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릭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어안이 벙벙해서 말문이 막혔다.
비슷한 심정인 건 로드릭도 마찬가지인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죽을 목숨 살려줬으니 그 은혜를 평생 갚겠다는 말 따위는 못 해. 너도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하진 않을 거고. 하지만, 하지만…….”
“…….”
“날 구해주고,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을 계속 무시하고, 구박하는 쓰레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로드릭의 얼굴이 꼭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로드릭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형님께서도 분명 나와 같은 것을 느끼셨을 거야. 그런데도 형님은 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로드릭을 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미하일이 내게 좋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사실에 로드릭이 미하일에게 실망감을 느꼈다는 건 놀라웠다.
로드릭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공작이라면 가장 따르는 사람은 미하일이었으니까.
“그리젤 공작이 될 사람은, 그것보단 훌륭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 망아지 같은 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소리는 아니라고 로드릭이 불퉁하게 덧붙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서 기절할 법한 일인데, 제 팔을 벅벅 긁고 몸을 배배 꼬아가며 괴로운 신음을 뱉어내던 로드릭은 기어코 한 마디를 더했다.
“……살려줘서 고맙다.”
“…….”
저 로드릭이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 비록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목소리도 작았지만.
내게 사과나 감사 인사를 할 바에야 혀를 깨무는 쪽을 택할 녀석이.
“아버지 말대로, 네게 제대로 고맙다고 인사한 적도 없었던 것 같아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폐부를 짓눌렀다. 이런 건, 이런 건 어울리지 않았다. 평생 경멸과 혐오, 무시만 주고받던 사이에 감사 인사라니.
죽도록 어색한 것은 로드릭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끝끝내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아버지가 가신들한테 둘러댄 핑계가 틀린 말도 아니고.”
“……?”
“사람들 앞에서 정신 놓고 쪽쪽거릴 정도로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푹 빠져 있는데, 형님이 공작이 되면 그리젤이 어떻게 되겠냐?!”
“쪽쪽…… 너 미쳤어?”
* * *
“……그런 말을 하더라니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드릭한텐 죽어도 들을 일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눈앞에 앉아 눈동자를 반짝이는 황녀님이 적어 내린 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이 하면 농담이 되겠지만, 진짜 거의 죽다 살아난 안젤리나가 하면 농담으로 받을 수가 없단 말이지.
공작이 베리를 소공작으로 정하겠단 의중을 밝힌 뒤로 외부 활동을 자제하다 처음 만나는 것이었는데, 볼 때마다 사람이 바뀌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혈색이 좋아지고, 눈빛에는 총기가 돌았다. 부스스하던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 소식을 전하는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듣던 안젤리나가 한 문장을 더 써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때?」
“기분이요?”
「응. 걔가 널 제일 못살게 굴었다며.」
“음. 나쁘진 않아요. 나쁘진 않은데…… 겨우 로드릭한테 감사 인사를 받았다고 새삼 기쁘다거나 하진 않아요. 이미 저희 사이를 가로지르는 골이 너무 깊으니까요.”
나는 라파엘처럼 좋은 오빠를 둔 안젤리나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며 농담을 던졌다.
“그래도 뭐, 계속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빠지는 관계에선 벗어날 수 있겠죠. 그 이상은 저도, 로드릭도 바라지 않을걸요?”
「어렵네. 너랑 내 상황이 반대라서 그런가. 넌 아버지와 사이가 괜찮고 오빠들과 사이가 최악이지만, 난 오빠와 사이가 좋고 아버지랑-」
안젤리나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질 좋은 양피지에 까만 잉크가 번져나갔다.
믿기 어렵겠지만, 황제는 그 일을 알게 된 후에도 안젤리나의 얼굴을 보러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씨시와 쥬드는 안젤리나의 얼굴을 보면 자신의 무능함을 피할 수가 없어서 그럴 거라고 추측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황제가 하는 일은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라파엘에게 빠르게 양위를 결정한 것이 나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씁쓸한 미소를 삼키는 나를 보던 안젤리나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얼굴에 티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아, 나는 반 박자 늦게 안젤리나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
안젤리나는 침을 삼키고, 기침을 해가며 목을 가다듬었다.
“……오, 빠랑은. 오빠가…….”
곧 작은 입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마냥 듣기 좋은 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처음에 비하면 천지개벽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안젤리나는 나를 상대로 천천히 말하는 걸 연습하고 있었다. 라파엘에게는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매끄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말할 거라나.
“청, 혼……한 거야?”
안젤리나의 시선이 내 가슴에 걸려 있는 브로치에 콕, 꽂혔다. 이 브로치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괜히 한 번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선황후의 유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안젤리나에게 확인을 받으니 그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청혼…… 비슷한 말을 하시면서 주시긴 했어요.”
“…….”
날 직시하는 시선에서 청혼이면 청혼이지 청혼 비슷한 말은 뭐냐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그, 래서. ……오데, 트. 너는……?”
나는 어쩌고 싶냐고? 그거야-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있어?”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마자 등장한 라파엘을 안젤리나가 대놓고 흘겨보았다.
“……안젤리나. 왜 오빠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
입 모양으로 ‘멍청이’라고 중얼거린 안젤리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라파엘이 내게 해명을 요구했다.
“오데트. 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전하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요.”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다니, 가슴이 찢어지는군.”
과장되게 슬픈 시늉을 해 보이는 라파엘의 복장이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오늘이 즉위식 때 입을 의상을 가봉하는 날이었나요?”
“그건 아직. 이건 즉위식 후 있을 무도회 때 입을 옷이야. 어때. 어울리나?”
라파엘이 선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았다. 한쪽 어깨에만 달린 망토가 빙그르르, 공중에 휘날렸다.
어울리냐고? 그거야, 당연하지.
그를 괴짜 황태자로만 여겼을 때도 대단한 미모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물며 사랑이라는 막을 하나 덧씌운 상태로 보고 있는 지금에야, 솔직히 말해 눈이 부시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홀린 듯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라파엘이 곱게 미소지었다.
“어울리냐 물었다고 그렇게 바라보면 내가-”
사각사각.
선명한 깃펜 소리가 라파엘의 말을 끊었다.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나타난 라파엘의 모습에 정신을 뺏겨서 안젤리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니.
안젤리나는 그런 나와 라파엘을 가볍게 번갈아 보더니,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보기 좋은데, 여기 나도 있거든.」
“…….”
“알고 있단다. 안젤리나.”
「오빠야 상관없을지 몰라도 오데트는 부끄러워할 거 아냐. 그러니까.」
닭살은 나가서 떨……. 창피해서 글자를 더 못 읽겠네. 고개를 푹, 떨구자 안젤리나의 작은 손이 내 손을 도닥였고, 라파엘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안젤리나. 정말 그래도 돼?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겠어.”
“…….”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안젤리나가 라파엘에게 입 모양으로 무슨 말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순간에 라파엘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한 거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니, 라파엘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민망해하고 있었다.
“……안젤리나 님?”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저 남자를 단번에 저렇게 만들 수 있나 싶어 안젤리나를 보았지만 은은한 미소만이 돌아왔다.
「난 괜찮으니까 둘이 데이트 좀 해. 바빠서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다며.」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는데. 라파엘이 안젤리나를 찾아와서 요즘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불평이라도 했던 걸까?
가슴이 간질거려와 나는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라파엘은 매우 멋쩍어 보였지만 안젤리나의 제안을 거절할 마음도 없는 것 같았다.
“이따가 다시 올게. 안젤리나.”
「안 와도 돼. 잘 가, 오데트.」
입 모양으로 대답하려던 안젤리나가 나를 의식했는지 글씨를 써서 답했다.
“이렇게 쫓겨날 줄은 몰랐는데.”
황녀궁 밖으로 쫓겨난 라파엘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 타이밍에 들어온 것만 아니었어도 안젤리나가 이렇게 쫓아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산책이라도 할까 싶지만 이 시간엔 어딜 가도 시선이 따라붙을 테고, 흠. ……내 궁에라도 가겠어?”
“네, 네?”
“내 궁. 아직 내 궁에 와본 적은 없잖아. 대관식을 치르면 거처를 옮기게 될 테니, 내 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보여주고 싶어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라파엘이 내 집이나 방에 온 적은 많아도 내가 가보는 건 생각도 안 해본 일이라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역시 재미가 없을 것 같나? 그럼 다른-”
“아뇨. 좋아요. 황태자궁이면…… 전하의 어린 시절 초상화 같은 것도 볼 수 있는 건가요?”
“그런 걸 보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아주 커다란 액자에 걸려 있지. 그런 그림을 남기는 것도 내 일이라.”
그 말을 하는 라파엘의 표정이 너무 떨떠름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웃는 나를 얄밉지 않게 흘겨본 라파엘이 에스코트를 하며 나를 황태자궁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안젤리나 님께서 아까 뭐라고 하신 거예요? 엄청 부끄러워하시던데.”
“…….”
“전하?”
“나보고 바보천치라고 하더군.”
“네?”
“아직 그대의 마음을 완전히 얻어내지도 못한 주제에 어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돌아다니는 거냐고 뭐라고 하던데. 난 안젤리나가 그렇게 말을 빨리할 수 있는 아이인 줄 처음 알았지 뭐야.”
그렇게 구박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며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세라 소중하게 키워온 동생에게 그런 말을 들은 충격과 민망함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젤리나 님께서 잘못하셨네요.”
“아니, 그렇다고 또 걔가 잘못했다고 할 것까지는-”
“다 얻어내셨는데.”
“뭐?”
라파엘이 머리를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의 곧은 콧대 위로 밝은 햇살이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접고 웃었다.
내 마음을 진작 다 가져가 놓고 아직도 모자라다 여기는 이 남자를 욕심쟁이라고 해야 할까.
내게 부족한 것은 라파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의 옆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신감이었는데 말이다.
“잠깐만. 오데트. 한 번만 더 말해봐.”
“싫어요.”
“사람이 말을 바로 해야지. 내가 뭘 다 얻어냈는지 똑바로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내 말 한마디에 여유를 잃고 매달리는 라파엘의 모습을 보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게 이런 짓궂은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부러 뜸을 들이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 라파엘이 했던 말대로, 고백은 황후궁에서 하고 첫키스는 신전 지하에서 했는데……이런 말까지 길바닥에서 할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황궁 안인 만큼 잘 정돈된 산책로 위였지만, 길바닥 위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기가 황태자궁인가요? 황녀궁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오데트!”
초조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라파엘을 뒤에 두고 앞서 걸었다. 얼른 저 궁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잔뜩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