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철벽 수비도 이런 철벽 수비가 없었다. 든든한 베리의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나는 프레튼 공작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
“…….”
……그 뒤의 일을 십 초 정도만이라도 미리 생각해봤어야 했는데.
배 위엔 적막만이 흘렀다. 창백한 프레튼 공작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입을 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런 주제에 시선은 내 얼굴에 고정하고 있었다. 대화를 할 때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이 기본 예의기는 하지만, 그건 대화를 할 때의 이야기지 않나.
‘말도 안 하고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는 건 시비를 거는 거지.’
그러나 프레튼 공작의 성정을-몇 번 대화한 적도 없지만- 얼추 알기에 불쾌하지는 않았다.
필시 이 남자는 지금 아무 생각도 없을 터였다. 베리에게 말을 걸었다가 나랑 배를 타고 한 바퀴 돌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 말을 충실하게 따르는 중일 뿐이다.
프레튼 공작에게는 빙빙 돌려서 질문하는 의미가 없겠지.
나는 방음막을 쳐서 사공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한 뒤, 그에게 곧바로 물었다.
“……베아트리체를, 좋아하세요?”
프레튼 공작은 베리를 몇 번 만난 적도 없었다. 베리는 나와 함께 가는 연회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으니까. 말을 섞어본 적도 다섯 번이 채 안 될 텐데.
그런데도 이런 황당한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프레튼 공작은 베리를 얼마나 좋아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무감하기만 했던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끌림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였다. 프레튼 공작은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질문은 실례지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건가요? 아직 몇 번 만나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다른 상대였다면 말을 좀 더 골랐겠지만, 베리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니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물론 프레튼 공작은 내 말투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감정에 훨씬 둔감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타고난 성격도 그렇고,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니까요.”
……알긴 아는구나.
“프레튼 공작령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훨씬 더 많은 곳입니다. 제가 평생 보아온 세상은 그런 빛이었습니다. 공녀님을 보기 전까지는.”
흔들림 없이 제 감정을 고백하는 프레튼 공작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사람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공녀님의 눈동자를 보며 저는 푸른 바다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한순간에 세상의 색을 바꿔버린 사람을 어떻게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프레튼 공작의 표정이 잠시 미묘해졌다. 곧 그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무래도 내가 오해할 여지가 있다고 여긴 듯했다.
“공녀님의 외모에만 끌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목소리, 말투, 행동. 검술에 진지한 모습까지- 제게 그보다 더 이상적인 상대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그저 제 감정에 솔직하게,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말을 마친 그의 입이 다시 단단히 닫혔다. 프레튼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나는 다리 위에 올려진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긴장하고 있어.’
‘저’ 프레튼 공작이. 목석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감정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베리에게 ‘치근덕거린다’며 그의 감정을 가벼운 것이라 속단했던 것이 미안해지는 모습이었다.
그의 감정이 진지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를 마냥 응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미안해졌다.
‘베리가 후계자의 자리를 얻게 된다면 프레튼 공작과는 이어질 수 없겠지.’
그렇게 되면 베리의 결혼 상대는 무조건 데릴사위로 들어와야 하는데, 프레튼 공작이 그리젤의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위를 버린다면 모를까.’
하지만 프레튼 공작은 갑작스럽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은 뒤에도 큰 차질 없이 모든 업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분명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겠지. 프레튼 공작은 꽤 훌륭한 영주였다. 갑자기 작위를 내던지며 자신을 따르는 가신들과 영주민들을 배신하는 짓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
하지만 베리는 그리젤 공작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프레튼 공작 부인이 될 수는 없는 아이였다.
검을 갈고닦아 더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꿈꾸는 베리에게 공작 부인의 자리는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젤 공작 부인도,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위하는 남편이 있었지만 결국 검을 포기해야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프레튼 공작에게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을 거란 충고를 할 수도 없었다.
함께 짝사랑을 하고 있는 처지에 그런 주제넘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잖아.’
심지어 나는 그보다 더 상황이 좋지 못한데도.
“……베리는 으스대는 남자를 싫어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그 말이 무슨 허락이라도 된다는 양, 프레튼 공작의 입술이 아주 작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오데트라고 불러주세요. 저랑 베리를 똑같이 부르시니, 헷갈리잖아요.”
“확실히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데트 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오데트 양.”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베리가 자신의 이름을 허락할 땐 이보단 더 부드럽게 부르겠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내릴 때가 돌아왔다. 방음 마법을 해제하는 사이 먼저 배에서 내린 프레튼 공작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잡으십시오. 오데트 양.”
“감사해요.”
그의 손을 붙잡고 배에서 내리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데트, 양?”
“…….”
황태자가 들으면 안 되는 것을 들었다는 얼굴을 하고 나루터에 서 있었다.
그 뒤에서는 베리가 내게 두 손을 모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베리라도, 황태자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
물론 그런 신분 차가 없었더라도 황태자는 순순히 져줄 인간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에 공녀와 친분을 꽤 쌓았나 보군. 공작.”
“예. 그렇습니다.”
비꼬는 말에 곧이곧대로 답하는 프레튼 공작의 모습에 기함할 뻔했다. 예, 그렇습니다가 뭐람.
황태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내게 말을 걸었다.
“이야기가 끝났다면, 내게도 시간을 내주겠나, 공녀. ……이렇게 청하지 않으면 평생 내 차례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언제는 내 마음 정리가 끝난 뒤에 편하게 연락을 하라더니.
“……기꺼이요.”
그러나 그 얼굴에서 아주 조금, 초조함이 엿보이는 바람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공녀는 내가 에스코트하지, 공작.”
황태자가 팔을 내밀자 프레튼 공작은 냉큼 제 팔을 거두었다. 눈치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베리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뒤에서 속이 터진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프레튼 공작이 베리의 호감을 사는 날은 아직 요원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닥친 일이 더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나를 에스코트하며 배로 향하는 황태자의 팔을 붙잡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버텼다.
황태자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는 순간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배를 몇 번을 타라는 거야. 이제 슬슬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또.
그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함께 강변을 걷는 것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배처럼 갇힌 느낌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거부 의사를 표하자 황태자는 더 요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강변에 난 길로 나를 인도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나가 한 차례 우리 둘의 주변을 감싸는 것도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황태자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러면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더라도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거야. 입은 움직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이상할 테니까.”
“…….”
왠지 그 말이 방음막까지 쳐놓고 프레튼 공작과 무슨 대화를 했냐고 꼬집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다른 말로 대꾸하는 걸 택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는 줄 알았는데요.”
이번에는 황태자의 입이 닫혔다. 조금 뒤에야 다시 열린 입에서는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언제 용서해줄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제가 아직 그럴 마음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그 생각을 어떻게 해야 더 빨리하게 될지 알려줄 수는 없는 건가?”
“더 늦춰지기만 할 것 같은데요.”
“안젤리나가 자꾸 구박한단 말이야. 용서를 받기 전에는 제게 말도 걸지 말라고.”
“그러면 안젤리나 님 때문에 제게 말을 거신 거네요. 정말로 제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황태자가 걸음을 멈추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붙잡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안젤리나의 핑계라도 대야 대화를 해줄 것 같아서- 아니, 안젤리나를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건가? 언제부터?”
“조금 됐어요.”
내 짧은 대답에 황태자가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은 황태자가 아니라 샤이탄이나 지을 법한 것이라 나는 입을 앙다물며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황태자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좁은 보폭으로 걷는 이유는 분명 나를 배려하는 것이리라.
“온 세상 사람에게 이름을 허락하는군. 나만 빼고.”
“…….”
“아니타 공자에게도, 프레튼 공작에게도. 공자는 그렇다 쳐, 공작은 왜 갑자기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건데? 공작은 누가 봐도 작은 공녀를 좋아하고 있잖아.”
그리 말하는 황태자의 턱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싫다는 뜻인가? 왜?
황태자가 이상했다. ……꼭, 질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