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40만 분의 1.2018.01.31.
“하하, 댄스요? 이런 시간에?”
선우진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아직 두 시도 되지 않은 대낮인데 벌써부터 댄스홀이 문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쉿-! 사이온지 님, 비밀 이야기랍니다.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메구미는 종업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병풍 칸막이 뒤쪽을 돌아보며 더욱 은밀하게 속삭였다. 선우진은 그녀의 흉내를 내서 자세를 낮추고 작게 물었다.
“……비밀이라고 조심하시는 것은 다카하시 사장 때문인가요?”
“네에, 아버지는 댄스를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거든요.”
메구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진은 속으로 웃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주 질색을 할 테지.’
구락부에서 춤추는 여자들을 보며 미간을 찡그리던 다카하시의 얼굴이 떠오른다. 저런 여자들을 집안에 들이면 안 된다고 역설하던 그의 목소리가 생생한데, 바로 그 딸이 댄스 삼매경이 푹 빠져 있었을 줄이야……. 이런 상황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비밀 이야기를 용케 들려주시는군요. 제가 다카하시 사장에게 고자질을 할지도 모르는데.”
“아뇨, 사이온지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메구미는 딱 잘라 말했다. 선우진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마음대로 확신을 하셔도 되는 걸까요? 저랑 대화하신 지 두 시간도 안 되었잖습니까?”
“그 두 시간 동안 사이온지 님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는걸요. 보통은 그렇지 않답니다. 모던 걸은 이런 게 틀렸다는 둥, 나이 먹은 사람들은 이런 점이 고리타분해서 싫다는 둥, 우리 집안 어른 아무개는 잘난 척을 너무 한다는 둥, 뭔가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기 마련이거든요.”
메구미의 열띤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가 사이온지 가문의 이야기를 화제로 올렸을 때, 선우진이 그저 빙긋 미소를 지은 채 듣기만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사실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뿐인데.
“알아들었습니다, 메구미 양. 그렇게까지 신뢰해 주시니 비밀은 지키지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댄스홀은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게다가 저는 춤을 전혀 출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선우진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인 채 속삭였다.
“그 두 가지 문제라면 저에게 맡기세요. 사이온지 님은 일단 운전사만 돌려보내 주시면 돼요. 후후후후.”
작은 목소리로 비밀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메구미는 또 코를 찡긋하며 웃어 댔다. 보고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성격이다.
“분업이군요. 으음…… 그러면 어떤 핑계를 대는 게 적절할까요.”
선우진은 잠시 망설였다. 인천에 대해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허름한 하숙집과 송도의 건설현장, 그리고 싸구려 식당 정도가 전부다. 그런 곳에 이 화려한 아가씨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고민하던 선우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시 속삭였다.
“니시 공원을 따라 산책을 하다가 돌아오겠다고 할까요? 두 시간 정도는 넉넉히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화방산 서쪽에 조성되어 있는 녹지 공원이라면 충분히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선우진의 제안이 반가운지 메구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한 다음, 사이온지 님과 저는 남쪽 입구로 몰래 빠져나오면 돼요!”
“그럼 그렇게 하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서로 윙크를 교환한 뒤 일어섰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자,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사가 문을 열어 주며 인사를 건넨다.
“식사는 즐거우셨습니까, 사이온지 님?”
“음,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풍광도 아름다웠고, 메구미 양과의 대화가 즐거워서 더없이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네. 다카하시 사장께 고마워했다는 말을 전해주게.”
패커드의 뒷자리에 앉으며 선우진이 대답했다. 운전사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과식을 했더니 청량한 공기가 쐬고 싶어지는군. 인천역 주변에 메구미 양과 두어 시간 정도 담소를 나누며 산책을 하기에 적합한 공원이 있을까?”
“역 주변에는 니시 공원이나 각국 공원이 있습니다. 혹시 바닷바람을 쐬는 걸 즐기신다면 월미도까지…….”
“니시 공원이 좋겠군. 메구미 양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함께 산책을 청해도 될까요?”
선우진은 운전사의 말을 자르고, 메구미를 돌아봤다. 그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있던 메구미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이온지 님과의 산책이라면 영광이지요, 후훗. 마침 니시 공원 저쪽 출입구 부근에는 저희 아버지의 주조 공장도 있답니다. 인천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소주는 그곳에서 만들어지지요.”
“오오, 그건 또 흥미롭군요. 꼭 한 번 봐 두어야 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우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운전사가 경로를 서문 쪽으로 택하도록 유도했다.
“그럼, 주조 공장을 거쳐 니시 공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운전사는 곧바로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올 때만큼이나 한참동안 해안 도로를 내달리던 자동차는 항만과 인천역, 세관창고를 지나쳐서 주조 공장을 한 바퀴 돈 뒤, 니시 공원의 서문에 멈춰 섰다.
“천천히 밥이라도 먹고 오게. 두어 시간 산책을 하고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선우진은 운전사에게 통보를 하고, 메구미를 향해 왼쪽 팔을 살짝 내밀었다.
“가실까요, 메구미 양?”
메구미는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발을 맞춰 걸었다. 양쪽으로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5분쯤 걸어 들어갔을 때, 선우진이 물었다.
“운전사가 아직도 우리를 보고 있나요?”
“잠시만요, 사이온지 님. 제가 슬쩍 뒤를 돌아볼게요.”
절대 들릴 리가 없을 만큼 멀어졌는데도, 메구미는 여전히 선우진에게 밀착한 채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나무들에 가려져서 안 보여요.”
“그럼 좀 걸음을 서두르죠.”
선우진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씩 걷는 속도를 올리던 두 사람은 급기야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메구미 양?”
“하아…… 하아…… 상공회의소까지 가야 해요, 사이온지 님! 야마노테마치 3정목!”
선우진의 보폭을 맞추느라 숨이 가빠진 메구미가 할딱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갈 길이 꽤 많이 남았다. 하이힐을 신은 이 부잣집 아가씨와 그렇게 멀리까지 걸어간다는 건 무리다.
“인력거!”
공원 내의 휴게실 부근에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들을 발견하고, 선우진이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두 사람은 2인용 인력거에 오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후! 후후후! 멋지게 따돌렸어요, 아버지의 감시자를! 후후후후! 게다가 인력거라는 것도 타 봤고!”
메구미는 대단한 모험이라도 성공한 양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선우진은 그녀의 그런 철부지 같은 모습이 재미있었다.
“불편하시지 않습니까, 메구미 양?”
인력거 바퀴가 튀는 것을 엉덩이로 느끼던 선우진이 물었다. 고급 승용차인 패커드의 뒷좌석과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인력거의 좌석은 좁았고, 바퀴의 진동이 고스란히 몸에 전해진다.
“으음…… 확실히 안락하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메구미는 허름한 인력거의 좌석과 차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사이온지 님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타고 갈 수 있어요. 게다가 우리는 지금부터 비밀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니까요.”
“비밀의 무도회라…….”
“하지만 기대하시면 곤란해요, 사이온지 님. 동화에 나오는 무도회장처럼 호화로운 곳은 아니랍니다.”
잠시 후 공원을 빠져나간 인력거가 시내 도로로 접어들자, 메구미는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고 선우진의 어깨 뒤로 숨었다. 휘익-! 돌연 불어온 바람이 메구미의 모자를 멀리 날려 버리려 할 때, 선우진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모자를 잡았다.
“어머나! 정말 빠르시네요, 사이온지 님! 귀족 신사일 뿐 아니라, 스포츠맨 같기도 하셔라!”
선우진이 모자를 돌려주자, 메구미는 환하게 웃으며 감탄과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선우진은 고개를 저으며 겸손하게 대꾸했다.
“스포츠맨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의 손이 빠른 것은 도박으로라도 살아남으라는 하늘의 가호 비슷한 것이다. 아무리 눈이 빨라도, 손이 느리면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착했습니다! 30전입니다!”
상공회의소 부근에서 인력거를 세운 인력거꾼이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나이는 아마도 선우진보다 서너 살 많을 테지만, 어색한 일본어를 보면 소학교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듯하다. 그가 걸친 남색 하피는 인력거 회사의 상호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땀과 소금, 때와 먼지로 절어 있다. 회사에서 제대로 세탁해 주지 않는 그 복장 때문에 그는 아마도 또 어딘가에서 멸시를 받게 될 터였다.
“요금일세.”
가여운 동포여. 선우진은 인력거꾼의 손에 10원 지폐를 쥐여 주었다.
“아니…… 저기…… 별안간 10원짜리를 내시면…… 동전이나 1원 지폐는 없으십니까, 고객님?”
9원 70전이라는 거금을 거스름돈으로 내줘야 한다는 걱정에, 인력거꾼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잔돈은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시게.”
“네? 이렇게 큰돈을? ……정말입니까? ……고, 고맙습니다!”
열흘 치 봉급을 손에 쥔 인력거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선우진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메구미를 향해 돌아섰다.
“자, 이제 비밀의 무도회장으로 저를 인도해 주셔야죠.”
“바로 여깁니다, 사이온지 님.”
메구미가 그를 이끈 곳은 상공회의소 도로 끝자락의 꽤나 넓은 가게였다. 나무문은 굳게 닫혀 있고 간판에 적혀 있는 것도 ‘가와’라는 두 글자뿐이어서, 모르는 사람이라면 평생 문을 열어 볼 일도 없을 것 같은 곳이다. ♪ 쿵쾅쾅-! 쿵쾅쾅-! 쿵쾅쾅-! ♬ 이중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문을 막아 어둑한 실내는 악단이 연주하는 요란한 음악소리로 가득하다. 중앙을 비운 채 듬성듬성 배치된 테이블마다에는 한 쌍 씩의 젊은 남녀가 앉아 있고, 일부는 일어서서 연인끼리 마주 보며 춤을 즐기는 중이다. 여자들의 몸짓이나 교태가 어제 구락부에서 보았던 모던 걸들만큼 고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다. 남자들은 욕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서양식 복장을 차려입은 여자들을 바라보고, 여자들은 그들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스텝을 밟거나 술잔을 마주 기울였다.
‘이런 곳이 왜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 거지? 경찰서도 바로 근처에 있던데.’
선우진은 잠시 멍해졌다. 백주대낮부터 음주가무를 일삼는 것은 엄연히 처벌의 이유가 된다. 도박뿐 아니라 유흥에 관해서도 인천의 경찰들은 관대한가 보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고객님!”
웨이터가 다가와 선우진과 메구미를 구석의 자리로 안내하고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판에 적힌 주류의 가격이나 가게 내의 청결도, 종업원들의 태도까지, 어느 면으로도 최고급과는 거리가 있는 가게였다.
“메구미 양은 뭘 드시겠습니까?”
선우진이 물었다. 벌써부터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던 메구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라무네 사이다를 주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라무네 사이다와 에비스 비루로.”
선우진은 웨이터에게 주문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른 시간인데 꽤나 손님이 많군요. 남자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아가씨들은 대체…….”
여자들을 기생이나 웨이트리스라고 하기에는 남녀 간의 행동이 너무 점잖다. 함부로 입을 맞춘다거나 끌어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전부 자유연애를 하는 연인들이라고 하기엔 그 수도 너무 많았다. 사의 찬미를 녹음한 후 곧장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이 ‘나는 자유연애론자다.’라는 말로 경성 한량들 가슴을 흔들었던 게,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자유연애라는 것은 파격적인 발상이고, 드문 일이다. 완고하기로 따지면 조선 사회에 결코 뒤지 않을 일본인들이 이리도 자유분방하게 연애를 하다니, 낯설다.
“저 아가씨들 점잖은 척하고 있지만, 대부분 스틱 걸들이랍니다.”
메구미가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선우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스틱 걸?”
“네에, 지팡이처럼 남자의 팔에 딱 끼워져서 함께 산책을 다니거나 나들이를 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여자들이요.”
“아하,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제야 알아들은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틱 걸들은 서양식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공개적으로 남자들과 데이트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젊은 여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모던한 애인을 두고 싶은 남자들의 욕망을 노린 신종 화류계 직업이라고나 할까. 몸을 파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자유연애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수요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스틱 걸들을 조선의 인천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일은 일본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선우진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메구미는 소곤소곤 추가 설명을 들려주었다.
“인천은 본토의 유행이 경성보다 더 빠르게 전파되는 곳이랍니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는요. 아무래도 젊은 해군장교들이나 파견 나온 무역업 종사자들이 많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짧은 머리의 젊은 남자 손님들이 몇 명 눈에 띈다. 군복을 갖춰 입지는 않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군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인상들이다. 소좌 이상의 고급 장교들이 제물포 구락부에서 재미를 보는 동안, 대위 이하의 하급 장교들은 이런 곳을 찾는 것이리라.
‘그래서 단속을 하지 않는군.’
웨이터가 미지근한 맥주와 사이다를 내려놓고 가 버린 뒤, 선우진이 물었다.
“신기합니다. 하지만 메구미 양 같은 분이 오실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퐁-! 손바닥으로 구슬을 눌러 사이다 병을 개봉한 메구미가 애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고급 가게는 아니에요. 그러니 이곳에서 너무 눈길을 끌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저와 사이온지 님의 관계도 스틱 걸과 고용주인 척해야 해요.”
“하하하, 무슨 그런…… 스틱 걸과 고용주의 관계인 척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 사이온지 님이 제게 계속 춤을 권하셔야 해요. 적당히 간절하면서도 조금은 무례하게요. 저는 고용주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마지못해 춤을 추는 사람의 연기를 할게요. 후후훗!”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는 듯 메구미는 또 코끝을 찡그리며 웃어 댔다. 이 당돌한 말괄량이 아가씨가 이런 곳에는 누구와 왔었던 것인지 궁금했지만, 선우진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전혀 춤을 출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말입니다.”
“사이온지 님이 가만히 서 계시기만 해도 모든 스틱 걸들이 저를 부러워할 거예요.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답니다. 자아…… 이제 어서 제게 춤을 권하세요.”
메구미는 새침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작게 속삭였다. 선우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일어나서 그녀가 부탁하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아아…… 어쩔 수 없네요. 사이온지 님이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까…….”
두어 번 거절하는 척하던 메구미는 사이다 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서 선우진의 손을 맞잡았다. 탁!- 탁타탁-! 타타탁-! 탁-! 탁타타탁-! 선우진의 손을 잡은 채 한두 스텝 가볍게 발을 떼던 메구미가 이내 속도를 올렸다. 그녀의 두 발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경쾌하게 스텝과 트위스트를 반복하면서 바쁘게 움직인다. 몸을 기울이면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오고, 두 팔을 번갈아 휘저으면서도 그녀는 선우진의 몸에서 멀리 떨어지는 법이 없다.
♪ 뿜빠바빰-! 뿜빠바빰-! 뿜뿌뿌뿌-! ♬ 그녀의 댄스 실력에 매료된 것일까, 밴드의 지휘자는 돌연 박자를 더욱 올렸다. 그러자 찰스턴 스텝을 밟는 메구미의 발도 더욱 빠르게 움직인다. 춤의 속도가 올라가면서 그녀의 하늘하늘한 치마와 목에 걸린 장신구들이 현란한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높다란 하이힐도, 뻣뻣하게 서 있는 파트너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작용도 있었다. 너무 눈길을 끌지 않아야 한다던 애초의 말과는 달리, 이내 그녀는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렸다.
“오오! 저 여자 좀 봐!”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군인들이 휘파람을 불어 댄다. 그들이 동행한 스틱 걸들이 샐쭉해져서 주의를 끌어 보려고 해도 그들의 눈은 이미 메구미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후로도 꽤나 긴 시간 동안, 메구미는 비밀 댄스 카페 <가와>의 모든 시선을 독점했다.
“후아아…… 어떠셨나요? 사이온지 님.”
밴드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테이블로 돌아온 메구미가 물었다. 그녀의 두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선우진은 손수건을 건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합니다. 오늘 본 메구미 양의 댄스는 아마도 꽤나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정말이신가요? 천박하다거나 방탕하게 보이지 않았고요?”
“그럴 리가요. 젊은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아주 아름다웠고요.”
“와아, 기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짤깍짤깍 손뼉을 친 메구미는 라무네 사이다로 목을 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칭찬을 받고 싶었어요. 사이온지 님과 함께여서 더욱 열심히 췄답니다. 이 기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목소리 사이로 축음기의 애절한 엔카가 흐른다.
“기적이라니요?”
선우진이 묻자, 메구미는 선우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사이온지 님은 지금 일본에 화족이 몇 분이나 계신지 아시나요?”
“아니오. 모르겠습니다.”
선우진 고개를 젓자, 메구미는 얼른 답을 일러주었다.
“작년에 3,100분이었다는 잡지 기사를 봤어요. 그에 비해 일본의 인구는 6천만 명. 2만 명의 일본인 중에 오직 한 분만이 화족인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희귀한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군요. 후후.”
선우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메이지 이후 상급 귀족들을 화족이라 뭉뚱그려 부르지만, 따지고 보면 세이카게인 그의 성은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한다. 동화 속에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이 철부지 아가씨가, 왕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요! 정말로 희귀해요. 화족 중의 절반만 남자라고 하면 그 확률은 4만 분의 1. 성인미혼남자로 줄이면 아마도 40만 분의 1까지 줄어들겠죠. 40만 분의 1! 사이온지 님은 믿어지시나요? 이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이? 현재 조선에 주재하는 일본인을 전부 합친 수가 40만 정도이거든요. 그러니 수학적으로는 조선 땅에서 딱 한 분의 미혼 화족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메구미는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선우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한 분이 이렇게 멋진 분일 줄이야! 꺄아-! 저는 오늘 정말 꿈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랍니다! 믿기지가 않아요!”
그녀가 스스로 만들어낸 감격에 취해 두 볼을 가리며 도리질을 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네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아까 메구미의 춤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어 대던 군인 일행이다.
“어이, 얼간이!”
군인 중의 한 놈이 비어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선우진의 옆에 앉으며 시비를 걸었다.
“네 스틱 걸 연락처 좀 알자. 아니, 아니…… 번거롭게 그럴 것 없지. 지금 내 짝과 네 짝을 바꾸면 어떨까?”
놈이 입을 열 때마다 덧니 사이로 역겨운 술 냄새가 확확 풍겨져 나왔다. 나머지 세 놈이 테이블을 둥글게 감싸고 서서 낄낄 댄다.
“그거 좋겠군! 어차피 네놈은 춤도 추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야, 하하하!”
“그만둬 주세요! 무례하시군요!”
메구미가 외쳤다. 선우진에게 시비를 걸던 덧니가 그녀를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조용히 해! 아가씨, 이런 고리타분한 놈보다는 우리 쪽이 훨씬 더 재미있다고! 이런 놈은 은행으로 돌아가서 대출심사나 하라고 해!”
시비가 벌어지기 직전인데도 종업원들은 끼어들 기미가 없다. 상대가 군인이어서 제지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4대 1인가?’
선우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시절 3대 1까지는 맞싸워 본 적이 더러 있지만, 4대 1은 처음이다. 하지만 선우진은 이런 상황에서 히죽거리며 물러설 만큼 유한 성격은 아니다. 촤악-! 선우진은 컵에 들어있던 맥주를 덧니 놈의 얼굴에 뿌렸다. 그리고 말했다.
“꺼져라, 못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