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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 체고의 씽카볼 투수가 되었다-42화 (42/88)

42화

3점차의 비교적 넉넉한 상황에서 시작해서 백투백 홈런과 3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까지 간 끝에 천운이 따라주어 간신히 첫 세이브를 성공시킨 이찬혁.

-이찬혁 마무리는 아니다.

-진심 에바임. 오른손만 나오면 다 맞을 것 같아.

-내가 오른손으로 쳐도 이찬혁 공은 칠 듯.

-그냥 이찬혁은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가 맞다.

-애초에 마무리 투수는 약점이 있으면 안 된다.

당연히 이 경기를 본 블레이드 헌터스 팬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못 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서 이찬혁의 마무리 투수에 회의적인 뜻을 보였다.

좋게 볼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좌타자한테 저승사자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다는 점?

그건 우타자한테 약해도 너무 약하다는 약점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마무리 투수는 1이닝을 온전히 소화해야 했으니 말이다.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하고는 다른 것이다.

단, 블레이드 헌터스의 팬들은 모두가 빠르게 바뀔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빨리 피드백 좀 해주면 좋겠다.

-몇 게임은 터져야 움직일듯.

-맞음. 윤성진 감독이 은근히 외골수라···.

-이상하리만치 고집이 셈.

자팀 감독이니만큼 윤성진에 대해 제법 꿰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불만을 표출해도 크게 변화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여기에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블레이드 헌터스, 마무리 투수 바꾼다···.>

<강철 라인을 구축하던 나강선이 블레이드 헌터스의 뒷문을 책임진다.>

이찬혁이 첫 세이브를 기록하고 나서 하루가 지나자마자 이와 같은 기사들이 우수수 쏟아진 것이다.

앞으로 이찬혁 대신 나강선이 블레이드 헌터스의 뒷문을 단속한다는 이야기.

윤성진의 피드백은 단 하루가 걸렸을 뿐이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윤성진: 강선이가 직접 감독실까지 찾아와서 나한테 요청하더라. 그 점에서 합격점을 줬다. 원래 선수가 감독한테 그런 말을 꺼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다들 알겠지만 마무리 투수는 배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점에서 보면 강선이는 합격하고도 남는다. 덕분에 크게 웃었다. 물론 기뻐서 웃었다는 뜻이다. 왠지 강선이라면 철민이처럼 잘해줄 것 같다.>

이처럼 윤성진은 인터뷰에서 나강선이 감독실에 와서 요청한 부분을 가감 없이 밝혔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일파만파로 퍼졌다.

-나강선이 직접 담판을 지었네.

-나강선: 답답해서 내가 던진다.

-나강선이면 인정이지.

-역시 마무리 투수는 나강선이다.

-물론 나강선한테 뒷문을 맡기면 이제 9회까지 가는 게 쉽지 않겠지. 하지만 9회까지 힘들게 가서 터지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더 낫다.

-윤성진 감독한테 직접 가서 말했다고? 진짜 심장 하나는 대단하네.

당연히 블레이드 헌터스의 팬들은 모두가 이번 결정을 반겼다.

그들의 나강선에 대한 호감도가 더 상승한 건 덤이었다.

윤성진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선수가 감독한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블레이드 헌터스 선수단 반응은 어떠냐고 하리라.

특히 이찬혁이 중요했다.

모처럼 중책을 맡자마자 나강선한테 빼앗긴 셈이니까.

허나···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살았어요.”

이러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듯, 이찬혁은 나강선한테 연신 고마움을 나타내기 바빴다.

본인이 바랐던 자리가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특히 모처럼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잘 적응하다가 갑자기 바뀐 거라 더 힘들었다.

실제로 이찬혁은 첫 세이브를 거둔 직후에 마무리 투수라는 직책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차마 이야기는 꺼내지 못 하고 잠까지 설치며 속으로만 끙끙 앓았는데, 그 고민이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나강선이 직접 담판을 지어준 덕분에 말이다.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어, 찬혁아. 전부 내가 원해서 요청한 거니까.”

“그래도 저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래? 난 좋던데. 왠지 주인공 느낌이거든. 스포트라이트도 선발 못지않게 받을 수 있잖아. 나가야 하는 타이밍도 알 수 있고 말이야.”

진땀을 흘리는 이찬혁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나강선이었다.

확실히 그의 모습은 즐기는 느낌이 다분했다.

헌데 이번 나강선의 요청에 놀란 건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심장 하나는 정말 대단하구나, 애송이. 설마 진짜로 가서 말할 줄이야···.

그는 박남천이었다.

사실 박남천은 어제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나강선이 직접 윤성진한테 찾아가서 마무리 투수로의 보직 변경을 요청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

박남천은 그걸 뜯어말렸다.

그 자신이 원했던 그림은 투수 코치나 조웅현을 통해 보다 점진적으로 바꾸는 거였다.

다짜고짜 윤성진한테 찾아가서 말하면 괜히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직접 가서 말하니까 오히려 윤성진이 엄청 좋아했다.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떠들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박남천은 이번에 여러모로 놀랐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그 또한 잘 아는 것이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하는 일이었잖아요. 시간을 끌면 찬혁이한테도 좋지 않았을 거고요. 그렇다면 그냥 가서 직접 말하는 게 낫죠. 그리고 우리 감독님은 은근히 깨어 있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제가 1군 스프링캠프에 바로 참가할 수 있었던 거죠.”

나강선이 대답했다.

아주 담담한 목소리.

그 모습은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애송이.

“구단에 숨어들어가서 우승주 몰래 마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하하, 내가 잠시 그걸 잊고 있었네.

박남천은 나강선의 대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새삼 그가 다시 마음에 든 것이다.

*

나강선의 마무리 투수 보직 변경하고는 별개로 오늘도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월요일과 우천 취소가 아니면 무조건 경기가 열리지 않던가?

오늘 경기 내용은 백중지세 그 자체였다.

따악!

[깔끔한 적시타! 블레이드 헌터스가 선취점을 올립니다!]

따악!

[곧바로 쫓아가는군요! 역전과 동점, 그리고 재역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경기네요. 어느 팀이 이길지 궁금할 정도로 말이죠.]

경기 내용이 엄청나게 치열했다.

한 팀이 점수를 내면 다른 한 팀이 곧바로 따라가는 점수와 역전을 해내며 엎치락뒤치락하기 바빴다.

오늘 경기에서 나온 역전과 재역전이 무려 다섯 차례일 정도.

말 그대로 투수들과 타자들 모두 죽어나가는 경기였는데, 이 흐름을 내심 반기는 이들이 있었다.

-준비 잘해, 애송이. 오늘 곧바로 나갈 것 같아.

“네, 선생님.”

그들은 바로 박남천과 나강선이었다.

이 흐름이면 세이브 찬스가 거의 온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어제 8회에 등판해서 1이닝을 던졌으니 2연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얼마든지 소화할 수 있었고, 투구수도 늘 그렇듯 공격적인 피칭을 통해 11구로 비교적 짧게 끊어서 괜찮았다.

오늘 리드를 잡은 9회에 나갈 수 있게 되거든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세이브와 함께 팀의 승리를 지켜내면 성공적인 마무리 투수 데뷔전을 치르는 셈.

따악!

-와아아아아아아~!

[또다시 역전! 다시 블레이드 헌터스가 리드를 잡는 데에 성공합니다!]

우선 다행히도 판은 깔렸다.

손현호가 주장의 품격으로 역전 적시타를 터트리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를 기술적인 타격으로 받아쳤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점수차가 고작 1점에 불과했기 때문.

그야말로 살얼음판 리드였다.

그리고 이건 빠르게 현실로 다가왔다.

따악!

[곧바로 안타를 쳐냅니다! 선두 타자가 살아서 나가는군요!]

[오늘 경기는 정말 짐작할 수가 없네요. 엄청난 타격전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다음 이닝인 8회에 접어들자마자 상대 팀의 선두 타자가 안타로 출루한 것이다.

이후에 또 이리저리 뛰다 보니 1사 1, 2루가 되었다.

안타 하나면 또 동점이 되는 상황.

그래도 블레이드 헌터스는 믿을 수 있는 투수가 한 명 더 있었다.

-투수 교체!

[여기에서 투수를 교체하는군요. 블레이드 헌터스에서 이찬혁이 등판합니다.]

[지금 오른손 대타가 없거든요. 아마 블레이드 헌터스는 이 부분까지도 계산을 한 거겠죠.]

상대 팀의 타자가 왼손이었던 것이다.

이러면 통칭 좌승사자라고 불리는 이찬혁을 올리는 게 당연한 선택인 셈.

중계진의 말마따나 상대 팀은 오늘 이미 대타를 여러 번 써서 기용할 수 있는 오른손 타자가 없었다.

바로 그 다음 타자가 오른손이어서 역시 한 명만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건 나쁘지 않았다.

1사 1, 2루와 2사 1, 2루는 차이가 컸으니까.

어쩌면 병살을 유도해서 그대로 이닝이 종료될 수도 있었다.

“강선아,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준비해라.”

“네, 코치님. 저는 이미 준비 다 됐습니다.”

나강선은 투수 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재 그는 불펜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기 내용이 워낙 치열했으니 미리 대기를 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8회에 바로 올라가야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잘해야 해. 좌타자만 확실하게 잡으면 되는 거야.’

이찬혁은 피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의를 다졌다.

그만큼 경기 내용이 치열했으니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헌데, 여기에는 매우 묘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뻐엉!

[들어갑니다! 그대로 스트라이크 아···!]

-볼넷!

[아니? 이, 이 공이 볼 판정을 받는군요! 이찬혁 선수가 볼넷을 허용합니다! 이제 1사 만루가 됩니다!]

[아무리 스트라이크존이 주심 고유 권한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공은 나중에 말이 조금 나올 수도 있겠네요.]

이찬혁이 신중한 피칭 끝에 풀카운트에서 회심의 변화구를 던져 바깥쪽 코스를 완벽하게 찔렀건만, 황당하게도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하지 않았다.

삼진이 볼넷으로 둔갑하는 순간.

2사 1, 2루가 1사 만루로 변하고 말았다.

“솔직히 이건 들어온 건데···.”

주전 포수인 김창훈은 이번 볼넷에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차마 주심한테 대놓고 따질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런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었고, 행여 퇴장이라도 당하면 골치가 아픈 것이다.

“왜, 왜 이게 삼진이 아니지···?”

그리고 지금 결과에 적잖이 당황하는 건 당사자인 이찬혁도 같았다.

그는 핼쑥한 표정을 지었다.

던지는 순간 삼진을 확신했는데 볼넷 판정이 나왔으니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1점차에 1사 만루.

안타 하나면 동점은 물론이요, 다시 역전을 허용할 수도 있는 상황.

여기에 이찬혁의 교체도 필요했다.

이제 오른손 타자가 타석에 등장하기 때문.

심지어 그는 중심 타자였다.

지금 상황에서 블레이드 헌터스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하나를 제외하면 없었다.

“···강선아, 가능하겠냐?”

나강선을 지금 올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투수 코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무리 투수한테 아웃 카운트를 무려 다섯 개나 맡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다.

심지어 나강선은 이번이 마무리 투수 데뷔전 아니던가?

가혹해도 너무 가혹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나강선의 대답은 의외로 금방 들려왔다.

“걱정 마세요, 코치님. 저는 자신 있습니다.”

씩씩한 목소리.

실제로 나강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신이 난 느낌이 다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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