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밟아 주마, 매국노.2018.04.07.
“하, 하하하! 사이온지 선생께서 알아봐 주시니 기쁘군요!”
자동차 칭찬을 들은 이화성은 환하게 웃으며 보닛을 짚었다.
“왕가를 제외하면 다임러를 타고 다니는 조선인은 아마도 제가 처음이지 싶습니다.”
검은색과 어두운 회색으로 이뤄진 차체 위를 미끄러지던 그의 손이, 라디에이터 그릴의 삼각별 모양 엠블럼에서 멈춘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었던 선우진은 다임러라는 자동차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과연!”
“사이온지 선생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타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독일인들의 기술은 미국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꼼꼼하다고 할까요.”
“음, 그럴 테지요. 저는 패커드를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선우진은 메구미와 함께 탔던 패커드의 기억을 활용하여 전문가 흉내를 냈다.
“물론 패커드도 정말 좋은 자동차입니다. 아……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내지에서 패커드를 타셨던 모양이군요.”
고급 승용차에 관해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됐는지, 이화성은 포커 테이블까지 걸어가는 내내 자동차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사이온지 선생께서도 이참에 반도에서 타고 다니실 용으로 한 대 구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금을 지불하고 나서도 자그마치 9개월을 기다려서야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저 차는 그만한 값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훗, 웃기는 놈이군. 내가 왜 9개월을 기다려야 하지? 며칠 내로 네 차를 타고 다니게 될 텐데.’
선우진은 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깟 자동차, 딱히 갖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은 없지만 동포들을 팔아먹는 이 천박한 놈이 그렇게 아끼는 물건이라면 빼앗아 줄 용의가 있다.
“하하하,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기다리는 것은 영 질색이어서요. 2만 원 가까이나 지불하고 차를 사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린다는 건…….”
“……2만 5천 원입니다.”
자동차의 가격 이야기가 나오자, 이화성은 정색을 하고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작년에 다임러가 벤츠와 합병을 하면서 신제품 자동차의 가격이 올랐습니다.”
자신의 자동차가 2만 5천 원짜리라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워서 도저히 감출 수가 없나 보다.
“허어, 그렇군요. 구매할 일이 있으면 참고하도록 하지요. 어쨌든 저는 그 두 배를 지불하더라도 그냥 그 자리에서 가져갈 수 있는 차를 택할 겁니다. 그런데…… 이화성 선생께서는 포커를 좋아하십니까?”
선우진이 묻자, 이화성은 기름을 발라 정성껏 가꾼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잘 하는 편이라고 주위에서 평하더군요. 아무래도 포커라는 게임은 눈치와 배짱이니까요.”
존댓말임에도 불구하고 ‘너 따위에게는 지지 않는다.’라는 자신감이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 하긴 나라까지 팔아먹을 정도로 약삭빠른 집안 출신이니, 눈치가 좋다는 것이 빈말만은 아니리라.
“아하! 그래서 내가 그리 매번 잃는 거였군! 눈치가 없어서! 이거 이 선생으로부터 여러 수 배워야 하겠는걸요.”
선우진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저렇게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쪽에서는 오히려 더 다루기가 쉬워진다. 아주 작은 도발만으로도 발끈해서 달려들 테니까……. 미련한 자의 용기만큼이나 스스로를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수단은 흔치 않다.
“신사 분들과 내게 마실 것 좀 가져다주게.”
포커 테이블에서 6천 원 어치의 칩을 지급받은 선우진은, 언제나처럼 100원을 여급의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여급이 멀어진 뒤, 이화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늘 후하시군요, 사이온지 선생. 하지만 저런 조선인 종업원들은 내지인들과 다릅니다. 배은망덕해서 도무지 고마움을 모른다니까요. 오죽하면 문명대국의 일부로 편입시켜 준 은혜도 모르고 아직까지도 걸핏하면 만세운동이니, 폭탄 투척이니 하는 뻔뻔한 짓을 일삼겠습니까?”
“호오, 그렇습니까? 그건 또 왜 그럴까요?”
선우진은 역겨움을 꾹 억눌러 참으면서 물었다. 이화성은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역시나…… 민도가 낮은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어 낸 지 이미 반세기가 넘은 데 반해, 조선은 아직도 진행 중이잖습니까. 내선합일을 이루기 위해 저희 같은 조선인 출신 귀족이나 고위관료들이 아무리 가르쳐 보려고 해도, 도무지 들어먹지를 않습니다. 그저 구습에만 사로잡혀 일본어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고……. 괜히 2등 국민이 아니지요. 갈 길이 멉니다.”
‘거지로 만들어 달라고 용을 쓰는구나…….’
고등보통 시절의 일본어 선생과 똑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화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강의보다 조선인 학생 매질을 더 열심히 하던 그 일본인 선생들.
“사이온지 선생……. 혹여나 조선인 계집이 마음에 드셨다면, 저따위 여급보다 훨씬 더 나은 아이들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함께 동경으로 유학을 가자고 꾀면 곧바로 넘어올 골빈 여학생들이 꽤나 많습니다. 저도 그 수법으로 재미를 좀 봤지요.”
3천 원을 칩으로 지급받은 이화성은 선우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보탰다. 그럴 테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고 똥에는 파리가 꼬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베팅을 시작했다.
“고마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리 색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거짓말까지 해 가며 순진한 여학생을 홀리고 싶은 마음은 없군요. 그보다…… 자, 10원 걸어 보겠소. 오늘 초반부터 패가 좋아서 그런지 들뜨는걸…….”
“하하하…… 사이온지 선생! 도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초반 패를 보고 운이 좋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포커는 베팅으로 이기는 것이지, 패싸움이 아니거든요. 자, 그런 의미에서 레이즈 해 보겠습니다!”
역겨운 설교를 한바탕 늘어놓던 이화성은 호탕한 웃음을 가장하며 테이블 중앙으로 20원을 던졌다. 그로부터 30여 분……. 선우진이 장악한 마술 같은 시간 속에서 철저히 농락당하고 짓밟힌 이화성의 말수는 현저하게 줄었고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잭 투 페어의 승리입니다.”
딜러가 판돈 1,100원을 수거하여 승자인 가토 은행장의 앞으로 밀어 주자, 이화성의 앞에는 이제 고작 200원 정도의 칩만이 남겨졌다. 불과 30분 만에 3천 원을 고스란히 날린 것이다.
“허어…… 이거 큰일입니다……. 이 선생. 이렇게 패가 안 들어와서야 포커를 함께 하자고 청한 내가 다 미안해지는구려…….”
선우진이 짐짓 걱정을 해 주는 체하며 놈의 속을 한 번 더 긁었다. 이런 놈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안다. 금전적 손해를 입히면, 이런 놈들은 반드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끝까지 승부를 보려고 한다. 물론 그러다가 더욱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만…….
“끄으음…….”
이화성은 못마땅한 얼굴로 앓는 소리만 흘렸다. 30분 전의 놈이었다면 분명 포커는 패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둥 뭔가 기고만장한 소리를 떠벌여 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오오, 벌써 와 있었나, 사이온지 군! 나를 빼놓고 먼저 시작하다니, 이거 곤란한걸!”
새 판의 패를 돌리기 직전, 다카하시가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옆 자리에 앉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물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한 거짓 변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이틀 만에 보니 더 반갑구만! 어제는 말이지, 너무도 중요한 사업 일정이 있어서 도저히 구락부에 들를 수가 없었다네! ……아쉽지만 어쩌겠나. 사업하는 사람이니 일이 더 우선이 되는 수밖에……. 근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나? 어디 장례식장에라도 온 것 같은 얼굴이네 그려.”
사이토 사장을 질투해서 어제 불참했다는 말이 나올까 봐, 미리 대비를 하던 다카하시가 이화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아, 다카하시 사장도 이화성 사장과 아시는 사이인지요? 저와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선우진이 이화성을 소개하자, 다카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이 사장이야 잘 알지. 무역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사람 아닌가. 같이 술도 몇 번 마셨고……. 이 사장, 많이 잃었나?”
“뭐…… 많이는 아니고 한 3천 원 잃었습니다.”
이화성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다카하시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3천 원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심각한가? 젊은 사람이 말이야. 도박을 하다 보면 딸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거지. 이 사이온지 군을 보라고, 돈을 땄어도 들뜬 기색이 별로 없잖나.”
“잃기는 이화성 사장보다 사이온지 선생이 더 많이 잃었습니다, 허허.”
맞은편의 가토 은행장이 끼어들어 던진 한마디에, 다카하시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에에! 진짜인가? 그럼 누가 딴 거요?”
“뭐…… 잘하는 사람이 따지 않았겠습니까?”
가토는 공연히 어깨에 힘을 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칩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가 대략 4천 원, 그의 옆자리에 앉은 야마다가 3천 원 정도를 땄다. 물론 선우진이 그 두 사람에게 몰아준 것이다. 다카하시는 입을 떡 벌린 채,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아니…… 나는 하도 여유만만하기에 사이온지 군은 조금 딴 줄 알았더니…….”
“제가 언제 포커 테이블에서 돈 따는 것 보셨습니까, 다카하시 사장?”
선우진이 언제나처럼 빙글거리면서 농담조로 묻자, 다카하시는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 못 봤지! 그리고 돈을 잃고 나서도 화내는 것도 못 봤고! 아니 그런데…… 그런 실력으로 마츠이 소좌와 단둘이서 포커 승부는 또 왜 벌인 겐가?”
소문을 뒤늦게 알게 된 다카하시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선우진은 싱긋 웃었다.
“그야 다카하시 사장께서 제게 유지를 남겨 주시고 가 버리신 바람에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아아! 그랬지! 내가 하도 화가 나서 술을 마시러 올라가 버렸었어! 가토 은행장, 기억납니까? 우리 둘이 함께 다 털렸던 판이었잖소.”
다카하시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호응을 구한다. 가토는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몽땅 잃은 판이 쉽게 잊히겠습니까? 당연히 다 기억이 나죠! 세상에……에이스 풀 하우스가 거기서 튀어나올 게 다 뭐랍니까? 뭐 물론 저는 다카하시 사장에 비하면 억울할 것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킹 풀 하우스였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지.”
새삼 분하다는 듯 허공을 보던 다카하시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선우진을 향해 입을 뗐다.
“설마…… 사이온지 군, 그래서 마츠이 소좌와 승부를 벌였던 겐가? 나의 복수를 해주려고?”
“아아, 뭐…… 그런 마음도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결과는 무승부였으니 더 할 말은 없지요.”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카하시는 혀를 찼다.
“무승부가 어디인가? 천만다행이었지! 사이온지 군의 포커 실력으로는 이기는 건 무리일세. 쯧쯧…… 어찌됐든 아깝구만. 내가 그때 술을 마시지 말고 곁에 머물면서 조언을 해 주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어디 그럼 오늘의 운을 한 번 시험해 볼까?”
다카하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 대며 5천 원 어치의 칩을 지급받았을 때, 이화성도 딜러를 향해 손을 들었다.
“나도 3천 원 더 바꿔 주게.”
다섯 명의 플레이어로 제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선우진은 또다시 철저하게 이화성을 짓밟았다. 베팅으로 패를 조절해서 놈이 한 번도 좋은 카드를 가져 볼 수 없도록 했고, 혹여 놈의 시작이 좋을 때에는 판돈을 줄여 놈의 김을 팍 빼놓았다. 놈은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서 새로 지급받은 3천 원마저 모두 날려 버렸다.
“4천 원…… 지급해 주게…….”
이화성은 이를 꽉 깨문 채로 딜러에게 말했다. 딜러가 칩을 세서 그의 앞에 차곡차곡 쌓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것으로 현재까지 총 만 원 지급되었습니다.”
이 구락부의 문을 나설 때에 갚아야 하는 돈이 자그마치 만 원이다. 야금야금 나갔지만, 갚을 때는 거액을 한 번에 지불해야 한다. 후불제 도박의 무서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도 잘 알고 있어! 설마 떼어먹을 사람으로 보이나?”
가뜩이나 흥분해 있던 이화성은 애먼 딜러에게 언성을 높였다. 딜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세 번째 칩 교환부터는 총액을 확인시켜 드리도록 되어 있어서…….”
“흥! 어차피 포커 테이블의 승자는 일어날 때 결정되는 거야! 그깟 만 원, 금방 따서 갚아 주면 그만인걸!”
이화성은 호기롭게 지껄이며 다음 판의 참가비를 중앙에 던져 넣었다. 하지만 놈에게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트리플이요!”
“미안하구려. 스트레이트올시다.”
“스트레이트면 먹어도 됩니까?”
“허어…… 이거 계속 맞부딪치니 플러시 패를 공개하기도 미안해지는군. 어쨌든 규칙은 규칙이니 내가 먹겠소…….”
놈이 승부를 걸어 올 때마다 선우진은 딱 한 단계 위의 패를 열어 보이며, 판돈을 쓸어갔다. 그러는 사이사이, 이따금씩 블러핑으로 아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기를 죽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이은 패배로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놈의 상황판단과 베팅도 엉망이 되었다. 얼굴이 시뻘개진 이화성은 버텨야 할 대목에서 카드를 꺾고, 물러서야 할 판에서 도리어 되도 않는 블러핑을 해 대다가 스스로 무너졌다. 그렇게 또 몇 판이 지나자 선우진은 본전을 지나 2천 원 가량을 딴 반면, 이화성의 5천 원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우우…… 후우우…….”
포커 테이블에 앉은 지 겨우 1시간 반 만에 세 번째로 지급받은 판돈마저 다 잃을 위기에 처하자, 놈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거금 일만 원이 그야말로 물거품처럼 사라져간다.
“어이! 계집! 빨리 술을 가져오라고! 뭘 하고 있어, 엉? 주문을 한 지 몇 분이 지났는데, 왜 늑장을 부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화성이 공연히 여급에게까지 신경질을 부리자, 뒤쪽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마츠이 소좌가 결국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당신, 뭐하자는 거야?”
“아니…… 저기, 그…… 저 여자가 제 술을 안 가져다줘서…….”
“여기가 무슨 불량배들 도박장인 줄 알아? 돈 몇 푼 잃었다고 계속 씩씩거릴 거면 그냥 일어서! 다른 회원 분들까지도 불쾌해지잖나!”
마츠이는 테이블을 짚으며 이화성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았다. 구락부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조선인 주제에 감히 이렇게 분위기를 흐리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으리라.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이렇게 사과드리겠습니다.”
해군 고급장교의 지적을 받자마자 이화성은 기회주의자답게 곧바로 비굴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에 앉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사과를 했다. 가토 은행장이 가장 먼저 일어서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푼다.
“아, 뭐…… 이제 양해를 구했으니 앉으세요, 이화성 사장. 설마 이 사장께서 그깟 돈 만 원이 아쉬워서 그러셨겠습니까? 그냥…… 패가 하도 잘 안 들어오니까 그게 화가 나신 거죠. 우리도 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인데, 왜 그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말이지 이화성 사장, 조금 더 점잖게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는 있을 것 같네. 안 되는 날이다 싶으면 그냥 한 잔 마시고 잊어버려도 되잖나. 그…… 명색이 인천조선인청년사업가회의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면 곤란하지.”
이화성의 태도에 대해 잔소리를 하던 다카하시 사장이 쓸데없는 한마디를 뒤에 덧붙였다.
“여기 사이온지 군을 보게. 크게 잃어도 이렇게 빙글, 또 좀 따더라도 그냥 이 정도로만 빙글. 늘 기분이 좋잖아, 얼마나 멋진가. 보는 사람들까지도 같이 웃게 된다고. 귀족이라면 바로 이런 여유 아니겠나? 쯧, 하긴…… 태생이 다르니까.”
“아아…… 네. 따뜻한 충고의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다카하시 사장.”
조선인이라는 부분을 지적당하자, 이화성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도 선우진을 흘겨본다.
‘후후후, 분한가? 하지만 네놈이 나를 노름으로 이길 방법은 없어. 네놈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점점 더 많은 돈을 잃게 될 뿐이다.’
선우진은 놈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못 본 척하며 여유롭게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판이 시작되었을 때, 또다시 놈에 대한 집요한 짓밟기가 이어졌다.
“퀸 투 페어의 승리입니다.”
야마다가 간만에 승리하면서 이화성의 나머지 돈까지 모두 쓸어가자, 놈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웠습니다. 다들 건승하시길…….”
“이런. 벌써 그만두십니까? 이러면 같이 게임을 하자고 청한 제가 민망해지는데…….”
선우진은 걱정을 해 주는 척하며, 자신의 앞에 쌓여 있는 칩들을 은근히 과시했다. 대략 9천 원. 본전을 제외하더라도 3천 원을 벌었다. 만 원을 홀랑 날린 놈으로서는 당연히 욕심이 날 수 밖에 없는 규모의 칩이다.
“아…… 네. 아쉽지만 지금 제가 가지고 온 현금이 이 정도여서 말입니다. 구락부를 나서기 전에 정산을 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은행 문이 열었을 시간도 아니고…… 이래저래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굴욕적인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힘겹게 대답하는 이화성을 향해, 선우진은 목소리를 높였다.
“난 또…… 이화성 사장. 그깟 현금이 문제라면, 저에게 말씀하시고 잠시 빌려 쓰셔도 됩니다. 일이 만 원 정도는 얼마든지 융통해드리지요.”
“그, 그럴 수 있겠지……. 사이온지 군이야, 가지고 있는 것이 현금뿐이니까…….”
야마다는 선우진의 돌발 행동에 놀라면서도, 눈치 빠르게 얼른 장단을 맞춰 준다. 물론 지금 그들의 수중에는 그만한 돈이 없지만, 뭔가 작전이 들어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에이! 그러면 안 되지, 사이온지 군!”
다카하시가 손사래를 치며 선우진을 만류했다.
“아무리 자네가 사람이 좋아도, 그런 식의 금전거래는 곤란하다네. 자네와 나 정도 되는 사이가 아니면, 돈은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오가도록 해야 해. 2만 원이라는 돈은 말이지, 구두 계약만으로 이자 없이 빌려줘도 되는 액수가 아니란 말이네. 아, 물론 이화성 사장 자네를 못 믿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닐세.”
“하하하, 다카하시 사장. 농담도 참 잘하십니다. 다임러를 타고 다니는 이화성 사장이 설마 그 정도 액수를 갚지 못하시겠습니까? 저 정도면 5만 원을 불러도 당장 구입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요. 저부터라도 사겠습니다.”
선우진은 너스레를 떨며 이화성을 자극하기 위한 미끼를 드리웠다.
“으음…….”
놈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제안입니다만, 아무래도 다카하시 사장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를 보죠.”
“허어,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선우진은 선선히 이화성을 보내 주었다. 하지만 놈이 이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만 5천 원짜리 자동차를 5만 원에 팔 수 있다면, 오늘 잃은 만 원을 제하더라도, 도리어 1만 5천 원을 딴 것이 된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놈의 머릿속이 당연히 복잡해지리라…….
“사이온지 군, 내 딸이라서 하는 자랑은 아닌데, 메구미는 참 건강한 아이라네. 그…… 춤을 추는 것만 봐도, 그게 보통 체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란 말이지.”
이화성이 떠난 뒤, 선우진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다카하시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계속 메구미의 체력 자랑을 속삭여 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흔히 외씨 같은 미녀라고 해서 핏기 없는 종잇장 같은 아가씨들을 예쁘다고 착각하는데, 그러면 못써. 늘 병을 안고 사는 거랑 마찬가지란 말이지. 너무 마르고 기운이 없는 아가씨들은 그…… 후사를 얻는 데도 지장이 있거든. 화족인 자네에게는 습작을 시켜 줄 후손이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닌가. 딸만 낳으면 화족의 신분도 끊기는 것이니까, 아무렴.”
그는 포커의 패를 확인하는 것보다도, 몸이 약한 여자가 배우자로서 갖는 한계에 대해 강의하는 것에 더 열중하고 있다. 이쯤 되면 누군가에게서 ‘사이온지가 사이토 유키와 함께 어울리더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 분명하다. 선우진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적당히 다카하시의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저…… 사이온지 선생.”
누군가 선우진에게 다가와 은근하게 부른다. 이화성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사장?”
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묻자, 이화성이 작게 말했다.
“아니…… 마침 오늘밤에 조선인청년사업가들이 존스턴 별장에서 연회를 열기로 했는데, 그곳에서도 도박을 하기에 초대를 드리려는 것입니다. 아, 수상한 자리는 아니올시다. 다들 귀족 자제들이고.”
존스턴 별장은 구락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중의 서양식 별장이다. 거기에 매국노의 아들놈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고 하니, 선우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승부다.
“도박이라……. 거기에서도 포커를 하십니까?”
선우진이 묻자, 이화성은 음흉하게 웃었다.
“포커는 아닙니다. 혹시 사이온지 선생께선 하나후다는 안 즐기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