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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꽃가마를 탄다 (109)화 (109/141)

“지금 무슨, 그 말을 왜 지금.”

새빨갛게 물든 라파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도 귓불만 겨우 붉혔던 라파엘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렇게 얼굴을 붉힐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답지 않게 말을 몇 번 더듬거리던 라파엘이 안 되겠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황후궁에서 고백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야 나도 여기서 고백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내가 숨이 막히는 만큼 라파엘도 속이 울렁거리는지, 거듭 심호흡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 손을 모아 얼굴 앞에 갖다 대고 있던 라파엘이 손을 내리고 겨우 나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그런 이유를 대면, 내가 반대를 할 수가 없잖아.”

그의 입꼬리가 요상한 모양으로 실룩거렸다.

“이거 참. 마음 편히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내 맘대로 조절이 안 되는군. 뺨이라도 때려주겠어?”

“……싫어요.”

“소공작의 뺨은 잘만 때렸으면서.”

“그 뺨이랑 이 뺨이 같은가요?”

내 대답에 라파엘이 결국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방 안에 방음 마법이 걸렸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가슴이 졸아들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렇게 웃을 때도 아닌데.”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음을 멈춘 라파엘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나도 얼굴을 굳혔다.

“그래. 그대의 말대로라면 당장 황후궁에 있는 게 위험하진 않겠지……. 하지만 무척 답답할 거고, 함부로 뒤지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도 몰라.”

“조심할게요. 공작저에서 삼 형제랑 지내는 거나, 황후궁에서 황후랑 지내는 거나 저한텐 별 차이도 없는걸요.”

“……그 새끼들은 내가 공작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해버리고 말 거야. 알아둬.”

“그거 저한테는 반가운 말이네요.”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 얼굴이 달빛에 희게 빛났다.

보라색 눈동자가 정말로 요사스럽게, 사람을 홀리는 빛을 흘리고 있었다.

“…….”

“…….”

내 심장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뛰어대는 건 다 이 남자 탓이다. 괜히 그에게 책임을 미루며 주먹을 쥐었다.

보라색 시선이 그 주먹 위에 잠시 머물다 갔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어. 이미 모든 증거가 사라진 뒤라면 그대가 여기 갇혀 시간을 보내는 게 다 헛수고가 되겠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저는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저를 빼내겠다고 전하께서 괜히 무리하시는 것보다는 낫고요.”

“그게 무리가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그대는 똑같은 답을 돌려주겠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라파엘은 결국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 내가 졌다고. 당장 오늘 밤 그대를 탈출시키는 건 포기할게.”

포기한다면서 왜 단서를 붙이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며 라파엘을 바라보자 그는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굳건한 태도를 보였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그렇게 오래 그대를 붙잡아 놓는다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올 거야. 임신 사실을 밝혀도 그 순간만 사그라들 뿐, 그래도 공녀를 그렇게 붙잡아 놓는 건 아니지 않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겠지.”

“그래도 황후가 계속 불안하다고 주장하면 귀족들도 크게 반발은…….”

황후는 신전과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전과 귀족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은 편에서 황제와 마탑을 견제해왔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균열이 과연 쉽게 생길지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반발해. 장담하지. 귀족들은 내내 자신들의 권력을 키우기 위해 신전과 손을 잡고, 황후의 지원을 받아왔는데- 지금 황후의 행동은 누가 봐도 황권으로 귀족들을 찍어누르는 짓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라파엘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황후궁에 내내 머무르는 처지에서는 벗어나야지. 정말 몇 달을 여기서 살 건가? 공작가의 타운하우스가 황궁에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니, 거기 머무르며 황후궁에 매일 얼굴을 비추는 것만 해도 충분하지 않냐는 말까지는 끌어낼 수 있어. 아니. 끌어낼 거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 불안한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라파엘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았나? 내가 폐하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고 있다고. 귀족들이 불만 어린 상소를 올려대기 시작하면 그게 터지기 직전까지 모아놨다가 폐하에게 넘겨버릴 작정이야.”

꽤 골머리를 썩여야 할 거라는 말을 덧붙이는 라파엘의 표정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서도 끝까지 황후의 편을 들면 그땐 정말로 아버지께서 노망이…… 이런 말은 안 하기로 했는데. 그래. 아무튼 아직 총기를 잃지 않으셨다면 그 정도는 양보를 하시겠지.”

노망이 났다는 말이나 총기를 잃었다는 말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을 지키며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그 잠깐 사이에 여기까지 생각해낸 건가.

“…….”

적어도 라파엘이 마법으로 계속 나인 양 구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현실적인 계획이었다.

‘황제만 예상대로 움직여준다면.’

하지만 황제의 동태만은 도통 예측할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말하는 황제와 내가 본 황제는 전혀 달랐으니까.

‘자기 아들한테 할 일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사람처럼은 안 보였는데.’

건국제 연설 때도 그렇고, 검술 대회 때도 그렇고, 내가 훈장을 주겠답시고 자리를 만들었을 때도 그렇고.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춘, 괜찮은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이 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거짓말을 해도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

“왜 대답이 없어. 마음에 안 들어? 이 정도는 받아들여달라고. 그대가 황후궁 아래서 먹고 자는 걸 상상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 뒤집힐 내 속을 생각해서라도.”

“……아뇨.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너무 좋죠. 중간에서 전하가 조금 고생하실 것 같아 걱정돼서 그래요.”

라파엘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십 년도 더 지난 음독 사건의 증거를 찾으며, 불만을 가진 귀족들을 상대하는 일까지 하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뭐가 고생이야. 결국 황후의 얼굴을 내도록 마주해야 할 그대가 고생이지. 그런데, 계속 전하인가?”

“네?”

“아니.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도 그렇고 호칭도 그렇고. 막 고백을 주고받은 연인한테 어울리는 건 아니잖아.”

“여, 연인이요?”

“그럼 서로 좋다고 고백했으면 연인이지. 아닌가? 대화의 내용이야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호칭 정도는 전하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

대체 왜 갑자기 대화가 그리로 튀는 거야? 연인이라니. 아니, 물론 라파엘의 말처럼 서로 마음을 확인했으니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아니지.’

지금 이런 소리를 하고 있을 때냐는 말을 내뱉기 직전이었다.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라파엘의 손이 아주 살짝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황후궁에 남겨놓는다는 게 라파엘에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조금이지만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만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영 딴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이런 농담이라도 해야지 안심할 수 있는 거구나.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나를 남겨둔 채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입술이 멋대로 움직이며 그의 이름을 담았다.

“……라파엘 님.”

그 이름을 발음하는 느낌은 무척이나 오묘했다. 황태자의 이름이야 그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걸 부를 날이 올 거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고작 이름 하나 불렸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니 자꾸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이…….

“더 편하게 불러도 되는데?”

취소.

“여기서 어떻게 더 편하게 불러요. 황태자 전하.”

“이거 괜히 농담했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겼군.”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던 라파엘의 표정이 곧 진지하게 변했다.

“이 상태로 오래 두지는 않을 거야. 그리젤 공작을 위시한 귀족들도 움직일 거고. 황후가 그대에게 무슨 말을 늘어놓더라도 무시해. 다 개소리니까.”

귀족들이 그렇게 나오면 황후가 나를 은근히 압박해서 그들을 달래게 만들겠지. 황후 앞에서만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것도 안 하면 되려나?

“그리고 마탑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마법 공부를 여기서도 이어갈 생각이라고 황후에게 전해둬.”

“이 안에서 제가 멋대로 마법을 써도 괜찮은 건가요?”

지금은 쥬드가 난리를 치고 있어서 괜찮은 게 아닌가?

“황궁의 보안 마법은 안팎을 드나드는 것들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어. 물론 공격성이나 파괴력이 강한 마법들은 따로 감지하지만, 다른 마법들은 비교적 감시가 느슨하지. 그대가 매일 마탑에 오가며 열심이었다는 건 황후도 알 테니 의심하진 않을 거야.”

보안 체계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였구나,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짓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 탐지 마법 같은 것들을 많이 배우지 못했잖아. 책들을 보내줄 테니 연습해서 황후궁을 샅샅이 뒤져줘. 내 몫까지.”

“네. 전하…… 라파엘 님 몫까지요.”

전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라파엘의 모습에 급하게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은 몇 마디를 덧붙이며 내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당분간은 이렇게 얼굴 보는 것도 힘들 거야. 오데트.”

내 이름을 부른 라파엘이 돌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는 내 머리는 어느새 뒤에 와 있던 그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

잠깐. 이건. 설마.

금방이라도 입맞춤을 할 것 같은 표정과 분위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보다, 라파엘의 입술이 가까워지는 게 먼저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보수해둬야지. 눈은 왜 감고 그래?”

이마에 말랑한 감촉이 닿고, 곧이어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건드렸던 보호 마법을 다시 수정하는 거였구나.

쪽팔림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자, 듣기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라파엘이 나를 끌어안았다.

“고백을 여기서 들은 것도 억울한데, 첫키스까지 여기서 할 수는 없잖아.”

라파엘은 그렇게 한참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마지막까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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