장으로 끌어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겨울이라는 계절이 생겨났지만, 적어도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눈이 내리는 계절도 나쁘지는 않다. 사시사철 농업에 힘쓰는 국민들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게 뭐지.
나는 제우스, 하데스와는 구멍동서가 되버렸구만. 그 대단하신 주신들과 구멍동서가 되어버릴 줄이야. 이거 번호표를 끊어서 서로 섹스 순번을 정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물론 나는 환영이다. 공짜로 여신과 떡을 칠 수 있다는데 어떤 인간이 싫어하겠는가?
"애초에 나는 일을 하기 싫단 말이야!"
"딸도 있는 애엄마가 못하는 말이 없구만?!"
"지금은 그 딸이 없잖아. 나는 딸의 앞에서는 부지런하게 일하는 훌륭한 어머니라고."
"그 애가 없으면 매번 농땡이를 부리니까 하는 말이잖아!"
지난번에는 데메테르가 일손을 떼면서 곡창지대에 막대한 피해가 벌어졌고, 제우스가 이를 듣고는 곧바로 데메테르를 윽박지른 적이 있었다.
데메테르의 유무에 따라서 곡식 생산량이 크게 변동된다. 조금이라도 생산량이 하락하면 주로 곡식을 수입하는 국가들 중에서는 식량난을 겪는 국가가 생기기 마련이고, 곡식을 얻기 위해서 인접국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벌어진다. 제우스는 현상유지를 이루는 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변동이 심한 전쟁을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테살리아에 대한 주의를 크게 기울이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에서 철광석을 수입하고 있는데 좀 도와주시죠."
".....또 나에게 일을 맡길 셈이야?"
밥값 좀 해라, 크게 일갈하고 싶었지만 적어도 테살리아에 우호적인 여신님이니 참았다.
힛타이트에서 철기 기술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철광석을 녹여서 철검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힛타이트가 만들어내는 철제 무기보다는 약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힛타이트의 기술을 전수받은 트로이와는 막상막하를 이룰 정도로 뛰어났다.
심지어 그리스의 남부 국가들은 아직까지도 청동제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기 기술을 받아들인 테살리아가 그리스 국가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했다. 테살리아의 기술자들에게는 말에게 철갑을 두를 수 있도록 하는 마갑 제련을 맡겼고, 1백 여기의 철기병을 육성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기술력이 덜 발전한 미개한 기마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돌덩이를 주고 식량을 받는다는 것에 신이 나서는 스스로 철광석을 바치면서 식량을 얻어갔다. 철제 기술이 없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있어서 철광석은 그저 빛을 내는 돌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리라.
"일 좀 하세요, 여신님."
"싫다!"
데메테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구슬려야 일을 시킬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