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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꽃가마를 탄다 (95)화 (95/141)

햇빛이 따가웠다. 양산을 쓰고 있어도 뜨거움이 느껴질 정도로 완연한 여름이었다.

그러나 시계탑 사건으로 한동안 모든 행사를 금지당했던 사교계의 인사들을 이런 더위 정도로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판을 더 크게 벌여, 몇 가문이 함께 뱃놀이 연회를 열어버렸다.

제도를 관통하는 기다란 강가에서 열리는 사치스러운 연회. 악사들이 강변에 서서 연주를 하고 야외에 간이로 설치된 주방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배와 강 주변의 나무들에 등불을 걸어 더 환상적인 풍경을 보게 될 것이라 했던가.

모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즐길 수 있는 연회였지만, 나는 마음 편하게 그 풍경을 즐길 수가 없었다.

조각배를 타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양산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

건강이 좋지 않다며 황후조차 참석하지 않은 연회였다. 그런 연회에 황태자가 떡하니 등장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휴. 언니 얼굴 뚫어지겠네. 왜 저렇게 보는 거람?”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가씨께 마음이 있는 거죠.”

“하지만 아가씨는 마법사님을 좋아하잖아요. 괜히 황태자 전하와 엮여서 오해를 사게 할 수는 없어요!”

차례대로 베리, 한나, 수잔이었다. 세 사람은 황태자를 잔뜩 경계하더니 내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그의 시선을 차단해버렸다.

같은 사람인 걸 모르기에 가능한 터무니없는 오해였지만,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으니까.

‘일주일만인가?’

그래. 고작 일주일이었다. 그 일주일 만에 황태자는 눈에 띌 정도로 살이 내려 선이 날카로워진 얼굴을 하고 등장했다.

황태자의 등장을 반기는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어 쉽게 다가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 대화가 끊길 때마다 느껴지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내가 지원군을 데려올게. 언니, 잠시만요!”

“……? 베리, 어딜 간다는-”

옆에서 함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베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한나와 수잔이 나를 달랬다. 수잔도 안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자는 거니.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지원군을 데려오겠다고 나선 베리는 정말로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오랜만이에요. 오데트 양.”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타 후작 부인과…… 칼리드. 칼리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간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베리.

“자, 자. 언니랑 칼리드 님은 배를 타고 한 바퀴 돌고 오세요!”

‘이럴 줄 알았어.’

황태자는 자기가 어찌할 수 없지만, 칼리드는 소문이 돌아도 자기 선에서 수습해줄 좋은 사람이니 적임자라고 생각했겠지.

“…….”

그러니까, 샤이탄과 황태자가 동일인물만 아니면 정말 좋은 선택인데 말이다.

칼리드는 에스코트를 위해 내게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이상한 놈이 자꾸 구애를 해오신다 들었습니다. 누군지 정체도 숨기고 있어 어떻게 할 수도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둘에겐 그렇게 설명한 건가. 하긴 황태자가 부담스럽게 쳐다보니 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절하기도 하지.’

칼리드는 곤경에 빠진 나를 구해주겠다는 각오로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배 한 번 같이 타는 것 정도야 사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자리기도 하고.

그럼 신세 좀 져볼까. 사실 황태자가 언제 사람들을 헤치고 내게 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곤란했거든요.”

그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답하니 칼리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적의 마법사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놀리지 마세요.”

웃음꽃을 피운 채로 칼리드와 함께 배에 올랐다. 뱃사공이 천천히 노를 저으며 배를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그간은 편지로만 안부를 전했었죠. 물론 오데트 양과 편지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만, 역시 직접 얼굴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얼굴을 뵙게 되니 즐겁네요. 검술 대회 때도 인사만 겨우 나눴었으니까요. 정신이 없어서-”

“아. 검술 대회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베아트리체 양이 그렇게 훌륭한 검사이실 줄이야.”

칼리드는 정말이지 좋은 대화 상대였다. 행동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에 대화를 나누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었다.

덕분에 처음 해보는 뱃놀이를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 위를 떠다니는 감각은 생소했지만, 그럭저럭 익숙해지는 듯했다. 투명한 강물 위로 얼굴을 비치는 걸 보니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여기, 수심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깊지는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영은 할 줄 아십니까?”

나는 욕조보다 더 깊은 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없었다. 물론 헤엄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고.

가벼운 모슬린 드레스를 입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드레스는 드레스였다. 혹시나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익사체가 어떻게 되는지 묘사된 책을 떠올리며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자, 칼리드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배가 뒤집힐 일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가 오데트 양이 물에 빠지는 걸 가만 보고만 있지도 않을 테니까요.”

칼리드의 말에 결국 나는 터지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려야만 했다.

“…….”

그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하나, 둘, 셋.

삼 초가 흘러도 그의 시선은 계속 내게 꽂혀 있었으니 우연은 아닐 터였다.

‘무슨 뜻이야, 저 표정은.’

곧바로 표정을 수습했지만 여전히 그의 턱엔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 턱선을 훑는 내 눈동자를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칼리드를 바라봤다.

“그럼 말을 탈 줄도 모르십니까? 여름이 지나 날씨가 선선해지면, 숙녀분들께서도 곧잘 말을 타고 함께 달리시기도 하는데.”

물론 말도 타본 적 없다. 그 커다란 몸도 그렇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무서워서 마차를 탈 때도 말이 있는 곳은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도 베리라면 금방 배우겠지. 어쩌면 이미 배웠을지도 모르고. 함께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승마를 배우려면 오래 걸릴까요?”

“순하고 혈통이 좋은 명마를 구해서 매일 길을 들이고 연습을 한다면 한 일 년 정도.”

“그 말씀은 제 운동 신경을 고려해서 해주신 말씀인가요?”

내 말에 뭐가 그리 웃긴지 칼리드가 목을 젖혀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곧 사과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운동 신경이라…… 말을 무서워하신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리실 겁니다. 말은 예민한 동물이라, 사람의 감정을 잘 읽거든요. 몸이 둔하다면 처음엔 말에 올라타서 자세를 잡는 것도 힘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마에 대한 욕심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몸이 그리 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불안한 말이 날뛰는 걸 힘으로 휘어잡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에서 잘못 떨어지면 바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즐겁게 웃으며 손으로 물살을 가르던 칼리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

그는 뱃사공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오데트 양. 혹시 그 곤란한 상대라는 게…… 황태자 전하십니까?”

칼리드도 뒤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시선의 압박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전하께서 무슨 일이라도?”

“오데트 양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저를 딱 찢어버리고 싶다는 눈으로 보고 계셔서 말입니다.”

“…….”

대체 어떻게 쳐다보고 있길래 칼리드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황태자에게 미친 스토커라는 오명이 씌워지는 것을 막아야 할까, 맞다고 인정하고 도움을 구해야 할까.

‘좋은 사람이니 괜히 휘말리게 하기는 싫은데.’

그러나 그는 이미 확신한 얼굴이었다. 이건 뭐 편을 들어주려고 해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분은 전하가 아니었는데, 방금 전하도 그 곤란한 상대가 되어버리셨네요.”

“무도회에서도 그렇고, 검술 대회에서도 오데트 양에게 손수건을 청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진지하게 오데트 양을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진지한 마음은 아니실 거예요.”

칼리드는 황태자가 나를 진지하게 좋아하면 어쩌나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 말을 잘랐다.

내게 직접 적당한 결혼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연막 같은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못 할 말이지.

내가 지나치게 단호하니 칼리드도 확신이 흐려진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쥐고 있던 양산을 한 바퀴 빙그르르 손안에서 돌린 뒤 답했다.

“그럼요. 제가 황태자 전하께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오데트 양은 충분히 매력적인-”

나를 신경 써주는 친절한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그 문제도 있지만,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께서 저를 황태자 전하의 상대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으실 거란 뜻이었어요.”

기적의 마법사니 뭐니 해도,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황제와 황후의 눈에 나는 여전히 출신도 모르는 고아일 터였다.

감히 황실의 가계도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걸 두고 보지는 않겠지.

‘왜 하필, 황태자여서는.’

조금은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참았다. 감정을 숨기는 법을 가르쳐준 아르뉴 부인께 감사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칼리드는 황태자의 이야기를 더 꺼내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로 대화 주제를 돌리는 배려심에 마음껏 뱃놀이를 즐기다 내릴 수 있었다.

“…….”

그의 손을 잡고 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좀 더 가까워진 황태자의 기척에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대로 말을 걸면 어떡하지, 마법으로 도망가버릴까.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치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커다란 남자가 하나 뛰어 들어왔다.

“?!”

“실례합니다. 공녀님. ……저랑도 함께 뱃놀이를 즐기지 않으시겠습니까?”

프레튼 공작이 목석같지만 정중한 태도로 내게 청했다. 뒤에서 베리가 나를 보며 엄지를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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