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오늘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넉넉한 편이었다.
야구하고는 별개로 공휴일이어서 오후 2시에 경기가 시작되었기 때문.
또한 경기 자체도 진행이 꽤 빨랐다.
점수가 많이 나긴 했지만 한 이닝에 집중적으로 나왔고, 가장 중요한 볼넷이 양팀 모두 적었던 것이다.
특히 블레이드 헌터스의 선수들은 홈구장 경기여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끝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구단에서 오늘 저녁 식사를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경기 자체가 오후 5시 정도에 끝났으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오늘은 그냥 저녁 식사를 알아서 해결하면 끝인 셈.
나강선이 이찬혁한테 같이 밥을 먹자고 권유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그나저나 어디로 갈 거냐, 애송이?
박남천이 물었다.
자신은 비록 먹지 못 한다지만 문득 메뉴가 궁금해진 것이다.
“그냥 분식집으로 갈까 하는데, 왜요?”
박남천의 물음에 별 생각 없이 대답하는 나강선이었는데, 그는 그러다가 금방 듣게 되었다.
-뭐? 겨우 분식집? 야, 너 그러다가 사줘놓고 욕먹을 수도 있어.
바로 이와 같은 박남천의 핀잔을 말이다.
그는 나강선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저 지금 가난하다는 거···. 애당초 전 찬혁이보다 조금 더 받는 정도라고요.”
금방 항변에 나서는 나강선이었다.
뭐, 이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현재 나강선의 연봉은 최저인 2800만 원에 불과했기 때문.
야구 선수의 특성상 10달에 맞춰서 들어오는 셈이니 매달 280만 원을 받는 건데, 이걸로 기본적인 생활비에 부모님 용돈까지 보내드리고 나면 남는 게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게다가 블레이드 헌터스의 연고지 특성상 그 집값 비싼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터라 빠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실제로 나강선은 평소에 먹는 게 여의치 않은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처럼 알아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이찬혁 같은 후배한테 밥을 사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나강선이 분식집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는 뜻.
물론 올해의 활약을 감안하면 내년부터는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지금은 아직 빈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비싼 곳으로 가. 당분간 굶는다고 생각해. 저기 좋다, 저기로 가자.
“켁···. 선생님 저기는 진짜 힘들어요. 농담이 아니라 저 굶어서 죽을 수도 있어요.”
저녁 식사 메뉴 고르기라는 뜻밖의 난관에 부딪쳐 진땀을 흘리게 된 나강선이었다.
‘···? 나강선 선배님이 왜 저러시지?’
옆에서 조심스럽게 걷던 이찬혁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아아아앙-!
갑자기 웬 비싼 외제차 한 대가 달려왔다.
그 차량은 나강선과 이찬혁이 있는 쪽으로 오더니만,
끼이익-!
이내 그 앞에 멈췄다.
-이거··· 전에도 한 번 본 거 같은데?
박남천은 그 외제차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일종의 데자뷰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건 아주 정확했다.
덜컹-
“오랜만입니다, 나강선 선수. 잘 지내셨죠?”
외제차의 창문이 열리더니만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바로 스포츠 에이전시 JH 스포츠의 대표인 유준호였다.
“안녕하십니까, 나강선 선수님.”
거기에는 유준호의 비서인 예휘령 역시 같이 있었다.
그녀는 전에도 보여준 것처럼 운전대를 잡은 상태였다.
“아니, 유준호 대표님이 어떻게 여기에···?”
“잠깐 근처에 일이 있어서 나온 참입니다. 그러다가 나강선 선수가 보여서요.”
깜짝 놀라는 나강선의 모습에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대답하는 유준호였다.
그가 이내 말했다.
“그나저나 저녁은 드셨습니까?”
*
저녁 식사 메뉴라는 예기치 못 한 난관에 부딪치게 된 나강선이었으나, 그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었다.
때마침 천군만마와 같은 유준호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나강선과 이찬혁을 같이 데리고 움직였다.
물론 그 장소는 한 군데를 제외하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준호 대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가게에 오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당연히 음식점인 것이다.
유준호와 예휘령도 때마침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라 여러모로 안성맞춤인 셈이었다.
유준호가 향한 음식점은 최고급 레스토랑.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먹나 내심 궁금했는데···. 내가 여기를 죽어서 와보게 되는구나.
박남천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유준호가 엄청난 레스토랑에 온 것이다.
“네 명입니다. 자리 안내 부탁할게요.”
유준호는 금방 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곧 그를 포함한 이들은 자리에 앉았다.
“으, 으아아아···.”
이찬혁은 거기에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너무 엄청난 자리에 끼게 된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심지어 메뉴판을 한번 펼쳐 보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이 반겨주어 머리가 더 아팠다.
혼미 상태가 어떤 건지를 체험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여기에는 유준호가 더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주세요.”
메뉴판을 한번 슥 보더니만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 종류는 무려 열 가지를 넘었다.
“대,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나강선은 그 광경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여기에는 유준호가 금방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죠. 두 분은 운동을 하시잖아요. 게다가 아마··· 음식이 남는 일은 없을 겁니다.”
파격적인 면모와 더불어 의미심장한 대답.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데···?’
나강선은 유준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기로 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음식 나왔습니다.”
“이건 어디에 놓을까요?”
이어서 조금 더 기다리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못 해도 전부 10인분은 되어 보였다.
-부럽다, 애송이. 난 죽을 때까지 이런 거 먹어본 적이 없는데···.
“음식 앞에 향이라도 피워볼까요? 선생님 맛보실 수 있게.”
-너 그러다 쫓겨나, 인마. 크크, 마음만 받을게.
나강선은 늘 그렇듯 박남천과 킬킬거리다가도 이내 식사를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무척이나 고풍스러운 저녁을 먹게 된 셈이었는데, 거기에는 이내 유준호가 말문을 열었다.
“아 참, 요즘 경기 잘 보고 있습니다, 나강선 선수. 활약이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제 기대 이상입니다.”
이처럼 소감을 밝힌 것이다.
예전에 그 자신이 한 말마따나 재빨리 침을 바르는 데에 성공해서 그런 걸까?
그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감사합니다. 전부 대표님 덕분입니다.”
“겸손하시네요. 제가 딱히 해드린 건 없는데.”
“JH 스포츠의 도움이 컸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거든요.”
“역시 나강선 선수와 계약을 맺길 잘했던 것 같군요.”
금방 훈훈한 모습을 보이는 나강선과 유준호였다.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이득을 취한 셈이니 당연한 것이다.
“올 시즌이 다 끝나고 난 뒤의 연봉 협상···.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나강선 선수.”
유준호가 이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건 돈방석 확정이다.
박남천이 짧고 굵게 말했다.
유준호의 두 눈을 보고 직감한 것이다.
‘역시 나강선 선배님이야···.’
이찬혁은 둘의 대화에 속으로 그저 감탄만 했는데, 그는 그러다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맞아. 저는 개인적으로 이찬혁 선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유준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시 대표님은 남다르시군요. 설마 벌써 찬혁이를 눈여겨보고 계실 줄이야···.”
“그만큼 좋은 실링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보기 드문 유형의 좌완 사이드암에 구속도 145km를 기록할 정도로 빠르죠. 오늘 등판은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기대가 큽니다, 이찬혁 선수.”
“가, 감사합니다···.”
나강선과 유준호의 대화에 간신히 고마움을 나타내는 이찬혁이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나강선 선배님, 선배님처럼 잘 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이찬혁 자신이 나강선한테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는 2군 선수 모두의 롤모델로 자리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나강선이 말했다.
“찬혁이 너는 공 던질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던져?”
“생각···이요?”
“그래. 생각.”
“음···. 볼넷은 주지 말자, 팀을 위해 던지자···. 수비 믿고 던지자?”
갑작스러운 나강선의 질문에 겨우 대답하는 이찬혁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건 그걸 제외하면 없는 것이다.
헌데 여기에는 나강선이 꽤나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래? 흠···. 나하고는 꽤 다르네.”
자신은 세 가지 모두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선배님은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던지시나요?”
“나는 우선 나 자신부터 생각해. 나를 위해 던지자는 거지.”
“나를 위해서···?”
“그래. 나. 다르게 말하면 돈이고.”
“도, 돈이요?”
돈이라니, 더욱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강선이 말했다.
“그래. 돈. 조금 저속하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 결국은 우리 모두 돈 많이 벌려고 팔 비틀어 공 던지는 거잖아. 전에 소드 윙즈에서 방출 당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어. 난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 기술을 배워야 하나? 그게 과연 돈이 될까···? 그래서 이 악물고 야구를 했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술술 잘 풀리더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이거야. 우선은 나부터 생각하자. 그러면 다른 데에 한눈을 팔 여유도 없어지거든. 그리고 찬혁이 네가 잘해서 나중에 필승조로 올라가고 나면 더 안심해도 돼.”
“그건··· 왜요?”
“네 뒤에 나하고 김철민 선배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더 편하게 던질 수 있겠지. 이걸 더 간단하게 말하면 마음 편하게 던지라는 거야. 그러면 좋은 결과는 알아서 따라오기 마련이거든.”
그야말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특히 나강선은 무사 만루에서 데뷔전을 치러서 무실점으로 막은 터라 더 와닿았다.
‘역시 나강선 선배님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대단하시네.’
이찬혁은 그저 감탄하기 바빴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강선으로부터 엄청난 자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결과로 증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좋은 이야기로군요, 나강선 선수. 저도 느낀 바가 많아요.”
“하하, 대표님 앞이라서 그런지 뭔가 부끄럽네요. 너무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아니요. 그래서 더 좋았어요. 솔직해서 나쁠 건 없는 거니까요.”
유준호와 나강선이 말했다.
이어서 그들은 금방 식사에 다시 집중했다.
여담이지만 이들이 주문한 음식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예휘령이 묵묵히 전부 처리한 것이다.
오히려 셋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그녀가 너무 많이 먹어서 추가로 주문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
저녁 식사를 끝낸 나강선 일행은 돌아가기로 했다.
모처럼 유준호가 차를 가지고 있던 터라 집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유준호 대표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찬혁 선수.”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이찬혁이었다.
때마침 집이 근처였던 것이다.
그가 내렸으니 이제 나강선의 집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대표님, 혹시 찬혁이와 계약하실 생각이십니까?”
헌데 나강선은 그 과정에서 대뜸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오늘 만난 게 우연처럼 느껴지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찬혁이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기도 하고요.”
나강선은 유준호의 반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저녁을 먹으려고 나왔더니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고, 유준호는 이찬혁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스포츠 에이전시 대표답게 기본적인 정보는 다 알고 있겠지만··· 좌완 사이드암이라는 투구 유형과 최고 구속이 145km까지 나온다는 점, 그리고 오늘 등판 결과까지.
어쩌면 오늘 유준호의 볼일은 이찬혁 관찰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냥 한번 찔러봤다.
이건 정답이었다.
짝짝짝-
“정답입니다, 나강선 선수.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유준호가 금방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거기에 가벼운 박수는 덤이었다.
“찬혁이도 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나강선이 사려 깊은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문득 자신의 경우가 떠오른 것이다.
아직 1군 개막전 엔트리 진입조차 확정나지 않았을 때, 유준호는 나강선의 가능성을 보고서 과감하게 계약을 제안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것처럼 계속 승승장구.
앞으로 이찬혁도 이렇게 되는 걸까?
유준호가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으면 오늘 바로 계약을 제안했겠죠. 단지··· 가능성은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바람을 말하자면, 거기에 나강선 선수가 조금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제가요?”
“네. 아무래도 이찬혁 선수의 보직상 앞으로 꾸준히 성장해서 필승조로 진입하면 앞서 나강선 선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같이 붙어서 나올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유준호의 지금 이야기는 간단하게 풀면 다음과 같았다.
이찬혁은 아직 햇병아리니까 네가 옆에서 좀 끌어줘.
그런 만큼 나강선은 이내 대답했다.
“올해 연봉 기대하겠습니다, 대표님.”
깔끔한 대답.
나강선의 말을 듣는 순간 유준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만족감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