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래! 기억났다!2018.05.12.
“천하무쌍이라 했소이까?”
선우진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천하무쌍의 도박사. 원래라면 정말 멋지게 들려야 할 말이지만, 저 형편없는 자칭 ‘조선최고수’가 지껄이니 이것 역시 허언 같다. 어디서 분명 되도 않는 3류 도박사를 보고 나서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는 것이리라.
“그렇소. 이 세상에 둘도 없을 실력! 그야말로 독보적인 도박사……. 스기우라 공작이 훔쳐간 그 막대기의 진짜 주인 말이지. 지금에 와서는 스기우라가 마치 그 막대를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양 아무 데에서나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래 봐야 가짜는 가짜.”
이지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 자세한 내막을 풀어내려 하자, 미우라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하…… 이거, 이거…… 스기우라 공작이 남의 것을 훔치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이지용 백작, 이러지 마시지요. 공연히 우리에게까지 불똥이 튑니다. 저는 안 들으렵니다. 게임에 집중합시다. 에…… 저는 콜입니다.”
미우라는 손사래를 치고 나서 자신의 칩 더미를 우르르 밀어 넣었다. 킹 페어를 숨기고 있는 그로서는 해 볼 만한 결정이다.
“그래요. 자꾸 그렇게 스기우라 공작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음해를 하니까, 버드나무 장 100대의 형벌이 가해지는 것 아닙니까? ……으음, 판돈을 보면 욕심이 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운만 기대한다는 건 우습고……. 저는 접었습니다.”
잭 한 장 외에는 이렇다 할 게 아무 것도 없던 구니토미가 아쉬워하며 카드를 덮는다. 매 맞은 이야기가 나오자, 이지용은 금세 발끈했다.
“백작이! 매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오? 으응?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요, 구니토미 선생? 이, 내가…… 흔해빠진 귀족도 아니고, 일한병합의 커다란 공로를 인정받아 엄연히 작위를 하사받은 백작이! 뭇사람들이 다 구경하는 앞에서 피 흘리며 매를 맞았는데!”
그의 늙은 목소리가 흥분으로 커지고 떨리는 것을 들은 구니토미는 한발 물러났다.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대체 스기우라 공작께서 뭐가 아쉬워 남의 물건을 훔치겠습니까? 그분의 재산이 미츠비시나 미쓰이 같은 재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막대한데요. 스기우라 공작께서 만주에 보유하고 있는 철광석 광산만 해도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흥! 거기 눌러앉아 있는 중국 군벌도 아직 온전히 청소해 내지 못했는데, 채굴을 마음대로 못하는 광산의 소유권이 다 뭐란 말이오? 그런 식이라면 나는 달나라 항아님의 별장을 매입해서 월궁선녀들로 기방을 차리겠소.”
이지용은 목을 빳빳이 세우고 여전히 불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미츠코시 지점장, 우라사키가 과장된 거짓웃음을 지으며 테이블을 두드린다.
“하하하! 좋은 날 왜들 그러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판에 집중하시죠! 모처럼 일찍부터 판이 달아오르니까 저는 흥미진진한데 말입니다.”
“허허! 저도 우라사키 사장과 같은 심정이올시다!”
우라사키가 기분이 좋다고 하니, 구경하던 다카하시 사장도 덩달아 웃음소리를 냈다. 어차피 오늘 그의 목적은 우라사키의 호감을 얻는 것이니까…….
“첫 판부터 삼만 원이 넘는 판돈. 누가 가져갈 수 있는지 봅시다! 다들 뭘 들었기에 그렇게 초반부터 지르셨습니까?”
우라사키는 시가의 연기를 뿜어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세 명의 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선우진과 미우라가 올 인을 한 지금 더 이상의 베팅은 무의미하니, 모두 자신의 패를 공개한 채 7구까지 카드를 받기만 하면 된다.
“아니, 나야…… 그저 그런데, 판이 커져서 한번 들어가나 봤습니다.”
가장 나중에 콜을 한 미우라부터 자신의 손 패를 공개했다. 킹 페어. 두 장의 킹과 바닥의 10, 5. 그저 그렇다는 겸양의 말과 달리 이만하면 훌륭하다.
“흥!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들어오셨군! 역시 하수는 하수야. 페어를 믿고 올 인을 받다니…….”
이지용이 기분 나쁜 말투로 비아냥대며 자신의 패를 깐다. 6, 잭, 에이스, 그리고 4다. 우라사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아니 이거, 이거…… 이지용 대감이야말로 이 패로 왜 올 인을 받은 겁니까? 바라볼 것이라곤 그저 에이스 하나뿐인데요?”
“그야…… 내가 이길 테니까 그렇소이다. 적어도 스기우라의 흉내를 내는 저 애송이 화족 정도는.”
이지용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선우진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포커가 2등에게도 의미가 있는 게임인 줄은 몰랐군요.”
이지용에게 보란 듯이 더욱 빠르고 현란하게 빙글빙글 만년필을 돌리던 선우진이 물었다. 이지용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선우진을 가리켰다.
“지금 이 판에서 당신과 나 사이엔 의미가 있지 않겠소이까? 자존심이라는 것이 걸려 있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이겼소이다.”
선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패를 공개하자, 테이블 전체에서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하하하!”
심지어 만 원을 걸고 1등을 다투어야 하는 미우라까지도 배를 잡는다. 두 장의 퀸, 그리고 바닥에 깔려 있던 8과 에이스. 킹 페어의 미우라에 이어 분명히 현재까지 선우진이 2등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낄낄대도 이지용만은 표정에 노기가 잔뜩 어렸다. 그는 자신의 바닥 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흥! 당신에게 높은 페어가 하나쯤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소. 허나 이 게임은 어디까지 세븐 카드 스터드. 일곱 장으로 승부를 가르는 것이오. 마지막 한 장을 받아 보기까지는 승패를 알 수 없는 법. ……자, 딜러. 5구를 주시게.”
“5구, 에이스 8이 가장 앞섭니다.”
딜러는 무감정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선우진에게 가장 먼저 5구째의 카드를 돌렸다. 슥-! 스슥-! 세 장의 카드가 각자의 주인을 향해 날아간다. 선우진의 앞에는 잭이, 이지용에게는 2가, 미우라에게는 8이 각각 떨어졌다.
“흐음……. 한 장씩이 더해졌지만, 판도에는 변화가 없군요.”
우라사키는 시가를 문 채 세 사람의 패를 유심히 보았다. 아직까지도 미우라의 킹 페어가 가장 앞선 상황. 물론 선우진과 이지용 두 사람 중 누구에게라도 에이스 한 장만 날아들면 그 우위는 깨진다.
“제가 이기면야 좋겠지만, 사이온지 선생은 이쪽저쪽으로 걸어 두신 게 많이 있군요. 일단 퀸 페어에, 에이스, 그리고 잭이 있으니 확률은 낮아도 스트레이트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미우라는 은행장답게 냉정한 분석을 내놓았다. 대화가 일단락되는 듯하자, 딜러는 곧바로 6구째의 카드를 돌렸다. 사락-! 삭-! 사락-! 이번에도 역시 카드는 선우진부터, 이지용, 미우라의 순서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
“으음! 여기서 이런 것이 뜨나요?”
이지용의 앞에 떨어진 에이스 한 장 때문에 판세와 다음 카드를 돌리는 순서, 모두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 이지용은 에이스 페어. 선우진과 미우라는 더 늘어난 것이 없다. 선을 잡게 되자마자 이지용은, 주름이 쪼글쪼글 잡힌 가느다란 목을 쭈욱 펴며 여 보란 듯이 잘난 척을 한다.
“보았는가, 젊은 화족 선생? 에이스 페어일세! 결국 누가 이기게 된 거지?”
“정말 이분 돈을 따도 되는 겁니까? 조선최고수께서 첫 판 여섯 장에서 이기고 있다고 저러시는데.”
선우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 주위의 사람들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사이온지 선생, 이제 점점 익숙해지실 게요! 보시다시피 살짝 오락가락하시는 분이니까! 하하하!”
“저분, 그래도 여유가 있으시구만!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도발을 해도 그냥 웃어넘기시는 걸 보니! 하하하하!”
웃지 않는 것은 이지용뿐이다. 그는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뻗으면서 딜러에게 명령을 했다.
“자아, 히든카드를 공개해서 돌려라! 에이스 페어가 선이다!”
“마지막, 히든카드입니다.”
딜러는 이지용의 앞에 가장 먼저 새 카드를 펼쳐 놓았다.
“3!”
시가를 깨문 채 열심히 판을 지켜보고 있던 우라사키가 큰 소리로 패를 알린다. 이지용의 패는 결국 에이스 원 페어에서 말라 버렸다. 사락-! 미우라의 새 카드가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10! 그럼 킹 투 페어!”
이번에도 역시 우라사키가 손뼉을 쫙 치며 외쳤다. 미우라의 얼굴에 승리감이 번지기도 전에, 사락-! 딜러는 선우진의 앞에 패를 던졌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려던 미우라의 입에서 경악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이스라고? 지금 여기에서!”
“허허! 이거, 이거…… 이런 아슬아슬한 승리가 다 있습니까? 하하하!”
선우진의 앞에 떨어진 에이스를 보며 우라사키가 감탄한다. 구니토미의 얼굴에도 흥분한 빛이 스쳐 지났다.
“허허!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운이 갈리는 겁니까? 캬아! 미우라 행장은 그야말로 3초천하였군요!”
“하아…… 사실은 3초도, 채 안 되었던 것 같은데요……. 다들 그렇게 너무 웃고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속이 쓰리단 말입니다…….”
미우라는 엄살을 떨며 카드를 덮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도 이내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아주 약간이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설렘이 있었다. 그에게 만 원이라는 돈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닌 그런 떨림이.
“에이스 투 페어가 이겼습니다.”
딜러가 선우진의 패를 가리키며 승리를 선언하자, 주변의 일본인들이 손뼉을 치며 축하 인사를 건넨다.
“오오! 축하합니다, 사이온지 선생! 첫 판부터 올 인을 하신 보람이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리 큰 판돈의 게임이 투 페어 다툼으로 마무리되었다니! 하아…… 역시 포커의 세계는 오묘하고도 넓다니까요. 이래서 도무지 이걸 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라사키와 구니토미가 번갈아 가며 칭찬을 하고, 아쉽게 패한 미우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짜릿해했다.
“캬아…… 거기에서 그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다니! 참으로 아깝군요. 그나저나…… 첫 판에서 4구째에 올 인이라……. 이건 또 신선한 맛이 있습니다, 그려. 하하.”
그러나 이지용만은 이 분위기를 함께 즐길 수 없었다. 3만 원을 새로 바꾼 이지용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그 칩들을 남아 있던 5천 원과 합치며, 선우진을 노려보았다.
“우쭐대지 마시오. 어차피 이번 판은 베팅이 아니라 그저 운으로 딴 것일 뿐이니…….”
“아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판이 순전히 운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몇 판 돌다보면 제 돈이 모두 이지용 백작께 가리라는 것도 말입니다. 조선최고수라 하시니까.”
선우진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용에게 동의의 뜻을 전했다. 물론 이번 판의 승리는 운 따위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콜 하는 사람이 하나든 둘이든, 어차피 그가 이기리라는 걸 단 몇 초 만에 미리 다 읽고 올 인을 외친 터였다. 어쨌든 한 판에 2만 원.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이번 판의 참가비는 제가 대신 내지요.”
선우진은 100원 칩을 하나 테이블 중앙에 툭 던졌다. 구니토미가 빙긋 웃으며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허! 그러시면서 은근슬쩍 판을 키우시는 겁니까? 참가비 50원이었을 때도 만 원이 한 판에 날아갔거늘, 그 두 배인 100원이라니! 이거 우리 돈을 얼마나 더 따시려고! 하하하!”
“요시! 그럼 나도 한 번 뜨겁게 불살라 볼까나? 사이온지 선생을 보고 있으니, 뭐랄까 잊고 있었던 야성이 눈을 뜨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사내의 본능이 이 안에서 꿈틀거리는군요! 하하하!”
우라사키가 호쾌하게 웃으며 본격적 싸움에 들 기세로 양복 웃옷을 벗는다. 선우진은 두 팔을 가볍게 벌리고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의 농담을 받았다.
“이런…… 들켰군요. 다들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사실, 지금까지 이것으로 먹고 살아온 프로이거든요!”
“하하하하! 이거, 이거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 다카하시 사장, 같이 게임을 하며 친분이나 쌓자고 했더니 전문 도박사를 데리고 오셨어! 그것도 귀족 전문 도박사! 하하하하!”
진실을 말해 주었는데도,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낄낄대며 재미있어 한다. 다카하시도 과장된 파안대소로 맞장구를 치면서 그들의 기분을 부추겼다.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 새빨간 허언입니다! 제가 사이온지 군과 포커를 함께 한 지 한 20일 가량 된 것 같은데…… 저 친구가 돈을 따서 돌아가는 걸 아마 한 번 정도 본 것 같습니다. 늘 이렇게 기분만 내다가 빈손으로 일어서곤 한다니까요! 하하하!”
조선 호텔 꼭대기 층의 특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차고, 그렇게 들뜬 느낌 속에서 판이 흘러갔다. 애초에 따려고 온 판이 아니었기에, 선우진은 적당히 풀어 주며 분위기를 더 달구었다. 가끔 한 번씩 미친놈과 같은 과감한 베팅으로 크게 따기도 하고, 또 크게 잃기도 했다. 그러면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모든 이들에게 아슬아슬한 승부의 긴장감을 선물해 주었다. 시작한 지 한 시간여가 지나자, 팽팽해 보이던 판의 형세가 조금씩 갈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첫 판의 피해를 회복한 이지용은 칩의 액수를 5만 원까지 늘렸고, 반대로 미우라는 3만 원 가량을 잃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다. 미우라가 돈을 잃으면서도 즐거워하는 반면, 이지용은 좀처럼 선우진을 누르지 못한 것이 분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또 도망을 치는 것이오? 내가 두렵기는 정말로 두려운 모양이구려. 이것 보시오, 젊은 화족 선생. 맞붙어서 지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올시다. 그렇게 피해 다니는 것이 진정으로 창피한 일이지.”
선우진이 일찌감치 패를 꺾자, 이지용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밉살스러운 소리를 쏟아냈다.
“그렇습니까?”
선우진은 이제 대응하기도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한 뒤, 그새 친해진 구니토미와 주식시장의 거래에 관한 담소를 이어갔다.
“……당분간의 전망은 나쁘지 않습니다. 어제만 해도 동신주 한 종목만은 15퍼센트가 올랐단 말입니다. 전쟁의 기운이 걷히면 확실히 주식은 뛰지요. 물론 본토에서 건너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온지 선생께는 일본에서도 거래가 가능한 동신주보다, 조선의 기업들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흐음, 예를 들자면?”
구니토미로부터 최근의 경성주식현물취인소 동향에 대해 듣고 난 뒤, 선우진은 뭔가 아는 잘 아는 사람처럼 물었다. 물론 주식이라는 게 뭔지 정도나 어렴풋이 알 뿐이지, 거래 관련 지식이라곤 전혀 없다.
“아…… 예를 들자면, 조선인견방직회사의 경우도 나쁘지 않지요. 물론 단기거래일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콜입니다.”
구니토미는 대답을 해 주면서 이지용의 레이즈를 받았다. 주식이라는 이 신식 투기 방식은 미두 시장보다도 오히려 더 도박성이 강한 것 같다. 하루에 15퍼센트가 뛴다니……. 증거금 10퍼센트의 거래방식이니, 잘만 하면 원금의 1.5배를 하루에도 벌 수 있는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추한 승부의 방식인 겁니다. 반면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라…… 싸움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운명.”
아무도 귀담아들어 주지 않는데, 이지용은 아직까지도 혼자서 선우진과 가상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 대단한 스기우라 공작조차 완전히 무릎을 꿇었던 날이 있었지. 나는 그 자리에 있었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겁니다. 그때가…… 어허, 돌아보니 벌써 한 20년 되었나? 으음, 빠르구만. 세월이라는 놈은! 그날은 스기우라가…….”
“에헤, 또 그러십니까? 우리들까지 피해를 입는다니까요! 이지용 백작! 그런 이야기는 댁에 돌아가셔서 우리 없을 때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니면 호텔 후원으로 나가셔서 환구단 황궁우라도 거닐면서 혼잣말을 하시든가요.”
미우라가 또 기겁을 하자, 이지용은 눈을 빛냈다.
“왜 그러시오, 미우라 행장?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요? 지금 귀족을 모독하고자 하는 겁니까?”
이쯤 되면 이 스기우라를 대화 소재로 삼는 것이 일종의 심리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일본인들이 긴장해서 이성을 잃게 만드는 아주 저급한 심리적 협박. 미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 거짓말이라고 했습니까? 듣기 싫다고 했지요! 하고 많은 이야깃거리 중에 왜 하필이면 그 서슬 퍼런 스기우라 공작입니까? 오늘 여기엔 화족도 한 분 와 계신데!”
“아니……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저 젊은 화족 선생에게서 비롯된 것 아니요? 저 선생이 자꾸 스기우라의 흉내를 내면서 작대기 같은 저놈의 만년필을 자꾸 돌리고 있으니까……. 내가 그것이 원래 스기우라의 물건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날의 일을 들려주려고 한 것인데……. 아! 아아!”
선우진을 가리킨 채 19년 전의 일을 떠올리던 이지용은 느닷없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라사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십니까, 이지용 백작?”
“기억났다! 기억났어! 저…… 저 얼굴! 왜 낯이 익은지! 어디에서 봤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아이고,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지 마십시오, 이지용 백작! 저분은 엄연히 화족!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과 같은 집안 분이십니다!”
우라사키가 만류를 해 보지만, 이지용은 막무가내로 핏대를 세워댄다.
“그래! 그래, 바로 저 얼굴이었어! 그 천하무쌍의 도박사! 스기우라가 훔쳐 간 작대기의 원래 주인! 조서……!”
그의 입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채 다 떨어지기도 전에,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특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총을 든 군인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누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모조리 다 잡아넣어! 엄연한 법을 어기고, 도박을 하는 자들이다! 네 이놈들!”
“……히에엑!”
군인들의 발소리를 듣는 순간, 이지용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는다. 잡혀가서 매질을 당했던 그 끔찍한 악몽의 기억이 그의 심장을 움켜쥔 모양이다.
“오호라! 이것 봐라! 조선은행장에! 미츠코시 사장! 주식현물취인소장에 현직 조선중추원 고문까지! 황국신민들에게 모범을 보여도 부족할 자들이 감히 이렇게 도박을 해? 그것도 이렇게 거액을 쌓아 놓고!”
도열한 군인들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노년의 남자가 미우라 앞에 쌓인 칩 더미를 우르르 무너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고! 놀라라! 난 또…….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총독 각하! 저 애들을 좀 보십시오!”
우라사키가 여급을 가리키며 볼멘소리를 한다.
“으흐흐…… 흐으으으으…….”
술잔을 채워 주던 미녀여급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쪼그려 앉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도박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방 안으로 총 든 군인들이 뛰어들어 왔으니,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장하다고 할 일이다.
“그뿐입니까, 이지용 백작은 지금 반쯤 실성을 했습니다. 저 얼굴빛 좀 보십시오, 총독 각하!”
미우라는 덜덜 떨고 있는 이지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지용의 얼굴은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고, 그의 호흡은 불안정하다.
“후우우…….”
다카하시 사장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연극을 끝낸 병사들은 공손하게 다시 문을 닫고 나가 버렸고, 노년의 남자와 보좌관만이 남았다.
“지나치긴? 네놈들이 지나치다! 나만 쏙 빼놓고, 이렇게 재미있는 걸 하고 있다니! 그러고도 의리 있는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노년의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 뒤, 냅다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가 시가를 물자, 보좌관이 곧바로 불을 붙여 준다. 사이토 마코토? 선우진은 노년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내심 놀랐다. 일본해군대장 출신의 조선총독. 물론 인천의 사이토 사장과 인척은 아니다. 발음만 같을 뿐, 한자 자체가 다르니까. 어쨌든 의외의 참가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조선총독이 오늘 이 자리에 합류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음?”
선우진의 시선을 느낀 사이토 마코토가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근데…… 저 어린놈은 누구이기에 놀라는 기색도 없는 거냐? 이래서야 내가 장난친 보람이 있겠나?”