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성신 군주-171화 (171/193)

171====================

일상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테살리아 왕궁의 정원에서 칼부림을 일으키며 싸우기 시작했다.

목적은 라에가르의 수청이다. 누가 오늘 밤에 수청을 들 것인지를 두고서 싸우는 모습이 살벌하다.

일반인은 절대로 범접하지 못할 무예를 가진 투희(鬪姬)들이 창검을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던 그리스 영웅들은 저마다 둘로 나뉘어져선 돈을 걸고 술잔을 기울이며 좀 더 과격하게 치열한 싸움을 기원했다.

“싸움을 보면서 고기는 살살 먹는군, 그렇지 않나?”

오디세우스가 술잔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이타카의 왕은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그리스의 영웅답게 싸움을 즐기는 것은 다른 영웅과 똑같았다.

그리스 최강의 무장이라 불리는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최강자 헥토르. 둘의 대결은 모든 역사가와 음유시인들이 보고 싶어 할 세기의 대결일 것이다.

아름답게 춤추는 투희들을 지켜보던 많은 군웅들이 라에가르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부러워 죽겠군. 한 명만 하더라도 아름다운 미녀인데 둘씩이나 차지하다니!”

“그래서 하계의 왕이시지. 우리 영웅들이 인정한 지고의 왕!”

바로 그때 아킬레우스가 휘두른 거대한 참격이 영웅들이 마시던 술상을 깨부숴 버렸다.

헥토르는 우아하면서 완벽한 움직임으로 회피하고 있었고, 무식한 멧돼지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참격을 퍼붓는 아킬레우스의 공격에 영웅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다시는 저승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영웅도 언뜻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아손이다. 영웅들 중에서 가장 범인에 가까운 무능력자 이아손은 오늘도 개복치처럼 두 영웅의 사이에 끼어서 얻어터지고 있었다.

“밤에는 아주 허리가 녹아 버리겠어?”

오디세우스가 라에가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킬킬 웃었다.

그 말에 라에가르가 답했다.

“덕분에 나는 애간장이 녹고 있다만.”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부수기 시작한 정원의 신상(神狀)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스 최고의 기술자가 신의 모습을 조각한 신상들이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헤라의 목이 날아가고 있었고, 아테나의 늘씬한 다리가 부서졌다. 마지막으로 아프로디테의 풍만한 가슴골이 절단되고 있었다.

정원에 아리따운 여신들의 조각상을 두면서 남몰래 수집욕을 느끼고 있었던 라에가르에게 있어 절망적인 결과나 다름없었다.

* * *

카산드라는 라에가르의 얼굴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준수한 용모와 왕으로서의 품격을 동시에 겸비한 남성은 자신의 정원에 있는 신상들을 모조리 초토화시킨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를 야단치고서 오는 길이었다. 야단을 맞은 아킬레우스는 라에가르에게 미움받았다며 울먹거렸고, 헥토르는 모든 책임을 아킬레우스에게 전가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말괄량이 두 여성을 제압한 라에가르는 새로운 왕비가 될 카산드라를 만나게 되었고, 아리따운 용모를 가진 공주님은 라에가르를 보며 ‘역시 운명이 보이지 않네’라고 생각하였다.

운명이 보이지 않는 인간.

지금까지 그 운명을 보고서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한 카산드라였기 때문에 운명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라에가르는 놀라우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의 남자였다.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 먼 길이었을 텐데 편하게 쉬어.”

“예,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말하는 라에가르를 향해서 카산드라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며칠 전부터 당신의 운명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불운한 이야기겠지만 카산드라는 아폴론에게 예언 능력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의존증이 생기고 말았다. 카산드라에게 있어 예언 능력은 애증이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미리 경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적도 많은 반면에, 그 예언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카산드라는 처음 본 여자가 운명에 대해서 지껄이는 언행에 라에가르가 분명 미친 여자라고 취급하리라 여겼지만, 오히려 라에가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 대해서 대답했다.

“저승 세계의 옥좌를 쥐게 된 이후부터인가…….”

하데스의 모든 권능을 강탈하면서 3대 절대신에 근접하는 힘을 얻게 되었기에 카산드라의 예언 능력으로도 라에가르의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카산드라는 절대신들을 제외한 다른 신들에 한해서는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카산드라는 라에가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촐랑거리며 돌아다니는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그녀의 운명을 점쳤다. 그녀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미래를 파악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불타는 올림포스.

날뛰는 괴물과 망자.

비명을 지르는 신족.

그리고 광소하면서 하늘의 옥좌에 오르는 라에가르.

직접 장본인인 라에가르를 통해서 예언을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주변인인 헤르메스를 매개체로 사용한다면 라에가르와 관련된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그를 엿본 카산드라는 라에가르의 운명이 왜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라에가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 올림포스를 공격할 속셈이군요!”

“그렇지.”

“불태우고 파괴시키고!”

“아니, 거기까지는 하지 않아. 나는 적어도 이성적인 성격의 남자라서…….”

“아름다운 여신들을 모두 노예로 삼아버리고!”

“그 말을 해버리면 반박하기 힘들어지는데.”

라에가르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거리를 좁히기 시작하는 카산드라의 적극적인 행동에 뒤로 물러섰다.

격노한 듯한 표정을 짓던 카산드라가 손가락을 올리며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올림포스를 점령하게 되면 분명 여신들을 죄다 꼬셔내서 난봉꾼으로 전락할 거라느니, 터무니없는 기술과 방법을 동원해서 온갖 음란한 짓을 하고 다닐 것이라느니. 심지어 여신들을 농락하면서 해괴한 술자리까지 벌인다고 한다.

카산드라가 아폴론에게서 능력을 받은 예언가라는 사실을 헤르메스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던 라에가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준 행동과 결과들을 상대로 추측해 본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섹스를 하면서도 식사를 해결한 적도 있었고, 여성의 입과 가슴을 술잔으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헤라와 아테나, 아르테미스는 겉으로 투정을 부리면서도 결국에는 라에가르의 요구를 받아주는 편이었고, 헤스티아는 라에가르의 부탁이라면 매번 들어주는 자상한 누나였기에 음란한 체위와 플레이를 요구해도 잘 받아주는 편이었다. 헬레네도 라에가르의 부탁이라면 들어주었기 때문에 라에가르는 성적인 판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앞으로 조심할게.”

“주의하세요! 여자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좀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면 당신처럼 인기 많은 남자도 언젠가는…….”

말을 이어 나가던 카산드라는 중요한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몸을 흠칫 떨면서 라에가르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다, 당신! 내 말을 들어주는 거야?! 예언이라고 했잖아! 예언이라니까?”

“그래, 예언.”

“그런데 왜 내 말을 믿어주는 거야!”

믿으면 안 되나. 설마 다 구라 친 거였어?

마치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관찰한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히는 카산드라의 말에 그만 믿고 말았다. 음란한 플레이를 하는 중년 변태라는 말에 혹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온갖 변태 같은 플레이를 하는 남자라고 말해 버리면 라에가르는 제 풀에 넘어가서 그를 믿어버리고 만다.

“이, 이상한데……?”

“아폴론의 저주 때문인가. 나는 이미 하데스의 권능을 모두 먹어 치운 상태라서 네가 나의 미래에 대해 내게서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나 또한 너에게 걸린 저주의 범위에 해당되지 않는 게 아닐까. 아폴론이 그만큼 강력한 저주를 걸었을 리도 없고.”

그 말에 카산드라는 울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라에가르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상태 그대로 고개를 푹 숙여버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 행동에 라에가르가 흠칫거렸다. 지금까지 여자들을 자주 울려왔던 라에가르였지만, 잠자리에서 거친 테크닉을 보여줄 때마다 색욕에 젖은 여성이 쾌락의 단말마처럼 흘리는 눈물이 전부였다. 물리적으로 여성을 울린 적은 결코 없었다.

“당신은 신계의 왕이 될 거야.”

“당연하지. 내가 누구인데.”

“그리고 나의 하나뿐인 지아비가 될 거야.”

“그래. 이제 너는 내 왕비가 될 테니까.”

“나는 네 아이를 낳게 돼.”

그 말을 남기며 카산드라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의 말을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

카산드라는 마치 어둠 속에서 하나의 구원을 찾는 기분이었다. 이 테살리아에 와서 다행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지아비로 섬길 수 있게 되어서, 나의 이 저주스러운 예언 능력으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이의 출산 일이 오늘로부터 열 달 뒤가 되지 않을까?”

“역시 변태라니까.”

예언에서 본 것처럼 눈앞의 남정네는 자신의 욕망을 전혀 숨기지 않는 지독한 인간이었다. 이런 사람이 나의 예언을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니.

카산드라는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라에가르가 손을 들어 눈물이 흐르는 뺨을 닦아주었다. 그 손을 맞잡은 카산드라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예언 능력이라면 앞으로의 고난을 쉽게 점지할 수 있어. 물론 당신을 통해서는 미래를 볼 수 없어. 주변인들을 이용해야 해. 당신에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변을 크게 맴도는 인물이면 좋아.”

“올림포스의 도둑년을 잡아오면 되겠군.”

카산드라는 어느덧 라에가르에게 마음을 열었는지 딱딱한 존댓말이 아닌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나눌 법한 경어를 사용하며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