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성신 군주-137화 (137/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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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젠장!”

한편 라에가르는 이미 구멍이 나버려서 가라앉기 시작한 기함 위에서 애처로운 상태에 놓여버리고 말았다.

육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테살리아도 해전에서는 맥을 못 춘다. 그리고 그것은 테살리아의 왕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명에 달하는 그리스 장수들을 추살해 버린 왕이라 할지라도 물에 빠지면 죽는다. 라에가르의 교육 담당이었던 아테나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그것은 라에가르도 마찬가지였다. 아테나로부터 배우지를 못했으니까.

흔들거리는 갑판 위에서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뱃머리를 보며 “빌어먹을 상황이군”이라면서 지금의 심정을 드러냈다.

“최대한 노를 저어라! 육지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게 들어가야 한다!”

“갈고리를 던져! 전하께서 계신 기함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수십 대의 함선들에서 갈고리를 던지면서 가라앉기 시작한 기함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천천히 육지로 이동하면서 소용돌이의 해류로부터 벗어나려고 했고, 덕분에 라에가르가 타고 있던 기함만큼은 소용돌이에 떠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 왕들은 소용돌이의 끔찍함을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주변에 어느 아군 함선도 없었던 터라 그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거센 소용돌이와 함께 먹혀버렸다.

고향을 떠나서 살라미스 만으로 온 그들은 해전에서 용감하게 싸우기를 고대하였겠지만 불운하게도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소용돌이에 먹혀서 죽어버렸다. 그리스의 전사로서는 매우 불명예한 죽음이었다.

“설마 포세이돈입니까?”

테살리아 장교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외침에 라에가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건 신의 의지가 아니다. 그저 자연 현상… 제대로 엿 먹었군.”

그렇게 말하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나서지 않았다. 제아무리 3대 절대신이라고 할지라도 외국 군대와의 전쟁에서는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국 신화계의 신들에게 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이집트. 그리스 신화계에 필적하는 강함을 가진 자들이다. 이집트 신화계와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이번 전쟁에서 손을 쓰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이번 전쟁에 손을 대지 말라는 제우스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신들은 이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지금의 소용돌이 현상은 그저 살라미스 만에서 벌어지는 자연 현상에 불과했다. 그저 우연이었던 것이다.

해전이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진 자연 현상. 그리스에게 ‘운이 좋았다’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배를 돌려. 이 망할 바다에서 당장 떠난다.”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오며 라에가르가 중얼거렸다.

“해전은 이제 지긋지긋하군.”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전을 경험해 버린 라에가르는 혀를 차 내렸다.

수평선 너머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 함선들의 뒷모습이다. 소용돌이 덕분에 전장에서 안전하게 탈출하게 된 그리스 함대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집트 함대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퇴각해 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아시아를 침입한 히타이트를 견제하기 위해서 부리나케 달려갔겠지.

“전하! 아군 병력들이 아테네로 집결하였다는 보고입니다.”

“좋아.”

각 국가들의 해군들이 모두 살라미스 만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사이에 지상 최강이라고 불리는 테살리아 육군들은 육로를 통해서 남진을 시작하면서 아테네에 집결했다.

그리스는 오로지 살라미스 만에서 벌어지는 해전에만 이목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테살리아의 십만 대군이 모조리 동원되어 아테네로 진격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테네에 모인 십만 대군은 오로지 라에가르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 초토화. 이번에야말로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들을 쓸어버린다.

사실 라에가르는 이번 해전에서 패배를 직감하고서 병력을 불러 모았다. 해전에서 패배하면 육지전에서라도 이득을 봐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상외로 잘 싸워 준 덕분에 해전에서는 무승부로 기록되었다. 물론 피해 규모로 따지고 본다면 테살리아와 트로이의 승리가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까지 앞뒤 모르고 날뛰어댔던 미케네부터 멸망시키자.”

* * *

살라미스 만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의 결과는 그리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우방국으로 나선 이집트는 매우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이집트로부터 배신을 당해버린 그리스는 가장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패전하면서부터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패전은 뼈아프게 작용했다. 그리스 동맹의 축을 이루던 다수의 폴리스 국가들이 패망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고, 심지어 트로이 함대에 의해 포로로 잡힌 그리스 왕과 귀족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트로이의 제3 왕자 헬레노스는 사로잡힌 폴리스 왕과 귀족들에 대해서 몸값을 지불할 경우 석방하자고 건의했다. 당연히 그 말에 제2 왕자 데이포보스가 이견을 제시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녀석들은 우리 트로이의 적이다!”

“하지만 형님, 저들을 살려 둠으로써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익?”

그 말에 데이포보스가 되물었다.

데이포보스와 마찬가지로 그다음 말을 듣고 싶었는지 상석에 앉아 있던 헥토르는 헬레노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많은 트로이 장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헬레노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그리스 왕과 귀족들이 모두 죽으면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모두 무주공산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가장 이득을 볼 세력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테살리아.”

“맞습니다.”

헥토르의 대답에 헬레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이가 그리스를 정복하기에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리스 반도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아테네를 뚫어야 하는데, 아테네는 테살리아의 영토였다. 나중에 테살리아와 교섭을 펼친다면 그리스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해전의 결과를 통해서 가장 많은 이득을 챙길 세력이 테살리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우방국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그리스를 보더라도 우방국 이집트의 지원을 믿고서 무리하게 살라미스 만의 좁은 해로로 들어와 버렸고, 테살리아와 트로이의 연합 함대에 걸려서 참패를 경험했다.

난세에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신들에 의해서 수백 년 동안 전쟁을 그리스 일대에서 지속해 왔기 때문인지 신뢰와 믿음은 땅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런 난세에서 테살리아가 그리스를 합병하면서 세력이 부지기수로 확장된다면 동맹국이라고는 해도 트로이로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헬레노스는 트로이의 왕녀를 보내어 테살리아의 왕비로 만들어 버리자고 주장하였지만, 설령 외척 관계가 된다고 할지라도 껄끄러운 상황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우선 저들을 보내어 그리스가 우리 트로이에 우호적 관계를 맺도록 만들고, 한편으로는 몸값을 받아내서 이득을 챙기자는 겁니다. 몸값을 받고 포로를 석방하는 경우는 전쟁에서 자주 있는 일이니, 테살리아가 의심하지도 않을 거고요. 적어도 우리는 테살리아가 그리스 점령에 시간이 걸리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흐음.”

헬레노스의 말이 청산유수처럼 이어지자 반발이 심했던 데이포보스조차도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맞는 말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최강국이라 불리는 테살리아의 영향권이 그리스 전역에 닿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이번 해전에서 테살리아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육군만큼은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테살리아 왕국에서는 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그리스 전역을 토벌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그 공세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리스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테살리아의 뒤를 치는 건 어떻습니까?”

트로이 장수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하지만 그 제안에 대해서는 헥토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절대로 테살리아에 맞서서 이길 수 없다. 설령 배신하여 그 후미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없었다. 트로이에 주둔하고 있는 모둔 군단들을 동원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트로이에서 대규모 병력들이 증원된다면 테살리아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에 기습 작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수차례 의견이 오고 가면서 회의가 이어졌지만 이렇다고 할 대안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이네이아스가 말했다.

“테살리아의 왕은 강해. 게다가 자신의 기함을 이끌고 그리스 본진을 때려 박는다는 미친 행동을 보일 정도로 용맹하기까지 하지. 적어도 그리스의 불사신 아킬레우스 이상이다. 라에가르 왕은 그 누구도 못 이겨.”

트로이에서 헥토르 다음으로 무예가 뛰어난 장수라는 평가를 받는 아이네이아스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성격이었지만 적어도 라에가르를 이길 수는 없다면서 못을 박았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날아드는 창과 화살들조차 그의 피부를 뚫어내지 못했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공격으로도 그를 상처 입힐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불사신이다. 아킬레우스보다도 뛰어난 불사신의 가호를 가진 괴물.

듣자 하니 과거에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라는 테베의 드래곤까지 죽여 버렸다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죽은 줄 알았던 드래곤은 테살리아 진영에서 활약하고 있었지만.

“그러면 테살리아를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트로이 장수의 반박에 아이네이아스는 “그런 말이기도 하지”라고 수긍하면서 좌중을 충격에 빠뜨렸다.

조용한 성격의 헥토르와는 달리 아이네이아스는 언제나 자신감으로 가득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남자가 갑자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트로이 장수들이 경악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라에가르가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본 자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네이아스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 어떤 공격으로도 죽일 수 없다.

불사신이라는 것은 무섭다. 그 어떤 공격으로도 죽일 수도, 상처 입힐 수도 없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스에서는 전쟁에서 용맹스러운 공헌을 쌓은 자에게 ‘불사자’라는 호칭을 붙여주는데, 그 호칭과는 별개로 실제로 죽지 않는 불사신이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아킬레우스와 라에가르였다.

아킬레우스는 적어도 발꿈치가 약점이라고 하지만, 라에가르에게는 약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아폴론은 그리스 최강의 무장이라 불리는 아킬레우스의 약점을 헥토르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는데, 라에가르는 그런 약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킬레우스와 달리 스틱스 강에 자신의 온몸을 담구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 성검, 이라면…….”

“불가능해. 바보 녀석, 그걸로는 못 죽여.”

헥토르가 푸른 성검을 툭툭 건드리면서 중얼거렸지만 아이네이아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성검으로 죽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네이아스의 생각이다. 트로이 왕실의 보검이라 불리는 듀란달은 분명 훌륭한 검이었지만, 지금의 라에가르에게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창검의 공격으로부터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불사신의 육체에 상처를 입혀봤자 고작 해야 바늘에 찔린 수준일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가장 좋은 방법은 테살리아와 우리 트로이가 영원히 우방국으로 지내는 것뿐이겠군요. 아니면 라에가르 왕이 수명을 다해 죽거나, 테살리아가 스스로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방법도… 결정적인 것은 적어도 우리 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우라질 나게 강한 녀석 때문에 눈칫밥만 먹게 생겼군.”

헬레노스의 말에 데이포보스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라에가르 왕의 용맹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 하더라도 넘치도록 많았다. 불사신의 육체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헥토르가 직접 라에가르를 상대한다면 뾰족한 수가 생기겠지만 지킬 것이 많은 트로이로서는 그러한 모험에 자신들의 국운을 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테살리아와 동맹 관계였으니 지금 당장 무슨 수를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건의하겠습니다. 왕실의 공주를 보내어 테살리아의 왕과 혼인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트로이와 테살리아가 앞으로도 영원히 동맹국으로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처음에는 트로이 공주를 다른 외국에 팔아 버리듯이 시집보내자는 헬레노스의 의견을 반대했던 데이포보스였지만 막상 현장에서 불사신 괴물의 실체를 경험해 버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테살리아에는 괴물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드래곤이 존재했고, 테살리아의 정예병들도 매서웠다. 게다가 지금 테살리아는 십만 대군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육군을 이끌고서 그리스 전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니, 바다 건너에 위치한 트로이는 직접적인 대안책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테살리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리스와 같은 파멸을 맞이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를 보내자는 건데? 누님을 보내자고 말한다면 네놈을 죽여 버리겠어.”

“물론 아닙니다, 형님.”

“그러면 누가 있지?”

“저의 쌍둥이 누님… 카산드라 공주는 어떻습니까?”

헬레노스의 말에 데이포보스는 물론 트로이의 모든 장수들이 “말도 안 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과거 태양신 아폴론에게서 청혼을 받았을 정도로 용모가 빼어난 카산드라 공주였지만, 트로이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유명했다. 아폴론이 카산드라에게서 ‘신뢰’를 뺏어가면서 그녀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렸고, 거짓말만 쏟아내는 공주를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장수 중에는 대놓고 그녀를 혐오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카산드라 공주를 테살리아의 왕비로 보내자는 말은 오히려 선전 포고를 해버리자, 라는 말로 들려왔다.

“차라리 폴릭세네를 보내라!”

트로이의 막내 공주라면 적어도 혼인 동맹에 대한 명분은 된다면서 데이포보스가 외쳤다. 카산드라를 보낼 바에야 아직 성인식조차 치르지 못한 폴릭세네를 보내는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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