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반해도 이렇게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에게 반할 수가 있나.
황당한 마음에 황태자의 머리라도 두드려보고 싶었지만, 물론 그럴 순 없었다.
둘만 있었다면 미친 척하고 한 번 해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몰려있었으니까.
연회를 주최한 귀족들조차도 황태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여기 온 것도 놀랄 일인데, 이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유가 뭔지 다들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것 같았다.
심지어 그의 옆에 서 있는 건 나였다. 자신의 사교계 데뷔 때도 춤을 추지 않았던 황태자가 유일하게 함께 춤을 췄던 상대. 기적의 마법사.
“전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이거 참, 부담스럽군.”
황태자가 뻔뻔한 얼굴로 이 말을 하고 난 뒤에야 연회는 다시 평범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평범하다는 말에는 조금 오류가 있을지도…….
모두 겉으로만 연회를 즐기는 척을 하고 있을 뿐, 여전히 온 신경을 우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
그중에서도 유독 따가운 시선이 있어 누구인지 찾아보니 서펜트 백작 영애였다.
서펜트 백작 영애는 충격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하는 얼굴로, 내 손이 얹어진 황태자의 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음. 빚을 이런 식으로 갚을 생각은 없었는데.’
귀를 감싸는 아름다운 선율이 서펜트 백작 영애의 귀에는 장송곡처럼 들릴 게 분명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미안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오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잔잔했던 곡의 연주가 끝나고, 곧 흥겨운 춤곡이 시작되었다.
프레튼 공작과 함께 무대로 올라가던 베리가 즐거운 얼굴로 외쳤다.
“언니! 같이 춤춰요. ……전하도 괜찮으시다면요!”
괜찮으려나? 이 곡은 파트너끼리만 추는 게 아닌데.
망설이는 내 손을 황태자가 먼저 이끌었다.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
황태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를 빼곤 아무와도 춤을 추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
이 순서대로라면 파트너를 바꾸는 부분에서 황태자는 베리와 춤을 추게 되는구나. 베리는 괜찮다는 건가?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러갔지만 내 몸은 충실하게 익힌 대로 춤의 시작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재밌지 그럼. 데뷔탕트 때랑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나. 나를 미친놈 보듯 보던 그대가 먼저 춤을 추자고 청하는 날이 오다니.”
“그게, 음. 티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티가 났나요?”
“그대는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좀 티가 났지. 특히 눈빛이 말이야.”
황태자는 샤이탄으로 있을 때도 자주 받아본 눈빛이라 익숙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럴만했죠. 그때는.”
“이젠 아주 막 대하는군. 내 비밀을 다 알았다 이거지.”
이걸 웃으면서 대꾸해줘야 해, 말아야 해. 순간 고민하던 나는 황태자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고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평소엔 프레튼 공작 못잖게 무뚝뚝한 얼굴의 황태자가 샤이탄의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을 참을 겨를이 없었다.
어찌나 즐겁게 웃었던지, 잠시 파트너와 떨어져 여성끼리, 남성끼리 정해진 스텝을 출 때 베리가 내게 작게 물어볼 정도였다.
“언니. 전하께서 간지럼이라도 태운 거예요?”
간지럼을 탄 거냐고 물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나. 베리의 말에 순간 소리를 내어 웃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정말로 즐거웠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
마냥 즐거웠던 것도 잠시. 다시 가까워지며 황태자의 손이 내 등을 받치는 동작을 취할 때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춰야만 했다.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는 게 손을 통해 느껴질까 긴장해서였는데, 나는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못잖게 황태자의 심장도 뛰어대고 있었다. 키 차이가 있어 내 귀는 그의 가슴께 즈음 닿는데, 바싹 붙어 있는 게 아닌데도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겨운 음악보다 조금 더 빠른 두근거림은 꼭 나와 같은 속도였다.
“…….”
괜히, 손이 닿아 있는 등이 평소보다 더 크게 들썩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태자도 지금 이걸 느끼고 있을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겨우 고개를 드니, 그 역시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악이 아주 먼 곳에서 연주되는 것처럼 들리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순간이 끝나고.
잠시 파트너의 품을 떠나 다른 이에게 가야만 하는 차례가 왔다.
어쩌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그 상태로 있었다가는 심장이 터져버렸을지도 몰랐다.
하나, 둘, 셋. 세 걸음을 파트너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오데트 양.”
“아. 칼, 리드 님.”
다행히 아는 얼굴이었다. 칼리드는 가볍게 아는 척을 하고 정해진 동작을 추기 시작했다. 아니타 후작 부인의 아들답게 유려한 몸짓이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눈만 깜박이자, 칼리드는 예의 그 다정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데트 양이 곤란한 이유가 황태자 전하 때문일까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대단히 실례가 되는 착각 같아서요.”
‘그러니까 지금.’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칼리드의 눈으로 봐도 내가 황태자를 좋아한다는 게 보인다는 소리지.
“곤란해 보이는 건 오히려 베아트리체 양이네요. 오데트 양과는 다른 의미로 말입니다.”
베리가 곤란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돌리니 황태자와 춤을 추며 아주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대를 대할 때 나오는 표정인데. 확실히 베리에게 황태자는 여러 의미로 애매한 상대이긴 했다.
날 방해하는 훼방꾼인지, 조력자인지 베리의 입장에선 알 수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저건 심한데.’
춤을 추는 사람끼리 전혀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다. 둘 다 운동 신경 하나만은 어딜 가도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니 서로 발을 밟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베리는 필사적으로 황태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빳빳하게 고정하고 있었고, 황태자는.
“이거 참. 얼굴이 뚫어질 것 같네요.”
“죄, 죄송해요. 칼리드 님.”
“아닙니다. 오데트 양이 죄송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칼리드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려본다고 해야 하나. 칼리드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는 있지만 그 역시 당황스러울 것이다. 황태자의 적의를 사서 좋을 일은 없으니.
다행히 다시 원래의 파트너에게 돌아갈 차례가 왔다. 칼리드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했다.
황태자에게 돌아가며 그가 또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몰라 잔뜩 긴장하는데, 의외로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
춤이 끝날 때까지 황태자는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마지막 동작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무대에서 물러나면서도 단단하게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지한 그 모습에 쉽게 말을 붙일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황태자는 말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웨이터의 쟁반 위에서 포도주를 두 잔 낚아채더니 내게 그중 한 잔을 내밀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아, 네.”
붉은 과실주의 빛깔이 영롱했다. 잔을 받아들자 순간 훅, 하고 달큰한 향이 올라왔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대체 저게 무슨 표정이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황태자는 손에 든 잔을 빙빙 돌리고만 있었다. 황태자의 눈이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내내 아리송하던 그의 표정이 일순간 변했다.
“……이유를 찾아낸 것 같아.”
“네?”
“그대랑 영영 화해를 못 할까 애끓고, 나 말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상황에 속이 꼬이는 이유 말이야.”
“…….”
황태자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더듬어 따라가니, 연달아서 춤을 추고 있는 베리와 프레튼 공작이 보였다.
“프레튼 공작에게 답답하다 뭐다 할 처지가 아니었군. 내가.”
황태자는 그리 말하며 잔을 한 번에 비워낸 후, 아주 기이한 것을 봤다는 눈으로 겨우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 어른거리는 붉은빛에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로 어떤 것을, 찾아내셨는데요?”
“이미 알고 있잖아. 오데트.”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굴러가는 순간 손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미끄러지는 잔을 황태자가 재주 좋게 받아내는 동안, 나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펄쩍 뛰며 도망가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아 누르는 게 고작이었다.
“지, 지금. 왜 이름을 그렇게.”
“아. 그건 용서해준다는 조건이었지 이름을 부르게 해준다는 게 아니었나?”
황태자는 내 체온으로 따뜻해졌을 잔의 손잡이를 매만지다가, 그대로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내 잔까지 비워버렸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까지 맨정신으로 뻔뻔하게 구는 건 힘든데.”
자신의 잔은 비우자마자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맡겨버렸으면서. 황태자는 내 잔을 계속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저건?
한참을 유리잔을 들고 손장난을 치면서도, 황태자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그런 거잖나. 내가-”
등불을 걸기 위해 중간중간 세워진 기둥에 몸을 기대고 황태자가 고개를 숙였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귓불이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는 걸.”
다시 고개를 든 황태자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