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성신 군주-154화 (154/193)

154====================

저승의 왕

“이걸로 모두 끝났군요! 낭군님께서 저승의 왕에 오르시고 하데스의 권속들을 모두 부하로 삼으시면 됩니다!”

아킬레우스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강아지처럼 라에가르에게 매달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가 그 누구보다도 우월한 위치로 올라서는 것에 고양감을 느꼈다.

하계의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 이미 태양신 아폴론까지도 죽였는데 하데스를 못 죽일 것도 없다. 게다가 저승의 모든 세력권마저 넘어왔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설령 하데스가 이변을 눈치채고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무너진 저승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으리라.

문제는 올림포스가 지금의 이변을 언제 눈치채느냐에 달려 있다.

제우스가 이 사실을 알아버리면 올림포스는 저승의 왕 하데스를 폐위시키기 위해서 에키드나와 손을 잡은 라에가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설령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올림포스를 멸망의 위기까지 몰고 갔던 에키드나와 손을 잡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된다.

에키드나는 화산 밑에 봉인된 티폰을 깨우고 다시 올림포스를 공격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라에가르는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다.

“큭! 내가 어째서 인간 따위한테…….”

“방금 내 낭군님께 뭐라고 한 거냐. 죽고 싶냐?”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제, 제가 실언을……!”

아킬레우스가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주먹을 추켜올리자 에리스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위험하다. 이년은 정상이 아니다.

에리스는 하계의 왕이라고는 해도 겨우 인간 따위가 자신의 머리 위에 선다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반발하였는데, 아킬레우스가 노려보기 시작하자 온몸을 벌벌 떨면서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주먹이 지나칠 정도로 가깝다. 저 주먹에 맞으면 곱상하고 예쁘장한 얼굴이라도 곤죽이 되어 버리겠지. 아름다운 용모에 자신감을 느끼고 있던 에리스는 자신의 이 얼굴이 흉측하게 문드러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에리스의 실태를 지켜보던 카론이 아킬레우스에게 다가오더니.

“역시 왕비님은 뭔가 다르십니다! 라에가르 님께서 저승의 왕이 되신다면 왕비의 자리는 당연히 아킬레우스 님이시죠!”

“뭐, 뭐 그렇지! 내가 왕비가 되는 건 당연해!”

입에 참기름이라도 발랐는지 유연한 입담을 부리며 카론이 아킬레우스의 총애를 얻었다.

훗날 저승의 왕비가 될 여자에게서 총애를 얻는 것은 앞으로의 출세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출세는 다른 게 필요 없다. 위정자로부터 총애를 얻는 것.

이승에서 온 망자들을 배에 태우고서 나르는 수송 역이나 하고 있는 카론으로서는 위정자의 총애를 얻을 방법이 없었고, 이번 기회를 십분 발휘하여 더욱 높은 자리로 오르고 싶어 했다. 적어도 타나토스나 에리스처럼 저승의 왕을 지척에서 모시는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면 좋겠지.

“낭군님, 낭군님! 어서 왕좌에! 에키드나인지 뭔지 하는 괴물 여자에게 질 수 없죠. 저승의 모든 것을 차지하시어 한시라도 빨리 그 여자를 저승에서 몰아내도록 하죠!”

“아니, 몰아내면 안 되잖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꾸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는 괴물 여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당장 이 저승에서 에키드나를 몰아내자고 말했다.

괴물 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라에가르가 저승의 왕으로 등극해 버리면, 그 권능을 발휘함으로써 에키드나 일당은 이 저승세계에서 힘을 못 쓰게 된다. 지금 이 기습 공격이 가능해진 것도 하데스가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데스가 저승의 옥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에키드나와 괴물들은 힘이 쇠약해지고 이 저승 세계에서 추방당한다. 저승이라는 세계 그 자체가 오로지 저승의 왕에게서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포스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에키드나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도 사양이다.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우선 저승의 왕이 되어 그녀를 억압하고 제어할 수 있는 억지력을 발휘해야 한다. 에키드나와 그녀의 부하들을 모두 휘하로 넣을 수 있다면 올림포스를 공격하여 신들의 제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테니까.

저승의 왕이 앉을 수 있는 옥좌.

그 옥좌의 방에 도착한 라에가르를 맞이한 것은 에키드나였다. 괴물들의 여왕은 자신이 저승의 왕에 오를 생각이었겠지만, 이미 라에가르가 그것을 차지한 뒤였다. 타나토스, 휴프노스, 에리스, 게리스 등의 저승신들이 모두 라에가르를 새로운 저승의 왕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데스의 투구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라에가르가 추대되는 것은 당연했다.

에키드나는 괴물 군세를 이끌고 저승을 습격하여 모든 영역을 정복하였지만, 결국 저승의 왕은 라에가르가 되었다.

재주는 에키드나가 부리고 돈은 라에가르가 받았다고 할까.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켰을 뿐이다. 에키드나는 그다지 불쾌하다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분노가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맹약을 나눈 건은 아니나 에키드나는 자신이 저승의 왕에 오를 생각이었는데, 그것을 라에가르가 가로챘다. 이것은 에키드나의 예상을 넘어서는 돌발적인 반전이다. 설마 저승신들이 한낱 인간을 추대할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왕은 나다. 그리고 이 저승은 나의 영역이다.”

“잘도 말하는구나, 인간. 고작해야 왕위를 갓 물려받은 햇병아리. 권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터인데도… 내가 너를 우습게 보았구나. 설마 왕위는 물론 하데스의 투구까지도 가로채다니.”

두 날개를 펄럭거리며 에키드나가 웃음을 흘렸다.

보란 듯이 옥좌에 앉아 있던 라에가르 또한 일어서면서 대낫을 치켜들었다.

하데스의 보물고에 보관되어 있던 사신의 대낫, 플루토스(Ploutos).

그 예리함이 신의 영혼까지도 베어낸다고 알려져 있는 사신의 대낫은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명검보다도 날카로웠기에 라에가르가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대낫을 치켜든 라에가르는 하데스의 투구를 장착하고서 에키드나의 앞에 섰다.

옥좌의 방.

왕에게 허락된 옥좌는 단 한 명만이 앉을 수 있다. 이미 라에가르가 저승의 왕이 되었고, 저 옥좌의 주인은 라에가르뿐이다.

비록 찬탈에 가까운 방법이었다고는 하나 저승의 왕이란 그런 것이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오로지 약육강식에 따라서 결정되는 추잡한 옥좌. 그것을 쥐기 위해서 라에가르는 괴물의 여왕에게 대적했다.

“네 부하들, 아니 자식들을 데려오는 게 좋을 텐데.”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하는 라에가르의 말에 에키드나가 마침내 속에서 들끓던 분노를 표출했다.

“건방 떨지 마라.”

붉은색의 마력들이 발산되며 저승 세계를 뒤흔들었다. 세계를 위협하는 괴물의 권능이 뿜어져 나왔다.

과거 제우스보다도 오래된 세월을 거치고 거친 지고의 괴물이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올림포스를 멸망시키려 하였을 정도로 막강한 권능은 옥좌의 방을 가득 메우면서 악령의 비명 소리와 같은 소음을 터트렸다.

“내가 혼자서 여기에 온 것은 저승의 왕 하데스조차도 내게 맞설 수 없기 때문이야. 괴물이 존재하는 곳이야말로 나의 영역. 나의 아이들이 내게 힘을 주고 있다. 어리석은 하계의 왕아, 너는 오만하고 어리석구나. 마치 제우스처럼.”

“그 제우스에게 패배한 계집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은데.”

에키드나의 손에서 드래곤의 발처럼 붉은색의 비늘이 돋아났다. 마치 건틀렛을 보는 것 같았다.

붉은 비늘의 손을 드러낸 에키드나는 손등에서 손톱과 비슷한 칼날을 사출시켰고, 그것을 휘두르며 라에가르와의 거리를 좁혔다.

대낫과 부딪치면서도 손톱은 부러지지 않았다. 육중한 무게의 플루토스에 비하면 그저 작은 칼날에 불과할 터인데도 밀리지 않는다.

금속과 금속이 깎여 나가는 불똥이 튀면서도 눈이 멀어버릴 섬광이 확산되었다. 눈이 아프다. 그리고 뜨겁다. 마력이 격돌하면서 발생하는 고열은 옥좌의 방을 후덥지근하게 데웠다.

인간, 아니 신이라고 할지라도 에키드나의 마력이 직접적으로 닿아버리면 그 열기에 녹아버리고 만다. 한데 바위조차도 용암으로 녹여버리는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라에가르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에키드나조차도 무너트리지 못하는 불사성. 불사의 왕에게 괴물의 화염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선 그 영혼부터 뜯어주마.”

칼날을 내려치는 에키드나의 공격을 목격한 라에가르가 바닥을 뒹굴면서 그것을 피해냈다. 그러고는 대낫을 휘두르며 높이 쳐올렸다. 그것을 정면에서 막아낸 에키드나의 칼날이 크게 울렸다.

에키드나의 가녀린 목을 완전히 잘라낼 생각이었는데 요령 좋게도 대낫을 막았다. 금색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에키드나의 마안. 상대의 영혼을 읽어내면서 그것에 기록된 정보들을 모두 읽어낸다.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와 같은 능력이다. 고작해야 찰나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을 뿐인 라에가르의 모든 정보를 읽어내는 건 간단한 일이다.

“젠장.”

라에가르는 벽면을 지르밟으며 섬광과도 같은 스피드로 에키드나의 화염을 피해냈다. 역시 고대의 괴물은 상대하기 벅차다. 네메아의 사자가 뿜어내는 화염도 이 정도는 아니겠지.

불사성을 위협할 정도의 화력이 옥좌의 방을 메운다. 에키드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은 분명 괴물에게만 허락된 권능이다.

대낫이 휘둘러지며 에키드나의 뿔을 잘라냈다.

머리 위에 솟아 있던 뿔이 잘려 나간 에키드나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화염을 뚫어내면서 무리하게 전진해 오는 라에가르의 공격에 잠시 허를 찔렸다. 하지만 겨우 뿔이다. 어차피 다시 돋아나는 그저 뿔. 에키드나는 자신의 화염을 뚫어낼 정도의 근성을 가진 라에가르를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하계의 왕이 대적하기에 에키드나는 너무도 높은 난관이다.

그녀의 칼날이 라에가르의 복부를 찔렀다. 정확히 그의 몸을 관통했다. 손톱의 끝에는 강한 산성 독이 점철되어 있었고, 독이 확산되며 라에가르의 몸을 녹였다.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마비와 함께 생명체의 근원을 갉아먹는다.

라에가르는 자신을 찌르고 있는 손톱을 대낫으로 내려치며 베어냈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여 에키드나의 어깨를 베어버렸다.

뼈까지 으스러뜨리는 대낫이 크게 휘둘러지며 에키드나를 내리쳤다. 하지만 어깻죽지를 베었을 뿐, 결정적인 공격은 중심부로 닿지 않았다.

“호오, 대단한 불사성이구나.”

에키드나가 눈을 좁혔다.

정확히 몸을 관통하였건만 라에가르의 몸에 생긴 치명상이 회복되고 있었다. 몸을 잠식한 산성 독까지도 모두 정화되며 불사성의 육체를 뽐냈다.

완벽에 가까운 육체다. 제우스와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 할아버지 우라노스와 비교하여도, 그 이상의 육체가 아닌가. 설마 자신의 독까지도 파훼해 버리는 불사성이라니. 대체 무슨 권능들을 박아넣은 거냐.

올림포스 여신들의 모든 권능이 그 육체에 맴돌고 있었고, 라에가르에게 해로 작용되는 모든 현상과 법칙을 막아냈다.

“더럽게 아프군. 평생 이런 고통은 처음인데.”

“불사신. 영혼을 찢어발기려면 꽤나 손에 벅찰 것 같구나.”

그 순간 라에가르의 몸이 사라졌다.

하데스의 투구 퀴네에의 힘을 발동한 것이다. 기척까지도 모두 감춘 투명 상태였기 때문에 에키드나조차도 감지할 방법이 없었다.

완전무결한 암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격.

그녀의 가슴팍에 대낫의 칼날이 꽂혔다. 피 분수가 일며 크게 상처가 벌어진다. 투명 상태에서 내지르는 공격은 몇 배에 달하는 파괴력으로 적의 육신을 깎아내 버린다.

피를 흘리기 시작하는 에키드나의 몸을 걷어차면서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다시 공격을 하려던 찰나.

화염으로 넘실거리는 옥좌의 방에 도착한 초로의 노인이 가열된 분위기를 냉각시켰다.

“내 영역에서 뭘 하고 있는 게냐? 하계의 왕. 에키드나.”

검은색 수염을 가슴팍까지 늘어뜨린 하데스는 노여움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

저승으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옥좌의 방에 도착한 하데스는 자신의 영역을 어지럽힐 정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라에가르와 에키드나를 목격했다. 둘 중에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면 어부지리를 택할 수 있었겠지만, 하데스는 자신의 영역을 어지럽힌 무뢰배들을 가만히 둘 정도로 얌전한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기와 보물을 다루는 라에가르를 보며 하데스가 고성을 내질렀다.

“네, 네놈! 대체 어디서 그 투구를……!!”

“큰아버지 애첩이 줬지. 그러게 여자 관리 좀 잘하지 그랬어?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닥쳐라!”

신의 위격을 끌어올리려는 하데스를 목격한 라에가르가 그의 팔을 베어냈다.

이승에서 산책을 즐기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권능을 빼앗겨버린 하데스는 라에가르가 휘두르는 대낫에 베여 한쪽 팔을 잃어야 했다.

절대신의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신의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하데스는 자신의 부하 신들이 이미 라에가르에게 붙어서 그를 새로운 저승의 왕으로 추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투구까지 빼앗기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자신의 몰락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무모하게 모습을 드러낸 하데스는 자신의 동생 제우스의 반쪽짜리 아들에게 팔이 베이는 처참한 꼴을 당해버렸다.

“이제 밥은 왼손으로 드셔야 하겠어.”

라에가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