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오붓하게?’
나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 딴에는 내가 낯을 가리는 걸 아니까 배려한 것 같긴 한데, 굳이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보좌관은 말을 멈추고 잠시 나와 샤이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도 분위기만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무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보좌관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보좌관을 두고 성질이 급하다 탓할 수도 없었다. 샤이탄이 어서 안 가고 뭐 하는 거냐고 눈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최대한 빨리 찾아오겠다 외치는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왜 그놈들을 잡아준다는 걸 거절했어요? 병사들을 빌리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잖아요.”
“생각해보시죠. 지금 그들은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병사들이 들이닥치면 바로 아, 들켰구나. 하고 포기할 거 아닙니까?”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렇게 쉽게 잡아줄 수는 없죠. 건물엔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병사들이 잡으러 오지도 않고. 배도 바로 출항하지 못하는 상황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때 잡아넣을 겁니다.”
그리 말하며 샤이탄은 제법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는 놈들한텐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성격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복수를 철저하게 한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반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여자는 실제로 속이 타들어가다 못해 시커먼 재밖에 남지 않았는데.
“저렇게 달려나갔으니 못해도 내일쯤엔 찾아올 겁니다. 방에서 좀 쉬시다가- 한두 시간 뒤에 만날까요.”
‘음? 그냥 사람 붙여준다는 걸 거절하려고 말한 게 아니었나?’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럴 때가 아니면 공녀님께서 또 언제 노을 지는 바닷가를 보시겠습니까. 혹시 보기 싫으신 겁니까?”
그걸요? 하고 되묻는 샤이탄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내 당황을 뭐라고 받아들였는지 샤이탄이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
“뭐. 이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유유자적하게 바다나 구경하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것도 마법사로서 유지해야 할 소양 중 하나라는 걸 아십니까?”
물론 안다. 그에게 수업을 들을 때마다 골백번도 더 들은 이야기였으니까.
“저 보좌관도 지금은 편히 쉬라고 물러갔지만 내일이 되면 여기를 고쳐달라, 저기가 무너졌다, 잔뜩 일거리를 가지고 올 겁니다.”
그러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라는 샤이탄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방으로 쫓기듯 들어왔다. 아니. 쫓기듯 들어왔다고 할 수 있나?
샤이탄의 당부대로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큰 창이 난 방은 온통 하얀 게 창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하얀 시폰 커튼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고, 밝고 가벼운 색의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장식품이 곳곳에 놓여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방이 한층 넓어 보이도록 구석에 놓인 거울을 본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거울 속에는 누가 봐도 역력히 들뜬 표정의 내가 보였다.
두 시간 뒤에 샤이탄을 만나서 해 질 녘의 바닷가를 함께 걷는 시간이 기대되어 견딜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꼭…….’
데이트 같잖아. 그런 생각을 한 내게 더 놀랄 지경이었다. 당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언니를 찾고 있는 상황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
한 번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모든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마탑의 일을 하러 가는 거라고 단출하게 입은 드레스나, 뽀송뽀송하게 마르긴 했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
샤이탄은 언제나처럼 시꺼먼 로브를 우중충하게 뒤집어쓰고 나올 거라는 걸 알지만-
신경이 쓰이다 못해 거슬리기 시작해 거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아가씨.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밤색 머리카락의 하녀가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비를 잔뜩 맞으셨으니 따뜻한 물에 몸을 푸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바로 올리겠습니다. 물론 갈아입으실 옷도 준비해 놓았어요.”
따질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찝찝하던 차에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할 수 있다니. 게다가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해 놓았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 리가.
노곤하게 목욕을 마치고 받은 옷도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괜찮았다. 새하얀 외출용 드레스는 바닷가의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나풀거리는 재질이었다. 함께 맞춰 착용하는 장갑 역시 가벼운 소재였다.
하녀의 손길에 맡겨 머리까지 땋고 나니 완벽하게 휴양을 즐기러 내려온 철부지 귀족 영애 같은 차림이 되어버렸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거울 앞에 서서, 챙이 넓은 모자까지 건네받은 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성은 충동 앞에서 패배하고야 말았다.
모자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시간에 맞춰 아래로 내려간 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계단의 마지막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샤, 샤이탄?”
“아, 내려오셨습니까.”
샤이탄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멀쩡한 모습이라는 건 그 칙칙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 모습이라는 뜻이었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벗을 땐 있었지만, 로브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건 몇 달을 함께 지내면서도 본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그냥 셔츠에 바지를 입은 것도 아니고 꽤 격식을 갖춘 차림이었다.
“그러다 턱 빠지시겠습니다. 그렇게 어색합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씻고 로브를 다시 입으려고 하니 저를 무슨 세상에 다시 없을 불한당처럼 보지 않습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잘했다고 보석이라도 쥐여주고 싶었다. 세상에,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저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황태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미모였다.
“……사람이 달라 보여요. 진작 좀 이렇게 입고 다니지 그랬어요.”
“귀찮아서 어떻게 그러고 다닙니까. 그리고 이렇게 꾸미고 다니면 제 미모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겨서 좀 곤란합니다.”
대꾸하지 않자 샤이탄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아무 반응도 안 하시면 제가 민망해지잖습니까.”
진짜 곤란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 더 당황할까? 짓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에 담지는 않았다.
“공녀님도 짓궂은 구석이 느셨습니다. 아십니까?”
“제가 그걸 누구한테 배웠는지부터 생각해보시는 게 어때요?”
“사람 입을 막는 재주도 느셨군요. 갑시다.”
샤이탄은 자연스럽게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밀었다. 팔짱을 끼자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길거리 음식 말고,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좋은 레스토랑을 몇 곳 추천받았는데 괜찮으시다면 모시겠습니다. 갑각류 알레르기는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없어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까지. 완벽한 데이트 코스 아닌가? 적어도 베리가 읽으라고 빌려줬던 연애 소설에서는 그러던데.
“그럼 잘됐군요. 식사까지 마치고 들어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보좌관 얼굴은 내일 지겹게 보게 될 테니 오늘 식사할 때마저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정작 이 남자는 지독히 사무적인 이유로 레스토랑에 가자고 제안할 뿐인데도.
심장이 너무 크게 두근거렸다. 샤이탄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밖으로 나오자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한 바다가 우리를 맞았다. 연한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아직 바다는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카르나스 항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항구로 발달한 곳이라 백사장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유일한 흠이죠.”
“지금 이 풍경에 흠잡을 곳이 있나요?”
“그냥 아쉽다는 겁니다. 세상의 어떤 조각상이나 그림이 이 풍경을 담아내겠습니까? 다만 백사장의 하얀 모래를 밟으며 파도를 직접 느끼는 건 또 감상이 다르니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파도를 직접…….”
샤이탄은 내 보폭에 맞춰 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내가 바다에 홀린 듯 시선을 뺏겨 아무리 천천히 걷는다고 해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저 바다가 발을 간질인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나지 않습니까? 공녀님께서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시는 광경이 눈에 훤합니다.”
“그런 상상은 왜 하는 거예요.”
“제 마음입니다. 상상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하시는 겁니까?”
정말이지. 한 마디도 져주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얄미운 마음에 괜히 흘겨보자 샤이탄이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웬 과자예요?”
작게 접은 유산지 안에는 처음 보는 과자가 몇 개 들어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뺀 샤이탄이 잠깐 거기 있어 보라며 나를 제자리에 멈추게 한 뒤, 몇 발짝 앞으로 가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
뭘 하는 거지.
멀쩡하게 차려입고 난데없이 과자를 번쩍 들고 있는 모습이 재밌는 건가? 샤이탄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앗!”
“하하. 보셨습니까? 여기 사는 갈매기들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먹이를 너무 많이 줘서, 직접 사냥도 안 한다고 합니다.”
게으른 놈들이라고 덧붙이면서도 샤이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해맑게 웃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 노을이 진다.’
분홍빛이었던 하늘에 점점 붉은빛이 퍼지고, 그 아래 펼쳐진 바다도 함께 붉게 물들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 서 있는 샤이탄의 얼굴에도 노을이 드리웠다.
폭풍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지만, 바닷가는 원래 바람이 내륙보다 강하게 부는 곳이었다. 샤이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과 함께 내가 쓰고 있던 모자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이고. 이거 놓칠 뻔했군요. 바람이 강하게 부니 모자는 손으로 누르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샤이탄이 그 모자를 낚아채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그 모자를 내 머리에 도로 씌워주며, 내 한쪽 팔을 들어 그 위에 얹어주기까지 했다.
나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샤이탄이 의아하게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정말 좋아하나 봐.’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