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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꽃가마를 탄다 (52)화 (52/141)

Chapter 5 :: 폭풍전야

“아니, 아뇨! 그런 소문이 돈다고요. 아가씨.”

사생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상식적으로 공작 부인이 임신을 몰래 하는 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공작 부인은 죽기 전까지 사교계 활동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잠시 공백이 있던 시기는 모두 삼 형제와 베리를 임신했을 때뿐이다.

“……사생아라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그걸, 이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공작 부인이 무슨 몇백 년 전 사람도 아니고.

“……시기적으로 안 맞는다는 걸 사람들도 알고 있을 텐데. 어떤 핑계를 대며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는지도 들었니?”

“…….”

“그, 그게…….”

수잔과 한나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고,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오데트 아가씨께서 공작 부인과 너무 닮으셨다고, 머리 색이며 눈동자 색이며…… 분위기는 조금 달라도,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똑같을 수가 있냐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나와 공작 부인의 외모가 닮은 건 정말로 단순한 우연이었다.

우연치고는 많이 닮았지만, 그 정도로 닮지 않았다면 공작이 나를 데려왔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서 로드릭이…….”

“아니, 언니. 로드릭이 난리 치는 건 그 자식 문제죠. 언니가 잘못한 일이 아니잖아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리가 발끈하며 고개를 저었다. 베리의 말이 맞긴 했다. 맞는데.

“내가 잘못한 게 아니어도, 내 존재가 공작 부인의 명예에 흠을 끼쳤잖니. 로드릭이 아니라 공작 부인께, ……공작님께 죄송스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구나.”

루크가 분명 아침이 되기 전까지 소문에 대해 수소문해 오겠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곧 공작도 이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뜻인데, 이 말을 들은 공작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

“……내일, 마저 이야기하자꾸나.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뭘 더 생각하기가 힘들 것 같아.”

미하일이나 콜린도 분명 알게 될 것이다. 그 둘의 반응은 로드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지.

‘……할 말이 없어.’

그리고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그들에게 한마디 대꾸할 말도 없었다.

이렇게 생겨서 미안하다고? 내가 진짜 사생아가 아닌 걸 알지 않냐고?

어느 쪽이든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욕당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언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생각이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베리가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위로를 전했다.

“그런 개소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예요. 언니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저는, 공작 부인……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머니께서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언니를 탓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너무 오래 고민하시지 말고, 푹 주무세요.”

“…….”

나는 힘없이 웃으며, 단호한 얼굴로 내게 잘못이 없다 말하는 베리의 손을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그래, 너도…… 잘 자렴. 베리.”

베리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았다.

* * *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자마자 아니타 후작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과 혹시 누가 그 소문을 퍼뜨렸는지 찾을 수 있냐는 질문.

아무래도 사교계에서 도는 소문이니 우리보단 아니타 후작 부인이 더 빨리 찾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생아라뇨, 사생아라뇨!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지! 내 눈을 피해 그런 말을 퍼뜨리는 쥐새끼들을 꼭 잡아내고 말겠어요. 어떻게 마리아를……!”

……그렇다고, 오후에 답장 대신 본인이 찾아오리라는 걸 예상하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죽은 친우가 모욕을 받은 일이니만큼, 아니타 후작 부인이 나나 베리보다 훨씬 더 분노하고 있었다.

“부인, 부인께서도 그럼 아직 누가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시는 건가요?”

“부끄럽지만, 그래요. 다들 어찌나 내 앞에서 입단속을 잘했는지, 나도 오데트 양의 편지를 받고 난 뒤에야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알았답니다.”

아니타 후작 부인의 손에 들린 부채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평소 인자하고 너그럽고 우아한 귀부인의 정석이었던 그녀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엔, 아마 좀 나이가 어린 이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아니타 후작 부인이 부채로 가볍게 제 손바닥을 두드렸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그러니까 나와 공작 각하 또래의 이들은 그런 소문을 퍼뜨렸을 리가 없어요. 들켰다간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마리아가 죽었을 때, 공작께서 황제 폐하 앞에 무릎 꿇고 어떻게 원망을 토해냈는지, 그걸 아는 이라면 감히.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없지요.”

그 말에 나는 보이지 않게 입안을 한 번 깨물었다. 공작이 공작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히 부인은 과거의 쓰라린 기억에 아파하느라 그런 내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아직 뭣 모르는, 아. 미안해요. 오데트 양, 베아트리체 양.”

“아니에요.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부인.”

“……어린 이들의 입에서 소문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답니다. 정확히 누구의 입에서 시작됐는지는 이제부터 찾아봐야겠지만요.”

뜨겁다기보다는 차가운 분노가 자리 잡은 아니타 후작 부인의 눈동자를 보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리젤 공작과 아니타 후작 부인의 눈 밖에 난 범인은 더 이상 사교계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게 될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각하께서도…… 이 소문에 대해 알고 계신 거죠?”

공작은 오늘 아침을 먹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아마…… 오늘 아침이 되기 전에, 자초지종을 전해 들으신 것 같아요.”

“저런. ……한 번 얼굴을 뵈어야겠네요. 두 사람은, 공자들은 좀 괜찮나요?”

“…….”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 대신, 베리가 입을 열었다.

“별로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오라버니들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 듣지 못했지만, 괜찮을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베리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욕보이게 만든 이들이니 찾아내서,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죠. 이 일로 저희가 상처받은 만큼, 아니 그 배로 돌려줘야 다시는 이런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 없지 않겠어요?”

“어머, 어쩜 이렇게 마리아를 꼭 닮았을까…….”

아니타 후작 부인이 나이가 드니 눈물만 많아진다며 눈가를 훔쳤다. 나도 조금 놀라서 베리를 바라보았고, 베리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부인, 괜찮으시다면 아버지께 가주시겠어요? 아무래도 저희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오랜 친우이신 부인의 앞에선 아버지도 조금 짐을 내려놓고 슬픔을 표현하실 수 있겠죠.”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베리의 모습에 나는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베리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 -이게 적절한 표현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의젓한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지.

“예. 각하께는 제가 가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각하께서 오히려 베아트리체 양의 말을 전해 듣고 눈물을 보이시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눈가를 다 훔친 아니타 후작 부인이 어느새 평소의 여유를 되찾고 능청을 부렸다.

그렇게 부인이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요, 언니.”

“……응? 어디로?”

“첫째랑 둘째를 데리고 셋째 방으로 가야죠.”

첫째랑 둘째…… 아니, 지금은 호칭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로드릭은 공작님께서 직접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잖아.”

“그러니까 저희가 가야죠. 나오지 말라고 했지 들어가지 말라고는 안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놈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는데, 뭐라도 알고 있는 게 있을 거고, 없어도 두 사람이 물어보면 로드릭도 입을 열겠죠.”

논리적이고 거침없는 베리의 말에 나는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베리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쾅쾅.

베리는 미하일과 콜린 방의 문을 차례대로 주먹으로 두드렸고, 어리둥절하게, 혹은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나오는 두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도 않고 로드릭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뭐, 뭐야?”

“베아트리체. 무슨 일인지는 설명을 하고 사람을…….”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에 로드릭이 놀라든 말든, 미하일과 콜린이 당황하든 말든 베리는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거지 같은 소문이 돌고 있던데, 알고 있었냐?”

“뭐?”

“언니가 공작 부인의 사생아라고. 그래서 어제 쟤가 공작님 앞에서도 눈이 뒤집혀서 언니를 밀치고도 뻗댄 것 같던데.”

“……사생아라고?”

“그런 소문이 돌았다니…… 로드릭, 넌 나한테 말하지 않고 뭘 한 거야!”

집에만 갇혀 있던 콜린은 당연히 모르는 눈치였고, 미하일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직도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로드릭의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 다 꺼져! 지금 함부로 남의 방에 쳐들어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내 속 뒤집으러 왔냐?”

“누군 네 상판대기 보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아니타 후작 부인이 소문을 퍼뜨린 건 아마 우리 또래일 거라 그랬어. 부인과 공작님 나이대의 귀족들은 감히 그런 말을 퍼뜨리지도 못할 거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소문을 퍼뜨린 놈을 찾아야 될 거 아냐! 그래야 네가 입에 거품 물고 언니한테 지랄을 안 하……!”

그 순간 베개가 날아와 베리의 얼굴에 그대로 맞고 떨어졌다. 베리가 뭐라고 화를 내기도 전에 로드릭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제기랄! 너는 뭐 좋은 줄 알아?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어머니는!”

“뭐?”

“로드릭!”

옆에서 미하일이 로드릭의 이름을 외쳤지만, 로드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소 큰형의 말은 저게 약 먹었나 싶을 정도로 잘 들었던 놈인데.

“세상 모두가 너만 불쌍해하지, 십오 년 동안 공녀인 것도 모르고 평민으로 힘들게 자랐다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고!”

로드릭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랜 시간 속에서 곪아버린 감정의 폭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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