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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459)

3. 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2017.12.20.

1927년의 늦은 봄. 따앙― 따앙―! 인천의 송도, 아름다운 해변에서는 땅을 다지고 기둥을 박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한쪽에서는 화강암을 다듬고, 또 다른 인부들은 벽돌을 나른다. 막 시작된 유원지 건설 기초공사 때문에 일대는 온통 소음과 먼지, 그리고 땀 냄새로 뒤덮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땀 냄새로.

1655066885283.jpg“일본인들과 친일매국노들의 여름 한철 즐길 거리를 위해, 조선 인부들이 비지땀을 흘린다……. 참으로 슬픈 일이구만. 망할 놈들, 월미도 해수욕장을 그렇게 초호화로 꾸며 놓고서 그거로도 부족한 건지.”

사무소에 들려 물 한 사발로 갈증을 지우던 노동 감독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운터에 앉아 서류작업을 하고 있던 젊은 남자가 대꾸했다.

16550668852842.png“일본인들을 위해 땀을 흘리는 건 아니죠. 다들 자기 식구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겁니다.”

젊은 남자의 이름은 선우진. 이제 막 열여덟이 된 그를 노동자들은 선우 학생이라 불렀다. 앳된 얼굴과 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는 이력 때문이리라. 선우진은 노동 감독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6550668852842.png“부당하고 억울한 걸 알아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별수 있나요. 지금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끼어 있지 않은 사업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1655066885283.jpg“으음……. 그렇기는 하지만, 매일 이리 고되게 일하는데도 하루 일당이 고작 1원 20전 정도니……. 이건 봉사라고 해도 될 판이야. 자네만 해도 낮의 일에 더해서 야간경비 근무까지 해 봐야, 월급은 40원에도 못 미치지 않는가?”

감독관의 물음에 선우진은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홀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3년. 엄청난 병원비와 가난만 물려받은 그였기에, 40원이라는 품삯은 혼자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액수다.

1655066885283.jpg“일은 어때? 좀 할 만한가?”

감독관이 질문을 바꾼다. 선우진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68852842.png“네, 그간 감독관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다른 분들도 친절하시고요.”

1655066885283.jpg“자네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한 보름은 되었나?”

16550668852842.png“예. 오늘이 보름쨉니다.”

1655066885283.jpg“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때로구만. 으음, 자네나 나나 얼른 한몫 잡아야 이 지긋지긋한 공사판에서 벗어날 텐데……. 그놈의 패가 좀처럼 안 떠 준다는 말이지.”

노동 감독관은 옹이처럼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패를 죄는 시늉을 하며 입맛을 다졌다. 선우진이 물었다.

16550668852842.png“도박장에 다니십니까, 감독관님?”

1655066885283.jpg“음! 다니지! 자네는 가 본 적이 없나? 유곽 골목 입구에 가면 좋은 곳이 꽤 많은데!”

감독관의 질문에 선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대로 임금을 받아 본 적도 없는데, 그런 유흥가에 들를 수 있을 리가 없다. 일을 마치고 나면 하숙집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저 걸어갈 뿐이다.

1655066885283.jpg“정말이야. 꽤 괜찮은 데가 여럿 있단 말이지. 어떤 곳은 단 한 판에 몇백 원이나 되는 거금이 오가기도 한다고. 그런 큰 판에서 이겨야 하는데 말이야……. 선우 학생 자네는 노름 좀 하나?”

도박 이야기가 나오자 감독관의 눈에 모처럼 광채가 인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서러운 식민지의 삶.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우울한 일상 때문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점점 더 깊이 도박에 몰입하던 시기니까…….

16550668852842.png“아뇨. 저는 도박은…….”

노름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선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는 순진하고 바른 학생의 모습만 보여 주어야 한다.

1655066885283.jpg“에그, 공부만 하던 백면서생이라서 역시 간이 작구만, 작아. 남자는 말이야, 승부를 걸 때는 걸어야 하는 법일세. 쪼잔하게 주판알만 튕기고 있어 봐야 거, 큰 돈 만지기는 어려워. 언제 시간을 내서 하나후다 보는 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줘야겠구만.”

감독관은 당장이라도 족보까지 일러 줄 태세다. ‘하나후다’ 혹은 ‘하나카르타’라는 이름의 일본 화투장은, 도입되자마자 전국에서 투전을 밀어내고 도박의 대세가 되었다. 일단 패의 수가 적어서 누구나 이해하기가 쉬운 데다, 빨리 승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55066885283.jpg“어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일 끝나고 배우는 겸 같이 한 판 쳐 볼까? 마침 급료일이기도 하잖나? 급료를 주는 날은 여기에서도 간이 도박장이 열린다고. 친치로린, 쌍육, 짓고땡. 다 할 수 있네.”

감독관이 열의 가득한 얼굴로 권유하자 선우진은 깜짝 놀라 물었다.

16550668852842.png“도박장이 이곳으로요?”

1655066885283.jpg“아, 자네는 모르나? 하긴 아직 일한 지 며칠 안 되었으니……. 바로 이 앞에 자리를 편다네. 인부들 월급이라야 25원 안팎이지만, 그 수가 400명이나 되고 보니 의외로 짭짤한 장사라는 말이지.”

감독관은 사무실 카운터 앞의 넓은 공터를 가리켰다. 햇빛을 가리는 천막이 도박장으로 변모하는 셈이다. 선우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6550668852842.png“그런 걸…… 내버려 둬도 됩니까? 상습 도박하면 장이 80대라는 법이 엄연하고……. 아니 그보다도 여기 사장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1655066885283.jpg“나한테는 오히려 막을 권한이 없어. 일본인 사장이랑 다 이야기가 된 건데 뭐, 다들 한통속이야. 순사들도 단속을 않고. 그 도박장도 일본인들 것이거든. 자네가 있던 경성하고는 달라, 여기는 인천이라네.”

씁쓸하다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감독관의 표정에는 오히려 묘한 기대와 흥분이 담겨 있다. 이 남자 역시 오늘 저녁에 한몫 잡아 볼 기대로 들떠 있는 것이다. 선우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댔다.

16550668852842.png“주제넘은 조언일 수 있지만, 그런 종류의 취미는 손을 안 대시는 것이…….”

1655066885283.jpg“에헤이! 그게 뭐야! 내 마누라 같은 잔소리는 그만 두게! 무릇 도박이란 서민의 3대 낙 중 하나라고! 이 쪼는 맛을 모른다면 인생이 다 무슨 재미란 말인가…….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잖느냐 말이야. 뭐 하여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 자네도 직접 보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 거니까.”

감독관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다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마음은 이미 도박장으로 떠난 지 오래다.

16550668852842.png“저리 좋아해서야 말려도 아무 의미가 없겠는걸.”

멀어지는 감독관의 등을 보며 선우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편으로 씁쓸함이 밀려온다. 그렇게 한 달 내내 고생해 번 임금을 도박장에서 날릴 인부들이 애잔하다. 일본의 위정자들은 에도 시대 때부터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고 그 돈을 다시 도박장에서 회수해 왔다. 말하자면 그 분야의 역사가 아주 길고, 조예도 깊은 셈. 순진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도박장에서 돈을 딸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건 선우진이 아주 잘 안다.

16550668852842.png“후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두툼한 장부에는 이번 달 일했던 노동자 400여 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고, 그 옆에 노동 시간이 기재되어 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꼬박 아홉 시간을 일해야 일당이 1원 20전. 턱없이 싼 임금인데, 여기에서 신참들은 소개료로 매주 50전을 6주 동안 떼고, 보증금 명목으로 또 매일 25전을 따로 모아 둔다. 점심을 외상으로 먹었다면 그 값이 8전. 일당을 미리 앞당겨 받아간 사람들도 적지 않아서 더하고 빼고 곱하고 이래저래 계산할 일이 많다. 하지만……. 사각, 사각, 사각, 선우진은 주판알 한 번을 만지지 않고 그저 빠르게 연필만 움직여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눈으로 장부를 한 번 슥 훑어보면 그 즉시 답이 계산돼 나왔다. 그리고 틀리는 법도 없다. 학교를 다니던 내내 산수와 수학에서는 늘 만점을 받았다.

16550668852842.png“사채업자가 미리 받아 가는 돈이 꽤 많군. 이것도 다 그 도박장 때문에 진 빚일 텐데……. 이래서야 월급을 받아도 채 보름을 버티기가 어렵겠어.”

선우진은 이따금씩 손부채질로 땀을 식히며 열심히 장부에 숫자를 기입했다. 쉬지 않고 빨리 마쳐 두어야 오늘 저녁에 인부들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임금을 받아 갈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 여섯 시. 때르르르릉―! 때르르릉―!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종일 땅땅거리던 공사판이 차츰 조용해지고, 인부들은 땀과 흙먼지를 닦으며 사무실 쪽으로 다가왔다. 고되었던 그들의 일과가 마무리되어 간다. 이제 사무실에 맡겨 두었던 표찰을 돌려받아 입구의 경비실에 두고 가면 끝이다. 쩔그럭. 선우진은 표찰이 든 나무통을 카운터 위에 올렸다. 각자의 이름이 적힌 표찰은 출근부와 비슷한 개념이다. 인부들은 일터에 도착해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것을 선우진에게 맡겼다. 그리고 일을 마치면 다시 받아가 입구의 경비실에 돌려줘야 한다. 중간에 몰래 빠져나가거나 하는 사람은 경비실에 표찰이 없을 테니 그날의 일당을 쳐주지 않는 것이다.

1655066885283.jpg“쿨럭, 쿨럭……. 선우 학생. 오늘 월급이 나오는가? 계산 끝났어? 쿨럭!”

파리한 얼굴의 남씨가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선우진은 그의 표찰을 건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68852842.png“네, 남씨 아저씨. 뒤쪽 소장실에서 받아 가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기침이 꽤 심해지셨네요. 조금은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 같은데…….”

1655066885283.jpg“아이구, 휴식은 무슨! 내 밑으로 딸린 입만 여섯이야. 노모에 마누라에 줄줄이 애새끼들까지……. 이렇게 매일 일을 해도 배를 곯는다고. 쿨럭! 쿨럭! 아, 젠장……. 어디에서 돈벼락 좀 안 떨어지나……. 쿨럭!”

남씨는 고개를 돌려 기침을 한 뒤 사무실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카운터 앞에는 벌써 긴 줄이 생겨났다. 한시라도 빨리 표찰과 임금을 받고 싶은 노동자들의 줄이다.

16550668852842.png“김판수 씨.”

선우진은 노동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무통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표찰 중에서 한 개를 꺼내, 카운터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에게 건네줬다.

1655066885283.jpg“아, 그래. 고마워.”

김판수는 자신의 표찰을 확인하고 히죽 웃어 보였다. 비록 글씨는 잘 모르지만, 자기 이름 모양만은 기억하고 있다.

16550668852842.png“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선우진은 마주 미소를 지어 준 뒤, 다음 사람의 표찰을 통에서 꺼냈다.

16550668852842.png“이바위 씨.”

1655066885283.jpg“저기…… 선우 학생. 근데 지금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우리들끼리는 계속 궁금해서 말들이 많았어.”

표찰을 넘겨받은 이바위가 물었다.

16550668852842.png“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1655066885283.jpg“아니, 지금 말이야. 별로 뒤적거리지도 않고 곧바로 내 걸 뽑아 줬잖아. 표찰이 그렇게 많은데 매번 그래. 한 번도 실수하는 걸 본 적이 없어.”

1655066885283.jpg“맞아, 맞아! 완전 족집게라니까!”

뒤에 줄지어 서 있던 다른 노동자들도 덩달아 술렁였다. 그들의 눈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1655066885283.jpg“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그걸 보고 주는 거겠지, 뭐.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떠듬떠듬 한 글자씩 읽는 우리보다 알아보는 게 빠를 거 아니야.”

오늘 새로 온 신참 일꾼이 별일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지만, 이바위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5066885283.jpg“예끼, 이 사람! 모르는 소리하지 말아. 통이 높아서 지금 선우 학생 앉은 자리에서는 이름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고.”

1655066885283.jpg“음……?”

그제야 신참도 새삼 선우진과 나무통의 위치를 유심히 살핀다. 나무통의 높이는 표찰의 3분의 2 정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들어있는 표찰들은 끝부분만 겨우 비죽 튀어나와 있다. 이바위 말이 맞다. 몸을 그쪽으로 기울여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름은커녕 성조차 보이지 않는 구조다.

1655066885283.jpg“그러네……. 이 학생 이거…… 신통력이 있는 사람인가 보구만. 그 진령군이라는 무당보다 오히려 나은 거 아니야, 이거? 그럼 나, 나 관상 좀 봐 줘봐! 언제쯤 이런 고생 안 하고 좀 팔자가 필는지!”

신참은 뒤늦게 감탄하며 선우진의 얼굴을 우러러 보았다. 선우진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16550668852842.png“신통력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표찰을 넣었던 자리를 기억하는 것뿐이에요. 며칠 하다 보니 요령이 붙었다고 할까요.”

1655066885283.jpg“이 많은 걸…… 일일이 다 기억한다고? 어디에 누구 표찰이 있는지?”

이바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건설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의 수는 대략 400여 명. 당연히 표찰의 수도 400개가 넘는다. 매일 출근하는 순서가 같은 것도 아니고, 아파서 못 나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특정한 자리가 있을 리도 없는데…….

16550668852842.png‘아차차……. 이거 너무 눈에 띄는 짓을 해 버린 건가…….’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일종의 경외심을 느낀 선우진은, 이마를 손으로 가리며 멋쩍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16550668852842.png“그렇게 감탄하실 만한 재주가 아니에요. 아이구,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사람 쑥스러워집니다.”

1655066885283.jpg“고등 보통 다니던 학생이라고 해도 뭐 별거 있을까 했었는데, 그게 아니네……. 신식교육 그거 대단하구만. 별걸 다 가르쳐 주는 갑네.”

뒤쪽에서 누군가 이 신기한 재주의 원인을 신식 교육에서 찾는다. 그러자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1655066885283.jpg“그렇구만……. 배운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1655066885283.jpg“표찰도 그렇지만,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이름을 칼같이 기억한다는 것도 신기해! 여기서 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보통 사람이 아니야.”

1655066885283.jpg“일주일은 아니지, 이 돌대가리야! 보름은 족히 넘었어!”

인부들이 뭐라고 한마디씩 중얼거리고 있을 때, 부우우웅―! 넓게 뚫린 신작로를 타고 한 대의 자동차가 빠르게 달려왔다. 미끈한 곡선의 20인승 합승차. 잠깐 한 번 타 보는 데도 20전을 넘게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이동수단……. 그 위용에 인부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부러운 시선만을 던졌다. 끼이익―. 합승차가 입구에 멈추고, 게다를 신은 일본인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 인원은 총 여덟. 천막과 병풍, 돗자리까지 가지고 온 도박꾼 일행들이다.

16550668965325.jpg“친치로린이 왔다!”

몇몇 인부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친치로린은 원기둥 모양의 통 안에 주사위 세 개를 넣고 숫자를 맞추는 도박이다. 주사위 세 개가 흔들릴 때 나는 소리가 일본의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부들 중 절반 정도는 얌전히 월급을 챙겨 귀가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간이 도박장이 설치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655066885283.jpg“저번 달에는 내가 100원을 땄다고! 마누라한테 양산 하나 사다 줬더니 얼마나 놀라던지! 아주 좋아가지고 깜빡 넘어가더라고!”

1655066885283.jpg“이달에는 나도 꼭 만회를 하고 말 거야!”

바람잡이 같은 사람들의 허풍과, 순진한 이들의 바람이 섞여 들려왔다. 가난한 도박판의 광기가 열기처럼 바닷바람을 타고 분다.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선우진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야간 경비 1조를 겸하는 그의 근무 시간은 열 시까지이므로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간이 도박장이 열린 자리는 그가 앉은 카운터에서 채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딸그라라락―! 딸그라라락―! 원기둥 모양의 통 안에서 주사위 세 개가 춤을 출 때마다, 귀뚜라미 우는 것 같은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도박장의 영업이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더욱 커진 인부들의 환성!

1655066885283.jpg“홀이다, 홀! 홀에 1원 걸었어!”

1655066885283.jpg“나는 무조건 큰 수에 건다!”

노란 백열등 아래 모여든 사람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쳐 대며, 자신의 일당을 주저 없이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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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6885283.jpg“다 거셨습니까? 자아, 그럼 승부입니다!”

일본인 도박사의 어딘지 교활한 것 같은 말투. 그리고 그가 주사위를 덮고 있던 통을 들어 올리자 탄식과 환호가 교차했다. 단순히 홀짝이나 숫자의 합계로만 승부를 가린다면 따는 사람과 잃는 사람이 반반이겠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 변형 친치로린에서는 4, 5, 6이 나오거나 모든 주사위의 눈이 같은 수가 나왔을 때, 걸린 돈을 모두 도박장이 차지한다. 반대로 1, 2, 3이 나오면 그때는 홀짝, 대소 불문하고 무조건 도박장이 지는 것이다. 사락―! 선우진은 책장을 넘기며 책의 내용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지난 두 달간 형무소에서 갖은 고생을 하는 동안,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굳게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미칠 노릇이다. 그저 한 귀로 흘리려는 주사위 부딪치는 소리가, 자꾸만 그의 귓속으로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너무도 선명해서 통 안에서 부딪치는 주사위들의 모양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인부들의 소음을 누르는 그 전달력은 기이함 이상이었다.

16550668852842.png‘젠장, 몇 달 지나는 동안 이놈의 감이 더 좋아진 것 같군…….’

선우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친치로린은 그의 주 종목이 아니었는데도…… 지금 끼어들기만 하면 분명히 딸 수 있다. 눈앞에 몇 달치 월급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아니 참아야 한다.

1655066885283.jpg‘아직 학생이라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지만, 다음번에 또 걸리면 1년 동안 바깥 공기를 쐴 수 없을 거다.’

그를 잡아 가뒀던 형사의 경고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결코 빈말이 아니었을 터다. 그 비좁고 더러운 형무소에서 1년을 보낸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 시간여나 지났을까. 선우진은 세 개의 주사위가 각기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사실과, 또 그 주사위의 각 면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그는 무슨 눈이 나올지를 소리만 듣고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따라라락― 따라라라락―!

16550668852842.png‘이건 십이가 나왔군. 육, 사, 이.’

따라라라락― 따라라락―!

16550668852842.png‘도박장이 싹 쓰는 판이군. 삼, 삼, 삼. 다 똑같은 눈이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 삼아 유추를 해 본 것이었는데, 한 번, 두 번, 연속해서 맞고 보니 선우진 스스로도 점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인 도박사가 이따금씩 못된 속임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따라라락― 따라라― 덜컥―! 원통이 지면을 때리는 순간에 맑지 않은 소리로 마무리가 되면, 그때에는 주사위 중 하나가 원통의 벽면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다는 의미다. 도박사가 통을 들어 올리면서 그 주사위의 눈을 은근 슬쩍 바꾸기 위한 수법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주사위의 소리를 구분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선우진 자신도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매번 그의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마치 신이 들린 것처럼……. 하지만 불행히도 인부들은 그렇지 못했다.

1655066885283.jpg“아이구! 미치겠네! 미치겠어! 왜 거기서 그런 눈이 나온담!”

1655066885283.jpg“망했다!”

아무 기술도 없이 그저 감과 운만 믿고 겁 없이 달려들었던 인부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져 갔다. 지난 한 달 내내 갖은 고생을 하고 벌었던 월급을 몽땅 날리는 데는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운이 좋게 다만 몇십 원이라도 딴 상태로 현명하게 곧 발을 뺀 사람들도 있지만, 잃은 이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1655066885283.jpg“쿨럭! 쿨럭! 저기…… 나…… 조금만 돈을 빌려주시오. 지, 집에 쌀을 좀 사 가야 해서 그럽니다. 그…… 내달 말에 월급을 받으면 꼭 갚을 테니까.”

파리한 얼굴의 남씨가 도박장 쪽 고리대금업자에게 애원을 하며 매달렸다. 고리대금업자는 콧수염을 베베 꼬며 거만하게 대꾸했다.

1655066885283.jpg“돈이야 꾸어 주지. 단 일주일에 오부 이자다. 그래도 좋다고 하면 여기에 지장을 찍어.”

고리대금업자는 남씨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마음 급한 남씨가 인주 묻힌 엄지손가락을 서류에 가까이 가져갔을 때였다.

1655066885283.jpg“남씨, 찍지 말아! 그거 찍는 순간 이자가 얼만 줄이나 알아? 그렇게 했다가 이놈들한테 마누라까지 빼앗긴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요 일본 놈들 돈 따서 빌려줄 테니까!”

다른 노동자들이 나서서 조선말로 그를 만류한다. 이상한 형태의 애국애족정신이 생겨나면서, 간이도박장은 순식간에 조선인 대 일본인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그만큼 열기는 뜨거워졌고, 사람들의 눈에는 핏발이 어렸다. 그러나……. 조선인 인부들과 일본인 도박사의 실력에는 그런 열의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다시 한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인부들의 돈은 거의 다 도박장 쪽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1655066885283.jpg“어이구…… 내 돈. 내가…… 내가 미친놈이지.”

월급날 빈털터리가 된 인부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하게 앓는 소리를 토해냈다. 듣는 것만으로도 선우진의 가슴까지 아파 오는 서러운 목소리다. 물론 도박은 나쁜 것이고, 다들 거기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에게는 동정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성실하게 다 모아도 한 달 생활비가 안 되는 빠듯한 임금. 바로 직장에까지 찾아와 거금을 내보이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도박장. 그것을 묵인하는 일본인 사주와 경찰. 교활한 바람잡이들의 선동. 선우진이 보기에 이 순진한 인부들은 도박에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런 논리적인 요소들보다 더욱 중요한 건, 조선인들이 울고 일본인들이 웃는 현재의 상황이었다. 조선말로 울먹이는 동포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작은 간이 도박장이 마치 식민화된 조선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일본인의 얄팍한 수에 착취당하는 가련한 조국, 애달픈 동포들의 삶. 이런 비극이 전국 팔도에서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으리라. 동포……. 두 글자로 된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선우진 역시 식민지로 전락한 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꿈도 날개도 모두 꺾인 채 어깨를 움츠린 채 살아야 하는 운명. 얼마나 기가 짓눌리고 약해졌는지, 돈을 모두 잃고 조롱까지 당하면서도 인부들은 대들 엄두조차 못 낸다. 그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몰래 노려볼 뿐이다. 이쪽의 수는 아직도 수십 명에 달하고 도박장 쪽은 불과 열 명인데.

16550668852842.png“후우…….”

선우진은 화를 삭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가슴은 끓어오르는 울분과 전의로 계속 격하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저 일본인 도박사에게 패배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1655066885283.jpg― 다음번에 또 걸리면 1년 동안 바깥 공기를 쐴 수 없을 거다.

형사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울리며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 차갑고 딱딱한 형무소 바닥. 선우진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 안에 든 반 달치 임금 20원을 꽉 쥔 채 갈등했다.

1655066885283.jpg“김씨 힘내! 이제 김씨랑 윤씨밖에 없어!”

1655066885283.jpg“아이구 좀 잘 좀 해서 따 봐…….”

도박판 주변을 빙 둘러싸고 구경하는 조선인 인부들이, 마지막 남은 몇 명을 응원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분위기를 띄우던 바람잡이들은 벌써 예전에 빠져나갔고, 밑천이 남아 있는 사람은 댓 명도 되지 않는다.

1655066885283.jpg“이제 그만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걸로 아직 마코리는 한 사발 드실 수 있지 않겠소? 후후후!”

일본인 도박사가 주사위통을 잡은 채 살살 약을 올린다. 막걸리의 발음 때문에 더 기분이 상한 김씨가 호통을 쳤다.

1655066885283.jpg“잔말 집어치우고 얼른 주사위나 굴리슈! 돈 걸고 노름하겠다는데 어딜 그만두라, 마라야? 명색이 도박장이면서 따고 나서 도망치려고?”

1655066885283.jpg“무슨 실례의 말씀, 저희 미쓰이 도박장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돈이 남아 있다면 승부를 보시죠.”

발끈한 도박사가 김씨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판이 벌어졌다. 물론 김씨와 윤씨, 그리고 남은 몇 명의 밑천도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짝에 걸려 있던 마지막 5원짜리 지폐를 싹 거둬 가면서 도박사가 말했다.

1655066885283.jpg“더 거실 분 있습니까? 괜히 또 미쓰이 도박장이 돈을 따고 도망갔다고 헛소문 내시지 말고, 승부 보실 분은 지금 나서 주십시오.”

16550668965325.jpg“끄응……!”

철저히 농락당한 인부들이 분하다는 듯 묵직한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제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 봐야 돈이라고는 씨가 말랐다. 바로 그때였다. 선우진은 돈을 쥐고 일어섰다. 더 이상은 참아 주기가 어렵다.

16550668852842.png“젠장, 나도 모르겠다. 깜빵이고 뭐고 일단 따고 생각하자!”

그는 보던 책을 덮어 버리고 간이도박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655066885283.jpg“없으면, 저희도 여기에서 이만 종료하겠습니다. 다음 달 월급날 또 찾아뵈올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길. 급전 빌리실 분들은 여기, 코바타 선생한테 부탁을 하시면 10원까지는 융통이 가능할 겁니다, 후후후.”

도박사는 주사위와 원통을 챙겨 일어나며,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일본인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광기의 간이도박장이 그 문을 닫으려 하는 순간, 돗자리 위로 5원짜리 지폐 네 장이 툭 떨어졌다. 선우진이 던진 돈이었다.

1655066885283.jpg“큭, 됐습니다. 20원 때문에 다시 판을 펴는 건. 무리하지 마시고 다음에 또 뵙죠.”

꼬깃한 돈과 선우진의 앳된 얼굴을 번갈아보던 일본인 도박사가 같잖다는 듯 무시하려 든다. 선우진은 그의 등에 대고 도발했다.

16550668852842.png“훗, 20원 가진 조선인이 무서워서 도망을 치려는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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