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꽃가마를 탄다 (92)화 (92/141)

서두를 떼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달라졌다. 의아한 마음에 눈을 덮고 있던 물수건을 치우려고 하자 베리가 나를 말렸다.

“아하하. 이건 그냥 놔두시고, 하던 말씀 계속하세요. 언니! 눈이 이렇게 됐는데 가라앉혀야죠. 엄청 부었어요. 진짜, 아주 퉁퉁!”

‘그 정도로 울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뭐, 베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아무튼- 그 마법사의 아는 여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베리, 무슨 일이니?”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팔꿈치로 잘못 부딪혀서. 헤헤. 그나저나 마법사들도 그런 연애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신기하네요~”

“조금 괴팍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평범한 사람들인걸.”

베리가 본 마법사라고는 나와 샤이탄이 전부니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실 베리만 가지고 있는 편견도 아닐 테고. 보통 사람들에게 마법사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동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래서요? 언니가 아는 마법사의 아는 여동생의 좋아하는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대요?”

손가락뼈가 뚜둑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 사람이 아주 큰 거짓말을 한 모양이야. 나쁜 의도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해도 일단은 자신을 속인 거니까 여동생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람?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서.

하지만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내 이야기라고 하면 분명 다들 득달같이 달려들 테고.

“그런데 그 여동생도 골치가 아픈 게, 분명 자기를 속였단 사실에 상처를 받았는데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대.”

내 머리를 터질 것처럼 만들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거였다. 꼴도 보기 싫은 마음과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가며 심장을 이랬다, 저랬다 하게 만들고 있었다.

“…….”

“…….”

그런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베리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서운 시선의 압박이 느껴졌다.

이 방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나와 베리, 한나와 수잔이 전부인데.

팔을 들어 슬쩍 눈을 덮고 있던 물수건을 치우니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역시 너무 뜬금없었나? 아는 마법사의 여동생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도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는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베리와 눈이 마주쳤다. 더 속아주는 척 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눈빛에 나는 마음속으로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베리는 침대에 앉으며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그래서 우신 거였어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황태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바로 베리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그것도 이렇게 바로 들켜버릴 것을.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말씀해주신다고 하셨으면서.”

“…….”

베리는 섭섭하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지만, 나를 정말로 탓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며 조금 짓궂은 목소리로 한나와 수잔을 대화에 끌어들였다.

“흠. 사실 저희끼리 이야기를 하고는 했어요. 그렇지?”

‘……뭐?’

한나와 수잔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정하지 않았다.

“오데트 아가씨께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신다면 그 상대는 마법사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아무래도 그렇죠~ 황태자 전하 이야기를 할 땐 끄떡도 없던 아가씨께서 마법사님 이야기엔 당황하시고 그러셨으니까~”

그리고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 머리맡으로 향했다.

“게다가 언니, 제도로 올라온 뒤에도 내내 저걸 침대에 걸어두시고 계시잖아요.”

내 머리 위에서는 깃털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전에 샤이탄이 공작령을 구경시켜줬을 때 사줬던 장식품.

막 제도로 올라와 저걸 침대에 걸어둘 때만 해도 내가 샤이탄을 좋아한다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맨날 그 기분 나쁜 후드를 눌러쓰고 있긴 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선을 보면 미남일 게 분명하고. 언니는 얼굴도 보셨을 거 아니에요. 마법사님. 엄청 잘생겼죠?”

“어, 어? 그, 그렇긴 한데…….”

샤이탄의 얼굴도 황태자의 얼굴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아니 감탄을 자아낼 수준이었으니까.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가 분한 듯이 주먹을 쥐었다.

“제도로 올라오는 길에 아가씨께서 마법사님이 연락 한 통 없다고 섭섭해하실 때부터 낌새는 느꼈지만, 결국 이렇게 됐군요-”

한나는 꼭 샤이탄이 미모를 이용해 순진한 나를 홀렸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려던 건 아닌데.’

이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어 몸을 일으키는데, 나보다 베리가 용수철처럼 앉아있던 침대에서 뛰어오르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그 마법사 놈, 님이 언니한테 대체 무슨 거짓말을 한 건데요?! 뭔 말을 했길래 울기까지 하신 거예요?”

‘……그 마법사 놈이. 황태자야.’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황제도 모르는 비밀을 멋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던 베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뭐, 무슨 마탑의 기밀 그런 거예요?”

“정말 미안해, 베리. 나도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숨기는 것 없이 털어놓고 싶은데.”

“언니가 말씀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테니까요. 괜찮아요. 하지만-”

작게 침을 삼켰다. 베리가 내게 이렇게 단서를 붙이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 마법사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는 말씀해주세요. 언니 눈에 눈물 나게 한 놈을 제가 가만 놔둬야 하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야겠어요.”

“…….”

전대미문의 황태자 폭력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는걸.

그나저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니,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말을 못 하겠다고 하면 베리가 정말 섭섭해할 텐데.

바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감정의 덩어리로만 존재하던 것을 풀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던 중 툭, 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내 세상을 넓게 만들어준 사람이야.”

베리가 갑갑하고 어두웠던 내 세상에 나타나 숨통을 트여주고 빛을 내려준 사람이라면, 샤이탄-라파엘은 나를 좁은 세상 밖으로 데려가 준 사람이었다.

마탑에서 나온 것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

일어나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쥬드를 좋아하는 나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공작저 밖에 나가본 적도 없는 나를 바깥에 데려가주고, 길거리 음식을 맛보게 해준 것도 그 사람이 처음이었고.”

머리맡의 장식품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베리. 너와 공작님께 선물했던 장신구에 마법을 담는 걸 도와준 것도 그 사람이었지.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물을 준비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깃털을 쓰다듬는 손등에는 이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막대한 마나를 불어 넣어가며 나를 살려준 사람이기도 해.”

샤이탄이 생일 선물이라고 남겨준 소환 마법진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여기 있지 못했을 테니까.

그가 소환 마법진을 타고 나타나는 걸 직접 본 바 있는 베리는 입술을 안으로 꾹 만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은 치사해요. 언니. 언니를 살려준 사람이라고 그렇게 도장을 찍어버리시면, 언니를 울렸다고 제가 마음 편하게 탓할 수가 없잖아요.”

옆에서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나도 복잡한 표정이었고, 수잔은…….

낭만적이라며 좋아하고 있었다.

베리가 침대를 적시고 있던 물수건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쥐어짜기 시작했다. 아래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언니가 왜 마법사님을 좋아하게 됐는지는 이제 충분히 알겠어요. 왜 울 정도로 상처를 받으셨는데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지도 알겠고요.”

“내가 왜,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니?”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난 그냥 내가 미쳤나, 하고 있었으니까.

베리는 뭘 그런 걸 묻냐는 얼굴로 나를 보며 대꾸했다.

“쉽게 포기가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첫사랑이잖아요.”

“…….”

첫사랑? 첫사랑이라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로 묶이는 걸 들으니 온 세상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불을 쥔 내 손끝까지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때 한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마법사님. 결혼하셨나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결혼하기 싫어서 내게 수작을 거는 척하겠다고 했던 인간인데.

“그럼 연인이 있으신가요?”

연이어 이어지는 질문에도 고개를 저으니 한나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보다 가깝게 지내는 이성은 있나요?”

“없……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물어보는 거니, 한나?”

“아가씨의 첫사랑을 이뤄드리기 위해서요.”

응?

자기 일처럼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던 수잔이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잔이 이런 주제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저 마법사님도 아가씨께 호감은 있지 않을까요? 누가 호감도 없는데 그런 일을 해줘요!”

“이성적인 호감이 아니라, 여동생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였어요?”

베리가 으르렁거렸다. 이런.

“여동생? 웃겨, 정말. 연애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양반이 뭘 알겠어요.”

“베리. 연애는 너도 안 해보지 않았니.”

“제가 그동안 읽은 연애 소설이 몇 권인데요! 그렇지, 수잔?”

수잔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베리의 말에 호응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애 소설이라니.

“저를 믿어보세요, 언니. 제가 이래 봬도 오빠라고 불러야 되는 놈들이 넷이나 있는 몸이잖아요. 솔직히 정말, 정말, 정말! 언니가 아깝다고 생각하지만! 언니가 그렇게 좋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베리는 들고 있던 물수건을 다시 대야에 던져버리고,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처럼 말했다.

“……베리,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빌어먹을 거짓말 때문에 마법사님하고 잘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 눈에서 눈물이라도 뽑아내겠어요. 언니가 흘린 눈물의 열 배는 흘리게 만들어야 성이 차죠. 그렇지?”

한나도, 수잔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건 나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