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마침내 칼을 빼든 블레이드 헌터스였다.
1군과 2군의 불펜 투수진 라인업을 대거 변경하는 매우 과감한 행보!
사실 이것만 놓고 보면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만큼 1군과 2군의 차이는 말 그대로 엄청났기 때문.
허나 블레이드 헌터스는 이번에 그러한 개념으로부터 전적으로 예외였다.
사람처럼 던지는 불펜 투수가 나강선과 김철민.
이른바 강철 라인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1군에 있던 투수들은 당연히 나락에 떨어진 기분을 맛봤고, 2군에 있던 이번 콜업 대상 투수들은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그야말로 희비가 교차하는 상황!
물론 나강선은 여기에서 전적으로 예외였다.
현재 김철민과 함께 강철 라인을 구축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겠는가?
같은 블레이드 헌터스의 선수들은 물론이요, 코칭스태프조차도 나강선한테는 조심할 정도였다.
우선 나강선은 이번 대규모 라인업 변동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 나름 익숙해진 얼굴들이 2군으로 가긴 했지만 그걸 딱히 아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잘하는 선수가 1군으로 올라오고, 못 하는 선수가 2군으로 내려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거의 자연의 섭리와 같은 느낌.
오히려 궁금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투수들의 공이 말이다.
-얼른 가자, 애송이. 지금쯤이면 던지고 있을 거야.
“네, 선생님.”
그래서 나강선은 오늘 비교적 야구장에 일찍 출근했다.
2군의 새로운 투수들이 올라올 텐데, 그들은 불펜에서 공을 던져보기로 했다.
물론 관련 보고를 2군 코칭스태프에서 받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거하고는 차이가 큰 것이다.
그리고 이건 박남천과 함께 서두르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나강선 역시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속했다.
앞으로 서로 합을 맞추게 될 수도 있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강선은 불펜으로 향했고, 이내 보게 되었다.
퍼억!
-나이스 볼!
뻐엉!
-베리 굿!
코치들이 보는 앞에서 한창 공을 던지고 있는 투수들의 모습을 말이다.
당연히 그 안에는 조웅현과 투수 코치도 자리하고 있었다.
-흐음···. 생각보다 괜찮은데?
박남천이 말했다.
그런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였다.
블레이드 헌터스는 투수진이 워낙 열악한 터라 매년 있는 신인 드래프트나 2차 드래프트에서도 투수 위주로 뽑곤 했는데, 마침내 그게 빛을 본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자리 뺏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긴장해야겠어요.”
-걱정 마, 애송이. 그 정도 실력이면 이미 1군에 오고도 남았을 테니까.
박남천은 경계하는 나강선의 목소리에 딱 잘라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자신이 직접 옆에 끼고 가르친 나강선에 견줄 만한 투수는 없었던 것이다.
“너도 왔구나, 강선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궁금하더라고요.”
이어서 나강선은 김철민하고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그도 불펜에 와 있었다.
그렇게 나강선은 피칭을 구경했는데, 거기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이가 있었다.
휘익-!
뻐엉!
-나이스 볼! 공 좋다, 좋아!
좋은 구위는 물론이요, 안정적인 릴리스 포인트와 더불어 좋은 제구력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완벽한 느낌의 투수가 있었다.
심지어 그 투수는 엄청난 강점도 따로 갖고 있었다.
무려 좌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투구 유형이 나강선처럼 아주 독특했다.
-이야, 저렇게 던지는 애가 실제로 있긴 하구나. 저건 경쟁력 있겠는데?
아무래도 그렇다 보니 박남천은 드물게도 감탄을 금치 못 했다.
거기에는 나강선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좌완 사이드암이라니···.”
그렇다.
지금 박남천과 나강선이 주목하는 투수는 무려 좌완 사이드암이었다.
이건 나강선의 정통파 언더핸드처럼 희귀한 유형에 속했다.
모르긴 몰라도 좌타자들한테는 지옥 그 자체이리라.
좌완 사이드암은 공이 상대의 등 뒤에서 나오는 느낌을 받기 때문.
그만큼 우타자들한테 취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저 친구는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딱 좋겠어. 안성맞춤이네.
박남천의 이러한 말마따나 용도가 이처럼 확실해지는 것이다.
상대 팀의 좌타자 한 명을 확실하게 처리해주면 충분했다.
투구 유형을 생각하면, 그리고 지금 피칭하는 모습을 감안하면 해주고도 남으리라.
때마침 블레이드 헌터스는 마땅한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도 없었다.
물론 기존에 해주던 투수가 있긴 했지만 방어율 9점대를 찍으며 불만 신나게 지르다가 결국 2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심지어 그 방어율도 나강선이 어느 정도 막아준 거였다.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의 특성상 막지 못 하면 승계 주자를 남겨두고 내려가기 일쑤인데, 그 승계 주자를 이어서 등판한 나강선이 모조리 막아낸 것이다.
그 2군 투수의 방어율은 나강선이 없었다면 가볍게 10점대를 돌파했으리라.
반면에 지금 새로이 얼굴을 비춘 좌완 사이드암 투수는 훨씬 더 나아보였다.
뻐엉!
“오···. 좋다, 좋아.”
“나이스 볼! 아주 좋다!”
공을 본 투수 코치와 조웅현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괜찮은 느낌인데···.”
그건 김철민도 마찬가지였다.
피칭을 보던 그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을 던지는 족족 아래로 낮게 깔리는 게,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이름은···. 이찬혁인가. 이 친구 잘 기억해둬, 애송이.
“네, 선생님.”
나강선은 박남천의 말에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서로 오래 볼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
블레이드 헌터스는 새로운 불펜 투수들의 등장과는 별개로 오늘도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유일한 휴식일인 월요일이 지나갔으니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날씨까지 야구하기 딱 좋은 느낌으로 화창했다.
단, 그 내용은 블레이드 헌터스한테 있어 썩 좋지는 않았다.
따악!
[안타! 또다시 실점하는 블레이드 헌터스입니다!]
따아악!
[다시 한 번 안타! 정말 방망이가 식을 줄 모르는군요!]
오늘은 시작부터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선발 투수의 상태가 별로 좋지 못 했다.
1회부터 선두 타자한테 솔로포를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만 이윽고 난타를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닝을 많이 먹어주기는 했다는 거였다.
총 성적은 5이닝 8실점.
투수들이 매번 잘 던질 수는 없는 만큼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애당초 5선발이라서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다.
나올 때마다 잘 던지면 1선발로 토종 에이스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뻐엉!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그대로 틀어막습니다!]
따악!
[멀리 못 가는 내야에 뜬 타구입니다.]
-아웃!
[그대로 1루수가 잡아냅니다. 쓰리 아웃.]
반면에 상대 팀의 선발 투수는 너무나도 잘 던졌다.
1점도 내주지 않는 짠물 피칭을 선보였다.
이렇게 보면 일찌감치 승패가 결정된 셈이었다.
점수 차가 무려 8점이었으니 말이다.
자고로 모든 경기를 다 이기는 건 불가능한 법.
이런 식의 패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의 경기는 블레이드 헌터스한테 있어 마냥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블레이드 헌터스에서 새로운 투수를 올렸습니다. 아, 그 2군에서 올라온 투수로군요.]
[새로이 한번 테스트를 해보려는 거겠죠. 우선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담은 없을 것 같네요.]
때마침 2군에서 올린 투수들을 시험해보는 데에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제 아무리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는 해도 결국은 2군.
1군에서 어떻게 던질지는 직접 봐야 알 수 있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크게 지는 때가 오히려 더 나았다.
말하자면 모두가 시작은 추격조인 셈으로, 이제 여기에서 옥석을 하나둘씩 가려내 추격조와 롱릴리프, 필승조 등으로 나누는 거였다.
그걸 위해서는 지금처럼 크게 지고 있는 상황이 딱 좋았다.
-과연 살아남는 녀석은 몇이나 될까~.
“다 잘 던지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큰 점수차로 지고 있는 만큼 나강선은 오늘도 휴식이었다.
그는 덕아웃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차례대로 마운드에 오르자 연신 구경했다.
새로운 필승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인지라 저절로 흥미가 생기는 것이다.
“김창훈, 쟤는 좀 어떤 거 같아?”
“가끔 공이 날리는 것만 빼면 좋은 느낌이야.”
“흠···.”
이건 블레이드 헌터스의 다른 선수들도 같았다.
그 안에는 손현호와 김창훈, 김철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경기가 초반부터 완전히 넘어갔으니 주전들은 그냥 백업들과 일찍 교체해서 휴식을 부여한 것이다.
144경기 체제를 고려하면 이런 식의 체력 안배도 중요했다.
모든 경기를 뛰게 하면 제 아무리 타자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 경기의 후반은 거의 이런 흐름을 보였는데, 박남천과 나강선은 이내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투수 교체! 이찬혁!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팀에 새로이 합류한 좌완 사이드암 이찬혁이 올라가게 되었다.
물론 그 상대는 좌타자였다.
-오, 드디어 저 친구 차례구나. 잘 됐네. 오자마자 바로 던지게 되어서.
박남천은 이찬혁의 등판에 잔뜩 신이 난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여러모로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타자한테는 약하겠지만··· 역시 좌타자는 확실하게 막아주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지금 역할만 충분히 해내도 나중에 FA로 10억은 족히 받을 걸?
“흠···. 아무리 원 포인트라고 해도 좌타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면 그 이상까지 가능하지 않을까요? 우타자를 잘 잡을 수도 있어요. 아까 보니까 제구력도 좋더라고요.”
-그게 되면 쟤는 부르는 게 값이지.
서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나강선과 박남천이었다.
그만큼 이찬혁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이다.
헌데··· 어째 시작이 영 좋질 못 했다.
타악!
[지금은 손에서 공이 빠진 걸까요? 너무 크게 튀는군요. 다행히 포수가 받아냈습니다.]
[아직 영점이 잡히지 않은 느낌인데요.]
다부진 모습으로 마운드에 오른 것까지는 좋았지만 초구가 엉망이었다.
공이 그냥 땅에 꽂힌 것이다.
포수가 블로킹을 해낸 게 대단할 정도였다.
-뭐, 초구는 누구나 저럴 수 있지.
“그렇죠.”
박남천과 나강선의 반응은 이와 같았다.
둘 다 충분히 이해하는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그 흐름은 점점 갈수록 이상했다.
뻐엉!
[이번에는 너무 높게 갑니다. 포수가 겨우 받아내네요.]
타악!
[바깥쪽으로 크게 빠집니다. 쓰리볼입니다. 제구가 되지 않는 느낌입니다.]
이찬혁은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던지지 못 했다.
아니, 그는 거의 그냥 공을 난사하고 있었다.
땅에 패대기치질 않나, 공이 위로 높이 뜨질 않나, 크게 빠지질 않나.
아까 불펜에서 보여줬던 낮게 깔리는 완벽한 제구력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로 인해 중계진의 말마따나 카운트는 3-0이 되었다.
물론 지금부터라도 잘 던지면 되겠지만, 거기에는 반전이 없었다.
타악!
-볼넷!
[결국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출루시키는 이찬혁 투수입니다.]
[지금은 제구가 되질 않네요.]
4구째 또한 볼로 꽂힌 것이다.
심지어 또 땅에 패대기를 쳐서 포수가 겨우 막았다.
-뭐지? 저건 내가 본 그 공이 아닌데?
박남천은 그 광경에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음···.”
그리고 그건 나강선 역시 같았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